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10
페데리코의 어머니 콘스탄체는 그녀의 아들 ‘콘스탄틴’이 ‘축복받은 땅’ 시칠리아에 남아 그곳의 왕으로서 평생을 보내길 바랐다. 이는 아이의 보호자인 교황이 그녀에게 요구한 바이기도 했다. 독일, 이탈리아의 영주들과 전 유럽의 교황파 세력 또한 페데리코가 팔레르모에 남길 소원했을 테다. 바르바로사와 엔리코의 유지를 이어받을 새로운 호엔슈타우펜 황제의 등장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 유럽의 군주들이 공유하던 바람이었다.
소년 페데리코로서도 시칠리아 왕국 바깥에 관심을 가질 여력은 없었다. 이미 유럽의 정세는 그의 존재를 잊고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삼촌 필립이 황제로서 독일 내 패권을 두고 교황파를 상대로 고투하고 있었고, 남부이탈리아의 영주들은 엔리코 사망 이후 마치 독립 영주처럼 자치권을 남용하고 있었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구심점이 없는 유럽의 혼란을 틈타 교황청의 세력을 키우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스와비아 영주 가문 호엔슈타우펜의 혈통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랍어와 이탈리아어를 비롯한 다개 언어를 문제없이 구사했던 신동 페데리코가 독일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팔레르모 시절 소년 페데리코와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독일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성인 페데리코 사이 간극을 가늠할 수 있다.
만약 알프스 너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페데리코를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지 않았더라면, 콘스탄체의 소원은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열네 살 페데리코가 홀로서기를 선언했을 당시 제대로 된 군사도, 재산도, 가신도 갖추지 못한 이 어린 소년이 가진 것이라곤 이름뿐이었다. 다만 호엔슈타우펜의 이름이 상징 하는 영광조차 이미 그와는 무관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1208년 황제 필립의 암살과 함께 소년 페데리코를 ‘축복받은 땅’ 바깥으로 끌어내는 역사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삼촌 필립은 딸의 결혼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연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황제의 죽음으로서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그의 사망과 교황파 오토의 황제 즉위라는 사건의 파장은 전 유럽을 뒤흔들만한 것이었다.
우선 이는 교황파와 황제파의 다툼에서 교황파가 우위를 선점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11년의 고전 끝에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던 필립이었다. 언제나 절대강자를 견제하는 역할에 충실했던 교황청마저도, 마지못해 교황파에 대한 지지를 포기한 채 필립의 황제 대관식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필립의 사망과 함께 판세는 완벽하게 역전된다. 필립의 제위 기간 내내 전란을 겪은 독일 영주들은 같은 혼란이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신속히 교황파이자 반-호엔슈타우펜 세력을 대표하는 가문인 구엘프(Welf) 가문의 오토를 황제로 추대한다. 이전부터 그가 후원하던 인물이었던 오토의 즉위를 교황이 반긴 것은 당연했다.
만약 오토와 교황파의 야망이 독일과 신성로마제국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조용히 팔레르모에 머물고 있던 소년 페데리코에게 새 황제의 등장이 직접적인 위협이 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오토는 구엘프 가문의 맹주인 동시에 사망한 황제 필립의 딸 베아트리체의 남편이기도 했다. 굉장한 야심가였던 오토는 아내의 혈통을 앞세워 그가 호엔슈타우펜가의 상속인임을 선언했고, 이는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바와 다름없었다.
교황이 새 황제 오토에게 바라던 것은 다른 황제들에게 바라던 것과 같았다. 교황의 충실한 신하로서 교황청의 권익을 수호하고, 지나친 영토 확장을 통해 교황청을 위협하는 일을 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토는 황제의 관을 쓰기 무섭게 교황이 점지한 역할을 그대로 수행할 의향이 없음을 증명했다. 황제 즉위식을 로마에서 올리자마자 그는 이전 교황과의 약속을 모두 묵살하고서, 주교의 임명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일은 물론, 시칠리아와 제국을 합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교황으로서는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안하무인으로 변해버린 오토를 두고서 “우리가 갈아낸 칼이 우리에게 치명타를 입혔다”라고 평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오토가 시칠리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자 남부의 정세도 격동하기 시작한다. 잔존하고 있던 독일 사제/영주들은 이전부터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페데리코, 즉 호엔슈타우펜/오트빌의 족쇄를 떼어내고 싶어 했다. 유명무실한 국왕의 존재를 망각한 채 남부 이탈리아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던 기존영주들에겐 다시 노르만 혈통의 페데리코를 왕으로 섬길 의향이 없었다. 특히 독일 영주들에게 있어서 페데리코는 남부 이탈리아가 제국 소유로 귀환하는 수순을 가로막는 존재일 뿐이었다.
