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15
출항 당시 십자군 원정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였다. 군사 규모와 국제 정세로 미루어 보았을 때 승산은 희미했다. 그러나 황제에겐 늘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적어도 이 시기까진). 이번에도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짓는다. 바위에 균열이 나타난 것이다.
알 무아잠 사망 이후 술탄 알 카밀은 동생의 영토를 합병하며 이슬람 세계 일인자 자리를 굳힌다. 다만 제국 전체를 통일한 것은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를 통치하는 셋째 동생 알 아쉬라프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대항 세력인 그가 맏형의 영토가 커지는 걸 경계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둘째 형의 영지를 나눠가지는 데까지 동의했지만, 분배가 끝나자, 반기를 들고나선다. 알 카밀은 다시 한번 형제간 갈등에 직면한다.
내부정리가 시급한 시점에 등장한 십자군의 존재는 알 카밀에게 골칫거리였다. 소수라 해도 해군을 보유한 시칠리아군이다. 그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는 사이 십자군이 나일강을 거슬러 카이로로 진군한다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알 카밀은 위협의 현실성을 직시해야 했다. 그는 결국 직접 나서 알 아쉬라프와 협상을 타결시키며 갈등을 해결하는 데 성공하지만 십자군의 위험은 여전히 잔존했다. 게다가 얼마나 더 같은 원정이 반복될지 기약이 없었다. 제5차 원정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벌써 두 번째 겪는 십자군이었다.
그는 우선 가자로 이동한다. 군사충돌을 피하며 십자군의 군사행동을 견제하려는 심산이었다. 반면 한시가 급한 페데리코는 신속한 소통을 위해 야파(텔 아비브)로 이동한다. 둘 사이 거리가 약 70킬로미터로 줄어든다. 이 시점부터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된다.
전개되는 외교전은 사신을 매개로 진행된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페데리코는 이슬람 측 사신인 파쿠르 아딘과 비공개 교섭에 임한다. 가신들과 사제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대화 내용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파쿠르 아딘은 종종 페데리코와 체스를 두며 대화를 이어갔고, 내용이 알 카밀의 승인을 요구할 경우, 체스를 중단하고서, 가자로 말을 달려 알 카밀에게서 답신을 받아와야 했다.
긴밀한 비공개 협상을 통해 두 군주는 서로가 ‘마지못해’ 성전에 참가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기록에 따르면 페데리코는 “서방인들의 신망을 잃을 위험만 아니었다면 술탄께 이런 조건까지 요구하지 않았을 텝니다”라고 파쿠르 아딘에게 고백한다. 알 카밀 역시 바그다드/메세포타미아/칼리프로 대표되는 원리주의 세력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골칫거리인 예루살렘을 서방에 넘겨주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을지 모른다. 둘에게 예루살렘은 민심을 달래줄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 페데리코에게 그의 왕국을 노리는 그레고리 9세와 교황청이 있었다면 알 카밀에겐 칼리프와 바그다드가 있었다. 둘은 동병상련하게 됐을지 모른다.
추측 건데 페데리코는 알 카밀이 이슬람 세계의 화를 지나치게 돋우지 않는 선에서, 알 카밀은 페데리코가 교황청에 명분을 세울 수 있는 선에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야 했을 테다. 이와 같은 상호 간 이해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낸다. 극적인 타결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3개월 간의 줄다리기 끝에 두 황제는 1229년 2월 18일 새로운 협정서에 사인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양보한다. 다만 알 아크사의 모스크가 위치한, 시내 동부 1/3에 해당하는 지역을 이슬람 지구로 지정하고, 예외로 한다. 이 계약은 10년간 유효하며, 쌍방의 동의 아래 연장될 수 있다.
2. 예루살렘 주변 일대는 이슬람 영토로 한다.
3. 베이루트에서 야파까지 지중해 연안을 이루는 항구도시는 그리스도교 소유로 한다.
예루살렘을 포기함으로써 알 카밀이 지불해야 할 대가는 컸다.도시의 이양이 추가적인 십자군에 대한 우려까지 소멸해 주리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정이었다. 평화를 약속하는 페데리코와 순례객의 안전을 보장하는 알 카밀 간의 신의가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독일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순례객들 앞에서 페데리코는 예루살렘의 수복을 알린다. 이들이 격하게 환호했음은 물론이었다. 교인들은 교황이 페데리코를 파문하고, 예루살렘의 방문을 금지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지가 개방되었을 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자명했다. 메시아의 성묘보다 확실한 권위는 없었다. 3월 17일 페데리코를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순례객들은 모두 감격에 젖는다.
제6차 십자군은 페데리코가 이루어낸 또 하나의 기적으로 기록된다.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예루살렘 정복 이후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성지수복이다. 그것을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이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3월 18일 성묘교회에서 예루살렘 왕 대관식을 거행한다. 환호하는 교인들 사이에서 페데리코는 왕관을 들어 올려 스스로 머리 위에 얹는다. 이어진 연설에서 그는 자신이 신의 가호로 예루살렘을 수복했으며, 그의 승리가 신의 의지를 증명됐음을 전 세계에 알린다. 말하자면 스스로가 절대자의 메신저임을, 교황의 매개 없이 그의 뜻을 직접 실행했음을 알린 것이다. 이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이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항소이기도 했다.
소식을 들은 교황은 격분한다. 전투 한 번 없이, 이교도와 ‘공생’을 바탕으로 한 협약을 맺은 그가 그리스도교의 적이라는 비난은 되려 거세진다. 모든 성지순례객들에게는 예루살렘 방문 금지령이 내려진다. 대외적인 이유는 파문된 황제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고, 그의 원정 역시 십자군 원정이 아니며, 이교도와의 ‘협상’을 통해 얻어낸 성과 마저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동시에 교황청은 시칠리아 왕국 정복 전쟁에 박차를 가한다.
급박한 본국 상황을 알고 있는 페데리코는 성지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머무른 시간은 이틀에 불과했다. 3월 24일 아코로 돌아온 페데리코는 근 한 달간 중근동 지중해 연안 일대 방위 체제 완비 계획에 전념한다. 추후 이곳을 방문하게 될 순례객들과 교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방위 시스템이다. 이 지역에 산재하는 성탑들 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유기적인 방어 체계를 고안한 것이다. 5월 1일, 완성한 기획을 예루살렘의 잔류하는 기사단과 제후들에게 일임한 페데리코는 마침내 귀향길에 오른다. 그가 오리엔트에 도착한 지 8개월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