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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an 23. 2020

멋쟁이, 댄디, 플레이보이, 그리고 소비자

댄디즘 1

댄디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댄디가 조롱이 아닌 다른 의도로 대중을 상대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C. 보들레르)


‘댄디즘’을 서술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댄디'에 대한 텍스트들을 조금만 폭넓게 살펴보아도 우리는 '댄디'의 정의가 저자의 의도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습을 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댄디 보들레르가 댄디즘을 “특정한 종류의 자기 숭배...가장 엄격한 수도원적 규율”이라 규정하며 댄디의 금욕주의적 삶을 드높인 반면, 댄디를 사회악으로 규명한 토마스 칼라일은 그들에 대해 "옷을 입기 위해 사는 남성...다른 이들은 살기 위해 옷을 입지만, 댄디는 옷을 입기 위해 산다"라 평하며 그들의 헤픈 쾌락주의를 비난했다.


에티엔 카라자트가 찍은 보들레르의 사진(1863)


댄디즘을 다루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지나치게 옷을 사랑하고, 지나치게 치장을 즐기며, 지나친 자의식을 소유했던 남성들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존재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사바이데스는 고대의 대표적 ‘댄디’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감안하여 난 남성복의 역사에 국한하여 댄디의 개념을 다루고자 하고, 이번 편에서는 근대 남성복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19세기 영국의 댄디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국왕 조지 4세, 그는 왕자 시절 보 브루멜의 드레싱룸에 출입하는 '영광'을 허락받은 남성들 중 하나였다.


근대 영국(잉글랜드+아일랜드)의 역사는 수많은 댄디들을 배출해 왔다. 헨리 8세, 찰스 1세, 찰스 2세의 옷에 대한 집착은 역사에 그 기록을 남길 정도로 유별났고(헨리 8세는 왕비를 포함한 여성 왕족들보다 더욱 화려한 의상들을 즐겼다), 19세기와 함께 도래한 복식 문화의 변혁 이후에도 국왕 조지 4세와 에드워드 7세로 대표되는 ‘로얄 댄디’들의 복장에 대한 까탈스러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에드워드 7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지인들의 옷차림을 지적했던 국왕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스스로는 핑크 타이, 녹색 수트, 화려한 플레이드 반바지를 즐기면서도, 바지 줄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B. 보이어)).


젊은 시절의 에드워드 7세


그러나 The Cut of His Suit의 저자 Brent Shannon은 19세기 영국의 '댄디'가 그들의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존재임을 주장한다.


첫째로 19세기의 댄디의 대부분은 Fop(멋쟁이)이라 불리던 18세기의 댄디와는 달리 귀족이 아닌 평민 계급의 남성들이었다. 이제 '댄디'는 귀족의 세계 속에 격리된 남성이 아닌 혼잡한 도시 한가운데서 생활하는 상류층의 남성을 지칭하게 되었다.



가발, 메이크업, 화려한 색상의 옷, 실크 스타킹, 무릎까지 올라오는 브리치스로 한껏 치장한 18세기의 멋쟁이(Fop)


둘째, 19세기 벽두에 등장한 조지 '보' 브루멜의 영향은 간소하고 자제된, 하지만 매우 정교하게 연출된 우아함을 댄디의 이상으로 확립시켰다.(보 브루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별도의 포스트로 다시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브루멜은 레이스가 달린 소매 커프, 향수와 파우더를 칠한 가발을 즐겼던 18세기 멋쟁이(fop)의 지나친 치장을 거부하고, 결점 하나 없는 깔끔한 셔츠, 완벽하게 매어진 크라밧,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매너를 댄디의 상징으로 명명했다.