이 시기 소년 페데리코에겐 팔레르모 외 시칠리아조차 제대로 통치할 힘이 없었다. 군사도, 재산도 없는 그는 팔레르모에서 이름뿐인 국왕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교황이 그에게 아라곤 가문과의 혼인을 제안했을 때, 스물넷으로 페데리코보다 열 살 연상일 뿐만 아니라 이미 헝가리 국왕과 결혼을 하여 아들을 두었던 바 있는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반기지 않았음에도, 페데리코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녀와 함께 시칠리아로 동행할 500명의 기사단 때문이었다. 500의 기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병력을 의미했다. 이 ‘혼수’를 활용하여 그는 그의 왕국을 평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제대로 전장에 투입되기도 전에 콘스탄체의 오라버니를 포함한 아라곤의 기사단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적군이 아닌 남이탈리아에 유행하던 열병에 쓰러진 것이다. 페데리코의 남이탈리아 정벌은 미뤄져야만 했고, 그의 적들은 싸움 한 번 없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사건으로 인한 낙심을 달래기 위해 그는 시칠리아의 숲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외롭게 자란 소년이었던 그는 상심할 때면 그것을 타인에게 내비치기보단 대자연을 찾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이 습관은 평생 그와 함께 하게 되는데, 훗날 유명해지는 그의 매사냥에 관한 열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테다.
페데리코의 불행은 시칠리아 왕국 내 영주들의 기쁨이었다. 1209년, 그가 상심해 있는 틈을 타 영주들 중 상당수가 독립을 위한 음모에 가담한다. 그들은 공공연히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려 들었고, 그중 몇몇은 페데리코의 면전에서 비판을 쏟아내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모두 왕으로서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반역행위에 대한 페데리코의 대응은 열다섯 살 소년의 그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즉각적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그들은 순식간에 모두 포획되어 처벌되었다. 모든 섭정이 권력을 내려놓고서 왕에게 권력을 반환한 시점이었다. 어린 황제가 직접 지휘한 소탕작전이었을 것이다. 통치자로서 페데리코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였다.
그러나 구엘프 가문 출신의 새로운 황제가 등장한 판국에 영주들 역시 반-페데리코의 기치를 쉽사리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이들은 즉위식 후 피사에 머물던 오토를 찾아가 남진을 간청했다. 친독 성향의 피사인들 역시 그에게 남부 정벌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풀리아의 주인은 황제”여야 하고, 따라서 시칠리아 왕국 전체가 그의 소유여야 하기에, 가짜 국왕 페데리코는 척결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오토의 입장에서 이탈리아 정벌은 영토를 넓히는 일인 동시에 황제로서 정당성을 위협하는 라이벌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했다. 필립의 사망 이후 황제로 정식 선출된 그였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후손인 페데리코에겐 스와비아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외교전보다는 무력행세를 사랑했던 오토로서는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을 테다.
