피렌체 17
피렌체 공예와 예술에 관한 포스트에서 15세기 피렌체의 예술적 성과가 코뮤네 내 경제적 양극화 현상과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설명한 바 있다. 13-14세기에 완성된 대형 건축물들의 다수가 코뮤네 정부의 지휘 아래 길드 소속의 건축 위원회 오페라(Opera)의 후원을 바탕으로 공적 사업으로서 추진됐다면,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피렌체의 건축물, 조각품, 회화는 피렌체 내 부를 독점하기 시작한 극소수 상류층의 사적 향유를 위한 사치품목으로서 생산되고 있었다.
우리는 피렌체에서 탄생한 르네상스 예술의 새로운 양식이 메디치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기 전인 15세기 초에 처음 두각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도나텔로의 성 마가 상은 1413년에, 성 조지 상은 1417년에 완성됐고, 원근법을 처음 회화에 적용시킨 마사초의 성삼위일체 역시 1428년 이전에 완성됐으며, 브루넬레스키가 두오모 돔의 공사에 착수하게 되는 해 또한 1418년이다. 코시모는 1434년에 이르러서야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를 확립하게 된다.).
코뮤네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던 메디치가의 지휘 하에 아르노의 공화국은 예외적인 치세를 맞이하게 된다(특히 로렌초의 수완이 이루어낸 1454년의 로디 조약 이후로 피렌체는 전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회, 경제적으로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내야 했던 13-14세기에 비해서 15세기 중후반의 피렌체의 문화는 확립된 독재 체제 아래서 이전과는 상반된 경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가 예술 발전의 이정표에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었다.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린 15세기 초기의 예술 작품들은 밀라노, 나폴리, 교황청의 위협 앞에서 길드 정부의 지휘 아래 (물론 과두정의 성격이 강했으나) 공화정 시민의 긍지로 투철하게 무장한 피렌체의 시민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 다리를 땅에 힘차게 딛고서 결연하게 칼을 뽑아 든 게오르기우스에게서 독재자 갈레아초 비스콘티를 상대로 공화정의 자유를 지켜낸 피렌체 시민의 긍지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꽈트로첸토 (15세기/1400년대) 초기 피렌체에서 나타난 대대적인 예술적 혁신이 피렌체 경제를 주도했던 신흥 상인들의 합리주의적 사상으로부터 도래했음을 주장한다. 15세기 초, 피렌체 경제의 산업화를 주도하고 있던 철저한 실리주의자로서의 부유층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상품의 품질과 무관한 수요와 공급의 효과, 숫자로서의 노동력”등의 시장경제적 개념을 이해하는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하학적 논리와 자연주의적 사실성을 앞세운 르네상스 초기 작품들은 합리주의적 관점을 생활화한 그들의 새로운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알베르티가 설파하던 기능과 형태가 기하학적 균형미라는 정점으로 점철되는 브루넬레스키의 건축과, 혁신적으로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구현하던 도나텔로의 조각, 마지막으로 '입체'의 사실성을 회화 속에서 구현한 마사초의 원근법은 사업적 실리를 급진적으로 추구하던 시민 계급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반면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예술은 메디치 가문의 지배 아래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사회 전체의 보수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코시모와 로렌초가 적용한 높은 과세, 양모 산업의 축소, 임금과 인구의 동시 감소 현상 등은 예술 작품의 구매층을 메디치 가문과 그 외 몇몇 가문으로 급격하게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로 전락한 15세기 중-후반의 예술품은 이제 그들의 배타적인 성격과 까다로운 취향에 어울리는 형태로 거듭나야만 했다. 예술사가들은 이러한 변화가 탄생시킨 15세기 중-후반의 예술 작품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새로운 경향/유행에 제2르네상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메디치와 함께 성장한 지식인 엘리트 클래스, 특히 로렌초의 후원과 함께 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네오-플라톤 주의자들은 마사초, 나니 디 방코, 초기 도나텔로 등이 보여주던 시민적 자연주의 작품들의 ‘거친 공화주의’적 작품들보다는 귀족적 고상함과 우아함을 갖춘 작품들을 더 선호했다. 