그가 런던의 중심에서 남성 취향의 절대 군주로 군림하던 시절 (1800-1816), 런던 사교계의 댄디는 최고급의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으면서도, 화려한 색상과 향이 진한 향수를 쓸 수 없었다. 널리 인용되는 그의  잠언 "행인이 고개를 돌려서 당신을 쳐다봤다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것이 아니다. 당신의 옷차림은 너무 뻣뻣하거나, 너무 꽉 끼거나, 지나치게 유행을 따른 것이다" 역시 이상적인 댄디의 멋은 섬세하게 연출된 절제된 멋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전형적인 19세기 댄디의 모습이다.-



'조용한 멋'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브루멜이 규정한 19세기 댄디의 규범은 당시 영국의 지배적 이념이 선전하던 남성상과 상당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브루멜의 댄디즘이 설파한 존재방식은 댄디의 유일한 가치인 멋을 위한 수련으로서의 삶이었다. 보들레르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댄디는 우아함 외 그 어떤 직업도 가지지 않는 존재였다.  이튼-옥스포드-로얄 경기병대를 거쳐, 상속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사교생활을 향유했던 브루멜의 삶을 답습한 19세기 영국 댄디들은 주로 귀족 혈통을 타고나지는 못했으나, 상류층의 교육과 (전 세기까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상류층의 사교생활을 즐기던 부유한 남성들이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려낸 도리안 그레이처럼 우아하게 여가를 즐기는 삶을 그들만의 예술 작품으로 삼았던 댄디에게 있어 완벽한 의복, 제스처, 취향, 재치는 그 자체로 최상의 가치였다.


그들이 상류층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 시사하듯, 옷차림에 앞서 댄디에게 가장 먼저 갖추어져야 했던 것은 완벽한 매너와 신랄한 재치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선언처럼 “때때로 지나치게 차려입는 일에 대한 유일한 속죄는 항상 지나친 교양을 선보이는 일"이었다.


토마스 칼라일 (A. 레그로스, 1877)


따라서 브루멜을 위시한 19세기 영국의 댄디에게 있어 매 순간 절약, 성실, 실용성을 강조한 19세기 중산층-부르주아 가치관은 경멸의 대상일 수밖에는 없었다. 명확한 수입과 직업이 없는 '자기 숭배자' 댄디는 산업화와 함께 도래한 모든 미적 감각의 평준화 속에서 신-귀족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그의 빳빳한 리넨 셔츠, 높은 칼라, 몸에 밀착된 코트는 중산층 남성의 헐렁한 상의, 투박한 부츠, 회중시계에 대한 반기였고, 후자의 천박한 실용성을 향한 댄디의 경멸은 보 브루멜과 오스카 와일드가 공공연히 내비친 개신교-자본주의 가치에 대한 조롱과 상통하고 있었다. 댄디의 존재 목적은 언제나 스스로의 과시에 있었고,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청교도로 대표되는 남성상과 절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보 브루멜의 삶을 극화한 2006년  제작된 TV 시리즈 <<This Charming Man>>  . 브루멜이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고, 훗날의 조지 4세가 지켜보고 있다.


쉽게 예상 가능하듯, 19세기 사회 비평가들에게 있어서 댄디는 박멸되어야 할 존재, 가장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신-귀족을 표방한 댄디에게는 "엘리트주의, 나태함, 지나친 치장"의 꼬리표가 자연스레 따라붙게 되었고, 18세기의 귀족들을 겨눴던 지식인들의 독설이 그들에게로 투척되기 시작했다.


상류층 남성이 대부분을 이루었던 댄디는 실제로도 노동을 기피하며, 유산 상속, 부유한 여성과의 결혼 따위를 꿈꾸며 상류층의 응접실과 대도시의 거리를 누비는 '비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이었다. 사회 비평가들은 이런 댄디들의 "공포스러운 비생산성", "생산이 아닌 소비를 위한 교양"에 대해 끝없는 비난으로 일관했다 (B.쉐논)


댄디의 과시욕을 조롱한 풍자화 (1853)



그러나 보 브루멜의 몰락 이후, 댄디와 댄디즘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정적 요인은 역시 영국 사회의 산업화였다.


(이전 포스트에서 다루었듯이,) 19세기 중반, 검소와 겸손을 추구하는 지배 이념의 남성상을 "남자다운" 제품의 판매를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던 백화점과 이들을 운영하던 부르주아 자본에게 있어 귀족적 삶을 추구한 댄디의 이미지는 더없이 좋은 광고 소재일 수밖에는 없었다.


보통의 남성들에게 댄디의 외모, 재치, 상류층의 교육/혈통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대량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댄디'의 기호를 전용한 제품들은 그들로 하여금 댄디 '라이프스타일'의 겉모습을 흉내 내는 일을 가능케 해주었다. 물론 백화점과 시장에서 대량 판매되던 이러한 상품들은 과장된 화려함을 자랑했고, '댄디'를 꿈꾸는 중산층 남성들을 요란한 차림의 공작새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다.  



