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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y 03. 2021

도나텔로와 르네상스 조각 양식

피렌체 16

    르네상스 조각의 탄생사는 건축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건축의 르네상스가 고대 건축의 모든 비밀을 다시금 피렌체로 운집시켰던 브루넬레스키의 손에서 시작됐다면, 르네상스 조각의 역사는 유럽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반-고딕, 탈-고딕적 요소들이 도나텔로의 작품 속에서 결집하면서 그 시작을 알리게 된다.


  '예술가들은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라는 선입견이 있다. 물론 편견은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인류사 최고의 예술가들이 발에 차이다시피 하던 피렌체에서도 예술가들의 성품은 그들 작품의 스타일처럼 제각각이었다. 그 예시로 브루넬레스키의 라이벌 로렌초 기베르티(그는 도나텔로의 라이벌이기도 했다)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그 어떤 결점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동시에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녔던 예술가였고(다만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교활하다'는 평을 받았다), 후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예술가 라파엘로 역시 친절하고 세련된 매너로 피렌체인들의 선망을 샀던 신사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르네상스의 문을 난폭하게 열어젖힌 두 도굴꾼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을 일축시키는 데 그 어떤 공헌도 하지 못했다.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두 예술가의 괴팍함에 대한 일화는 차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메디치 궁전의 계획이 “너무 거대하고 화려하다”는 이유로 코시모에 의해 거절당하자 격분한 브루넬레스키가 스스로 제작한 궁전의 모델을 부숴버렸던 일화는 유명하며(덕분에 오늘날까지 그가 작업한 메디치 궁전의 설계도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완성된 조각의 값을 깎으려 하는 제노바 상인의 무례함에 분노를 참지 못한 도나텔로가 완성된 조각을 (코시모 앞에서) 계단 아래로 던져버린 사건 역시 그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두 배의 값을 제안하며 잘못을 비는 상인과 코시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도나텔로는 그가 부순 조각을 결코 다시 제작해주지 않았고,  코시모 또한 두 번 다시는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를 볼 수 없었다(그는 훗날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을 따르지 않은 사실을 두고두고 후회했음을 고백한다). 브루넬레스키가 기베르티에게 청동문 제작의 영광을 빼앗긴 사실에 격노하여 1401년, 로마로 떠나버렸듯이, 도나텔로 역시 작업하던 작품을 내팽개친 채 (고용인이 제대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고용한 도시에 등을 돌려버리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인부들을 너무 혹사시킨 나머지 그들을 파업으로까지 몰고 갔다면, 도나텔로는 작업하던 돌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말해! 말을 해! 그렇지 않으면 피를 싸게 해 주겠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1401년부터 1418년까지 이 둘이 로마에서 무려 17년간 함께 동거 동락하며 고대의 건축물과 조각을 공부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사실들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반박하는 전문가들의 반론이 없더라도, 이 두 예술가가 17년이나 동거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도나텔로의 동상

   

 균형미에 대한 유별난 집착을 보였던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눈에 거슬리는(균형이 맞지 않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방식으로 그의 ‘성격’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코시모가 브루넬레스키가 아닌 실용주의자 미켈로초를 중용했던 이유 역시 그의 이런 '완벽주의'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에게 건축을 일임하는 선택은 '일을 지나치게 크게 벌이는 것'을 의미했다) , 도나텔로의 ‘격정’은 그의 작품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조각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브루넬레스키처럼 균형에 집착하지도, 기베르티처럼 ‘선’의 구현에 심혈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각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시각적 효과의 구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조각가였다. 돌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늘 소재와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그는 조각 표면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고딕적 아름다움에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는 조각의 형태와 조각의 시각적 효과 중 빛과 그림자가 구현하는 조각의 시각적 효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최초의 조각가였다.


    완성된 조각상의 실제 형태와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형상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신의 눈이 아닌, 조각품을 올려다볼 인간의 눈을 위한 조각품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도나텔로는 수많은 동시대의 조각가들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고 있었다. 그가 조각가로서 이루어낸 수많은 혁신 역시 그가 이루어낸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신이 아닌 그것을 관조하는 인간의 눈을 상상하며 긴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도나텔로는 중세를 지배했던 조각에 대한 사상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Saint Mark/성 마가(도나텔로, 1411-13)

  

