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빌로의 탄생 4
새빌로와 헨리 풀... 두 단어는 오늘날 동의어와 다름없다. 사람들은 "그는 항상 새빌로 수트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하거나 "그는 언제나 풀(Poole)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테일러 앤 커터 1946년 9월 6일)
19세기 초 테일러들이 이루어낸 사업적 성공은 비약적이었다. 1838년 한 잡지는 “세인트 제임스에는 더 이상 테일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재단 예술의 교수들이다... 돈벌이로서 그것은 마술과 다름없다”라며 약간의 농조 섞인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하듯 상업적 성공은 사회적 지위의 격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신분 상승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1850년 영국을 방문한 프랑스인 프란시스 웨이(Francis Wey)는 “프랑스에서라면 용납될 수 없는 계급 간의 단단한 위계질서가 잔존하는” 런던 사회에 대한 놀라움을 표했고, 이는 당시의 영국 사회 내 귀족의 위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상류층의 영역이었던 웨스트엔드에 진출하는 일은 모든 테일러들의 꿈이었으나, 메이페어-세인트 제임스의 세계에서 테일러는 최하위 계층을 구성할 수밖에는 없었다. 마이어와 데이비슨이 보 브루멜의 저택을 찾아 체촌과 가봉을 진행했듯이, 당시의 웨스트-엔드 테일러들은 주로 상류층 고객들을 직접 찾아 그들의 ‘시중’을 드는 방식으로 옷을 주문받았고, 어떤 경우에도 고객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었다.
이것은 계급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유지하고 있던 영국 사회 보수성의 단면이었다. 금전적 여유를 찾은 몇몇의 테일러들은 그들의 고객들처럼 독일의 엠스나 바덴으로 휴양을 떠날 수 있었으나, 그곳에서 그들의 손님들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고객과 테일러 사이 신분의 격차는 종종 곤란한 상황을 야기시켰다. 그의 ‘시종’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금 지불을 하찮은 일로 여기던 귀족들은 '감히' 계산서를 내밀지 못하던 테일러들을 난궁에 빠뜨렸고, 많은 테일러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손을 뻗칠 정도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곤 하였다.
물론 예외는 존재했다. 오늘날 새빌로 15번가의 사인 포스트를 장식하는 '헨리 풀' 테일러 하우스는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귀족들의 세계 내로 출입을 허락받았던 (물론 그 역시도 대금 미납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으나) 테일러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헨리 풀은 ‘처음으로 새빌로에 가게를 세운 하우스’로 알려져 있고, (최근 출판된 헨리 풀에 관한 제임스 셔우드의 저서의 제목 역시 Henry Poole- The First Tailor of Saviel Row다.) 이 ‘원조’의 타이틀은 ‘디너 자켓의 창시자’와 함께 헨리 풀 하우스의 이름을 수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수식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1848년 헨리 풀이 처음 새빌로 거리에 가게의 정문을 열었던 시기, 새빌로를 포함한 옛 벌링톤 영지 주변 부동산의 5분의 1 이상에는 테일러 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리처드 워커는 이러한 역사의 '왜곡'이 스스로가 이룬 성공에만 신경이 팔린 나머지 이웃의 존재에 완벽하게 무관심한 한 남성의 ‘나르시시즘’의 산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헨리 풀이라는 인물의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창업자도 아니었고, 훌륭한 테일러도 아니었던 그의 이름이 그의 탄생 200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새빌로 15번가의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루어낸 성공의 아우라가 여전히 새빌로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준다.
헨리 풀의 아버지 제임스 풀은 1781년 작은 시골 마을 Baschurch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에 태어난 그의 아내 매리 풀은 부유한 과부였다고 알려지고, 많은 이들은 제임스 풀이 아내의 재력에 힘입어 시골 마을을 탈출하여 런던으로 진출하였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는 블룸스베리의 에베렛가 7번지에서 그의 첫 가게인 포목 가게를 개점한다.
웨스트엔드만큼 각광받는 지역이 아니었던 블룸스베리에서 제임스 풀은 변호사, 의사, 법무관등을 상대로 그의 포목 사업을 이어갔고, 1815년에는 테일러링으로까지 사업의 영역을 넓혀 밤늦게까지 재단과 재봉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1815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과 함께 발발한 프랑스와의 전쟁은 수많은 영국의 젊은 남성들의 자원입대로 이어졌다. 제임스 풀 역시 이 중 하나였다. 당시 모든 자원병은 자신의 제복 상의를 직접 제작해야 했는데, (헨리 풀 하우스에서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장교들은 그가 만든 제복이 특출 나게 멋지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그중 한 명이 그에게 “자네, 테일러인가?”라 물었고, 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 제복도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는가?”의 질문이 따랐고, 제임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제복은 연대 내에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그에게로 제복 주문들이 밀려들게 되었다. 이것이 '제임스 풀' 군복 사업의 시작이었다.
