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16
페데리코가 동방에서 십자군을 지휘하던 시기, 교황 그레고리 9세 또한 그만의 원정을 계획한다. 바로 시칠리아 침략 전쟁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문된 ‘해적’(그는 임의로 십자군을 떠난 황제를 ‘해적’이라 비난했다)을 징벌하는 '성전'을 위해 그는 전 유럽의 군주들을 소집한다.
그러나 돌아온 소식은 그레고리를 실망시킨다. 독일, 스페인,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롬바르디아 등이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일부는 금전적 지원만을 제공한다). 그들로서는 명분이 부족했다. 페데리코는 교황청의 숙원인 성지 탈환을 위해 동방으로 떠나 있었다. 그런 그의 빈자리를 교황이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명목상 로마 황제의 가신인 그들로선 여러모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전쟁이었다. 우선 오랜 세월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섬겨온 독일 영주들이 그들의 맹주를 배신하기를 거부한다, 놀랍게도 페데리코의 앙숙 북이탈리아의 꼬뮤네들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 황제에게 창을 돌리는 공공연한 반역 행위를 고사한 것이다. 그 외 유럽 군주들 역시 교황의 손발이 되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레고리 9세의 ‘십자군’은 이탈리아 중-남부로 국한되고 만다.
<그레고리의 남벌>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스폴레토 공작(섭정)의 군사행동은 분명 섣불렀다. 교황청과 시칠리아 왕국은 이를 계기로 전면전에 돌입한다. 전쟁 초기 시칠리아군은 카푸아와 아브루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동방 원정 중인 왕국의 군사력은 약소했다. 무엇보다 문제는 황제의 부재였다. 교황은 페데리코가 동방에서 사망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이는 도시들의 사기에 치명타를 가한다. 거기다 독일에서 반향을 얻지 못한 교황의 권위가 이탈리아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우후죽순 격으로 도시들이 교황 지지를 천명한 것이다. 순식간에 반도 남부 도시 다수가 교황청 편에 가담한다.
페데리코는 귀국을 서둘러야 했다.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의 방어 체제를 제대로 정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1229년 5월 1일, 페데리코는 팔레스타인을 뒤로한다. 알 카밀과의 조약을 통해 이슬람과의 평화를 이루어냈지만, 동방의 교황 지지세력은 여전히 그를 음해하고 있었다. 떠나는 파문 황제의 함선을 향해 예루살렘 주교가 동원한 사제와 시민들이 오물을 던지는 장면까지 연출됐다. 페데리코는 그들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성지를 황급히 떠나야 했다.
6월 10일, 그의 함선이 브린디시에 정박한다. 사랑했던 페데리코의 죽음을 애도하던 시칠리아인들 앞에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곧장 바를레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귀환을 선언한다. 전세가 순식간에 뒤집힌 순간이다. 시민들은 그들이 교황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황제를 지지하는 군사들이 신속하게 황제 곁으로 결집한다.
이제 상황은 급변한다. 동방에서부터 페데리코를 따라온 군사들부터, 조류에 휩쓸려 풀리아에 긴급 정박한 튜턴 기사단까지, 황제군의 전력은 교황군을 압도할 정도로 증강된다. 반도로 진출한 황제는 우선 카푸아에 지원군을 보내며 조금만 더 버틸 것을 당부한다.
다만 그에겐 교황군과 전투를 벌일 의향이 없었다. 그레고리로부터 이단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슬람과는 협상만으로 목표한 바를 이루어낸 그가 교황군과 충돌하여 사상자를 낸다면 여러모로 이로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의 부재를 노린 침략이다. 페데리코는 자신의 등장만으로 충분할 것이라 예상한 듯하다. 그의 계산은 맞아떨어진다. 9월 8일 페데리코가 카푸아에 도착했을 때, 전쟁의 결과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의를 상실한 교황군은 10월 내로 거의 모두 국경 밖으로 철수한다.
이렇게 양국 간의 전쟁이 막을 내린다. 이제 반기를 들고 일어선 왕국 내 도시들만이 남았다. 교황군과는 무력 충돌을 피했던 페데리코지만, 동조한 도시들의 처우는 달랐다.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했다. 저항을 이어가던 소라가 희생양이 된다. 라치오의 이 작은 도시를 상대로 페데리코는 직접 군사를 지휘한다. 함락된 도시에 진입한 황제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시키고, 시민들을 학살한 후, 불을 지른다. 페데리코의 표현대로 소라는 고대 카르타고의 운명을 따르게 된 것이다. 남은 타 도시들 역시 모두 그에게 투항한다. 황제는 시민들의 목숨은 보전하되 이들의 성벽을 모조리 허물어버렸다. 배신자에 대한 잔인한 처단은 페데리코가 평생 일관되게 유지한 원칙이다.