    도나텔로가의 성 마가(1411-13)의 모습이다. 오르산 미켈레의 외부 벽면 벽감을 장식하고 있는 열넷 조각품 중 하나다. 오르산미켈레 건설 당시 길드 정부는 각각의 길드로 하여금 외부 벽감에 길드를 대표할 조각품을 하나씩 배치하도록 권했고, 이 중 도나텔로는 두 길드의 선택을 받아 두 점의 조각상을 완성했다 (라이벌 기베르티 역시 세 점을 위임받았다). 그중 성 마가는 Arte dei Linaioli e Rigattieri, 리넨 옷감 상인 길드의 수호 성자, 성 마가를 조각한 작품이다. 도나텔로가 약관 스물다섯의 나이에 시작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르네상스 조각을 규정하는 사상인 자연주의와 고전주의가 도나텔로를 일찍부터 사로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성자 마가의 자세를 살펴 보자.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서지 않고,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마치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뻣뻣한 고딕적 조각품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인체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조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도나텔로의 의도가 느껴진다. 이는 사실성을 추구했던 도나텔로의 자연주의 사상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도나텔로가 로마에서 접했던 고대 조각품들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살아있는 인체의 모습을 모방한, 한쪽 다리를 짚고 선 조각의 비스듬한 자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 불리는 이 기법은 분명 그리스 조각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정과 자세가 드러나지 않는, 마치 신의 세계의 존재와도 같이 인간을 묘사했던 이집트의 조각품에서부터 실제 사람의 모습에 가까운 조각품으로의 지양을 이루어낸 그리스인들처럼, 모든 사실성을 상실한 채  종교 건물의 장식품으로서 기둥과 벽 속에 박혀 있던 고딕 조각들을 자연으로 회귀시킨 것이 바로 르네상스 조각이 이루어낸 '해방'이었고, 이러한 예술사의 흐름에 있어서 도나텔로는 단연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아메넴헤트 3세의 동상(기원전 1859–1814)과 고대 그리스의 라오콘 군상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1220년 완성)의 고딕식 조각품들과 도나텔로의 대리석 다비드상(1408-9).



     성 마가에는 그리스적 콘트라포스토의 답습 외에도 도나텔로가 최초로 시도하고 있던 그만의 혁신적 기법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디테일은 바로  피렌체의 특산품이었던 '의복'의 표현에 있어서 도나텔로가 보여준 전통과의 결별이었다.  



도나텔로의 성 마가 상(좌)과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 상(우)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완성돼, 동일한 교회의 벽면을 함께 장식하던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과의 비교를 통해 도나텔로의 작품의 파격성을 느껴볼 수 있다. 우선 우측의 세례 요한이 걸치고 있는 토가를 살펴보자. 일정하게 둥근 곡선이 물결무늬를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기베르티가 고딕식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 도나텔로의 성 마가의 옷은 훨씬 더 사실적인, 불규칙한 주름으로 뒤덮인 형태를 보여준다. 탁월한 사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도나텔로의 성 마가는 옆에 선 세례 요한상의 '둥그런 곡선'을 우스꽝스러워 보이게 만들고 있다.


    예술 역사가 프레데릭 하트는 도나텔로의 이러한 시도가 15세기 피렌체 조각가들의 작업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라 주장한다. 조르지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피렌체의 조각가들은 토가를 입은 성자의 모습을 조각하기 위해 물과 클레이가 섞인 용액에 옷을 담근 뒤 그것을 미리 완성해 둔 누드 클레이 모델에 입힌 후, 원하는 모양이 나오도록 손으로 옷을 매만져 연출하고선, 옷이 굳은 후에 그 모양을 모델로 삼아 조각을 깎아냈다. 르네상스의 조각가들 중에서도 재료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던 조각가 도나텔로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옷의 모양새를 무시하고, 비잔틴, 고딕 양식의 도그마를 따라 둥근 선을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성자의 토가를 조각하는 일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양모 원단의 가공-판매를 통해 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피렌체의 역사를 생각했을 때, 어쩌면 일찍이 나타났어야 했던 변화였다. 도나텔로는 '장인'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과거 피렌체의 조각가들이 시도하지 못한 이러한 '사실성'의 추구를 과감하게 추진시켰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 게오르기우스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도나텔로의 초기 작품이며,  오르산미켈레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 마가상과 동일하다. 갑옷과 무기 제작자 길드, Arte dei Corazzai e Spadai의 주문으로 제작됐으며, 그들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조각품이었다. (황금 전설에 등장하는 로마의 기사 게오르기우스가 왕국에 역병을 퍼뜨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사악한 용을 죽이고 제물로 바쳐질 운명에 처해있던 공주를 구해내는 내용의 전설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작품이다) 조각상은 용과 전투를 벌이기 직전의 성 게오르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도나텔로는 콘트라포스토를 활용하고 있다. 다만 마치 언제라도 벽 바깥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게오르기우스의 자세는 전통적인 콘트라포스토(한쪽 다리에 무게가 실린 채 반대쪽 다리는 자유로운)가 아닌 두 다리가 모두 힘차게 땅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다. 용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그의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게오르기우스의 이와 같은 자세는 도나텔로가 고려해야 했던 제작에 관련된 제한들에 의해서 탄생하게 됐다.  오르산 미켈레 성당 벽면에 조각을 위해 마련된 벽감은 도나텔로가 조각 작업에 착수할 당시 이미 일정한 크기로 완성돼 있었고, 이는 조각의 크기가 일정하게 제한돼야 함을 의미했다. 오르산미켈레의 벽면의 내부에는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외부에 위치한 벽감은 깊게 설계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곳에 위치하게 될 조각상 역시 지나치게 크게 제작될 수 없었다. 허나 조각상을 작게 제작하는 일은 도나텔로를 고용한 갑옷과 무기 제작자 길드, Arte dei Corazzai e Spadai의 명예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각 길드를 대표하는  길드의 호위/수호성인의 사이즈가 줄어드는 일은 길드의 권위를 깎는 일이었던 것이다. (값비싼 청동이 아닌 대리석으로 조각을 주문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의 권위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도나텔로는 생동감 있는 콘트라포스토를 통해 비교적 작은 사이즈(2m 9cm)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각을 구현해야만 했다.  


