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빌로의 탄생 6
이번 포스트에서는 새빌로 1가의 하우스, 기브스 앤 호크스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리처드 워커의 새빌로 스토리, 제임스 셔우드의 새빌로, Number One Savile Row를 참고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거리에서도 200년 이상의 계보를 오늘까지 이어가는 동시에 새빌로의 대표적 하우스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하우스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Meyer & Mortimer와 Davies & Sons 정도가 떠오른다)
몇 안 되는 선택지 중에서 기브스 앤 호크스를 택한 이유는 기브스와 영국 해군 사이의 오랜 관계와 오늘날 기브스 앤 호크스가 제작해내는 수트에 대한 내 흥미가 작용했다. 충분한 양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면 오늘날 기브스 앤 호크스의 헤드 커터를 맡고 있는 David Taube에 대한 이야기 역시 언젠가는 다루어 보고자 한다.
기브스 앤 호크스의 탄생을 말하기 위해선 200년이 넘게 이어진 두 하우스의 역사를 탐색해야만 한다. 기브스와 호크스의 이름으로 운영되던 각각의 두 테일러링 하우스가 오늘날 새빌로 1가의 하우스로 통합된 시기는 1974년으로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두 하우스의 계보를 그 기원에서부터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18세기로 회귀해야 한다.
1760년대의 어느 날, 스무 살이 안 된 청년 토마스 호크스는 단 돈 5파운드를 쥐고 고향 스토브리지(Stourbirdg)를 떠나 수도 런던을 찾는다. 그는 그곳에서 부유층 남성들을 위한 말안장과 벨벳 모자를 제작하던 모이씨의 가게에 장인(Journeyman)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는 고향에서 도제 교육을 마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업혁명 초기까지 이탈리아에서 손으로 직조되던 벨벳은 의류뿐 아니라 마차와 저택 인테리어에도 널리 활용되던 사치품이었고, 부의 상징이었던 벨벳 모자는 부르주아와 귀족들에 의해 사랑받고 있었다.
1771년, 모이씨로부터 독립한 토마스 호크스는 소호의 골든 스퀘어 근방에 그의 말안장-모자 가게를 개점했다. 당시 귀족 남성들은 새빌로를 위시한 메이페어와 세인트 제임스를 포괄하는 소호의 서쪽, 웨스트엔드에 주거하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들의 사치품을 구입하기 위해 소란스러운 소호 거리를 찾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토마스 호크스의 가게는 개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섭정-왕세자(훗날의 조지 4세)의 모자 제작을 담당하게 된다. 치장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조지 4세가 벨벳 모자의 유행에 무지할 리 없었다. 어느 일요일, 급하게 벨벳 모자가 필요했던 조지 4세가 호크스를 호출했을 때, 그가 "일주일 중 6일은 왕세자를 모시지만, 일곱 번째 날에는 신을 섬긴다"라는 답신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803년에 이르러 왕세자의 아버지 국왕 조지 3세 역시 호크스 벨벳 모자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이제 토마스 호크스는 명실공히 로열 패밀리의 모자 장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복용 모자 제작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토마스 호크스에게 있어서, 당시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영국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군용 모자 제작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806년, 기존의 위치보다 조금 더 상류 사회에 가까웠던 피카딜리가 14번지로 이사한 호크스 하우스는 영국군의 장교들을 위한 투구 제작에 돌입했다.
토마스의 운은 계속되었다. 그는 샤코 (Shako)라 불리던 헝가리식 원통형 군용 헤드기어를 완성하는 가죽 처리 기법을 스스로 발명하였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군모가 유럽 전역에서 널리 채택되면서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그가 처음 시도한 샤코 모자의 재킹(Jacking) 가죽 처리 공정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손으로 가죽을 닦아내는 작업을 통해 가죽을 더 견고하게 만들었고, 그 탁월한 기능과 괴이한 형태는 장교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 위로 높이 솟은 형태로 만들어졌던 샤코는 실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샤코는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었던 알버트 왕자가 고안한 놋쇠 헬멧에 공식 군용 헬멧의 자리를 내어주게 됐고, 호크스 하우스가 왕가의 놋쇠 헬멧 제작 하우스로 자리 잡는 일 역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809년 토마스 호크스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가게는 계속해서 수많은 귀족들을 위한 모자를 제작하며,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16년에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자가, 1830년에는 웰링턴 공작이 그들을 찾았다.
샤코의 인기와 함께 사복용 모자 전문 가게에서 각종 군용품으고 사업을 확장한 호크스는 내친김에 군복, 검, 벨트 등의 제작에까지 뛰어들었고, 183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냥 용품을, 1877년에는 왕세자 알버트 왕자(에드워드 7세)의 군용품과 제복을 납품하는 로열 워렌트를 하사 받게 됐다.
