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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Feb 13. 2020

노동의 착취

새빌로의 탄생 3

지난 포스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9세기 초기의 런던은 '장인들의 아테네'라 불렸다. 전쟁이 불러온 남성복 수요의 급성장과 19세기 댄디즘의 유행이 주도한 테일러링에 대한 인식의 향상은 그들의 입지를 단단히 해주고 있었다. 산업화가 탄생시킨 각종 기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옷 생산의 많은 공정은 인간의 손을 필요로 했고, 웨스트 엔드/메이페어의 고급 테일러 하우스들과 그 밖의 '시티 테일러'들 또한 유래 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만 높은 수요 이상으로 런던을 '장인들의 아테네'로 거듭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강력했던 런던 테일러 조합의 존재였다. 런던 테일러링 업계의 장인(Journeyman) 조합은 1417년 이전부터 '클럽'의 형태로 존재했고, 18세기에는 런던 내 그 어떤 상인 조합도 이들과 조직력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런던 테일러 조합은 정부의 모든 임금 인하 정책을 성공적으로 막아서며 19세기 초기까지 테일러들의 권익을 지켜내고 있었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테일러 공방.테일러들은 타 직종 상인 조합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19세기 초 런던 테일러링 업계에 통용되던 기본 근로 규정은 르네상스 시대의 관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테일러링 하우스의 마스터(고용주)는 7년의 정식 도제 수업을 받은 테일러만을 장인'(journeyman)으로 고용할 수 있었고, 도제 수업을 받지 않은 그 어떤  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7년의 도제수업에 관련한 규정은 더없이 엄격했고, 도제와 마스터 쌍방의 책임과 권리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19세기 초반 테일러 도제 계약서는 도제에게

1. 마스터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 (세 번 이상 마스터의 지적을 받은 도제는 그의 가게를 떠나야 한다)

2. 마스터의 비밀들을 발설하지 않을 것

3. 마스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

4.  계약 기간 동안 간음을 범하거나 혼인을 올리지 않을 것

5. 도박을 즐기거나 극장, 주점 등에 드나들지 않을 것

이 요구되고 있음을 명시했다.


반면 마스터는 7년의 계약 기간 동안 도제에게 필요한 숙식을 보장해주어야 했다. 이와 같은 규정은 집이 일터이고 일터가 집이며, 도제는 가족의 일원과 같았던 전통적 환경 내에서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마스터-도제의 관계는 17세기부터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테일러 샵 운영의 대표적 모델일 수 없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모로니의 "테일러" "Il Sarto" (1570)


전술했듯이 19세기 초 발발한 나폴레옹과의 전쟁은 노동 공급 부족 현상을 불러왔고, 이는 자연스레 테일러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1813년 테일러들의 임금은 역대 최고치에 이르고 있었고, 테일러 노동조합은 다섯 명의 간부의 지도 아래 강한 단결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들의 '좋은 시절'을 가능케한 프랑스혁명 전쟁은 동시에 그 시절의 끝을  예고하고 있었다. 많은 테일러 하우스들의 마스터들, 특히 높은 임금을 부담스럽게 여겼던 작은 가게의 경영자들은 테일러 노동조합에 반감을 품었고, 밀려드는 일감을 감당하기 위해 외부 노동을 활용하여 옷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부 노동자들은 장인 인증을 받지 못했기에 낮은 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었고, (많은 경우 이들은 도제가 준수해야 했던 엄격한 규율을 지키지 못하고, 세 번 이상 지적을 받아 마스터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이들이었다) 이들 중 이민자, 여성, 아동 등은 그보다도 더 낮은 임금에 고용되어 의복 제작에 투입됐다. 이러한 불법 행위는 외주 공방의 비정규 테일러들 ('dungs'라 불렸다)과 마스터의 가게 내에서 근무하던 정규 테일러들(flints) 사이에 균열을 일으켰다.


