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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Feb 27. 2020

헨리 풀 1872-1913

새빌로의 탄생 5


“나는 왕자와 대중을 위해 일했고, 결국 빈자로서 죽는다.”


1876년, 헨리 풀이 남긴 마지막 편지의 내용이다. 말년의 그는 이뤄낸 성공이 무색해질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었다.


1870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폐위되었고, (그는 헨리 풀의 고객이었던 비스마르크의 포로가 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헨리 풀은 그의 가장 큰 고객 중 하나였던 (1858년 그에게 첫 로열 워렌트를 하사했던)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아내 유제니 황후를 잃게 되었다. 같은 해, 헨리 풀 공방에서 새로 설치된 전기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화제가 발생했고, 거세게 솟아오른 불길은 제작 중이던 모든 옷들을 불태워버리는 참사로 이어졌다.


시암의 대사를 맞이하는 나폴레옹 3세와 유제니 황후 (1861) -장 레옹 제롬의 작품
헨리 풀의 고객이었던 유제니 황후 (프란츠 세이버 윈터하터의 작품이다) (1853)



그러나 정작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872년 실행된 헨리 풀의 장부 정리는 2만 3천 파운드(오늘날의 1백44만 파운드)의 미납된 외상금을 보고하고 있었다. (상류층 남성들이 그들의 테일러들에게 대금 지불을 등한시했다는 사실은 지난 포스트에서 다루었다) 헨리 풀의 대응은 2만 2천 파운드(1백377만 7400파운드)를 5 퍼센트의 이자로 은행에서 대출하는 것이었다(제임스 셔우드).


물론 절박한 상황 속에서 헨리는 미결제된 대금을 지불받으려 몇 차례 시도했으나, 이는 오직 고객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효과만을 가져왔다. 감히 귀족에게 '탕감해야 할 빚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테일러의 당돌함은 로즈베리 백작 알치발드 프림로즈를 포함한 소중한 고객들과의 이별로 이어졌다.


헨리 풀의 가장 중요한 고객 중 하나였던 영국 수상 알치발드 프림로즈. 이전 편에 다루었던 로스차일드 남작의 외동딸(영국 내 최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여성)의 남편이기도 했다.



1876년 헨리 풀의 사망 후, 가게의 장부를 들여다본 유족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외상 빚 중 왕세자 알버트와 그의 친구들이 차지하고 있던 몫은 천문학적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회수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다. 헨리 풀 테일러 하우스는 헨리 풀과 함께 매장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결국 회계를 담당하던 헨리 풀의 사촌 샘 컨디는 만 파운드 이상의 빚을 회수 불능의 계정으로 처리해야 했고, 과부 엠마는 헨리의 경주마, 그림, 프랑스 가구 등을 매각해야만 했다. (헨리가 생전에 아꼈던 고급 맨션과 별장들 또한 헨리 풀 하우스의 자금난에 일조했을 테다)


왕세자 알버트. 1876년 헨리 풀이 사망하던 당시 그는 서른 다섯이었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25년 이상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의 헨리풀 보이콧은 그의 즉위식까지 이어진다.


헨리 풀은 죽고 나서야 그의 친구 왕세자 버티에게 제공한 어마어마한 워드로브의 결제를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이와 같은 ‘무례함’에 격노한 왕세자는 금액을 지불하는 대신 그가 헨리 풀에 하사한 로열 워렌트를 철회해 버렸다. 그의 대응은 ‘왕세자를 단골손님으로 두는 영광은 이미 충분한 보상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헨리 풀 ‘보이콧'은 30년 가까이 지속됐고, 헨리 풀 하우스에게 있어서 이는 대참사와 같았다.


