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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Feb 06. 2020

전쟁과 댄디즘

새빌로의 탄생 2

"피카딜리로부터 1/2 마일 반경 안에서 재단된 수트를 입지 않은 남성은 확신을 가지고 여성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리처드 보일이 건설한 런던 속 작은 이탈리아(벌링턴 영지)는 건축물들이 조성하는 특유의 정취와 버킹햄 궁전과 근접한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18세기 전반에 걸쳐 귀족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벌링턴 영지 내 작은 거리 새빌로는 귀족과 젠트리 계급의 저택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고, 테일러들은 미래의 보금자리에 아직 그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테일러들의 거리로 명성을 알리게 되는 새빌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19세기 런던에 찾아온 사회적 변화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이번 포스트는 19세기 새빌로의 이야기를 다루게 된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바이런은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세 인물은 나폴레옹, 보 브루멜, 그리고 자신이라 주장했다.(1800-01)


Savile Row의 작가 제임스 셔우드는 19세기 초기 테일러링 업계가 이루어낸 성장에 대해 "국가가 전쟁 중일 때 새빌로는 호황을 맞는 듯하다"라고 평한다. 물론 매번 들어맞았던 공식은 아니지만, 새빌로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영국 현대사를 수놓은 전쟁들은 테일러링 하우스들에게 결정적인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중 가장 중요했던 전쟁은 단연 프랑스혁명 전쟁이었다. 1794년에 발발하여 1815년 워털루 전투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프랑스와의 전쟁은 영국 의복 산업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호재로 작용했다.


전쟁이 불러온 군복 수요의 증가는 폭발적이었다. 수십만 병사들의 군복을 생산해야 했던 영국 내 밀리터리-테일러들을 위한 일감은 끊일 줄 몰랐다(군복 생산을 주 업무로 삼던 영국 내 밀리터리-테일러샵의 수는 마치 오늘날의 맥도널드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제임스 셔우드)). 또한 장교로 참전한 귀족들의 제복을 책임져야 했던 런던 웨스트엔드의 최고급 테일러들에게 전쟁은 저명한 인사들을 고객으로 삼을 기회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윌리엄 헤이샴 오버렌드(1851-1898)가 그린 트라팔가의 넬슨 제독과 로열 해군


최고급 제복을 생산하고자 했던 영국 테일러들에게 있어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달리 자국의 귀족 계급이 대체로 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새빌로를 대표하는 하우스들 중 상당수는 이 시기에 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들은 장교들의 맞춤 제복을 생산하는 일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며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 새빌로 1번지에 자리한 테일러링 하우스 기브스 앤 호크스(Gieves & Hawkes)의 창립자 중 하나(Gieves의 창립자)인 어거스투스 메레디스 (Augustus Meredith)는 1785년 항구도시 포츠머스에 그의 가게를 열었고, 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 해군 군복을 생산하는 일을 통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의 유니폼이 처음으로 획일화된 것이 이 시기였다.) 당시 해군의 규모는 13만에 이르고 있었다.


(넬슨 제독 역시 메레디스의 고객이었다. 그가 넬슨을 위해 제작한 반짝이는 금몰이 가미된 화려한 군복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을 지나치게 적의 눈에 띄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리처드 워커))


해군 제복 차림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 (1758-1805)


기브스 앤 호크스의 또 다른 창업자 토마스 호크스 (호크스의 창립자) 역시 프랑스혁명 전쟁 중 육군 장교 제복을 생산하는 일을 통해 사업을 크게 확장시키고 있었고(그는 이 시기에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3세와 왕세자(훗날의 조지 4세)를 위한 옷을 제작하게 된다.), 1815년 엘바에서 탈출한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육군 제복 상의(Tunic) 제작에 재능을 보인 계기로 테일러로 거듭나게 된 헨리 풀의 창립자 제임스 풀의 성공 신화 역시 전쟁이 테일러들에게 제공한 기회의 좋은 예시였다. (언급된 하우스들보다는 조금 늦게 그 문을 연 오늘날 새빌로 10가에 자리한 Dege & Skinner 역시 영국 육군과 해군의 제복을 생산하던 밀리터리-테일러로 1865년 처음 개점했다)


오늘날 헨리 풀 새빌로 스토어의 전경


양모로 제작된 수트가 유럽 남성의 유니폼으로 자리 잡게 된 일 역시 프랑스와의 전쟁이 가속화시킨 변화 중 하나였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수입품이었던 실크의 가격은 폭등했고, 1806년 나폴레옹이 선포한 대륙 봉쇄령은 프랑스산 벨벳과 실크의 수입을 중단시켰다(면 소재 실 역시 이 시기에 처음 발명되었다(Richard Walker)).


