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능의 욕망 Jan 09. 2020

영국 신사의 이념

쓰리 피스 수트의 탄생 2

18세기와 19세기 영국 복식의 역사는 쓰리 피스 수트가 완벽하게 영국 남성의 유니폼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로 베스트-코트-브리치스/바지의 조합은 점차적으로 더블렛과 호스를 대체하며 영국 남성의 공식 의복으로 부상한다. 시대는 우아함과 화려함이 아닌, 근엄함과 검소함을 남성복이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확립시켰다.


    이제 모든 귀족 남성은 직위, 경제력, 소속 정당을 막론하고 쓰리 피스 수트를 착용했으며, 지식인들은 모두 시대의 흐름인 간소화된 의복의 예찬에 편승했다(물론 Mandeville과 같은 예외도 존재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사치가, 악덕임에도 불구하고, 권장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베르사유 궁중 문화의 후광에 힘입어 로코코 양식의 호화로움을 유럽 전역에 수출하던 프랑스의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지만(18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궁중 의복은 더할 나위 없는 화려함을 자랑했다), 루이 14세의 무리한 정복전쟁 이후로 국제적 위상의 지속적 쇠락을 경험하고 있던 프랑스는 산업혁명과 함께 비약적으로 성장한 국력을 자랑하던 영국에게 남성 복식문화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다. (다만 영국이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서는 19세기에도 서유럽 여성복의 유행은 파리의 여성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Jean-Baptiste-André Gautier-Dagoty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 (1775)


    18세기  복식 문화사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요소 중 하나는 당시의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던 군대 문화였다. 유럽의 18세기는 서양사의 그 어떤 격동의 시대와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전쟁이 발발했던 시기였다(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1748), 7년 전쟁 (1756–1763), 미국 독립 전쟁 (1775-1783), 프랑스혁명 전쟁 (1792-1802)) 남성 인구 중 상당수가 전쟁을 위해 징용됐고, 그들을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군복이 제작됐다. 1726년에서 1760년 사이, 기존의 병력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 군은 1년에 2만 벌 이상의 군복을 신병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군복이 직접적으로 남성복의 유행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는 7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프러시아 군복의 타이트한 핏, 곧은 실루엣, 화려한 장식용 액세서리가 서유럽의 테일러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사건이었다.  1760년대와 1770년대는 이러한 군복의 요소들이 평상복에 적용되던 시기였다.


7년 전쟁 (1756–1763)에 참전했던 프러시아 장교들의 군복


    그러나 군대문화가 복식 문화사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특정한 유니폼이 아닌 ‘복장의 획일화’가 가져오는 정서적 효과에서 유래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군복은 규율, 복종, 소속감의 상징이다. 현대적 국가의 개념이 안정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시대의 특성상 남성 인구 중 상당수를 군인으로 징용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애국심과 사회적 의식의 고양을 가져왔고(Chris Breward),  특히 영국의 경우 군장비 구비에 요구되는 비용 중 일부를 병사들이 부담해야 했기에, 대다수는 퇴역 후에도 군대에서 사용했던 옷과 장비를 개인 소장했으며, 부분적으로 착용했다. 이는 평상복의 유행에 있어서도 군복과 군대문화가 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했다. '사치'라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복장의 획일화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18세기 유럽의 군대문화가 일반 남성의 유니-폼한 유니폼(uniform and a uniform)이었던 쓰리 피스 수트의 유행에 일조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제 영국 국내 사정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남성복의 진화를 결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동력은 영국의 국내 정치에서 기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게 된 의회파 귀족들에게 있어서 왕권의 몰락이 가져온 부작용은 특권적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려 했던 그들의 지위적 정당성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중앙집권제의 와해는 귀족의 고귀한 혈통, 왕가와의 친분, 화려한 씀씀이가 그들의 사회적 위상과 권력을 정당화해주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당파 귀족들을 견제하는 ‘저항 세력’을 표방했던 의회파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정당화할 새로운 이념을 정립해야만 했다.


1789년 6월 20일의 테니스 코트 선언.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작품이다. (1794)

 

    1789년, 18세기 최대의 사건이었던 프랑스 대혁명의 소식은 이러한 이념의 필요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프랑스식 혁명을 통한 공화국의 설립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귀족(일부 젠트리를 포함한)이 주도하는 정치의 구현이라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왕당파 귀족들과 그들의 사치를 비판했던 것이다. ‘전통 복식 제도’의 시대가 끝을 맞이한 18세기, 명예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영국 귀족은 '자유 평등 박애'를 앞세운 급진주의의 위협 앞에서 그들의 태세를 재정비해야만 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앞세워 이념화되었던 개념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영국 신사'의 매너와 도덕성이었다.(David Kuchta)

18세기 후반 영국 지배층의 이념을 대표하는 사상을 정립한 에드먼드 버크(1729-1797). 쓰리피스 수트를 착용하고 있다.


