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피스 수트의 탄생 3
라운지 수트는 "남자는 옷 따위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이념이 지배하던 19세기 영국에서 남성의 유니폼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라운지 수트의 인기 역시 또 하나의 유행일 수밖에는 없었다. 19세기 후반, 영국 남성들은 전통 복식 문화 아래에서 답습했던 화려한 색상, 정교한 장식, 밀착된 핏 대신(이와 같은 요소들은 이브닝 웨어(포멀 웨어)와 군복에서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실용적인 옷감, 여유 있는 핏, 어두운 색상을 찾게 되었다. (이것은 흐르는 곡선, 값비싼 소재, 정교한 디테일, 체형을 압박하는 코르세트로 대표되는 여성-드레스와 대조를 이루며 리전시-조르지안-빅토리안-에드워디안 시대의 지배 담론에 의해 거듭 강조되었던 성역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었다(Brent Shannon, The Cut of His Coat))
Psychology of Clothes의 저자 Flügel은 19세기 초, 어두운 색의 쓰리 피스 수트의 유행의 도래와 함께 영국 남성은 “아름답게 보일 권리를 포기하고, 오직 유능해지기만을 바라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반 남성이 즐겨 입던 수트의 헐렁한 핏, 박스와 같은 실루엣, 둥근 통의 모양을 한 소매와 바지는 근육과 군살을 모두 은폐시켰고, 남성의 육체적 매력을 모조리 지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제 남성의 몸은 육체성이 거세된, '실용성의 몸'(Utilitarian body) (Anne Hollander)으로 거듭나야 했으며, 쾌락이 아닌 노동에 전념해야 할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치장과 과시를 전염병처럼 피해야 했던 19세기-20세기 영국 남성은 의복의 유행(패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춰야만 했다. 유행에 편승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허영으로 가득 찬, 실속 없는 한량(fop)으로 치부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절대로 입어서는 안 되는 옷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있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당시 영국 남성들은 그들에게 요구되는 올바른 예절, 올바른 행동, 올바른 언행, 올바른 의복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다.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etiquette manual’(예법 안내서)이 존재했다. 17-18세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유행하기 시작한 ‘안내서’ 장르는 19세기에도 영국 내에서 꾸준히 판매되고 있었고, 당시의 남성상에 입각한 '신사의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도 서술했듯이 19세기 영국 '신사'는 혈통과 재산이 아닌 올바른 행실(behavior)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물론 혈통과 재산은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무력하지 않았다). 신사로서 그의 행동거지와 외관은 절제된 과묵함과 여유 있는 무심함을 선보여야 했고, 의복과 언행에서 그는 모든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했다. 따라서 19세기 복식 안내서들은 남성에게 어두운 색상의 옷감이 구현하는 ‘조용한 멋'을 주문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댄디와 노동계급의 바람둥이들로부터 스스로를 차별시킬 것을 당부했다. (18세기와는 달리 19세기 예법 매뉴얼이 경계 대상으로 명시한 이들은 귀족이 아닌, 화려한 차림으로 관심을 끌고자 하는 중산층의 댄디와 노동자 계급의 난봉꾼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기의 예법 안내서에서 찾을 수 있는 “현란한 색상들을 피하라; 평상복으로는 ‘조용한’ 트위드 색상을 고르고, 타이의 색상 역시 튀지 않는 색상이어야 한다. 모자는 검은색이어야 한다.” (The Glass of Fashion, a conduct manual 1881), “멋지게 옷을 갖춰 입은 남성은 오로지 그의 특출 난 절제에 있어서만 타인의 눈에 띄기 마련이다.”(Etiquette for All Occasions, 1901), “진정한 신사는 간소하며, 허세가 없고, 자연스럽다.”(Etiquette 1900)등의 조언에서 볼 수 있듯이 '수수함'과 '절제'는 영국 남성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미덕이었다.
