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능의 욕망 Jan 31. 2020

새빌로 1599-1733

새빌로의 탄생 1



이번엔 영국 테일러링의 수도인 런던 새빌로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 한다. 이후의 포스트에서 이어지게 될 댄디즘에 관한 고찰 역시 새빌로와 깊게 연관되어 있기에, 이 포스트가  그에 관한 배경 지식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용이 조금 고리타분해질 테지만 난 새빌로의 탄생사를 조금 상세하게 훑어볼 계획이다. 스타일과 옷에 관한 이야기, 현존하는 새빌로 하우스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아마 다음 편에 다룰 수 있을 듯하다. 우선 새빌로의 탄생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새빌로의 헌츠맨을 나서는 그레고리 펙. 오랜 고객이었던 그레고리 펙은 헌츠맨의 자랑이다.  그의 이미지와 옷은 오늘날 헌츠맨 광고 캠페인에 활용되고 있다.



헨리 풀, 대이비 앤 선, 앤더슨 앤 쉐퍼드, 헌츠맨 등의 새빌로 하우스들은 100년이 넘는 그들의 역사 (헨리 풀과 데이비 앤 선의 경우 200년)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새빌로의 탄생사를 세밀하게 살펴보는 일은 400년을 거슬러 오르는 수고를 요한다. 리차드 워커의 The Savile Row Story를 참고하며, 초상화 조차 찾을 수 없는 인물, 로버트 베이커(Robert Baker)의 이야기에서부터 새빌로의 탄생사를 살펴보자.


원하는 지역을 하이라이트 해주는 지도를 찾기 어려운 관계로 직접 구글 맵 이미지를 캡처해 보았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소머셋, 별로 표시된 곳이 타운튼이다.


16세기 말, 소머셋(Somerset) 타운튼(Taunton)의 옷감 상인의 아들 로버트 베이커는 고약한 삼촌에게  유산을 빼앗긴 후, 그의 고장 Taunton의 테일러, 톰킨스(Tompkins) 밑에서 도제로 일하게 된다. 일정 기간의 도제 생활을 마친 후, 그는 런던에서 그의 기술을 시험해보기로 결심한다.


오늘의 런던시 지도, 붉은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구간을 아래 지도에 펼쳐 보았다. 이곳이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줄 메이페어의 동쪽이다.

  

로버트 베이커가 도제로 일했던 가게와 그가 직접 열게 되는 가게가 자리했던 Strand Street의 시작과 끝을 표시해 두었다. 2020년 오늘의 지도다.


런던에 도착한 그는 스트랜드가(지도 참고)의 테일러 하우스에서 장인(journeyman)으로 취직하고, (그가 에스파냐 무적함대와의 해전(1588), 에스파냐 카디즈 정복 전쟁(1596)에 참전했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1599년에 홀로서기를 결심하게 된다.


같은 해, 타운튼의 집을 매각한 베이커는 스트랜드가에 작은 테일러 샵을 열게 된다. 가게의 주요 상품은 귀족들이 즐겨 착용하던 피카딜리(Pickadilly)라는 이름의 커다란 칼라였다.


당시 유행하던 러프(Ruff) 장식 (1581)


피카딜리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유행했던 목 주위를 감싸는 커다란 칼라를 가리킨다. 르네상스 복식에서 유래한 이 러프(Ruff) 칼라는 나풀거리는 셔츠 칼라로 처음 유행하기 시작하여, 세기를 거치며 점점 더 과장된 형태로 진화했고, 베이커가 테일러로 활동하던 시기의 런던에는 풀을 먹이거나, 철사를 사용해서 그 부피를 지탱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칼라가 유행하고 있었다. 피카딜리(Pickadilly)의 어원 역시 스페인어로 창을 의미하는 pica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로버트 베이커는 철사를 활용하는 커다란 칼라들을 제작-판매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피카딜리의 제작-판매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베이커는 17세기 초기 런던에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시대(1558-1603)의 러프(Ruff) 칼라,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사치품의 유행은 끝이 나게 되고,  로버트 베이커는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게 된다.


(피카딜리에 대해 첨언하자면, 풀을 잔뜩 먹이거나 철사로 지탱하는 커다란 칼라가 착용자의

활동성을 고려했을 리 없었다. 이와 같은 사치품의 착용은 그것을 관리하고 세탁할 하인들의 존재를 암시했고, 착용자가 노동하지 않는 귀족임을 나타냈다.)