소재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 같은 도시에서 제작된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 상과 세례 요한 상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기베르티의 세례 요한상과의 비교를 통해 그의 성 게오르기이수 상이 얼마나 혁신적인 작품이었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게오르기우스의 얼굴을 관찰해 보자. 찌푸린 이마와 미간에 근심이 가득하다. 미소년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긴 목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단단하게 땅을 짚고 있는 두 다리와 (이후에 도난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칼과 칼집을 쥐고 있던 오른손과 왼손의 긴장감이 얼굴에까지 전해진 듯한 인상을 준다.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세례 요한상의 얼굴과는 완벽하게 상반되는 사실적인 묘사다.


    머리카락의 연출에 있어서도 우리는 비교적 인위적으로 둥근 곡선을 그려내는 고딕적인 형태의 기베르티의 기법과는 달리 홈과 상처를 통해 훨씬 더 사실적인 머리카락의 질감을 구현해내는 도나텔로의 획기적 연출을 발견한다. 동공의 처리 역시 눈동자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동공에 칼금을 내는 방식을 택한 기베르티와 달리, 눈의 중심에 홈을 만들어 그림자로 동공을 연출한 도나텔로의 게오르기우스의 눈빛이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청동/대리석 소재의 실제 형태가 아닌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형상에 집중했던 도나텔로의 접근이 그 타당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세인트 조지의 혁신은 부조 조각에서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르네상스 원근법을 처음 착안한 이는 브루넬레스키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세인트 게오루기스의 부조를 관찰하며 원근법의 계보가 그처럼 명확하게 밝혀지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나텔로는 그만의 방식으로 평면 대리석 위에 입체감을 구현해낸 것이다.


    전면에 나타나는 게오르기우스, 용, 공주는 깊게, 배경에 속하는 숲과 건물은 얕게 파내는 방식으로 그림자 효과를 통해 평면의 공간에 깊이를 더함으로써 도나텔로는 최초로 부조 조각에 원근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점으로 소멸되는 브루넬레스키적 원근법과 차별화된다) 오르산미켈레의 반대편 건물에서 반사되는 일정한 빛을 감안하여 그 앞에 선 피렌체 시민을 상상한 그의 선택은 르네상스 조각의 정신을 더없이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상을 향해 높이 솟은 고딕 성당의 장식물로써만 활용되던 길고 마른 고딕용 장식들은 13세기부터 점차적으로 건축에서 분리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북유럽에서도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고대 건축을 테마로 한 조각들 역시 피사를 위시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같은 시기부터 서서히 발견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각각의 요소들이 파편적으로 발견되던 조각의 양식이 한 사람의 손에서 집결돼 그 완성된 형태를 처음으로 구현하게 된 것은 도나텔로의 초창기 작품들이었다.  이후로 르네상스 조각 양식의 전파는 급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도나텔로 역시 긴 활동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면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르네상스 조각 양식을 구현해낸다. 르네상스 조각에 대한 이야기 역시 미켈란젤로에 관한 포스트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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