    혈통과 재산이 지배계급의 통치를 정당화해줄 수 없다면, 이제 예절과 규범, 신사의 매너가 그것을 대신해 주어야 했다.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으로 대표되는 반-대혁명적 정서가 지배하던 18세기 후반의 영국 귀족 사회는 ‘훌륭한 도덕성과 예절’이라는 귀족 남성의 ‘남성적 정서’ (‘manly sentiment’ of an aristocartic man)를 영국 남성의 이상으로 내세웠고, 지배계급 특유의 보수성에 물든 왕당파와 피동적 삶에 적응해버린 평민 계급이 아닌 이타적이고 규범이 되는 '남성적 정서'를 갖춘  '진정한' 귀족들이 국가의 앞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배 세력을 배격하는 저항적 담론으로 활용됐던 ‘예의 바르고, 검소하며, 이타적인 신사’의 남성상은 이제 프랑스 대혁명이 암시하는 ‘지나치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막아서기 위해 사회 내 주류 담론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르네상스 귀족의 사치를 비판한 그들이 계속해서 검소한 옷차림의 예찬을 지속한 일은 당연했다.


    복식문화에 있어서 이 지배적 이념이 초래한 결과는 영국 남성복의 발전이 간소화의 일변도를 걷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19세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전형적인 18세기 중반기 귀족 남성의 복장, 셔츠 칼라와 소매의 러플이 화려하다. (18세기 프랑스 화가의 작품(미상))


이제 그 간소화의 과정을 단계별로 짚어보기로 하자.


    18세기 초기 쓰리 피스 수트의 베스트는 코트와 비슷한 기장으로 재단됐다. 베스트는 18세기 중반부터 짧아지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밑자락이 무릎 위까지 오는 모델이 유행하였고,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높은 활동성을 제공하는 밑자락이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짧은 베스트가 유행하기도 했다. 베스트의 버튼은 보통 허리에서만 잠가졌는데, 그것은 가슴으로 흘러나오는 셔츠의 러플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1760년 이후부터는 베스트의 소매가 생략되기 시작했고, 1770년대에는 밑단이 허벅지 중간에, 1790년대에는 밑단이 허리선(오늘날의 베스트와 동일한 기장을 의미)까지만 떨어지는 베스트가 유행하였다. (B. 보이어)


18세기 후반 영국 남성복으로 추정, 베스트의 길이가 짧아진 것을 볼 수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의 복식 문화의 추세는 18세기 말에 확립된 쓰리-피스의 형태를 고수한 채, 수수함과 정중함을 추구하고 있었다.


보 브루멜 (1778-1840). 멋 내기에 하루 5-9시간을 할애한 그였지만, 그의 복장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았다. Rober Dihton이 그린 그의 초상화(1805)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대표적 댄디 보 브루멜의  코트-셔츠-크라밧-바지의 복장 역시 간소화의 유행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가 옷차림에 있어서 ‘심플함’을 강조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 남성복을 18세기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의복의 색상이었다. 오늘날 남성 복식의 규정에 있어서 검은색은 장례식장, 혹은 블랙 타이 이벤트가 아니면 피해야 할 선택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19세기 영국의 의회, 증권가, 법정의 유니폼은 검은 프락 코트였다.



1840년 당시 유행하던 남성복을 그린 삽화
1867-1868 검은색 일색의 쓰리 피스 수트



    방대한 식민지와 급속도로 성장한 국내 산업은 영국 경제의 활성화와 중산층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획일화된 검은색 수트는 새로이 등장한 각종 직업의 유니폼으로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 영국 중산층은 명실공히 남성 복식 문화를 주도하는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17세기 왕당파를 배격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검소'와 '겸손'으로 대표되는 남성상의 이념이 이 시기부터 중산층에 의해 전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귀족들이 왕족과 왕당파의 사치를 비난했듯이, 19세기 중산층의 지도세력은 귀족계급의 상속된 부와 지위가 허영과 사치로 대표되는 근원적 악덕의 뿌리임을 주장했고, 놀고먹는 귀족이 아닌 '생산적인 계급' (productive class)인 그들의 도덕적 탁월함을 내세웠다. (계급의 개념이 등장하는 것도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일이다. 이전까지는 오로지 '계층'(Rank)의 개념만이 존재했다.  계급의식의 탄생은 중산층 시민의 결속을 가속화시켰다.)  


    17세기 귀족들이 검소한 ‘소비’ (Consumption)를 주장했다면, 중산층이 내세운 검소함의 담론은 그들만이 진정으로 생산적인 계급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1832년 Reform Act 이후 그들에게는 투표권 역시 주어졌고, 이는 더 이상 귀족들이 중산층 계급의 성장을 억압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Bowler hat, 짧은 코트, 가슴 상단까지 올라오는 하이-베스트, 바지와 부츠, 19세기 후반부터 영국 남성의 유니폼으로 확립된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루어진 복장의 간소화 역시 귀족-젠트리 계급이 즐겨 입었던 모닝코트와 프락 코트가  점원-직원 계층의 유니폼이었던 '보울러 모자, 짧은 자켓, 높은 웨이스트-코트, 점차적으로 좁아드는 바지’라는 더더욱 간소화된 형태로 변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수트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라운지 수트'가 영국 신사의 유니폼으로 도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