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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an 03. 2020

쓰리 피스 수트의 탄생

남성성의 이념

산업화된 세계 내 ‘고급 남성복’의 기호가 셔츠, 타이, 자켓, 베스트, 바지, 구두라는 획일화된 이미지를 소환한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삶의 기반인 의식주 중 전 세계를 아우르는 통일성은 아직까지 오직 남성복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고급 주택', '고급 음식' '고급 여성복'이 연상시키는 상품은 각 지역/국가마다 작지 않은 차이를 보여줄 테다.)


수트의 세계적 성공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고리타분한 접근일지 모르나, 난 그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한다.


The Three-Piece Suit and Modern Masculitniy의 저자 David Kuchta는 모던 수트의 기원을 1666년 10월 7일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발표한 남성 복식에 관한 결의안에서 찾고 있다.


“찰스 2세가 복식 양식을 결정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것은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규정은 베스트(Vest)의 착용을 제정한다... 귀족들에게 절약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사무엘 핍스의 일기)


궁중 서기는 찰스가 선언과 함께 "더블렛, 스티프 칼라, 망토 등을 벗어 버리고, 아름다운 베스트를 착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쓰리 피스 수트가 오늘날 남성복 애호가들의 전유물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베스트'가 복식의 중심으로 도래한 사건은 오늘날의 수트와 자명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러나 당시의 베스트는 오늘날의 웨이스트코트/베스트와는 판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초기의 베스트-셔츠-코트-브리치스(무릎까지 오는 반바지) 조합
18세기 궁중 의복. 베스트와 프락 코트를 착용하고 있다.


초기의 베스트는 허벅지, 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장에 (베스트가 짧아지고, Waist-Coat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훗날의 일이다) 긴소매와 버튼을 포함한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상의였다.


물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베스트는 그 탄생부터 셔츠와 코트(자켓) 사이에 자리하는 상의의 역할을 수행했다. 베스트-코트-브리치스의 쓰리피스 수트가 현대의 모던 라운지 수트의 원형으로 인식되는 점도 이러한 베스트 본연의 활용성에서 기원한다.


생소한 형태를 띠고 있는 17세기의 베스트가 어떻게 오늘날의 수트로 진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의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고,  찰스가 시도한 복식의 개혁이 가져온 변화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찰스 2세는 새로운 남성복 양식의 도입이 귀족의 절약을 위한 것임을 주장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베스트의 착용이 궁중 의복의 간소화를 의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찰스의 선언 이전까지 통용되던 궁중용 남성복은 어떤 양식을 따르고 있던 것일까.  


당시 서유럽 전체에서 통용되던 남성복은 '더블렛''호스'로 대표되는 에스파냐식 의복이었다

17세기 서유럽의 대표적 궁중 의복. 상의가 더블렛, 하의(반바지 모양의 트루스와 그 아래의 양말)가 호스로 구성되어 있다.



셔츠-베스트-코트의 조합과는 달리 셔츠 위에 단품으로 착용되던 더블렛은 (물론 더블렛 위에 망토를 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14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17세기까지 서유럽 전역에서 애용되었다. 300년의 시간 동안 더블렛은 다방면으로 진화했는데, 아래 첨부된 헨리 8세와 찰스 1세의 초상화를 비교해보아도, 두 국왕의 더블렛은 전체적 실루엣과 세부의 장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패딩이 추가된 더블렛과 호스, 망토를 착용한 헨리 8세 (역국 국왕: 1509-1547)



더블렛을 착용한 찰스 2세의 아버지 국왕 찰스 1세(1625-1649)


오늘날의 수트가 어깨 패딩, 심지, 드레이프, 다트 등을 활용하여 어깨와 가슴 선을 강조하듯이, 더블렛 역시 패딩과 자수, 보석 등을 활용하여 남성미를 강조하는 실루엣을 구현하고 있다. (다리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했던 호스 역시 남성미를 과시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반바지 모양의 트루스는 매우 짧게 재단되었고, 양말 역할을 한 호스는 얇고 타이트하게 제작되었다.) 다만 현대의 수트가 체형 보정에 머무른다면, 중세의 더블렛은 실루엣을 ‘지어 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도한 양의 패딩, 슬래싱, 보석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더블렛의 제작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비용을 요구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궁중에서 착용되던 더블렛은 기본 소재로 실크와 벨벳과 같은 값비싼 수입(프랑스/이탈리아산) 옷감을 사용했던 사치품이었다.  