1210년 가을, 오토가 풀리아를 향해 진군한다. 타고난 전사인 그의 군대 앞에서 남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순식간에 백기를 내걸었다. 벌써부터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교황은 그에 대한 파문을 선언하고, 독일의 모든 주교들에게 오토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몇 주 만에 왕국의 본토 영토 상당 부분이 오토 휘하로 편입되었다. 시칠리아와 최단 거리에 위치한 칼라브리아와 바실리카타 주가 오토에게 투항하는 순간, 전 유럽이 제국군의 시칠리아 상륙이 시간문제가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페데리코에게도 손 놓고서 그의 왕국을 빼앗길 뜻은 없었다. 그는 시칠리아 북동쪽으로 직접 출동하여, 대비를 단단히 하였고, 궁중 내부의 친-황제/기벨린 세력을 몰아내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시칠리아 내 분열을 대비했다. 또한 이 시기 시칠리아 왕국 문양에 세계의 패자(霸者)를 의미하는 태양과 달을 추가하며 급박한 위기 앞에서 오히려 긍지 높은 군주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211년 가을이 돌아왔을 때, 왕국의 본토 영토는 모두 오토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1211년 9월, 오토는 칼라브리아에서 시칠리아 상륙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수송을 담당할 피사의 해군이 이미 아르노강을 떠나 남부로 향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이슬람인들마저 페데리코를 저버린 채 오토를 환영할 의사를 표했다.
오토의 상륙은 재앙과도 같을 터였다. 페데리코에게는 이에 맞설 군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오토에게 협상을 제시했다. 스와비아 영토를 포기하고서, 그에게 수천 파운드의 금과 은을 약속했다. 교황 또한 중부 이탈리아 교황청 영토 일부를 보상으로 제안하며 오토를 회유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목표를 목전에 둔 오토는 협상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페데리코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만 했다. 그와 그의 가족을 아프리카로 피신시키기 위한 갤리선들이 팔레르모 항에 준비되었다.
이후 이어진 상황의 전개를 두고 훗날 페데리코는 그것이 ‘기적’이었다고 회상한다. 본토 영토를 모두 잃고서, 시칠리아 내 배신자들에 둘러싸인 채, 아프리카로 피신할 채비를 하고 있던 페데리코를 눈앞에 둔 오토가 페데리코,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를 전부 뒤로하고서 독일로 회군해 버린 것이다. 페데리코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토를 회군하게 한 사건의 전개는 모두 알프스 너머 독일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토의 패인은 성급하게 교황청을 적으로 돌린 선택에서 비롯됐다. 황제로 즉위하기 무섭게 교황과의 약속들을 전부 파기해 버림으로써 그는 교황이 그가 가진 모든 힘을 총동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술했듯이 인노첸시오 3세는 오토가 진군을 시작하기 무섭게 그를 파문했고, 독일의 주교(이중 다수가 독일의 대영주들이었다)들에게 파문된 오토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없음을 알렸다. 동시에 그는 오토의 사촌, 영국 왕 존의 앙숙인 프랑스 국왕 필립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국 국왕의 사촌이자 소년기를 영국에서 보낸 오토의 황제 즉위는 영국과 제국이 동맹국이, 프랑스와 독일이 적국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자연스레 필립이 오토를 향해 품고 있던 반감을 이용하려는 것이 교황의 의도였다. 인노첸시오는 필립에게 오토를 지지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며, 간접적으로 반-오토 연합 결성을 제안했다. 곧장 교황의 의중을 헤아린 필립 역시 곧 행동에 착수했다. 그는 독일 내 영주들에게 접근했고, 오토의 독일 내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교황과 프랑스의 지속되는 물밑 작업은 오토가 남이탈리아 정복전을 이어가는 사이 서서히 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결국 오토가 시칠리아 상륙을 준비하고 있던 1211년 9월, 독일 영주들은 대회의를 주최하고, 이 자리에서 오토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로 바르바로사의 손자 페데리코를 선출하는 데 합의한다.
교황과 페데리코의 거듭되는 협상 제안을 무시하고서 파죽지세로 전진하던 오토는 곧장 이 소식을 접한다. 구엘프파 영주들이 보낸 사신은 상황의 급박함을 그에게 호소했고, 독일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오토는 당장 전군을 철수해 버린다. 이 회군 역시 오토의 성급함을 잘 보여주는 예시였는데, 제국의 황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당시로선 시칠리아로 진군하여 새로이 선출된 페데리코를 포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앞뒤 재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버렸고, 이로써 거의 다 이루었던 남부 이탈리아 정벌을 그르치고 말았다.
