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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ul 09. 2024

황제 페데리코 세콘도 3

나폴리 11

페데리코의 독일 입성은 오토와의 황제 자리를 둔 정면 대결의 시작을 의미했다. 시칠리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팔레르모의 이슬람식 궁중 문화와 지중해의 풍요로움을 사랑했던 전통 황실 가문 호엔슈타우펜의 페데리코와, 영국에서 자라나 북부의 거친 날씨가 익숙한 작센 가문 벨프의 오토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 성향을 띤 라이벌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오토에 비해 페데리코가 평균 체격이었다면, 배움에 ‘중독’돼 있다고 묘사될 정도로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갖춘 페데리코와 달리 ‘작센 시골뜨기’라는 별명을 가진 ‘단순무식’한 남자가 바로 경쟁자 오토였다. 둘 사이의 혈전은 훗날 세기에 걸쳐 이어지는 기벨린-구엘프 갈등의 집합체이기도 했다. 영적 지도자 교황을 중심으로 중세적 봉건주의를 옹호하는 교황파와, 세속적 질서를 앞세워 중앙집권을 꾀하는(하늘은 교황에게, 땅은 황제에게) 황제파의 대립은 기벨린의 절대적 상징으로 부상하게 되는 페데리코의 등장과 함께 전 유럽적인 양상으로 굳어진다.


시칠리아인 페데리코에게 할아버지의 고향은 ‘야만인이 다스리는 땅’을 의미했다. 당시 독일은 제후들조차 라틴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오직 돈과 권력 외 그 어떤 법률과 신용도 존재하지 않는 고장이었다. 필립과 오토 사이에서 이어진 오랜 전란 내내 영주들은 그들의 자치권을 마음껏 남용했고, 자연히 황제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오토와 필립은 지속적으로 영주들과 타협해야 했고, 페데리코의 삼촌 필립은 가문의 재정을 탕진하면서까지 납세권과 재산을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조금 더 많은 재산과 영지를 위해서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가벼운 것을 의미하는 이곳에서 아직 수염조차 나지 않은 18살의 사제-왕(보호자 교황이 내세운 꼭두각시 왕이라는 조롱이었다)/풀리아 소년, 페데리코가 황제로서 군림하는 일은 쉬운 일일 수 없었다.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는 일은 소년 황제에게는 난제가 될 터였다.

독일행을 만류했던 시칠리아 대신들이 우려했던 대로 가까스로 쿠어(현 스위스)에 당도한 페데리코의 편에 서주는 독일 영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역을 모르고, 세력 기반이 없으며, 군사도, 재산도 없는 그에게 아버지의 고향은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호엔슈타우펜의 오랜 영지인 스와비아의 재정은 탕진되어 있었고, 그를 노리는 오토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으며,  교황과 프랑스의 지원 역시 독일 현지에서 그를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빠른 행동이 필요했다. 그의 선택은 콘스탄체로의 진격이었다. 300기의 병사와 함께 그는 콘스탄체로 향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다음은 없었다. 이미 오토의 병사들이 콘스탄체 인근 위버링겐에 도달해 있었다. 소식을 듣고서 페데리코를 포획하기 위해 콘스탄체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결국 몇 시간의 차이로 콘스탄체, 독일, 크게는 제국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실로 극적인 전개였다. 이번에도 운명은 페데리코의 편이었다. 요리사를 포함한 자신의 수행원 일부를 콘스탄체로 보낸 오토가 그 뒤를 따르던 참이었다.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이 오토를 맞이하기 위한 차비를 마칠 무렵, 성문에 페데리코가 도착한다. 모두의 예상보다 일찍 콘스탄체에 도달한 것이었다. 본래 참을성이 없기로 유명한 페데리코는 이 시점에서 신속함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문을 열기를 요구하는 '풀리아 소년'의 등장에 콘스탄체의 주교는 당황했다. 그는 우선 페데리코의 입성을 저지했다. 그러자 성문 밖에서 페데리코와 동행하고 있던 교황청의 외교사절이자 바리의 추기경, 베라드가 오토를 파문하는 교황의 명을 낭독한다. 갈팡질팡하던 주교는 결국 교황의 권위에 굴복했다. 페데리코를 성내로 맞이한 것이다. 성내에는 오토를 맞이하기 위한 만찬이 준비돼 있었고, 페데리코가 이를 즐기게 된다. 뒤늦게 도착한 오토는 페데리코가 배를 채우는 동안 성문 밖에서 발을 구르며 분을 식힐 수밖에 없었다. 만약 세 시간만 늦었더라면 페데리코는 결코 콘스탄체를 잃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토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오토로부터 콘스탄체를 가로챈 상징성은 컸다. 게다가 독일 백성들 사이로 퍼져나간 콘스탄체에서의 일화는 페데리코의 명성을 드높여주는 데 크게 한몫하게 된다. 입소문이 오늘의 신문 역할을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소년 왕이 경쟁자를 위해 차려진 만찬으로 배를 채우고서 그의 성 역시 차지했다는, 전래동화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는 독일 민중 사이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교황 역시 페데리코와 오토를 다비드와 골리앗에 빗대며 페데리코의 승리서사에 힘을 실어준다)