이로써 본국의 상황이 정리된다. 페데리코가 동방에서 돌아온 지 5개월 만이다. 이제 남은 것은 교황과의 관계회복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을 벌여 보기 좋게 패배한 교황은 큰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전 유럽이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심지어 로마 귀족들의 탄압에 고향인 아냐니로 피신해야 했다. 그럼에도 페데리코는 그로부터 사면을 받고 황제직에 정식 복귀하길 바랐다. 로마 교황이라는 상징성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레고리 9세는 고집불통이었다. 지상의 수장으로서 이단 황제를 처단하겠다는 의지 역시 여전했다. 이런 그에게 현실을 직시시키고, 페데리코를 황제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하는 데 수많은 외교관들의 노고와 1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페데리코는 이 1년간 이탈리아 중부에 머무르며 상황을 주시한다.
황제와 교황 간 갈등은 전유럽의 관심이 쏠린 사안이었다. 1227-8년에 유포한 성명에서 페데리코는 교황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십자군 자금을 황제와 그의 왕국을 음해하는 데 사용하고 있음을 고발했다. 이후 교황은 군사행동을 통해 이를 사실로 증명해 준 셈이 되었다. 따라서 페데리코는 자신이 겸손한 태도로 시간을 끌수록 여론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침착하게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한 교황에게 화해 외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교황청과의 협상을 위해 페데리코는 튜턴 기사단 단장 헤르만 폰 살차를 아냐니에 파견한다. 교황청이 인정한 수도기사단 수장이면서 황제의 심복인 그는 둘 사이 화해를 주선할 적임자였다. 교황은 지속해서 무리한 조건을 요구함으로써 협상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거듭 찾아오는 헤르만 폰 살차와 포기를 모르는 황제의 끈기에 결국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1230년 8월 28일, 교황과 황제가 아냐니에서 조우한다. 단신으로 교황과 마주한 페데리코는 교황의 신하로서 모든 예의를 다한다. 둘만의 식사가 이루어지고,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평화 협정이 이루어진다. 환한 표정으로 평화의 키스를 나누며 황제와 교황은 모든 갈등이 해소되었음을 알린다. 페데리코의 파문은 철회되었고, 이제 황제로서 다시 왕국을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이제 유럽에도, 동방에도, 그에게 도전할 인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멜피 헌장>
십자군 원정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바다를 건너며 성지 팔레스타인을 처음 맞닥뜨린 페데리코가 배 위에서 신성모독적 발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풀리아를 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태인들에게 하사한 이 땅을 그처럼 과대평가했을 리 없다”
고향을 향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평생을 통틀어 그 어떤 여성, 자녀, 친구에게도 큰 애착을 품은 적 없는 페데리코의 진정한 연인은 ‘풀리아’였다. 그는 마치 사랑하는 애인을 대하듯 풀리아에게 말을 걸고, 찬사를 헌사하며, 시를 썼다.
‘풀리아’는 그에게 있어 고향 시칠리아를 포함한 남부이탈리아, 즉 시칠리아 왕국을 의미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들과 자리를 바꾸면서까지, 독일의 황제이기보다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 자리를 고집했다. 그의 바쁜 일정에 조금이나마 틈이 나기라도 하면 그는 곧장 남부로 말을 달렸다.
교황과의 갈등을 해소한 시기 페데리코는 다시 자연스레 사랑하는 고향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뛰어든다. 바로 시칠리아 왕국을 중세 최초 중앙집권의 법치국가로 세우는 일이었다. 1231년 여름에서부터 가을까지 이어진 이 도전은 멜피헌장이라는 역작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가 구상한 것은 중세적 국가 형식의 탈피였다. 이를 위해 유스티니안 대법전 이후 최초로 법전 제정을 시도한 것이다. 멜피 헌장 이전까지 중세의 법전 개편은 그저 기존에 존재하던 관습과 법률의 재정비 정도로 국한되었다. 이유는 중세 특유의 정치적 구조 때문이다. 영주들이 각자의 영지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봉건 유럽에서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헌장’은 요구되지 않았다. 많은 경우 법의 제정은 존재하는 관습법과 고대 로마의 법을 참고하는 한에서, 무엇보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페데리코는 시민 삶의 전면을 중앙 정부, 즉 황제가 주관하는 국가를 꿈꿨다. 이는 권력을 완벽하게 독점하는 절대군주로서만 가능한 일이며, 그의 영토 중 비잔틴, 노르만의 통치 아래 오랜 세월 통일 왕국으로 존재했던 그의 고향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신학자들의 힘을 빌려 왕에게 주어진 “정의를 구현할 의무”를 멜피 헌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것은 신이 황제에게 내린 책임이라는 주장이었다.