16세기 유행했던 호박을 연상시키는 짧은 트루스(반바지/브리치스)와 바지 아래 얇고 밀착된 호스가 남성의 다리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다소 화려해 보일 수 있는 초기의 베스트는 실크, 벨벳, 각종 보석과 장식이 요구되던 더블렛에 비해 획기적인 검소함을 상징하던 옷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베스트는 실크, 벨벳에 비해 월등히 저렴했던 (영국산) 양모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장식이 가미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더블렛에 비해 조금 더 소박하게 디자인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다면 14세기부터 이어져온 더블렛과 호스의 복식 양식이 17세기에 중반에 이르러 베스트로 대표되는 쓰리-피스 수트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David Kuchta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변화가 가져온 남성성에 대한 사상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


1620년, 찰스 2세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는 그의 아들 헨리 왕자에게 복식에 관한 충고를 남긴다.


"관습을 따르라. 동시에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기보다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때때로 더 화려하게, 때때로 더 소박하게 복장을 갖춰 입어야 한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 (1603-1625)


그의 조언은 르네상스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서유럽 궁중 문화를 지배했던 전통 복식 제도(Old Sartorial Regime)의 사상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베스트의 탄생 이전까지 의복 관습을 지배하던 전통 복식 제도(Old Sartorial Regime)는 왕족과 귀족, 특히 국가의 최고 권위자인 국왕이 호화로운 소비를 통해, 복식의 취향을 확립해야 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100년 전쟁(1337-1453)과 장미의 전쟁(1455-1485)을 거치며 확립된 중앙 집권 체제 아래 강력한 왕권을 거머쥔 영국 국왕은 영국의 교회인 성공회의 수장인 동시에 문화와 관습에 있어 영국의 취향을 결정/대표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17세기 궁중 문화의 최고봉을 자처했던 베르사유 궁정 양식의 화려함 역시, 국왕의 권위가 최절정을 구가하던 시기, 권력에 편승하기 위해 베르사유로 모여든 귀족과 왕족들이 이루어낸 절대왕정의 업적이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1643-1715)


물론 국고의 탕진을 염려하는 이들에게 왕가의 지나친 사치는 경계의 대상이었으나, '때때로' 선보이는 화려한 궁중 의복의 착용은 국왕으로서의 의무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확립된 궁중문화에서 유래한 이러한 전통적 사상은 의복이 남성의 내적 가치의 표현이어야 함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상류층의 복식 문화는 그들의 귀족성을 나타내 주어야 했다.


제임스 1세의 충고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단순히 '철저하게 룰을 따르는' 일은 이러한 귀족성을 대변해주지 못했다. 각각의 장소와 상황이 요구하는 복장을 선택하는 능력과 함께 더블렛-호스-망토, 그리고 그 외에 추가되는 화려한 장식품을 착용한 채 자연스러움을 연출할 수 있는 능숙함만이 상류층의 혈통을 증명할 수 있었고, 이러한 탁월한 취향은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라는 믿음이 전통적 복식문화 이념의 전제였다.


옷은 내적 가치의 표현이어야 했기에, 귀족의 우아함은 화려한 더블렛을 주문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nonchalantly") 입어낼 수는 없었던 벼락부자 (upstart)와의 차이를 가시화시켜주어야 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조안 켈리는 르네상스 남성에게 요구되는 우아함은 "전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면서, 매력적이고, 우아하게 보이는 일,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상대방을 매혹하는 일"이라고 서술한다.