이처럼 ‘튀지 않는’ 복장이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19세기 남성복 유행이 획일화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수 없었다. 검은 쓰리 피스 수트는 중산층의 유니폼과도 같았고, 댄디와 바람둥이의 지나치게 화려한 차림과는 달리 은행가, 증권 중개인, 변호사, 공장주의 검은 수트는 “믿고 돈을 맡길 수 있는 남성”(Harvey)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남성에게 있어 당시 유행하던 '수수한' 옷차림이 사회생활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음을 시사했다.
중산층이 유행을 주도하던 산업사회 내에서 영국 남성은 생산자-계급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쇼트 자켓-베스트-바지로 구성된 라운지 수트를 입어야 했다. 그것은 '평균의' 유행을 따르는 일이었다. 사치-유행-치장에 전혀 관심이 없는 신사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 19세기 말-20세기 초기의 영국 남성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릴 수도, 지나치게 편안한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상황과 장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격식을 준수하지 않는 옷차림은 그곳에 자리한 모든 이에게 불쾌함을 주었고, 이러한 결례는 댄디, 혹은 바람둥이로 오해받는 일보다 더욱 끔찍하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파리로 대표되는 오트 쿠튀르의 화려한 ‘패션’의 유행을 지나치게 열심히 따르는 댄디의 옷차림이 ‘이목을 끌지 마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금기를 위반하고 있었다면, 지나치게 형편없는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이목에 나는 일 역시 신사의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러한 복식 규율에 대한 인식의 향상은 남성들에게도 복장에 대한 관심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통 복식 제도의 이념 아래 화려함을 지향해야 했던 귀족들만큼이나 신분상승을 꾀하던 중산층의 남성들 역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수수한 멋’을 구현하는 데 지출해야 했다. 당시 의복 카탈로그의 “의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성은 스스로를 위선자로 규정하는 셈이다.... 사업, 직장, 사회 내 성공을 위해서 옷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며, 그것에 신경을 쓰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일이다. 오직 백만장자와 걸인만이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Pope and Bradley‘s clothing Catalogue 1912)는 주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에티켓 매뉴얼의 조언을 따르는 일 이외에, 사회생활을 위해 영국 신사가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현명한 전략은 그가 소속되어 있는(혹은 소속되고 싶은) 무리의 남성들의 옷차림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구현해낸 복식문화는 ‘획일화’를 향할 수밖에는 없었다. 1890년 테일러들의 잡지였던 “Gentleman’s Magazine of Fashion”의 리포터 T.H Holding은 St. James가의 남성들이 입고 있는 옷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는 남성 전용 회원제 클럽들이 즐비한 세인트 제임스가에서 발견되는 남성복의 실망스러운 단조로움을 보고했다.
“때를 막론하고 늘 놀라울 정도의 ‘복장의 일관성’이 발견된다... 무엇이 유행이건, 모든 남성들은 그리로 향한다. 검은색 비큐나 프록코트이건, 더블브레스트 쇼트 코트(reefer)이건, 혹은 반 세기 전에 유행했던 짧은 허리와 긴 꼬리의 모닝코트이건, 이들은 언제나 같은 옷을 입어야만 하는 듯하다.”