결국 헨리 풀을 구한 것은 헨리를 사랑했던 그의 누이 마리 앤 풀이었다. 그녀는 헨리의 기억이 모조리 강매되는 일을 막기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고(그중에는 리전트가, 옛 헨리 풀 하우스 부지의 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헨리 풀 하우스는 수년간 이어진 고비 끝에 매각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워드 컨디. 헨리 풀의 사망 후 새빌로의 '큰 어른' 역할을 수행하며 테일러들의 파업이 있을 때마다 노사간의 중재를 도맡았다. 오늘날 헨리 풀의 이사 사뮤엘 컨디는 그의 증손자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헨리 풀 하우스는 샘 컨디(헨리 풀의 회계사)의 아들 하워드 컨디의 지휘와 대표 이사 레지날드 핸슨의 감독 아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특히 '무자비한 핸슨’ (Hanson the Merciless’)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전 런던 시장 ‘레지날드 핸슨은 미납된 대금을 지불받기 위해 고객을 법정 고소하는 일 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핸슨이 런던 시장으로 취임했던 해인 1886년 베니티 페어에 출판된 그의 캐리커쳐



헨리 풀의 고객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갑작스러웠다. 19세기 말 댄디 중의 댄디(The King of Dudes)라 불리던 에반더 베리 월은 미국 사라토가 스프링(경마로 유명한 스파)의 한 호텔에서 어느 오후 무려 40벌의 옷을 갈아입고선 그들을 일일이 선보인 전설적인 일화를 연출한 인물이었다. (다음 날 미국 전역의 모든 신문들은 그의 옷들이 전부 헨리 풀의 제품이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따라서 1888년 9월 1일, 미납금 250 달러의 납부를 위해 헨리 풀이 에반더 베리 월을 고소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을 때, 그것은 큰 스캔들을 일으킬 수밖에는 없었다.  



뉴욕 사교계의 유명 인사 에반더 베리 월. 10대 후반-20대 초반에 2백만 달러의 재산 (오늘날의  5천만 달러)을 상속 받은 후, 평생 동안 옷과 파티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물론 스캔들을 즐기던 대중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헨리 풀의 고객들이었다.


베리 월에게 보낸 고소장이 단발적인 조치가 아닌, 가게의 새로운 정책을 반영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영국 신문 Society Times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풀의 급습!”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런던에서 러크나우(인도 북부)까지... 남성들의 얼굴에 짙은 공포가 드리워지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리처드 워커)


헨리 풀이 청구서의 납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오랜 고객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으나 (그 전까지의 구매한 옷에 대한 가격 지불의 관습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준다 ) 19세기 말엽, 하워드 컨디의 지휘 아래 헨리 풀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새로이 헨리 풀을 찾은 고객들은 '식민지' 왕족들(인도를 포함한)과 미국과 유럽의 기업가들이었다. 이들의 인기에 힘입어 이미 국제적인 고객층을 자랑하던 헨리 풀은 1880년대부터 비엔나와 베를린에 새로운 지점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헨리 풀의 명성은 영국 전역에 ‘가짜 헨리 풀’을 탄생시킬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미국의 기업가 코넬리우스 반더빌트 2세 1883년에서 1893년 까지 2,132 파운드 (오늘날 141,100 파운드)를 헨리 풀에서 지출했다. (존 사전트의 작품)



쓰리 피스 수트의 역사에 관한 포스트에서 서술했듯이, 19세기 말 남성복의 유행은 간소한 라운지 수트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왕세자의 테일러로서 처음 유명세를 얻었던 헨리 풀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 궁중의복보다는 (기업가/정치가들로 구성된) 새로운 고객들을 위한 비즈니스용 라운지 수트를 주 상품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헨리 풀과 함께 고안한 디너 자켓을 입고 있는 훗날의 에드워드 8세/윈저 공작과 공작부인


에드워드 7세가 고안한 테일이 생략된 이브닝 웨어, 버튼을 잠그지 않은 프록코트, 마지막 단추를 잠그지 않는 베스트 등의 혁신을 이끈 헨리 풀이었으나, 새빌로의 테일러 답게 그들은 유행을 주도하는 역할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19세기 초 헨리 풀이 주도했던 정복 유행 역시 전통적인 멋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이 새빌로 하우스의 스타일은 ‘원조’의 타이틀에 걸맞은 보수적인 ‘멋’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보 브루멜이 제안한 ‘남성의 멋’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의복만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헨리 풀의 보수성에 대해 혹자는 ‘“헨리 풀의 업적은 남성 패션의 발전을 막아선 것뿐이다. 그는 도르세이(19세기 런던의 댄디)와 그의 추종자들이 유행시킨 색상을 앗아가 버림과 동시에, 스타일에 있어서 그 어떤 변혁도 가져오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보수성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포멀 웨어(디너 웨어)였다. 검은색 일색인 이 복장은 이전까진 오직 장례식에만 허용되던 복장이었다.