실크의 고갈은 자연스레 양모 산업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815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영국은 유럽 내 최강국으로 부상했고, 상승한 국가적 위상과 함께 영국산 양모로 만들어진 영국식 수트는 자연스레 유럽 복식 문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1824년 비엔나의 베토벤은 그의 9번 심포니의 첫 공연에 입을 검은 코트가 없음을 불평하게 된다).  



영국산 양모를 다루는 일에 가장 익숙한 테일러들이 런던의 테일러들이었음은 당연했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비스포크 테일러들은 전쟁의 종식과 함께 유럽 최고의 남성복을 생산하는 테일러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제 런던은 명실상부한 남성 복식의 수도로 군림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런던은 이탈리아 나폴리와 함께 여전히 세계 테일러링의 중심지다)



조지 크룩생크(George Cruikshank)(1792-1878)가 그린 테일러 샵에 방문한 젠트리의 캐리커쳐 (1820)


 

런던 웨스트엔드/메이페어의 유명 테일러들에게 있어 19세기가 가져온 변화 중 전쟁 다음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은 보 브루멜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형식의 댄디즘이었다.(댄디즘에 관한 별도의 포스트 역시 계속해서 이어갈 예정이다) 브루멜이 유행시킨 장식이 배제된 절제된 멋은 코트, 바지, 부츠, 모자, 장갑의 완벽한 핏을 요구했고, 이는 댄디가 착용하는 모든 제품이 맞춤-제작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브루멜의 전기 작가 제시 대령은 브루멜이 불필요한 치장을 거부한 것은 그가 자신의 우아함에 쏟아진 찬사를 그의 테일러와 나누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이어, 슈바이처, 데이비슨 등 브루멜의 옷을 제작했던 테일러들의 이름은 브루멜을 추종하던 이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훗날 왕위에 오르게 되는 섭정 왕세자(조지 4세) 역시 브루멜을 따라 마이어에게 그의 수트를 맡기고 있었기에, 브루멜의 추종자들이 마이어와 슈바이처를 찾았던 일은 당연했다. 마이어의 가게는 체스터필드가에 머물던 브루멜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했고, 마이어는 종종 브루멜의 집을 방문하여 주문을 받고, 체촌을 진행했다


브루멜이 거주하던 체스터필드가 4번지와 그의 테일러 마이어와 슈바이처, 데이비슨의 테일러 하우스들. 브루멜의 테일러들이 새빌로 근방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일어난 방직 공정의 산업화 역시 유명 테일러들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옷감 생산의 산업화는 맞춤복의 제작에 있어서 훨씬 더 폭넓은 선택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늘어난 선택지는 상류층 남성들이 더 많은 의복을 소비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791년 영국을 방문한 어느 독일인은 영국 사회를 평하며"이전에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남성도 일 년에 한 벌의 수트를 구매하는 일로 충분히 격식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반 남성마저도 그의 사회적 입지를 지켜내기 위해 일 년에 세네 벌의 옷을 구매해야 한다"라고 고찰했다(리처드 워커).


따라서 웨스트엔드의 유명 테일러들은 갑자기 늘어난 선택지 앞에서 혼란을 겪게 된 상류층 고객들을 브루멜과 왕세자가 선호하는 옷감들로 안내해야 했다(슈바이처는 왕세자와 브루멜 중 브루멜의 선택을 따를 것을 고객들에게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완벽한 핏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 외에도 올바른 취향을 갖추어야 했던 19세기의 최고급 테일러는 오늘날 새빌로 테일러의 원형이었다. 전쟁이 불러온 호황과 새로운 유행을 주도한 댄디 컬트는 훌륭한 테일러가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많은 수입을 올리는 일을 가능케 해주었다.