토마스 호크스의 성공이 Jacking공정을 거친 Shakos로 대표된다면, 그의 뒤를 이어 호크스 하우스를 매입- 운영했던 헨리 토마스 화이트의 대표 상품은 코크-라인 헬멧이었다. 1920년 헨리 화이트의 아들 바실 화이트는 이 코크-라인 헬멧의 탄생에 대한 비화를 잡지 '테일러 앤 커터'에 소개한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사무실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계셨어요... 어떤 남자가 소포 하나를 가지고 들어오더니 샵 지배인에게 그것을 보여주더군요. 지배인이 그를 내보내려던 차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 남자를 다시 불러 세웠어요. 그 소포에는 코르크 헬멧의 원형이 담겨 있었죠. 코르크는 고무로 고정되어 있었어요. 지배인 마르틴 씨보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아버지는 로열티를 지불하기로 약속했고, 그렇게 코르크 헬멧은 수정을 거쳐서 시장에 소개됐죠."
19세기 중반 영국이 치러야 했던 전쟁 중 상당수는 열대 지방에서의 육상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흐린 영국 날씨에만 익숙했던 영국군은 오지의 열대 기후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57년 인도 군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이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은 상당수의 사망자를 냈고, 그중 75퍼센트 이상이 적군의 총알이 아닌 일사병과 그 외 질병에 쓰러진 병사들이었다.
헨리 화이트는 그가 운 좋게 손에 넣게 된 코르크 헬멧을 피카딜리 14번지에서 뿐만 아니라 (파견된 에이전트를 통해) 캘커타에서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호크스의 코르크 헬멧은 두 겹의 코르크, 그 사이에 자리한 자연 송진(주로 인도산 고무였다)으로 코팅된 면, 그리고 거기에 겉면의 캔버스가 추가된 제품이었다. 이렇게 제작된 코르크 헬멧은 유연한 동시에 놋쇠 헬멧보다 훨씬 시원할 뿐 아니라 단단하고 저항력이 강했다. 그것을 사용해본 장교들은 모두 호크스 헬멧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 헬멧이 태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물을 담는 양동이로도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호크스 헬멧은 19세기를 통틀어 영국군의 열대 지방 원정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영국군의 1867년 아비시니아 원정, 1882년의 이집트 원정에서 코르크 헬멧은 그 유용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유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르크 헬멧은 영국군의 열대 지방 공식 헤드기어로 채택되었고, 헨리 화이트와 호크스 하우스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제 기브스 앤 호크스의 또 다른 반쪽, 기브스의 역사를 짧게나마 들여다보도록 하자.
기브스의 탄생사는 18세기 후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서 해군 제복을 제작하던 군용 테일러 메르치세덱 메레디스 하우스에서부터 시작한다. 메레디스는 포트 시의 소란스러운 부두에 가게를 두고 있던 나머지 테일러들과는 달리 포츠머스의 부유한 지역에 속하던 하이 가에(High Street)에 그의 테일러 샵을 열었는데, 이러한 특이점은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메레디스’ 하우스의 제복을 ‘특별한’ 제품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메레디스는 나름의 큰 사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전 포스트에서도 언급했듯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호레이쇼 넬슨 부제독 역시 메레디스 하우스의 고객 중 하나였다. 그의 제복은 푸른색 양모 옷감, 패딩과 올곧게 선 칼라, 실크 라이닝으로 구성됐고, (넬슨이 1797년 산타 크루즈 de Tenrife에서 잃은 오른팔을 위해) 오른쪽 소매가 라펠의 버튼에 부착된 형태로 제작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의 종전까지, 영국 해군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그들에게 제복을 공급하던 메레디스 역시 이어지는 호황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축적시켜 준 부에도 불구하고, 메레디스 하우스는 메르치세덱 메레디스의 사망(1814)과 전쟁의 종전이 불러온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20년이 넘는 고전분투 끝에 1837년, 메레디스의 아들 어거스투스 메레디스는 결국 하우스의 파산을 신고하게 된다(로열 네이비가 여전히 전 세계를 누비고 있는 시기였기에, 메레디스 하우스의 사업적 실패는 어거스투스의 소양 부족으로 해석되어야 할 테다).
1841년 메레디스 하우스를 매입한 것은 하이가 63번가에서 이웃 테일러 하우스를 운영하던 조셉 갈트였다. 1852년, 조셉 갈트는 동업자를 영입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구두 장인 가문 출신의 은행가 제임스 기브스였다.