반면 페데리코로서는 앞으로 이어지는 상황의 전개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11월, 독일에서 온 사절단이 팔레르모에 도착한다. 페데리코에게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됐음을 알리는 사신들이었다. 그들은 페데리코에게 독일의 영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에, 어서 그들을 만나 제국의 권좌를 그의 것으로 선언하라는 초청장이었다. 페데리코가 ‘기적’이라 이른 것이 바로 이 극적인 반전이었다. 그로서는 그의 운명에 신의 가호가 함께함을, 그가 선택받은 인물임을, 그의 앞길에 영광이 깃들 것임을 확신하게 하는 계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신념은 앞으로도 그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대담하게도 사신의 초청을 받아들이고서 독일로 향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는 어머니의 유지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평생을 ‘축복받은’ 남이탈리아에서 보낸 그는 독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독일어도 서툴렀다. 그의 가신들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지나치게 위험한 길이었다. 호위 병사도, 비용도, 의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려운 여정이 될 터였다. 게다가 오토가 독일로 귀환하여, 세력재정비에 힘쓰고 있는 만큼, 페데리코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변덕 심한 독일 영주들이 그를 황제로 환대해 줄 것인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를 포획하려는 마크바르도의 군사들이 그의 긍지를 일깨웠듯이, 그를 노리고서 남진하는 오토의 병사들 앞에서 실감한 무력감은 페데리코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듯했다. 응당 그의 것이어야 하는 유산을 빼앗아간 구엘프가문, 교황청의 손익만을 따지는 교황의 간교, 강자 앞에서 신의를 내팽개쳐버린 풀리아의 영주들의 작태에 의해 입은 수모는 페데리코에게, 그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같은 종류의 위험에 다시금 노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독일로 향하여 오토의 땅과 권력을 빼앗아 오기로 결심한다.
다만 떠나기 전 그는 교황과의 협약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교황으로서 페데리코에게서 교황청 영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그를 돕는 일은 무의미해질 터였다. 따라서 페데리코는 교황의 지원을 보장받기 위하여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령임을, 시칠리아의 주교 선출 또한 교황청의 관활임을, 제국과 시칠리아의 통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해야만 했다. 이를 위한 조치로 그는 태어난 지 겨우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그의 아들 엔리코를 시칠리아 왕위에 올렸고, 그의 아내 콘스탄체를 섭정으로 내세웠다. 페데리코는 고향 시칠리아의 왕위를 포기한 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자로서 독일행에 오른 것이다.
첫 행선지는 로마였다. 오랜 세월 그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던 교황과의 첫 만남이 될 터였다(동시에 마지막 만남이 된다). 교황의 지지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그리스도 세계 전체를 향해 그가 정당한 교황청의 황제임을 선언하기 위한 대면이었다. 돈도, 호위병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페데리코의 여정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오토의 동맹국 피사의 해군이 그의 독일행 소식을 듣고서 반도 서해 바다를 수색하고 있었기에 페데리코는 메시나를 출발하여 가에타에 상륙한 후 그곳에서 한 달 이상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서야 육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었다.
1212년 4월, 성베드로 성당에서 황제와 교황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만남 직전까지 서로의 심정은 복잡했을 테다. 교황으로서 페데리코의 황제 선출은 차선책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파의 전통적 맹주, 시칠리아 왕국의 주인, 교황청의 숙적 호엔슈타우펜가를 그의 손으로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키운 교황파의 맹주 오토의 배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위험성을 모르지 않을 인노첸시오였다.
반면 페데리코 역시 교황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그의 보호자였으나, 교황청을 위해서는 시칠리아 왕국도, 페데리코의 안전도 망설임 없이 위험의 길로 몰아넣었던 교황이었다. 그의 ‘외교전’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이 생생했을 터였다. 물론 오토의 위협 앞에서 교황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유년기에 교황의 음모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페데리코는 이 시점에서 교황의 신뢰를 얻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에겐 사람을 매료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삶을 통틀어 직접 담판을 통해 이루어낸 수많은 외교적 성과들은 이 ‘기품’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교황 앞에서 순진한 소년의 얼굴 뒤에 그를 향한 반감과 스스로의 커다란 야망을 숨기는 데 성공한 듯했다. 부활절 일요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서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은 채 충성을 맹세하는 소년 황제에게 교황은 격려의 말을 건넸고, 로마에서의 경비를 지원해 주었으며, 나머지 여정을 위한 융자를 제공했다.