따라서 브루멜의 수트와 같은 아름다운 옷을 제작할 수 있는 실력 있는 테일러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속적으로 격상되고 있었다. 새로이 얻은 부와 명성은 그들이 새빌로 지역의 부동산으로 침투하는 일을 가능케 했고, 브루멜의 테일러였던 마이어, 슈바이처, 데이비슨의 가게가 자리하던 코크가와 콘두이트가는 모두 오늘날의 새빌로와 매우 근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에게는 더없이 까다로운 고객이었던 상류층 남성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요구됐다.


헨리 풀 공방 1944


다행히 당시 런던의 장인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자부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런던은 장인들의 아테네라 불릴 정도로 장인들의 기술과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을 경험하고 있었다.  17-8세기의 긴 베스트와 긴 코트는 가미된 화려한 장식품에 비해 재단에 있어 별다른 특수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브루멜이 고안한  정교한 실루엣은 실력 있는 재단사의 숙련된 재단 기술을 필요로 했고, '완벽한 코트'의 구현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 속에서 갖가지 재단 테크닉이 개발되고 있었다. (줄자가 처음 발명된 것도 이 시기였다) 테일러들이 처음으로 재단 매뉴얼을 출판하기 시작한 것도 19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1840년, 오직 3개의 솔개만으로 재단되던 18세기식의 코트가 아닌 총 6등분 된 옷감이 하나의 코트를 구성하는 재단 시스템이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 재단 방식은 수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영국 수트의 코트는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앞판, 뒤판, 사이드 바디로 구분되는 3등분, 총 6 등분된 옷감으로 구성된다. 사이드 바디 없이 4등분 된 옷감으로 수트 자켓을 재단하는 대다수 이탈리아 사르토리아와의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19세기 중반의 리전트가


벌링턴 영지 내 부동산 상황 역시 19세기와 함께 변화를 맞고 있었다. 1820년, 건축가 존 내쉬가 기획한 상업용 거리 리전트 거리가 새빌가 동쪽을 가로지르는 위치에 개설되었다. 섭정으로 군림하던 조지 4세의 직위에서 그 이름을 딴 리전트가(Regent Street) 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1층의 상점, 2층의 점원용 숙소, 3층의 고급 객실로 구성되었고, 귀족들의 여가와 쇼핑을 위해 계획된 이곳에는 오직 화려한 쇼윈도를 갖춘 궁전과도 같은 가게만이 입점을 허락받고 있었다. (정육점, 청과물 상점, 주점, 모든 가정용 상품점들이 금지되었다)


소호와 메이페어의 경계선에 위치한 리전트가를 표시해 두었다. 메이페어의 동쪽 끝에는 새빌로가 자리한다.


리전트가의 탄생은 상류층을 접하는 고급 테일러 샵이 즐비한 '새빌로'의 동쪽 경계선을 확립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소호(Soho)로 알려진 리전트가의 동쪽 지역은 18세기부터 새빌로 테일러의 옷을 외부 제작하는 재봉사들의 공방이 자리하던 지역이었다. 이제 상류층과 그들을 위한 제품을 제작하는 고급 테일러들이 자리하는 서쪽의 메이페어와 새빌로 테일러들의 외주 노동자들, 전당포, 값싼 가정용 제품의 상점들이 있는 소호 사이에 확실한 경계선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구분이 오늘날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같은 재봉사가 제작한 옷이라 하더라도 새빌로 테일러의 수트의 가격은 소호 테일러의 수트보다 두 배 이상인 경우가 평균적이다. )



메이페어의 새빌로 지역에 가게를 내는 일은 테일러로서 그가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이들은 도시 테일러(City tailor)라 불리는 런던 내 타 지역 재단사/재봉사들과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게 되었다. 격상된 인지도는 새빌로 태일러들이 더 이상 중산층 고객을 두고 범람하는 기성복과 경쟁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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