파문된 오토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호엔슈타우펜 소년을 황제로서 환대할 것을 요구하는 교황의 명령, 동맹국 프랑스의 지속적인 경제/외교적 지원, 마지막으로 '이 ‘풀리아 소년’에게는 신의 가호가 깃들었다는 소문과 함께 페데리코는 오토와의 경쟁에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다. 남부 독일의 성들은 하나둘씩 페데리코에게 성문을 열고 있었다. 반면 오토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오토의 수상을 맡고 있었던 샤펜베르크의 콘라드(그는 메스와 스파이어의 추기경도 겸하고 있었다)가 이 시기 오토를 버리고 페데리코 쪽에 충성을 맹세한 사건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만큼 페데리코의 인기는 치솟고 있었다. 어느덧 오토에게 그는 벅찬 상대로 부상하고 말았다. 자신을 음해하는 소문들을 등장만으로 단박에 소거할 만큼 용모, 품행, 언변이 탁월했던 페데리코였다. 애송이'라 그를 조롱하던 독일인들에게 이제 ‘풀리아 소년’이란 별명은 페데리코의 성공이 자아내는 경탄, 그의 신비로운 비상을 설명하는, ‘남부’가 간직한 비밀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고, 이에 반해 오토의 용맹성에 대한 찬사였던 ‘색슨족’, ‘야만인’이라는 별명은 황제의 권좌가 요구하는 품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순무식한’ 인간을 가리키는 조롱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군사행위를 통해 이탈리아를 향한 야욕을 드러냄으로써 후원자였던 교황을 적으로 만들었던 오토였다. 그는 자신의 세력권이나 다름없던 독일에서도 편파적 논공행상과 거친 언사로 불필요한 적을 만들고 있었다. 교회 소속 영주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독일에서 그는 고향인 영국 출신 사제들을 편애함으로써 독일 교회의 반발을 샀고, 그의 영국적 기질인 지나친 인색함은 제후들의 환심을 사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반면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페데리코는 영악했다. 그는 독일은 남부 이탈리아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본래 분권 통치 관습의 뿌리가 깊은 게르만의 땅에서(황제의 자리는 세습되지 않았으나, 세속영주들의 영지는 세습되었다) 지역 내 기반이 없는 페데리코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가 ‘황제’의 품격을 갖추었음을 과시했다. 그는 자신을 상대로 저항하다 패배한 영주, 로레인 공작 티볼트와 몇 달간 매일 밤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아량을 보이거나 재물이 생기는 족족 독일 제후들에게 나누어주는 ‘과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인심을 샀다. 프랑스 국왕이 페데리코에게 은화 2만 마르크를 전달했을 때, 가신들이 이를 보관할 장소를 묻자, 페데리코가 “한 푼도 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제후들의 몫이다. 그들이 나누어가질 일이다”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헤프다’고 느껴질 정도의 이런 관대함은 "호엔슈타우펜이야말로 황제 가문이다"라는 세간의 평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만 그가 그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사안은 독일 내 최대 세력인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교회는 독일 내 영지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관공서를 운영하고 있던 존재였다. 페데리코는 1213년 에거 금인칙서를 선언하여 독일 내 주교 임명 권한을 교회에 일임했고, 이로써 영지에 대한 권한을 상당 부분 포기했다. 큰 희생이 따른 결정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이 칙서는 교황청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를 확실히 그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훗날 교황청과 페데리코의 갈등이 불거졌을 때에도 독일 교회는 페데리코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동시에 할아버지 바르바로사와 아버지 엔리코 6세가 교회를 상대로 확보한 황제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에 맞서 기운 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오토가 꺼내놓은 묘안은 역시 전쟁이었다. 페데리코와 오토 간의 경쟁은 구엘프와 기벨린간의 갈등인 동시에 오랜 라이벌인 영국과 프랑스의 이권이 얽혀 있는 사안이었다. 오토는 페데리코의 동맹국 프랑스를 표적으로 잡았다. 그의 삼촌 영국 왕 존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제압한다면, 독일에서도 반전을 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즉각 행동에 나선 오토는 영국군이 라 로셸에 상륙한 시점에 프랑스 북동부로 전진한다. 프랑스 측에서는 국왕 필립과 그의 아들이 출전하여 연합군에 맞섰다. 세 국왕의 자존심이 걸린 전쟁은 1214년 부빈 전투에서 판가름 나게 된다. 결과는 오토와 존의 완패였다. 프랑스는 이 전투를 통해 현 프랑스 영토를 대부분 국토로 확보하게 되고, 영국왕 존은 악화된 여론에 밀려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사인하게 되며, 오토는 황권에 대한 희망을 완벽하게 상실하게 된다.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전장을 보지도 못한 페데리코였다. 이제 더 이상 오토는 그의 경쟁자일 수 없었다. 행운은 여전히 그를 따르고 있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호레이스 베르네가 묘사한 부빈 전투