제임스 풀 이상으로 전쟁이 불러온 호황의 혜택을 누린 하우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매출 덕에 1822년 제임스 풀은 블룸스베리를 떠나 웨스트엔드에 새로 개설된 (이전 편에 다루었던) 리전트가로 그의 가게를 이전하기로 결정한다. 이제 헨리 풀은 명실공히 웨스트엔드의 테일러 하우스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1827년 테일러 & 커터 잡지에 실린 헨리 풀의 비즈니스 강령은 그들이 상류층을 상대하는 웨스트엔드의 테일러 하우스로 변모했음을 말해준다.
1. 고객의 요구가 아무리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그것을 맞춰주기 위한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2.재단사는 그의 의견을 고객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고객의 희망사항을 묻고 그것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 모든 계산서는 정확하게 기록된 후, 늦지 않게 전달돼야 한다.
4. 추천에 대한 감사 편지가 서명과 함께 전달돼야 한다.
5. 옷은 고객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야 한다.
1814년 제임스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난 헨리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골칫덩어리와 같은 존재였다. 1829년, 그의 형 제임스가 주식 투자사에 취직하면서, 열다섯의 헨리는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게 뒤편의 공방에서 가업을 물려받기 위한 수업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그가 초크와 노트북을 들고 조수 역할을 수행하게 될 즈음, 가게 내 모두는 그가 재단 재봉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되었다.
어린 헨리에겐 재봉 외 다른 관심사가 즐비했다. 그는 먼지 쌓인 공방보다 가게를 찾던 귀족과 고위층의 아들들의 삶에 훨씬 큰 매력을 느꼈다. 그는 친구였던 젬 메이슨(Jam Mason)(당시 세계 최고의 크로스-컨트리 경주 기수)과 함께 귀족들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들에 출몰하기 시작했고, 상류층 자제들은 매주 하이드파크에서 파에톤(사륜 쌍두 마차)을 타고 달리는 메이슨과 헨리 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제임스 풀은 결국 아들의 탕아적 재능을 십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들 헨리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가게의 제품으로 꾸며주고선, 그에게 어디서건 새로운 손님을 추천할 수 있는 위임장을 맡겼다. 물론 제임스 역시도 헨리 풀의 선천적인 매력, 사교생활이 길러준 매너, 그의 친구 잼 메이슨의 존재가 그의 사업에 불러일으킬 효과를 예상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헨리 풀에게 귀족 가문의 여인들과 그들의 응접실은 언감생심 꿈꿀 수 없는 성역이었지만, 사교계의 젊은 미혼 남성들과 접촉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슨과 함께 하이드 파크를 마음껏 누비던 헨리는 우선 상류층 세계의 변방에 자리하는 '별종'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헨리 풀에게 초청장을 내민 이 중 하나는 당시 영국 사회에 이단아로 알려졌던 스탬퍼드 백작이었다. 그는 서커스 여단원과 결혼하며 런던 사회를 경악시킨 바 있었기에 응당 그의 저택을 찾던 이들은 모험적인 남성들 뿐이었다. 사냥광이었던 스탬퍼드 백작은 여우사냥을 위한 폭스-하운드를 다루는 일에 탁월했는데, 승마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헨리 풀의 재능은 스탬퍼드 백작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헨리 풀의 저택 출입을 허락했고, 백작이 1856년 (영국의 저명한 사냥 클럽 중 하나인) 코른 헌트(Quorn Hunt)를 이끌게 된 이후부터 헨리는 사냥 클럽의 회원들과 빠르게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스탬퍼드 백작의 저택은 테일러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적인 사건의 현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백작의 저택에서 당구 게임을 즐기고 있던 헨리 풀에게 백작의 손님 중 하나가 다가와 자신이 입고 있는 '제임스 풀 코트'의 핏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헨리는 당구 초크를 들고 불평하는 남성의 코트의 곳곳에 초크 표시를 만들어 놓고선, 런던에 돌아갔을 때, 그의 아버지의 가게에서수선을 부탁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일화들은 부풀려지기 마련이어서, 때때로 이 일화는 헨리 풀과 왕세자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각색된다)