상류층을 위한 쇼핑 아케이드, 뉴 익스체인지가 1609년 4월에 베이커의 가게 근방(오늘날에도 건재하는 1602년 개점한 런던의 펍, Seven Stars 옆 건물 자리)에 문을 연 사건 역시 베이커의 사업적 성공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1613년에는 국왕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을 위한 새틴 칼라의 제작이 베이커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이 계기로 베이커의 가게는 왕족의 세례를 받은 테일러 하우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쇼핑 아케이드 중 하나였던 뉴 익스체인지(New Exchange)


매출의 성장과 함께 찾아온 금전적 여유에 힘입어 그는 그의 가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공터(오늘날의 Lyric Theatre에 해당) 1.4 에이커를 매입하고, 그곳에 그의 저택을 짓기로 결심한다. 정원과 외양간까지 갖춘 그의 대저택은 무일푼으로 상경한 시골 테일러에서 거부로 거듭난 로버트 베이커의 이름을 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고, 그들은 피카딜 사업 덕택에 거부가 된 그의 저택을 피카딜리 홀(Pickadilly Hall)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베이커 본인은 기꺼워하지 않았던 이 별칭은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 포르투갈가(Portugal Street)의 이름 역시 피카딜리가로 뒤바뀌게 되었다. 오늘날 런던의 대표적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피카딜리 서커스의 어원은 로버트 베이커가 판매하던 피카딜리 칼라였던 것이다.(Pickadilly에서 Piccadilly로 스펠링이 바뀌게 되는 시기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다).


1967년의 피카딜리 서커스


로버트 베이커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피카딜리 주변 런던 서부의 공터들을 사들였고 그가 매입한 부지들은 오늘날의 팔 말(Pall Mall)가와 옥스포드가 사이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자수성가한 부동산 재벌답게 그는 이 지역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에 전력을 다했지만, 1623년 갑작스레 사망하게 되고,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사유지는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소유권 분쟁 속에서 가리가리 찢겨나가고 말았다.


오늘날의 옥스포드가에서 팔말가 사이의 구간을 대략 표시해 보았다. 17세기 초, 로버트 베이커는 공터에 불과했던 이 지역의 토지들을 대량 매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족은 그의 선견지명의 덕을 보지는 못했지만, 런던시 서부의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한 로버트 베이커의 판단은 옳았다. 1666년의 런던 대화제, 1665-6년의 대역병은 런던 시민의 대규모 서진으로 이어졌고, 하룻밤 사이에 난민이 된 시민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런던 서부에서 찾게 되었다. (첫 번째 포스트에서 다뤘듯이 찰스 2세가 쓰리 피스 수트를 귀족의 유니폼으로 규정하는 칙령을 선포한 것 역시 1666년이다. 검소한 복식 문화의 확립을 표방한 이 개혁안은 화제와 역병을 신이 내린 역경으로 여긴 청교도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1666년의 런던 대화제, 작가 미상의 작품이다.


표시된 곳이 당시의 런던시의 중심, 아래 지도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당시 런던 중심가의 80%를 재로 만들어버린 1666년 런던 대화제의 피해 지역




물론 대화제 이전부터 로버트 베이커의 '사재기'와 그 뒤를 따른 가족/가문 사이의 법적 분쟁은 이 지역으로 수많은 개발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당장의 수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이들은 피카딜리 주변 지역을 일관성 없이 대강 지은 빌딩들로 뒤덮기 시작했고, 건설 계획 역시 기존의 규정을 위반하기 일쑤였다.


 

제1대 벌링턴 백작 (The first Earl of Burlington) (1612-1698)



다행히 대화제와 역병이라는 악재는 피카딜리와 그 주변 지역을 귀족에게 각광받는 고가의 토지로 탈바꿈시켰고, 당시 피카딜리 지역에 만연했던 혼잡을 타개해줄 인물의 등장을 가능케 해주었다. 오늘날 메이페어의 동쪽의 끝, 장차 새빌로가 자리하게 될 지역에 처음으로 대저택 공사를 시작한 인물은 벌링턴 백작이었다. (오늘날 영국 수트 애호가들에게 벌링턴 백작의 이름은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2012년 새빌로를 떠나 한 블록 남쪽으로 이주한 앤더슨 앤 쉐퍼드(Anderson & Sheppard)의 주소는 32 올드 벌링튼가(Old Burlington Street)다.)


오늘날 로얄 아카데미 건물로 쓰이고 있는 벌링턴 하우스의 위치


오늘의 메이페어를 표시해 보았다. 새빌로가 메이페어 동쪽 끝 즈음에 자리함을 확인할 수 있다.