예상컨대 페데리코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테다. 그는 교황에게 배신을 당했음에도, 다시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서, 그의 고향인 시칠리아를 포기할 뿐 아니라, 갓 태어난 아들로 하여금 자신이 걸었던 소년 ‘볼모’의 길을 걷도록 해야만 했다. 이 '수모'는 황제인 그에게 진정한 세계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철저하게 실감하게 하는 순간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을 위해서 그는 이 관계를 역전시키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조차 철저히 숨겨야만 했을 테다. 훗날 그는 이 로마방문을 회상하며, "과거 황제들의 영광이 살아 숨 쉬는 로마"에서 "교황도 아닌, 독일 영주들도 아닌, 위대한 로마가, 로마의 시민들이" 그에게 영광을 쟁취할 것을, 제국의 최고 자리를 그의 것으로 만들 것을 그에게 명령했다고 회상한다.
로마를 떠난 페데리코의 다음 행선지는 제노바였다. 피사가 오토의 동맹국이었다면 제노바는 호엔슈타우펜가의 오랜 동지였다. 그들은 피사해군의 눈을 피해 황제를 그들 배로 직접 ‘밀입국’시키는 데 성공했고, 도시의 사제, 영주, 시민들이 모두 황제의 방문을 격렬히 환영했다. 페데리코는 제노바에서 세 달을 머무르며 기벨린 가문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페데리코는 제노바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무역 특권을 약속하고, 그가 ‘황제로 즉위한 후’ 보상을 약속하며, 상당량의 자금을 그들로부터 확보한다. 탁월한 사업가인 제노바인들은 페데리코의 성공에 그들의 운명을 걸어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1212년 7월, 이제 페데리코는 알프스 너머로 향할 준비에 착수한다. 우선 그는 기벨린 도시 파비아로 향한다. 페데리코로서는 가장 위험한 구간에 봉착한 셈이었다. 바르바로사를 상대로 가장 끈질기게 저항했던 롬바르디아 동맹의 맹주인 밀라노가 여전히 호엔슈타우펜가의 앞길을 가로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롬바르드 평야를 광범위하게 수색하며, 황제의 독일행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파비아에서부터 롬바르디아를 가로질러 오랜 전통의 기벨린 도시 크레모나에 도달할 수 있다면, 독일에 도달하는 일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페데리코는 파비아에서의 뜨거운 환영을 뒤로하고, 해가 진 후 어둠을 틈타 크레모나를 향해 출발한다. 람브로 강을 물이 얕은 지점에서 도강한 후, 크레모나 군과 반대편에서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날이 밝아올 즈음, 페데리코는 강의 반대편에서 그를 맞이하기 위해 출동한 크레모나군을 알아볼 수 있었다. 페데리코를 호위하던 파비아군과 그를 맞이하러 나온 크레모나 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람브로 강기슭에서 밀라노의 정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가 강을 건너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그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강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라노군을 알아본 페데리코의 결단은 신속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안장조차 없는 말에 올라타 강으로 뛰어들었다. 가까스로 헤엄쳐 반대편에 도달한 페데리코는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밀라노군을 향해 돌진한 파비아군이 희생돼야 했으나 이번에도 페데리코에겐 신의 가호가 함께했다. 그는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크레모나에 입성했다. 이 일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이 ‘풀리아 소년’이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임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게 된다.
이제 더 이상 할아버지의 땅으로 귀환하는 그의 앞길을 막을 길은 없었다. 크레모나인들에게 두둑한 보상을 한 페데리코는 추측 건데 만투아-베로나- 트렌트-엔가딘 숲을 거쳐 1212년 9월 오늘날 스위스에 해당하는 쿠어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드디어 호엔슈타우펜가의 고향 입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유산을 두고 독일에서 벌어지는 페데리코-오토 간의 전투를 다루게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