1844년, 메이슨은 경주에서 은퇴하였고, 크로스컨트리 역사상 최고의 기수는 이제 '제임스 풀 테일러 하우스'의 모델로서 상류 사회에 그의 우아한 코트를 홍보하는 일을 도맡아주게 된다. 헨리 풀 역시 이제 런던의 사냥 사회의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 제임스 풀은 아들의 활약 덕분에 스포츠 용품 섹션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제임스 풀은 리전트가의 가게에 세를 주고, 올드 벌링톤가 4번지에 그의 쇼룸과 공방을 마련한다. 그 역시도 나름의 수완을 발휘하여 새로운 암녹색과 담자색의 궁중 의복의 새로운 모델을 고안했고, 사업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2QOd9IjJEQ
1846년 제임스 풀이 사망하고, 예정대로 가업을 이어받은 헨리 풀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가게를 180도 회전시킨다. '제임스 풀 & 선' 테일러 하우스는 정문이 있는 쇼룸과 응접실을 올드 벌링톤가 쪽에, 공방과 사무실을 새빌로 쪽에 두고 있었는데, 헨리 풀은 가게의 확장을 결정함과 동시에 새빌로 쪽에 가게의 정문이 자리하도록 가게를 회전시키는 일을 주문한다.
전술했듯이 당시의 옛 벌링톤 영지에는 다수의 테일러 하우스들이 존재했다. (코크 가에 아홉, 클리포드 가에 넷, 새빌로에는 세 개의 테일러 하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새빌로의 그 어떤 하우스도 새로이 '헨리 풀'로 그 이름을 바꾼 풀의 명성과 규모에 빗댈 수는 없었다. 1851년 확장을 결심한 헨리 풀은 새빌로 36가에서 38가까지, 올드 벌링톤가 3가에서 5가까지의 영지를 매입하고 가게를 리모델링한다. (테일러 하우스보다는 세인트 제임스의 신사용 클럽의 모습을 따라 디자인됐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헨리 풀이 디자인한 하인들의 정복(正服)을 판매하던 별도의 가게 역시 2005년까지 앤더슨 앤 쉐퍼드가 있었던 새빌로 30번가에 세워졌다. (정복은 헨리 풀의 대표 상품이었다. 유럽 곳곳의 궁전 문 앞을 지키는 경위병들 중 절반은 황과 루비로 장식된 헨리 풀 정복을 입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헨리 풀은 유럽 정복 유행을 완벽하게 주도하고 있었다)
헨리 풀에게 그 문을 열어준 런던 상류 사회는 19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유태인 은행가들과 상인 자본의 출입을 허락하기 시작한다(그들의 자라나는 세력은 유태인을 지속적으로 등한시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첫 유태인 중 하나는 훗날 영국 의회에까지 진출하는 로스차일드 남작 (Baron Mayer de Rotthschild)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이들과 함께 여우 사냥을 즐기던 루이 나폴레옹 왕자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남자 역시 런던 사교계에 종종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떠벌리던 이 별 볼 일 없는 사내에게 비웃음 외 별다른 관심을 할애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탁월한 상인이었던 로스차일드는 런던 사회의 비웃음거리로 통하던 이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사내에게서 범인이 찾지 못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나폴레옹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헨리 풀 하우스의 옷으로 맞춰 입히고선(둘 사이의 첫 만남 역시 헨리 풀의 새빌로 쇼룸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던 그의 선거전에 만 파운드 이상을 투자하는 도박을 감행한다. (헨리 풀 역시 그의 고객을 따라 나폴레옹의 선거전을 금전적로 지원했다)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로스차일드의 도박은 천문학적인 경우의 수를 극복하고 잭팟을 터뜨리게 되고, 1852년에는 사교계의 한량이었던 그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게 된다. 헨리 풀은 이렇게 그의 첫 로열 워렌트(왕족의 임명장)를 따내게 된다. (루이 나폴레옹은 1846년부터 1871년 사이 311 파운드 (오늘날 82 080 파운드(제임스 셔우드)) 상당의 각종 의류를 헨리 풀에서 주문하게 된다)
1860년 헨리 풀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고객의 선택을 받게 된다. 훗날의 국왕 에드워드 7세, 왕세자 '버티' 알버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악명 높은 방탕한 맏아들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옷과 여자에 미쳐 있던 탕아 중의 탕아였다 (그와 견줄만한 옷 사랑을 자랑했던 인물로는 그의 큰 할아버지 (국왕)조지 4세와 손자 (국왕)에드워드 8세(윈저 공작)가 있지만, 새빌로의 역사에 있어서 에드워드 7세보다 중요한 국왕은 없었다) 어느 날 연극을 관람하러 극장을 찾았던 왕세자는 배우 페터(Fechter)의 코트가 유별나게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테일러의 이름을 묻게 된다. 페터는 그의 코트가 헨리 풀 코트임을 고백하고, 그렇게 헨리 풀과 에드워드 7세 사이의 전설적인 친분이 서막을 알리게 된다.