1667년 공사는 시작되었고, 5000 파운드의 경비가 소요된 저택 건설은 1668년 완성됐다. 벌링턴 백작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새 저택으로 입주했을 테지만, 런던 대화제 당시의 새빌로 근방은, 개발자들이 지어놓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들어선 농촌의 전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주변 이웃들이 일으키는 악취와 소란이 못마땅했던 벌링턴 백작은 저택 북쪽의 토지들을 사들이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해서 오늘의 새빌로를 포함한 메이페어 동쪽 끝의 대부분의 토지가 그의 사유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대표적 새빌로 테일러링 하우스들을 표시해 주고 있는 일러스트 지도. 앤더슨 앤 쉐퍼드는 올드 벌링톤가에 자리한다.




벌링턴 하우스의 주변 환경에 대한 걱정이 컸던 그는 저택 앞 코크가와 새빌가(Cork Street and Saville Street)가 마구간과 변소로 뒤덮이는 일을 염려했다. 따라서 그는 엄격한 규정을 토지 대여 계약서에 추가시켰고, 이는 19세기까지 새빌로의 서쪽, 올드 벌링턴 쪽의 거리(윗 지도 Richard Anderson과 Richard James이 자리한 쪽)가 그 어떤 건축물도 들어서지 않은 채 19세기 초까지 공터로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7년부터 벌링턴 하우스는 로얄 아카데미가 임대하고 있다. (1874년의 그림)



1698년, 제1대 벌링턴 백작은 사망하게 되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들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 벌링턴 하우스는 우리의 이야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3대 벌링턴 백작, 리차드 보일(1694-1753)의 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제3대 벌링턴 백작 (The third Earl of Burlington) (1694-1753)



리처드 보일은 이탈리아로 떠난 그랜드 투어(상류층 남성이 성인이 되었을 때,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등지를 여행하는 문화 답습의 관례)에서 이탈리안 건축에 완벽하게 매료되었던 젊은 심미가(aesthete)였다. 그는 귀국 후, 자신이 보고 온 베네치아 건축의 팔라딘 양식을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땅에 재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 그는 무엇보다 그가 런던 건축사에 남긴 공헌으로 기억되고 있다.


 

토마스 호스머 쉐퍼드가 그린 벌링턴 하우스 (1831)


그는 팔라딘 양식에 대한 그의 열정을 공유하는 건축가들(윌리엄 켄트, 콜린 캠벨, 지아꼬모 레오니 등)과 함께 벌링턴 하우스를 재건축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소도시의 모델을 본떠 저택 근방의 재개발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저택 주변의 거리들을 닦아 나갔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코크가, 클리포드가, 보일가(Cork Street, Clifford Street, Boyle Street)등의 이름은 모두 그의 가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733년, 리처드 보일의 아내 '도로시 새빌'의 이름을 딴 새빌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벌링턴 백작의 재건축 계획은 천문학적인 지출을 의미했고, 그는 죽기 전까지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덕분에 새빌로를 포함한 벌링턴 하우스 주변의 개발은 팔라딘 양식을 추구한 십 수명의 건축가들이 제각각의 건물들을 지어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를 재현하고자 했던 기획의 큰 틀은 지켜지고 있었다. 벌링턴 하우스 근방의 거리들은 매 교차로마다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 그 끝을 장식하고 있었고, 동시에 거리 전체의 크기는 넓게 유지되었다. (건축가 레오니는 1727년에 '행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건물을 발견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리차드 워커)). 벌링턴 하우스와 그 주변 지역은 메이페어의 나머지 지역들과는 확연하게 차별화된 주변 환경을 자랑하게 되었다.



요하네스 킵이 스케치한 18세기 벌링턴 하우스와 주변 지역의 모습 (1908): (Getty Images)



백작과 그의 건축가 친구들의 열정에 힘입어 18세기의 벌링턴 하우스 근방은 최고가의 주택들에서 저명한 귀족들의 파티가 끊이지 않는 런던의 명소로 거듭나게 되었고, 백작 가족들의 이름을 딴 각각의 거리에 입주한 귀족들의 대부분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여생을 보낼 정도로 매력적인 아우라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입주한 주민들의 3분의 1이 당시 발행되던 건축 출판물을 구독하는 유행에 민감한 귀족들이었다는 기록 또한 당시 이 지역이 누리던 인기가 리처드 보일의 건축에 대한 열정이 이룬 성과라는 것을 알려준다.



벌링턴 하우스 주변 지역의 인기는 18세기를 통틀어 새빌로의 부동산이 상류층에 의해서 독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33년의 새빌가 탄생 이후, 테일러를 포함한 그 어떤 상인도 그곳에 가게를 마련하는 일을 꿈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세기의 새빌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멋쟁이, 댄디, 플레이보이, 그리고 소비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