패배와 함께 오토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 쾰른으로 피신했지만, 그를 쫓아 쾰른 성문 앞까지 추격해 온 페데리코를 피해 순례객으로 변장하여 그곳마저 떠나야 했다. 이제 독일에서 페데리코의 권좌에 도전할 인물은 없었다. 풀리아 소년은 1215년 7월 Aix La chappelle에서 로마의 왕으로 즉위한다. 이로써 대를 이어 지속된 호엔슈타우펜과 벨프 가문의 혈전은 끝이 난다. 오토는 결국 철저하게 고립된 채 1218년 5월, 그의 영지 브룬스윅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페데리코는 독일의 왕으로 등극한다. 독일을 모르는 독일왕으로서 할아버지의 땅을 찾은 소년은, 어느덧 독일에서 무려 8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그는 독일과 시칠리아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우선 페데리코는 독일의 뿌리 깊은 분권 체제를 혁파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전 유럽을 호령하는 황제로서 군림하길 욕망했지만 독일 제후들의 특권을 몰수하여 진정한 통치자가 되는 꿈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에거 금인칙서를 선언하는 결정 역시 사제 겸 영주가 대다수인 독일 내 영토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페데리코의 독일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독일에 머물 의향이 없었다. 평생 시칠리아와 풀리아를 향한 사랑을 고백했던 페데리코였다. 그들의 고장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독일 영주들과 영토싸움을 벌이는 일에 애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평생 독일 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일관되게 영주들을 달래는 타협책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가 평생 독일에 머무는 기간은 오토와의 전쟁을 벌였던 시기를 제외하면 단 1년뿐이었다.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고향인 시칠리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하는 것이었다.  