개척 정신이 투철했던 상인에서부터 피렌체를 정치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장악한 지배 계급으로 변모한 15세기 중반-후반 피렌체의 최상류층은 예술의 향유에 있어서도 귀족적 고상함과 우아함을 갈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귀족적 고상함과 우아함은 부분적으로 고딕적 요소들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2르네상스가 과거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기보다는 르네상스 양식과 늘 공존하고 있었던 중세적 요소들이 몇몇 소수 가문들에 의해 예술 시장에서 각광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르네상스 피렌체 예술 시장의 상황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등장과 함께 이전의 모든 양식이 ‘낡은 것’이 돼버리는 20세기 후반의 미국이 아닌, 인상파와 그들의 추종자들의 그림이 소수 엘리트들에게 판매되는 와중에 고전주의 회화가 여전히 살롱을 지배하던 1880년대 파리의 상황과 유사했다(프레데릭 하트). 고딕 양식은 실제로 15세기 중-후반에도 진보적인 르네상스 양식과 함께 피렌체의 회화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금으로 만들어진 벽장식, 첨두아치, 트레이서리, 뾰족탑과 같은 전형적인 고딕적 요소들 역시 여전히 일부 귀족/상류층에게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피렌체 상류층의 취향의 변화는 그들의 주택문화와 분리해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14세기까지 그들은 교회 건축에 자금을 헌납하고, 예술품과 예배당을 기부함으로써 사후의 명예를 좇았다. 반면 15세기부터 피렌체의 최상류층은 팔라초를 건설하고, “풍부하게 장식한 붙박이장의 목재 벽판, 그림과 조각이 있는 농 까소네(뚜껑이 있는 장방형 수납가구), 화려하게 만들어진 침대, 예쁘게 장식한 달걀형 틀에 넣은 가정예배용 그림 똔도, 무늬를 아로새긴 탄생명 (desco da parto)과 그밖에 마욜리까 도자기의 수많은 공예품”(아놀트 하우저)을 갖추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응당 이러한 주택문화는 대저택 내에서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줄 회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피렌체의 상류층 가문들은 이제 회화에 있어서도 거친 사실성을 앞세운 작품이 아닌 귀족적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작품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렇게 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 현세로부터 한발 물러난 채 서정적, 시적, 로맨틱한 환상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들이었다.
이처럼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추상적인 선과 분위기, 감정적인 갈망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주제를 찾는 상류층의 갈증을 채워주는 데 있어서 보티첼리보다 훌륭한 역량을 보여준 예술가는 동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보티첼리(1445-1510)의 작품과 그 유명세는 몇몇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를 위해 완성한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는 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유명한 작품이지만 (심지어 예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는 조토,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등이 이룬 성과에 견줄만한 혁신을 이루었던 적이 없었다. 또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이 다방면에서 그의 미적 세계를 구현한 '르네상스 인간'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인물 역시 아니었다. 마사초의 직계 제자였던 필리포 리피 아래서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원근법을 구사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그였지만, 앞으로 보게될 그의 대표작에서 오직 평면적인 그림으로 일관했다.
이는 보티첼리가 의식적으로 ‘사실성’을 앞세운 자연주의보다는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된 서정적 초현실을 그려내는 일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근법과 깊이를 무시한 채 오로지 선과 색상의 유려함을 통해 완성한 그의 그림은 선과 평면 구성의 미묘함에 있어서 그가 누구보다도 탁월했고, 그는 이러한 환상적 세계의 구현에 있어서 동시대 이탈리안 예술가 중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룬 아름다움의 설득력을 방증하고 있다.