갈트와 기브스가 노리던 주요 고객층은 물론 로열 네이비의 장교들이었다. 제임스 기브스는 1853년에서 1856년까지 벌어졌던 크림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제복과 군용품을 그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과감하게도 요트 하나를 테일러링 워크숍으로 변신시킨 후, 전쟁의 현장이던 흑해로 파견시켰다. 그곳에서 이 '떠다니는' 워크숍은 해군 장교들의 제복 관련 주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크림 전쟁 중 갈트 앤 기브스 하우스의 매출은 세 배로 뛰어올랐다. 전쟁 후에도 로열 네이비와의 관계를 백분 활용하고자 한 기브스 하우스는 (1887년 제임스 기브스가 갈트의 지분을 사들이게 되면서, 이제 옛 메레디스 하우스는 기브스 하우스로 거듭나게 된다) 사관학교 생도에서부터 해군 제독까지 모든 해군 장교를 그들의 고객으로 만드는 작전에 착수한다.
기브스는 로열 해군 대학에 합격한 모든 합격생들의 집으로 축하 전보를 보냈고, 프록코트와 실크 모자를 쓴 기브스의 축하 사절을 학생의 집으로 파견하여 소년의 부모와 함께 그의 전망과 그가 앞으로 필요하게 될 제복들에 대해서 논의했다. 기브스의 해군 사관학교 제복으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갖춰 입은 생도들은 와이트 섬에 위치한 사관학교로 떠나는 보트에 탑승하기 전 마지막으로 포츠머스의 기브스 하우스 스태프를 맞닥뜨렸고, 그로부터 복장에 있어 규정에 어긋나는 곳이 없는 지의 여부를 확인받은 후 보트에 탑승하여 사관학교로 출발할 수 있었다.
제임스 왓슨 기브스의 '어릴 때 잡아두기!'('getting them young') 전략(오늘날의 나이키를 연상시키는)은 기브스가 해군 생도 제복 판매를 독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910년, 기브스는 그들이 1850년 이후로 모든 해군 장교 중 5/6 이상의 유니폼 제작을 맡아왔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해군 생도의 독점은 20세기에도 계속됐다. 1903년에서 1927년 사이 사관학교를 졸업한 3967명의 해군 생도 중 98퍼센트가 기브스의 고객이었다.
당시 해군 장교들은 제복을 스스로 구매해야 했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기브스는 크레디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로열 네이비의 협조 아래, 장교들은 유니폼의 가격을 그들의 월급에서 삭감하는 방식으로 제복을 '일찍' 구매할 수 있었다.
기브스는 해군 장교들을 위한 "해군 장교가 되는 법'과 "로열 네이비의 관습과 에티켓"이라는 이름의 매뉴얼을 출판했고, 선내 생활을 위한 사물함 제작을 위해 목공소를 운영했으며, 생명 보험을 제공하는 보험 회사의 역할 역시 담당하고 있었다.
1888년 제임스 기브스 사망 이후 가게는 그의 아들 제임스 왓슨 기브스의 손으로 넘겨졌지만, 전설적인 기브스의 고객 서비스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기브스는 해군 장교들을 위한 단독 발레 서비스를 그들이 원하는 차량으로 제공했으며, 고객을 대신해 꽃, 공연 티켓, 탈의실, 샤워, 모터 카, 경주마까지 오더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고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이 원하는 제품을 전달해 주었다.
이러한 기브스의 고객 서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중해 함대의 해군 장교가 칼라 스터드 하나를 요청했을 때, 세일즈 담당 직원이 말타 섬 지점에서 파견되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가로질러 나폴리와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지중해 함대까지 전달하는 고객 서비스의 전설적 일화를 연출하기도 하였다.(이후 말타 지점으로 군용품과 제복을 찾는 장교들의 주문이 폭주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 기브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세계 1차 대전의 발발은 밀리터리 테일러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기브스와 호크스를 위시한 모든 테일러들의 생산량 한계를 시험한 사건이었다. 테일러들은 주 6-7일 근무에 매일 같이 강요되는 야근까지도 도맡아야만 했다.
이 와중에서도 기브스는 그들의 소중한 고객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바로 기브스가 직접 특허를 취득한 구명-웨이스트 코트였다. 훌륭한 구명조끼가 되어줄 뿐 아니라 평상시에는 보통의 웨이스트 코트와 다름 없는 모습을 한 이 제품은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조끼에는 브랜디 플래스크를 위한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이는 난파된 배의 선원이 , 팽창한 웨이스트 코트의 힘으로 물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전해진다)
세계 1차 대전은 호크스와 기브스 양 쪽에 있어서 그다지 많은 부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수많은 테일러들의 징용으로 이어졌고,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장교들의 화려한 제복은 오직 실용성만을 강조한 군복에 의해 교체됐다.
넬슨 제독의 화려한 제복과 높이 솟은 샤코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20세기는 기브스와 호크스에게 있어 새로운 시련을 의미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은 그 맛보기에 불과했다.
다음 포스트는 20세기 초기의 복식 문화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그리고 1974년의 합병을 아우르는 20세기의 기브스 앤 호크스에 대한 이야기는 20세기 남성 복식에 관한 이야기가 충분히 이루어졌을 시기에 이어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