전형적인 19세기 런던의 하청 공방의 모습, 형편 없이 낮은 임금으로 고용된 여성과 아동 노동이 런던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정규직 테일러들의 정식 임금은 1813년의 상한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테일러 하우스들의 외주 노동 활용 정책은 그들의 일감을 감소시켰고, 실제 평균 임금은 하락세를 맞이할 수밖에는 없었다.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노동조합 역시 1826년 찾아온 불황 속에서 조합 자금이 고갈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1820년대와 30년 대에 펼쳤던 여성 노동과 임금 하락을 규탄하기 위한 파업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1833년 9월, 경기 회복과 함께 테일러들은 '런던 직공 테일러' 조합을 개설하며 반격을 노렸다. 새로운 조합은 조합원들 내 그 어떤 구분도 두지 않았고, 런던시 테일러 업계 전체를 대표하는 조합임을 자처했다. 그들의 목표는 마스터들이 자행하고 있던 노동의 분업화와 외주 노동 활용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의복 제작을 가게 내의 정규 장인들의 손에만 맡기는 본래의 규정을 마스터들에게 강요하고자 했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테일러 공방. 1913


1834년, 런던 직공 테일러 조합은 다른 직종의 상인 조합들과 '통합 상인 조합'을 개설하며 더 급진적인 개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논했던 내용 중에는, '노동자를 위한 은행 개설', '고용주 제도의 폐지와 상업 위원회를 통한 경영 구현'  '화폐의 폐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미국-유럽 정부들과의 협상' 등의 개혁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영국 정부는 노동조합의 이상과 극렬히 대립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오직 도제 기간을 마친 장인만을 고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1814년에 폐지되었고, 1834년 4월 도체스터 시의 농장 노동자들 6명이 노동조합을 조직했다는 죄명으로 국외로 추방당했다.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도 런던 테일러 조합은 1834년 4월 25일, 파업에 돌입했다. 약 9000에서 13000명의 조합원들로 구성된 이들은 마스터들에게 요구사항들을 전달했다. 마스터들의 대부분은 웨스트-엔드/메이페어의 고급 비스포크 하우스의 경영자들이었다.  


4월 28일 마스터들은 세인트 제임스의 작은 별채에 모여 그들만의 협의안에 도달했고, 그들은 조합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파업 파괴자/외주 노동자(strike-breakers)들을 고용하기로 결의했다.


장인들의 노동 투쟁은 영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1860년 미국 마사추세츠 주 린에서 시작된 신발 장인들의 파업을 묘사한 그림이다


조합 위원회는 협동 작업장을 개설하며 장기적 투쟁을 꾀했다. 그러나 곧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2주 만에 조합원들을 위한 파업 수당을 삭감해야 했다. 시티-테일러들은 점차적으로 직장으로 귀환하기 시작했고, 오직 웨스트-엔드/메이페어의 비스포크 테일러들만이 투쟁을 지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금난을 견디지 못한 잔여 조합원들 역시 5월 14일에 고용주들에게 협상을 제시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5월 20일, 조합원들은 그들의 운영비가 횡령되었고 협동 작업장에 도둑이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전의를 상실한 테일러들은 이전의 조건으로 직장으로 복귀하는 일을 제안했다. 그러나 마스터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영원히 단념하는 서약을 복귀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6월 4일에는 오직 5000명의 테일러들만이 여전히 파업을 지속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 역시 마스터들이 내놓은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며 점진적으로 일터로 복귀하게 됐다. 테일러 조합의 패배는 영국 노동조합의 운명이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건설 노동조합이 유사한 방식으로 와해되면서 영국 내 상인 조합은 당분간 완벽하게 일소당하게 됐다.


이후 30년 동안 테일러 하우스들은 완벽히 무력해진 장인들을 상대로 새로운 요구사항들을 지속적으로 관철시키면서 가게의 규모를 증식시켰다. 1849년 웨스트엔드 비스포크 하우스 테일러의 임금은 1813년의 절반 정도로 하락하였고, 심지어 외주 노동자들의 임금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19세기 중반 스웨트샵의 캐리커쳐. 반-유대인 정서가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1845)


이러한 상황에서 테일러 업계의 추세는 양극화로 흘러갈 수밖에는 없었다. 1813년에서 1849년 사이 숙련된 장인들에게 평균 임금 이상을 지불할 수 있는 웨스트-엔드의 고급 비스포크 하우스들의 수는 72점에서 60점 정도로 줄어들었고, 저렴한 가격의 평균 이하의 품질의 옷을 판매하는 나머지 테일러 하우스들의 숫자는 172점에서 344점으로 정확히 두 배 늘어나게 되었다.


1834년 이후, 노동조합이 유명무실해진 런던의 테일러 하우스들은 스웨팅(Sweating)이라 불리는 외주 노동 착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 동남아, 인도 등지의 운동화 공장을 연상시키는 단어인 스웨트샵(Sweatshop)의 프로토 타입은 웨스트엔드의 비스포크 하우스들에 옷을 제공하던 런던의 외주-공방이었다.