작가, 정치가였던 에드워드 불웨-리튼 (1803-1873)


따라서 "진짜 댄디는 그의 옷과 가구 등 모든 가정용품들을 맞춤-제작했[지만], 우아함, 화려함, 개성의 기호에 굶주려 있던 중산층을 위해서, 댄디의 소지품들은 정교하지 못한 형태로나마 모방되어 대량생산"되었고, 대량으로 구매되었다  (B. 쉐논)   


이러한 상품들의 범람 속에서 브루멜이 활약했던 리전시 시대 댄디의 절제, 매너, 재치와 같이 상품화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들은 더 이상 댄디를 규정하는 특징이 되어줄 수 없었다. 1820, 30, 40년대의 대표적 댄디였던 벤자민 디스라엘리, 도르세이 공작, 에드워드 불웨-리튼와 같은 저명한 이들이 "스스로를 과시하고픈 마음에 초조해 [하며], 의복과 매너의 현란함으로 주위의 이목을 끌고자 했"(램버트)던 남성들이었다는 불운 역시 전통적 댄디의 몰락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막달렌 칼리지 (옥스포드) 시절의 청년 오스카 와일드. Masher의 유니폼과도 같았던 화려한 체크무늬 수트를 입고 있다. (1870년대 중반)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댄디, Masher(플레이보이)는 중산층의 댄디에 대한 환상과 그들의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의류 산업이 낳은 결실이었다. 댄디가 우아함을 추구하는 상류층의 남성이었다면, Masher는 댄디를 모방하려 한 중산층-노동자 계급의 난봉꾼을 가리키는 사회의 멸시를 담은 호칭이었다.


패션 역사가 패리드 체노우네는 Masher를 런던의 백화점, 혹은 시장에서 판매하는 기성복 수트의 '기워맞춘 우아함'으로 스스로를 치장한 사회악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영국의 작가 H.G. Wells는 1890년대의 전형적 Masher의 모습을 묘사하며 그의 "턱 뼈에 상처를 낼 정도로 [높은 칼라], 모서리가 지나치게 휘어 올라간 모자, 값싼 지팡이", 계속해서 여점원을 곁눈질하는 시선을 조롱했다.



상류층 행세를 하는 Masher의 유형 중 하나인 Cad를 풍자한 삽화 (<<Best Dressed Man>>, 1892)


사회의 민주화가 시작될 무렵, 아직 남아있는 귀족의 기억이 탄생시키기 마련인 댄디(C. 보들레르)와 달리, "Chappie", "Piccadilly Johnnie", "Cad" 등으로도 불렸던 Masher는 (미국에서 처음 고안되어 영국에서 보편화된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산업화, 대량 생산, 중산층의 득세가 낳은  후기 산업 시대의 산물이었다. (B. 쉐논) 그들의 요란하게 화려한 기성 수트와 겉멋이 잔뜩 들어간 어투, 천박한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외적으로 '댄디'적 삶을 지향함을 선언했다.  


같은 모자를 쓰고 있지만, 상류층-중산층-노동계층의 출신 성분은 속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시사하는 (Masher를 조롱하는)삽화 (1898)


물론 오스카 와일드, 맥스 비얼봄, 젊은 윈스턴 처칠과 같은 댄디의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는 남성들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가 탄생시킨 수많은 종류의 상품들의 범람은 브루멜이 고안한 댄디 본래의 이상을 그 속에 잠식시키기에 충분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부르주아 문화의 획일성에 대한 반기의 상징이었던 댄디즘은 부르주아지의 현란한 상술에 의해  백화점 '남성복 코너'의 광고용 캐리커쳐로 전락하게 되었다. 전통적 댄디의 모범이 되어주었던 보 브루멜과 오스카 와일드는 부르주아의 '실용성', 검소함', 돈의 숭배를 조롱했으나, 부르주아 산업의 힘은 댄디의 전형을 '옷차림에 유별난 신경을 쓰는 남성 소비자'로 환원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말년의 보들레르는 "스스로 창조한 스펙타클"로 존재했었던 댄디의 남성상이 근대 유럽에 몰아친 동일화와 평균화의 물살 아래 사라지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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