따라서 전통 복식 제도는 남성이 그 지위와 권위에 알맞은 의복을 선택할 때에만 우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암시했고, 그것은 왕과 귀족들은 화려한 더블렛을, 평민 계급은 값싼 소재의 더블렛을 입어야 한다는 무언의 규정을 확립시켰다. 이러한 이념은 "군복은 장교가 입었을 때에는 멋지지만, 일반인이 착용했을 때에는 우스꽝스럽다"는 당시의 복식에 관한 일반론의 연장선에 서 있었다.


실제로 Sumptuary Laws라 불리는 사치-단속법이 존재했지만, 그것이 시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반면 철저하게 지켜졌던 규정 역시 존재했다. 모든 귀족이 더블렛을 착용했음에도, 가장 비싸고 화려한 소재와 색상은 (보라색 실크를 포함한 ) 오로지 국왕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 (1556–98),



17세기 중반 베스트의 등장은 전통 복식 제도가 더 이상 유럽 사회 내 복식 문화를 완벽히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당시 영국 사회, 정치, 경제에 불어닥친 전방위적 변혁은 의복의 영역에서도 전환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우선, 남성 의복 문화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변화는 더 이상 국왕이 이전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었다.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로 영국은 중앙 집권제를 뒤로하고, 입헌 군주제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이전부터 국왕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큼 강력한 의회의 전통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이었다). 이제 영국의 권력은 왕이 아닌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과 젠트리 계급(평민 신분이었으나 자작농으로서 성공을 거둔 부유한 중산층)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17세기 이후로 영국의 왕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명목상의 우두머리' 역할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왕권의 몰락은 복식 문화의 본보기로서의 왕의 권위 역시 이전과 같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의회 정치의 실세로 등극한 의회파 귀족과 젠트리 계급은 왕족과 왕당파 귀족(토리당)이 내세우던 전통 복식 제도를 존중할 의사가 없었다. (1666년 발표된 찰스 2세의 결의안은 명예혁명에 앞서 이미 진행되고 있던 시대의 변화에 편승하여 왕의 권위를 지켜내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화가 게인즈버러가 그린 18세기 영국의 전형적  젠트리  부부의 초상

의회 정치의 주류로 부상한 하원의 휘그당 의원들은 왕당파가 다수를 이루고 있던 토리당의 의원들과는 달리 수도가 아닌 지방의 영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금욕주의에 충실했던 청교도인 동시에 이윤의 추구에 큰 관심을 가졌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영지에서 양모 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베스트의 옷감인 모직물 생산을 직접 관리하던 사업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 서유럽에 유행하고 있던 중상주의에 입각한 수출 장려와 수입품 제한 정책의 직접적 수혜자였다.


18세기 영국 의회



중앙 집권 체제의 르네상스 영국 남성의 미적 취향을 대표한  존재가 국왕이었다면, 새로이 도래한 자본주의 입헌군주제 체제 내에서 남성성의 모델을 제시한 것은 젠트리 계급이었다. 새로운 복식의 양식은  전통 복식 제도가 추구했던 궁중 의복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를 선보일 터였다.


금욕주의를 숭상한 청교도인이었던 젠트리 계급이 복식에 있어서 검소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전통적 복식 제도가 권장하는 '지배 계급의 호화로운 소비의 의무'를  부정한 그들은 청교도 교리에 충실한 삶을 표방했고,  남성이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일을 오로지 허영, 즉 타락의 신호로 치부했다.


실크, 벨벳, 보석으로 수 놓인 화려한 더블렛 아래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들의 우아한 취향을 과시하던 귀족 남성은 더 이상 영국 남성의 본보기가 될 수 없었다. 영국산 양모로 만든 베스트를 입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지방의 중산층 신사라는 새로운 남성상이 도래한 것이었다.


'신사'의 가치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기에, 검소한 의복의 착용이 고수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검소와 겸손이라는 내적 가치가 드러나야 한다는 역설적인 사상이 남성 복식의 지배적 이념으로 부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전통 복식 제도와 새로이 도래한 남성상의 이념 사이의 긴장,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시사하는 바는 다음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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