19세기 중후반 런던 전역에서 자행되던 스웨팅은 웨스트엔드의 고급 비스포크 하우스들에게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예상 가능하듯이 새빌로 하우스의 하청을 통해 발생한 수익은 대부분 중개인들의 주머니로 떨어졌고, 외주 노동자들은 더없이 참혹한 환경 아래에서 노동을 지속할 뿐이었다.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19세기 중반 헨리 풀-새빌로의 전경


1857년의 기록은 당시 최대 규모의 테일러 하우스, 헨리 풀이 500명 이상의 테일러를 고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중 가게 내에서 근무하는 테일러들은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당시 헨리 풀은 3단계 임금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새빌로 헨리 풀 가게 내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임금이었고, 두 번째로는 소호에 위치한 헨리 풀의 공방 인력을 위한 임금, 마지막으로 하청 공방, 또는 자택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위한 임금제가 따로 존재했다.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와 유태인 이민자들의 증가는 분업화와 여성 노동이 주를 이루는 스웨팅 산업의 지속적 성장을 불러왔다. 메이페어의 최고급 비스포크 하우스들은 런던 동부에 그들의 공방을 마련했고, 다른 가게들 역시 하청 업자를 통해 값싼 노동력을 수급했다. 심지어 장인들이 그들만의 스웨트샵을 여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테일러들이 낮은 임금과 형편없는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항구의 단순 노동을 찾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19세기 말 런던 이스트-엔드의 스웨트샵


무섭게 퍼져버린 스웨팅과 그것이 야기하는 부작용들은 국가적 문제로 부상했고, 1888년 영국 상원에서는 '스웨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노동 착취에 관한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이어진 탐사는 런던 내 대부분의 고급 비스포크 하우스들이 스웨팅 노동을 활용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켰고, 이윤 추구를 위한 스웨팅의 남용이 의류 업계의 상황을 지나치게 악화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1888년 런던 내 대부분의 테일러에게는 스웨팅을  활용하는 일과 스스로 스웨팅에 투입되는 일의 두 가지 선택지만이 허락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쏟아지는 규탄에 대한 대응으로 마스터들은 미국에서 자행되는 훨씬 더 심각한 노동 착취를 지적하곤 했다 사진은 뉴욕의 스웨트샵이다. (1887)


청문회가 내린 결론은 직접적인 조치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상원의 스웨팅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을 이끌어내었고, 이는 테일러들을 고무시켰다. 1891년, 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노동조합을 구성하며 공동 파업에 들어가게 되었다(이 투쟁을 위해 그들은 그동안 그들을 분열시켰던 인종 차별, 성 차별을 극복하게 된다). 이번에는 마스터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새빌로 테일러들은 노동 환경의 개선과 균일화된 임금 제도의 확립을 요구했다. 조합원들은 새빌로의 뒷골목인 헤돈(Heddon)가에 그들의 본부를 마련했고, 마스터들은 헨리 풀 가게 내에서 그들만의 대책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하워드 컨디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새빌로 최대 하우스였던 헨리 풀의 마스터 하워드 컨디(현재 헨리 풀을 운영하고 있는 사이먼 컨디의 증조부)의 주도 아래 마스터들은 노동자들과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테일러들의 요구에 협조적이었던 컨디의 활약에 힘입어 1891년 6월 새빌로의 마스터들은 노동 시간표 시스템과 획일화된 임금 제도의 확립에 동의하게 되고, 7월 4일 런던 테일러 업계 전반에 노동 시간표 시스템이 새로운 노동 임금제로 발효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스웨팅과 외주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마스터들은 계속해서 외주 노동을 활용했고, 1892년 8월, 노동자들은 또 한 번의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오늘날 헨리 풀을 운영하고 있는 앵거스 컨디와 사뮤엘 컨디




1892년 9월 11일 로이드 위클리 런던(Lloyd's Weekly London) 신문에는 '열병의 소굴에서 제작된 요크 공작의 바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된다. 기자는 스웨트 샵의 끔찍한 노동 환경에서 제작된 새빌로의 고가 비스포크 수트들이 귀족 고객들에게 전염병을 옮기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기사에 따르면 스웨트샵에서 제작된 여성 승마복이 로버트 필 경의 딸의 사망에 책임이 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요절한 맏손자 클레런스 공작(Duke of Clarence)을 죽음으로 이끈 것 역시 감염된 그의 더블-브레스트 자켓이었다(그는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인플루엔자 독감으로 사망했다). 또한 기사는 클레런스 공작의 동생인 왕세손 요크 공작의 바지 역시 열병의 소굴에서 제작되고 있음을 보도했다.