깊은 오렌지 나무 숲 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프리마베라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보티첼리가 피렌체 시내를 뒤로한 채 환상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다만 15세기 피렌체인들은 나무 위 오렌지들이 메디치 가문의 문양인 여섯 개의 구를 가리키고 있음을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뒤엉킨 나뭇가지와 오렌지들 사이로 하늘과 지평선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원근법의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일렬로 늘어선 여신들이다. 그림의 우측에서는 서풍을 상징하는 제피르가 입에서 꽃을 흘리고 있는 클로리스를 범하고 있다. 그녀는 이제 봄의 여신 플로라로 변신하여 드레스에 담긴 꽃을 뿌리며 봄의 도래를 알린다. 좌측에서는 머큐리가 그의 지팡이로 나무 사이로 밀려든 작은 구름을 가리키고 있고, 그의 옆에는 카리스들(세 자매 여신 Aglaia (빛나는 여자), Euphrosyne (기쁨), Thalia (만발한 꽃))이 춤을 추고 있다. 그림의 중심에는 성화의 마돈나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형상의 성스러운 그녀, 비너스가 아름다운 자태로 봄의 축제를 관장하고 있고, 그녀의 머리 위에선 비너스의 아들 큐피드가 눈을 가린 채 (사랑이 눈을 멀게 함을 암시) 카리스들에게 황금 화살을 겨냥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르네상스에 와서야 다시금 예술의 주제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전적 가치를 설파하던 휴머니스트들이 주도하던 피렌체의 지적 풍토에서도 프리마베라의 등장은 당시로서도 충격이었다. 이전까지 고대 신화가 윤리적 교훈을 가시화하기 위해 제한적으로만 회화에 활용됐다면(알베르티 역시 그의 회화론에서 이러한 접근을 권장했다) 고대 신화를 윤리적 교훈이 아닌 미적 향유의 사적 즐거움을 위해 활용했다는 점에서 프리마베라는 15세기 후기 피렌체가 경험하고 있던 예술적 변화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르네상스 회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사실성을 대신해서 비현실적으로 긴 목과 팔을 가진 여신들은 모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고, 이는 장면의 비현실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여신들과 머큐리는 풀과 꽃들 위에 서 있지만, 식물들을 짓밟지는 않고 있다. 그들은 땅 위에 서 있으면서도 공중 위를 떠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한쪽으로 기운 머리와 가파르게 떨어지는 비너스의 왼쪽 눈 역시 몽환적인 꿈속 세계의 초현실성을 가시화하고 있고, 이러한 비현실성은 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주로 묘사했던 초기 르네상스 프레스코화와 완벽하게 상반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림의 아름다움은 오로지 보티첼리의 선의 유려함에 의해 구현된다. 칼리스들과 비너스의 옷의 묘사 역시 지난 포스트에서 살펴본 기베르티 조각품의 고딕적 곡선을 연상시킨다. 깊이를 제거한 채, 2D 사물의 배치를 통해 그림 전체의 아름다움을 연출한 보티첼리는 원근법의 등장과 함께 등한시되고 있던 중세적 ‘배치’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구현하고 있다.
사투르누스의 잘려나간 성기가 바닷속에서 비너스를 잉태시켰다는 고대 신화를 재연하고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비종교적 주제를 바탕으로 한 여성을 모사한 라이프사이즈 누드화라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여성의 누드화는 천국에서 쫓겨나는 이브를 묘사하는 그림을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았던 테마였다. 반면 제피르가 일으킨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금발 아래로 미의 여신 비너스는 수치심이 아닌 아름다움의 이상을 상징하는 정숙함을 표현하고 있다.
프리마베라보다 그 규모가 다소 작고, 캔버스 위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역시 동일한 요소들이 발견된다. 비너스 뒤로 지평선과 하늘이 묘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의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제피르, 클로리스, 비너스가 모두 동일 선상에 위치하고, 입체적 사물인 조개 역시 어두운 톤과 밝은 톤의 교차를 통해 평면적으로 표현됐다. 파도를 나타내는 V 모양의 물결무늬 역시 그 질감을 통해 바다의 깊이를 제거한 채, 전면을 평면화시키고 있다. 프리마베라에서 발견되던 초현실성은 더더욱 짙어졌다. 비너스는 코클 조개껍질을 밟고 서 있지만, 그녀의 발은 몸을 받치고 있다기보다는 허공 위로 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비현실성은 얼굴 아래로 나타나는 지나치게 긴 목, 지나치게 가파르게 떨어지는 어깨, 지나치게 긴 상체와 팔, 한쪽으로 기운 얼굴과 오른쪽 눈에 비해서 지나치게 기운 왼쪽 눈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르네상스의 폴리아르와 마사초의 정확한 선, 원근법, 조토의 풍부한 스토리텔링은 완벽하게 제거됐다. 보티첼리는 선과 색의 사용에서 특유의 유려함으로 그만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보티첼리 특유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은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채 "하늘로부터 내려온 선물로서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다]"(아놀트 하우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