새 헌장을 위해 페데리코는 휘하 법학학자, 성직자, 문장가들을 동원한다. 다수 신하들이 멜피에 합숙하며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법전을 완성한다는 대담한 시도였다. 황제 역시 멜피에 머무르며 전 과정을 직접 관장한다. 유스티니안 법전을 포함한 고대 로마, 노르만과 각 지역의 관습법을 참고한 연구를 통해 필요한 규정들이 채택되었다. 헌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왕국의 사법권이 모두 황제에게 집중된다. 봉건 영주가 임의로 주민들을 심판하던 중세식 관습은 철폐된다, 만약 어긴다면 영토를 압수당할 수 있었다. 모든 형사재판은 오직 황제가 임명한 관료인 대사법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했다.
대사법관은 지방의 통치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임기는 1년에 불과했고, 파견된 지역 출신일 수 없었으며, 그곳에서 주민이 되거나, 토지를 소유, 또는 혼인을 올릴 수도 없었다. 뇌물 수령은 매우 중대한 범죄였으며, 만약 불공평한 판정이 내려졌을 경우, 심할 경우엔 법관을 상대로 사형까지 내려질 수 있었다. 이들의 임기가 1년에 불과했기에, 법정판결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모든 사건이 3개월 안에 해결돼야 했다.
두 번째는 군사력의 집중이다. 영주들의 상위병을 혁파하고 대신 황제의 용병과 요새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페데리코의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카푸아 헌장이 확립한 영주들의 군사활동 제한이 한층 강화된다. 국방의 책임과 권한을 모두 황제가 독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주들은 성을 소유하거나 군사를 이동하는 데서 심각한 제지를 받게 된다. 무기 소지와 사적 폭력/상해의 권리 역시 강하게 통제되었다. 중앙집권국가 설립에 있어서 군사력의 독점은 근본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토지 소유권에 대한 통제다. 우선 중세 체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자치권이 박탈된다. 영주 역시 오직 황제의 신하로서만 봉토를 통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종교 집단의 토지 소유권 역시 제한되었다. 무소유의 땅을 교회가 차지하던 관행은 폐지된다. 만약 누군가 유언으로 토지를 교회에 기부하더라도, 1년 이내에 매각해야만 했다. 이는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토지를 획득,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토지 소유권은 황제의 허락 하에 임시적으로만 용인되는 것이 된다.
네 번째로 각료, 행정, 군사 체계가 개편된다. 우선 페데리코 주관 하에 일곱 부문의 장관, 네 명의 고위 성직자와 두 명의 봉건 영주가 참석하는 왕실회의가 왕국 최고 결정기관 역할을 맡게 된다. 추가적으로 주민들이 그들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각 마을/도시마다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성직자, 기사 계급 외에도 제3계급인 시민 대표가 참석했다. 이 회의의 주목적은 페데리코의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었지만, 제3계급이 그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였다.
동시에 군사 지휘 통치 체계 역시 재구성되었다. 이제까지는 제독이 수군과 육군을 모두 지휘하던 군사 체계가 제독이 수군을, 원수가 육군을 지휘하는 구조로 변경된다. 동시에 황제의 눈과 귀가 되어줄 비밀경찰이 개편된다. 주된 임무는 반국가 세력에 대한 감시와 보고였다. 특히 교황청과 연루되거나 이단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관찰하였다.
여섯 번째는 경제 수익 구조의 재정비다. 페데리코는 세금 징수와 독점품의 철저한 국가 관리를 통해 국가 수입을 극대화하는 방침을 택했다. 소금, 철 염료, 비단, 삼이 국가 독점 상품으로 지정되었고, 땅에서 나는 곡물에 대한 12퍼센트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동시에 위기 시에만 부과되는 특별세가 실시됐다.
무엇보다 세금 징수가 중앙화되었다. 봉건 영주가 아닌 황제의 관료들이 세금 관리를 책임지고, 내용을 정확히 기록한 장부를 관리하게 되었다. 또한 수월한 세금과 무역의 관리를 위해 도량형이 통일되고 왕국의 금화가 주조된다. 바로 중세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폐로 알려진 아우구스탈레다.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금화를 모방한 그의 금화는 한쪽 면에는 로마 황제로서 월계관을 쓰고 황제의 망투를 쓴 페데리코의 두상이, 반대편에는 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와 그의 이름인 페데리쿠스가 적힌 형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