기사는 엄청난 스캔들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가 그린 19세기 중반 글로체스터 거리의 중고 의류 시장



저명한 귀족들의 사망 원인이 사실 '감염된' 옷으로부터 전염된 질병이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런던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어진 글래스고의 상인 의회에서 스웨트샵 노동자 패니 힉스(Fanny Hicks)는  그녀가 새빌로의 하청 업자를 위해 일하고 있으며, 요크 공작 (Duke of York)의 바지를 만드는 방에서 두 아이가 열병에 걸렸으며, 한 아이가 사망했음을 증언했다. 그녀는 왕세자의 웨이스트 코트들, 그리고 코너트 공작(Duke of Connaught)과 사망한 클레런스 공작의 바지 18벌 역시 같은 방 안에서 제작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만약 귀족들의 옷이 이러한 병균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재봉된다면, 일반인들의 옷은 어디서 만들어지는지는 상상할 수 없다고 첨언했다.


요절하지 않았다면 에드워드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클래런스 공작 (1864-1892)


공포는 상류층 사회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왕세자(훗날의 에드워드 7세이자 클레런스 공작과 요크 공작의 아버지/ 빅토리아 여왕의 맏아들)가 그의 테일러를 소환해 그의 의복의 출처를 확인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기자들은 연일 소호의 스웨트샵들로 특파되어 그곳의 형편없는 노동 환경을 보도하였다. 패니 힉스는 그녀에게 분할된 일감들의 출처가 새빌로 테일러 데이비 앤 선(Davies & Sons)(이들은 오늘날에도 새빌로를 지키고 있고, 오늘날까지 이 혐의를 부인한다)임을 밝혔고, 그들은 혐의를 극구 부인했지만, 스웨트샵 외주 노동을 활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스캔들의 주인공, 감염된(?) 바지를 오더 한 요크 공작, 훗날의 영국 국왕 조지 5세이다.


"리전트가에서 단 2분 거리에 위치하는 사악하고 어두우며 더러운 굴속에서 제작된 옷들이 유럽과 미국의 댄디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다"라고 기사들은 연일 폭로했다. 반대로 노동자들과 조합 지도자들은 이 스캔들을 업계의 노동 착취의 실상을 고발하는 데 십분 활용했다. 그들은 스웨트샵의 노동자들의 임금이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며, 사용되는 실 조차도 직접 사야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극심한 노동을 지속하고 있음을 호소했다.


새빌로의 테일러 하우스들을 상대로 언론의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고,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선 새빌로의 마스터들은 모두 노동을 착취하는 악덕 고용주로 묘사되고 있었다.



1909년 뉴욕에서 열린 메이데이/노동자의 날 퍼레이드


그러나 신문 잡지를 연이어 달군 스캔들과 이어진 언론의 폭로 역시도 결과적으로 새빌로 하우스들의 외주-노동을 근절시킬 수 없었다. 하청 계약은 20세기에도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말 러시아 대학살과 독일의 반 유대 정책을 피해 영국을 찾은 유대인 이민자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고, 이들 중 많은 수는 대륙의 테일러링 기술을 답습한 숙련된 테일러들이었다. 1881년에 1,709명이었던 런던 내 폴란드+러시아인 인구는 1911년에는 68,420명까지 늘어났고 이러한 상황은 새빌로 하우스들이 외주 노동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1912년 런던 테일러 조합은 또 한 번의 파업을 가동했지만, 이미 이민자들을 고용하는 외주 노동은 새빌로와 시티 테일러 하우스의 불가분적 요소가 되어버렸다. 이제 새빌로 테일러 하우스 내에는 더 이상 도제를 교육할 여건조차 마련되지 않았고, 마스터들은 도제들의 양성을 위한 학교 건설과 같은 사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스터들은 테일러 노동조합에게 그들 스스로 도제들의 트레이닝을 책임질 것을 제안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저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는 숙련된 이민자 테일러들과의 경쟁 속에서 영국 테일러들은 그 생존을 위협받게 되었다.


1834년 노동조합의 와해 이후 테일러들이 봉착한 난관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척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새빌로의 유명 하우스들이 폭발적 성장을 이룬 시기이기도 했다. 고도의 노동 착취가 이루어낸 성과였다.


다음 포스트는 새빌로의 대표적 하우스 중 한 곳의 성공 신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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