1940년까지 운영되었던 헨리 풀의 파리 지점 '쇼윈도의 장식' 혹은 밝은 조명을 금지했던 헨리 풀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테일러의 왕자의 작가 맥앤드류는 20세기까지 ‘새빌로’의 이름이 연상시키던 배타성과, 신비주의를 처음 확립시킨 장본인으로 헨리 풀을 지목한다. 맥안드류는 헨리 풀이


“그의 시대에 유행하던 스타일을 석회화하고 방부 처리한 후...테일러링 업계 전체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긴 잠에 빠뜨려 버렸다. 그는 테일러 하우스들의 외관은 내부에서 지켜지는 훌륭한 예절을 반영해야 한다고 믿었고, 테일러는 고객에게 있어 그의 변호사, 혹은 의사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객은 그의 클럽에 들리듯 테일러 하우스에 언제든 방문할 수 있어야 했고, 따라서 모든 쇼윈도 진열이 금지되었고, 불투명 유리 창문과 어두운 실내조명이 새빌로를 점령하게 되었다”(리처드 워커)라고 기록한다.



넓은 모자, 망토, 긴 머리로 심미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오스카 와일드(1854-1900)


헨리 풀이 추구하던 '진중한' 스타일은 연기와 얼룩으로 가득한 공장들이 즐비했던 런던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오염된 런던에서 (대기 오염은 나날이 심해져가고 있었다) 드라이클리닝이 발명되기 전 밝은 색상의 수트를 아무 걱정 없이 입을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1850년 이후 지속적으로 어두운 색상이 남성 복식의 유행을 주도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화려한 색상의 옷을 걸친 남성들은 점차적으로 '반항아'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와 같이 이러한 '음울함'에 대해 공개적인 저항을 시도한 이들도 존재했다. 와일드는 로열 아카데미의 비공개 모임에서 (당시 새빌로 근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검은색 프락 코트와 실크 탑 햇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와 버튼 홀에 끼운 릴리를 매치시키는 그만의 차림을 연출했고,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챙이 넓은 모자와 망토, 무릎까지 오는 브리치스를 착용하며 남성복의 지배적 이념과 완벽하게 반대되는 행보를 시도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서 그 역시도 결국 어두운 색상의 새빌로 스타일로 회귀하게 되었다.(제임스 셔우드)



1900년 영국 노동당을 창당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키어 하디(1856-1915)


19세기의 끝에서 새빌로에 불어닥친 스타일의 변화는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괴짜'가 아닌 역시 '산업화'의 영향이 불러온 '간소화'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범람하는 기성복의 영향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은 기성복 라운지 수트를 선택했고, 새빌로 역시 이러한 '검소함'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90년, 런던에서는 사회주의가 그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고, 역사상 첫 노동당 의원이었던 키어 하디(Keir Hardie)는 실크 모자와 프록코트로 가득한 의회장에 트위드 모자와 검은 라운지 수트를 착용한 채 나타났다. 그의 복장은 곧 노동당 의원의 유니폼으로 채택되었다.


의회장 바깥에서도 복식 문화는 눈에 띄게 간소화되고 있었다. 19세기 말 런던의 도시 문화는 격식 있는 이브닝드레스의 규범을 따르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극장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교외의 집에 들러 이브닝 웨어로 복장을 갖춘 후,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관객의 수는 제한적이었다. 이에 따라 복식의 기준은 라운지 수트의 평상복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완화될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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