에드워드 7세의 옷 욕심은 전설적이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워드로브를 소유한 남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아홉 벌의 영국 기사복과 그 외 오십 벌의 각종 기사복, 영국 군 내 모든 연대의 제복과 갖가지 외국 군대의 제복, 그 외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옷을 갈아입던 그의 욕심을 채워줄 만큼의 사복을 소유하고 있었다. 1860년에서 1876년 사이 왕세자 '버티'는 헨리 풀에서 10,940파운드에 상당하는 옷을 구매했다. (오늘날 64만 6870 파운드에 해당한다.) 그가 가장 선호하던 모델은 짧은 라운지 코트- 오늘날 수트 자켓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제임스 셔우드).
가게보다는 세인트 제임스의 신사 클럽과 같이 디자인되었던 헨리 풀의 새빌로 하우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드 7세가 그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 '우체국'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헨리 풀과 그의 가게는 왕세자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옷과 여자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865년, 저녁 식사에 모닝코트보다 편안한 착장을 원했던 에드워드 7세는 짧은 코트를 헨리 풀에 주문했고, 이것은 디너 자켓(턱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베스트의 최하단 버튼을 잠그지 않는 관습 역시, 에드워드 7세의 습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왜 처음 그것을 시도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사업적 성공과 함께 헨리 풀의 활동 반경 역시 확장되고 있었다. 그는 매년 나폴레옹 3세의 궁정을 방문해야 했는데, 주로 늦은 가을, 황제가 왕족/귀족들과 사냥을 포함한 각종 게임들을 즐기던 파리 교외 콩피엔에서 그를 접견하곤 했다.
1866년 새빌로 테일러의 위상을 한껏 격상시켜준 스캔들 역시 이곳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의 등자 위에서 출발의 술잔을 기울이던 왕족들 사이로 창백한 얼굴색의 뚱뚱한 남자가 푸른 눈빛을 빛내며 헨리를 향해 그의 말을 몰아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와 대화를 시작했는데, 헨리의 얼굴이 넘치는 황홀함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왕세자가 공공장소에서 그의 테일러와 (친구로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었다!" (도날드 맥앤드류)
60년대가 저물어 갈 때 즈음, 헨리 풀의 테일러 하우스는 세계 그 어떤 테일러보다 더 많은 로열 워렌트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헨리 풀이 유럽의 왕족들로부터 하사 받은 '로열 워렌트'의 리스트에는
1860- 영국 왕세자 (Prince of Wales), 리히텐슈타인 대공, 러시아의 니콜라스 트루비츠코이 왕자, 러시아의 미켈 대공
1861- 러시아의 콘스탄틴 대공, 오스트리아의 맥시밀리안 대공, 독일의 황태자
1862 - 바덴의 프레데릭 대공,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863 - 남프랑스 오랑지 대공Prince of Orange), 메테르니히 대공, 에딘버르 공작, 험버르트 대공(훗날의 이탈리아 국왕)
1864- 러시아 황제 알렌산더 2세
1865 - 포르투갈 국왕 루이 1세, 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앙 대공, 빅토리아 영국 여왕,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황태자, 아오스타 공작, 색스-바이마르 대공
1866 - 호헨로헤 링겐버그의 헤르만 대공 (Prince Herman of Hohenlohe Langenburg)
1868 - 제노바 공작
1869 - 바텐베르크의 루이 대공, 코노트 공작
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란돌프 처칠 경, 영국 수상 벤자민 디스라엘리,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일본의 두 왕자, 브라질의 황제 등이 헨리 풀의 고객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애물단지에서 영국 국왕의 절친한 친구로 거듭나게 된 헨리 풀은 60대에 접어들었을 때, 드디어 런던 사회 최고로 저명한 응접실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테일러가 아닌 'Old Pooley', 런던 사회의 고유명사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