이노켄티우스 3세. 로마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 회랑에 위치한 프레스코


다시 한번 하늘이 그를 향해 도움의 손을 내민다. 이 시점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페데리코의 전-보호자이자 유럽 최고 권력자인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가 사망이었다. 페데리코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그를 '조종'하려 했던 그의 사망은 페데리코의 ‘귀향’ 계획이 예상보다 일찍 실행에 옮겨지게 됨을 의미했다. 사실 페데리코 이상으로 그간의 전란을 통해 큰 수확을 올린 인물이 교황이었다. 확실한 황제가 부재한 상태의 지속은 이노켄티우스에게 있어 교회를 세속 통치자와 분리시켜 자체적 '정부'로 확립하는 기회를 의미했다. 이를 위해선 황제와의 협상이 필요했는데, 황권을 둔 경쟁이 이어지는 한 후보 중 누구도 교황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거듭해서 교황의 요구는 수용돼야 했고, 오토가 교황에게 약속한 영지와 이권을, 페데리코가 추가적인 조항을 더하여 양여하는 과정이 반복됐다(에거의 금인칙서도 이 중 하나였다). 교황청의 권위와 영토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페데리코가 승리를 거머쥐었을 무렵, 이는 역사상 최고점에 달해 있었다. 황제가 교회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은 축소된 반면(사제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을 확보한다), 교황청이 사제들에게 내린 칙명을 통해 영지의 통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은 확장됐고, 늘어난 영지와 함께 교황청은 명실공히 중부 이탈리아 최강자로 군림하였다(이노켄티우스의 개혁이 교황청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는 사제 세력과 세속 권력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훗날 페데리코는 이를 십분 이용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개최된 회의가 이노켄티우스 3세의 주최하에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다. 역사에 남게 되는 이 공의회에서 교황은 오토가 폐위되었음을, 동시에 페데리코가 황제로 즉위했음을 선언했다. 세속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권위 역시 교황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세계 내 최고 권력자는 교황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제스처였다. 이노켄티우스로서는 전 유럽의 군주들 위에 정식으로 군림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라테란 공의회 다음 해인 1216년 7월 그가 사망한 것이다.


패데리코는 그를 옭아매고 있던 족쇄가 느슨해질 것임을 내다보았다. 새로 취임한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그의 유년 시절 팔레르모 추기경 겸 그의 가정교사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페데리코가 그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는 우선 아들 엔리코를 로마의 왕(즉 독일 국왕)으로 선출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선거에 앞서 제후들의 지지를 구하였고, 동시에 독일 공문서에 점차적으로 엔리코의 이름을 등장시켰으며, 결국 엔리코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동시에 그는 고대해 왔던 시칠리아행 준비를 시작했다. 정반대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엔리코가 사망할 경우를 대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를 대비한다는 독특한 논리였다) 스스로가 엔리코의 후계자임을 밝혔고, 상왕이자 후계자로서 시칠리아 공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등장시켰으며, 점차적으로 시칠리아로 거처를 옮길 시기를 재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아들에게 독일왕 자리를 맡기고서, 스스로는 시칠리아로 향할 심산이었다. 시칠리아와 독일의 분리를 유지하되 시칠리아 왕인 아들이 독일로, 독일의 왕인 자신이 시칠리아로, 서로 자리를 바꾸는 방도를 구상한 것이다. 물론 이는 독일로 떠나기 전 시칠리아 왕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이노켄티우스와의 약속을 번복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노켄티우스가 건재했더라면, 페데리코는 적어도 이렇게 일찍 시칠리아행을 감행할 수 없었을 테다. 오토를 파문한 전례에서 보듯이, 이노켄티우스는 약속을 번복하는 것을 묵인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노켄티우스는 없었다.  페데리코는 새 교황인 호노리오 3세가 불같은 성격의 전 교황과 다른 성품의 사나이였음을 알고 있었다

페데리코의 아들 엔리코 7세


그럼에도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우선 일을 전진시키고서, 뒤늦게 교황청의 허락을 구하며, 사신이 제 때 출발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핑계를 꾸며내는 방식으로 일을 진전시켰다. 그는 4월 23일 아들 엔리코의 로마 왕으로서의 선출을 급기에 진행시켰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추후 교황청에 자신은 이 선거는 엔리코에 대한 제후들의 지나친 충성심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자신은 이에 대해서 몰랐다고 발뺌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하지만 페데리코가 그를 알고 있듯이, 새 교황도 페데리코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 역시 새 황제의 의중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페데리코의 번복 행위를 묵인하는 쪽을 선택했다. 교황으로서 그가 페데리코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야망이었던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황제인 페데리코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눈앞에서 교황청과의 약속을 어기고 있는 페데리코를 주시하면서도 그는 다가오는 로마에서의 황제 즉위식 진행을 묵인한다. 페데리코는 이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결국 또다시 일은 페데리코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교황은 1220년 11월 22일 페데리코의 머리 위에 황제 관을 씌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못 이기는 척 페데리코의 시칠리아행과, 엔리코의 로마의 왕 즉위를 허락했다. 대신 페데리코는 십자군 원정을 떠날 것을 교황 앞에서 맹세한다. 1220년 겨울, 페데리코는 이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그가 그리던 고향으로 향하는 금의환향의 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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