London Tailor 지는 1899년, “역사상 이처럼 모두가 유사한 옷차림을 보여준 시대는 없었다”며 19세기 말 남성복의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아쉬움을 표현하던 일부의 남성들의 존재는 획일화된 당시의 남성복의 현실에 권태 역시 사회 내에 팽배했음을 말해준다 – 이는 남성 모두가 ‘검소함’의 미적 가치에 설득되지는 않았음을 알려준다. '검소함'의 담론에 설득되지 않았던 ‘반항적’ 남성들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유행의 일반적인 형태는 상류층의 취향을 하류층이 답습하는 형태를 보이기 마련이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처럼 19세기 후반부터 보편화된 라운지 수트 유행의 특이점은 전통적 하류 계층이었던 중산층 시민계급의 유니폼이 귀족, 부르쥬아, 일반 중산층 계층을 포괄하는(노동계급을 제외한) 영국 남성의 대표적 의복으로 인준됐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역전된 유행의 흐름은 20세기 중-후반기에 일어난 노동자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청바지의 유행을 연상시킨다. 청바지와 마찬가지로 라운지 수트의 캐주얼함은 귀족 계급으로 하여금 라운지 수트를 그들의 고유한 형태로 독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Shannon)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몸에 밀착된 날렵한 실루엣을 그리고 허리에서부터 약간의 플레어를 그리며 내려오는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던(맞춤-제작된) 프록코트와 모닝코트에 익숙해져 있었던 상류층 남성들이 박스와 같이 네모난 모양의 헐렁한 핏의 라운지 수트를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20-30년대까지도 일부 상류층 남성들은 프록코트, 모닝코트, 탑햇을 고수했고, 조끼, 코트, 바지가 모두 한 옷감으로 만들어진 라운지 수트를 “Dittoes”라 부르며, 그 단조로운 모양새에 멸시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대다수의 중산층 남성과 젊은 세대는 실용적이며 편안한 라운지 수트를 신속하게 받아들였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계급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남성이 라운지 수트를 그들의 유니폼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소수 계층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편리를 지향했던 다수의 압력에 굴복하게 된 셈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이와 같은 전통 복식 제도의 완벽한 전복의 배경에는 역시 영국 사회의 산업화가 있었다. 라운지 수트가 프록코트와 탑햇을 구세대의 전유물로 만들며 남성복 시장의 패권을 거머쥔 사건의 원동력은 새로이 등장한 백화점과 그곳에서 판매되고 있던 기성복 수트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초기의 라운지 자켓은 스포츠와 휴식을 위한 ‘편리한 옷’으로서 처음 탄생했고, 따라서 18세기 초-중반 당시의 쇼트-자켓은 트위드, 체비엇, 혹은 벨벳과 같은 편안하고 값싼 소재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쇼트-자켓이 지향하던 젊음과 편리함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Shannon) 따라서 19세기 중반까지,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옷은 특유의 우아함을 자랑하던 프록코트-베스트-바지의 쓰리 피스 수트였다. 그러나 1880-90년대부터 백화점에서 널리 판매되었던 기성 라운지 수트의 등장은 복식문화의 판도를 급격하게 바꾸어놓았다.
1910년 대표적 광고주였던 John Wanamaker는 “몇 년 전까지 남성이 라운지 수트를 입고 ‘Ritz’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러한 차림으로 도시(런던)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디에서나 라운지 수트를 찾아볼 수 있으며, 굉장히 포멀한 행사와 크고 화려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낮에 라운지 수트를 착용하고 어디든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라운지 수트는 캐주얼한 스포츠 용품에서 프록코트를 제치고 신사의 유니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라운지 수트의 유행을 직접 조장했으며, 그것을 가장 반겼던 이들은 역시 백화점과 방직 공장을 운영하던 자본가들이었다. 맞춤-제작되어야 했던 프록코트에 비해 규격화된 형태의 기성 라운지 수트는 훨씬 저렴하게 양산 될 수 있었고, 보울러 햇, 금색 채인과 금시계, 우산으로 대표되는 영국 신사의 필수품들 역시 대량 생산되어,다량으로 백화점에서 판매되었다.
물론 19-20세기 남성상의 이념은 백화점을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하였으나, 이 역시도 발 빠른 마케팅을 활용할 줄 알았던 대형 백화점에게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아니었다. 재빨리 남성성의 기호에 어필한 영국의 백화점들은 남성용품 코너의 확장, 공격적인 광고, 남성 전용 클럽을 모방한 젠틀맨 라운지의 구비를 통해 백화점을 남성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세기 초 런던의 백화점은 라운지 수트를 구매하러 온 남성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계명은 대량 생산되는 라운지 수트의 착용을 남성에게 강요했고, 이는 규격화된 기성 수트가 거리를 지배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라운지 수트는 진정 부르주아에 의한,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주아의 유니폼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