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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r 12. 2020

1차 세계 대전과 그 후유증

새빌로의 탄생 7

1차 세계 대전은 서구 세계의 질서를 뒤흔든 20세기 최대 사건이었다. 서구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전면전’의 잔혹함과 직면해야 했다. '영광스러운 전쟁'의 기치 아래 유럽 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출발했으나, 기술 발전이 탄생시킨 무기들이 연출한 전쟁의 참상은 끔찍한 것이었다.


전쟁은 초반부터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있었다.기관총 앞으로 전진을 명령한 영국 지휘관들의 무모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5만 7천 명의 사상자가 나온 솜 전투의 첫날 이후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호전으로 변모한 서부전선의 지루한 소모전 속에서 병사들은 참호 족염과 독가스 공격에 신음하고 있었고, 모든 '신사성'이 사라진  땅따먹기 싸움의 현장에서 영국의 청춘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1910년 에드워드 7세의 사망 소식에 버킹햄 궁전에 모인 유럽 9개국의 국왕들. 이들은 모두 새빌로의 고객이었다.


새빌로 역시 1차 세계 대전(1914-1918)의 시련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다.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참혹한 전쟁에서 넬슨 제독, 웰링턴 공작, 국왕 조지 5세의 수려한 제복은  철저한 실용성을 자랑하는 보호색의 군복에 그 자리를 내줄 수밖에는 없었다. 전 유럽의 군사들, 특히 미국 병사의 바지가 카키 바지로 통일된 것 역시 1차 세계 대전 중 일어난 변화였다. 전 유럽을 통틀어 화려한 색상의 군복들은 모두 보호색의 그것으로 교체되고 있었다.


물론 1차 세계 대전은 테일러들에게 있어 폭발적인 주문량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영국의 존명이 걸린 전쟁(이전까지의 전쟁은 엄밀히 말해 이와 같은 '총력전'에는 미치지 못했다.) 속에서 하우스들은 사업적 호황을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솜 전투(1916) 3백만이 투입되어 1백만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투였다. 전투 초기 영국군은 무거운 군장을 짊어진 채 그들을 기다리던 독일군의 기관총 앞으로 '걸어서' 전진했다


우선 새빌로의 일손 중 반 이상이 전쟁에 징용됐다. 주문된 옷들을 완성하기 위해 새빌로 공방들은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돼야 했다. 시골에서 테일러의 꿈을 품고 런던을 찾는 젊은이들 역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새빌로의 하우스들은 늘어난 오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인력 부족을 경험하고 있었다. 영국 군에서만 백만 명 가까운 전사자를 낳은 전쟁이 전개되고 있었고, 매일 같이 바닥에 앉아 ‘남’의 옷을 꿰매는 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수는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한 인력에 신음하면서도 새빌로의 하우스들은 남은 일꾼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나라를 위한 ‘희생’을 자청하는 긍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대표적 예시로 기브스 하우스는 전쟁 기간 동안의 가격 동결, 그리고 전사한 장교들의 미납금을 유족에게 요구하지 않는 방침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윈스턴 처칠을 탄생시킨 것이 계급사회라면 우리에게 계급사회를!"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처칠이지만, 그의 1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은 미비했다.


결과적으로 새빌로는 1차 세계대전을 큰 피해 없이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하우스들은 전쟁 후유증이 그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줄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남성들의 슈트를 만들기 위해 예전의 종이 패턴을 꺼내 든 테일러들은 급히 수선-테일러의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4년 간의 전쟁을 거치며, 전투, 훈련, 야영 생활에 익숙해진 남성들의 체형이 더 ‘남자다워’ 졌던 것이었다. 특히 남성들의 가슴, 팔, 상체 전반의 사이즈가 늘어나 있었고, 이것은 새빌로 슈트 역시 그에 따라 변화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는 운동을 즐기는 남성들의 급증과 함께 평균 체형이 점점 '근육질'로 변해가는 오늘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에드워드 섹스턴을 위시한 새빌로 테일러들 역시 재단에 있어서 이와 같은 변화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정도는 새빌로에게 있어 그다지 문제 될만한 변화가 아니었다.



프락 코트와 실크 탑햇 차림의 조지 5세


결정적인 타격은 정부 정책에서 기원했다. 전쟁이 야기한 생활고 타개를 위해 영국 정부는 소집 해제된 병사들을 위해 "브리티쉬 메이드 슈트"를 57쉴링의 획일화된 가격으로 제공했고, 전쟁 이전부터 영국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던 기성복 라운지 슈트는 이제 더욱 급속도로 복장의 간소화를 이끌어 가게 됐다.


새빌로에게 있어 다행이었던 사실은 국왕 조지 5세가 의복에 있어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기성복의 범람 속에서도 1920년대 세인트 제임스의 귀족 세계는 여전히 프록코트와 실크 햇의 드레스 코드를 유지하고 있었고, 조지 5세는 이러한 드레스 코드를 철저히 수호하는 보수적인 복식을 사랑하던 국왕이었다.


국왕 조지 5세와 왕세자(Prince of Wales) 데이비드. 편안한 라운지 수트를 선호했던 그였지만,  아버지와 함께하는 공식 석상에서 국왕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한 '젊은 세대'의 영웅은 조지 5세가 아닌 20세기 최고 스타일 아이콘 중 한 명 이었던 왕세자 에드워드였다.


20세기 초반 그 어떤 남성보다 많은 사진에 등장하고 있던 데이비드 왕자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지난 십수 년간 남성복 유행을 주도한 '클래식 멘스웨어'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 모두는 영국 국왕의 자리에 채 1년도 머물지 못한 에드워드 8세/윈저 공의 사진을 피해 갈 수 없었을 테다.) 프락 코트보단, 모닝코트를, 모닝코트보단 라운지 슈트를 선호한 윈저 공은, 검은 라운지 슈트 일색인 공식 석상에 라이트 그레이 플라넬 슈트를 입고서 등장하는 일을 즐기던 '이단아'였다.



그의 테일러 숄테가 그를 위해 구현해준 드레이프 컷-더블브레스트 수트다. 윈저공에 관한 이야기들은 다음 포스트에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에드워드의 '이단아적' 취향은 기존의 복식 예절을 고수하고자 했던 그의 아버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규격에 언제나 불편함을 느꼈다...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재킷을 벗어던지고, 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라고 고백하던 자유분방한 영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다룬 모든 스타일 아이콘들이 기존의 격식을 파괴하며, 당시의 기준에 있어서 지나치게 ‘간소한’ 차림을 보편화시킨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윈저 공을 남성복 역사의 마지막 스타일 아이콘으로 인식하는 일 역시 무리는 아닐 테다. 그가 그의 테일러 숄테와 함께 유행시킨 소프트한 재킷의 드레이프 컷은 오늘날까지 복식의 정석으로 남아 있다.


사촌 사이였던 라운지 수트 차림의 영국 국왕 조지 5세(우측)와 러시아 차르 니콜라스 2세.


새빌로에게 있어서 이러한 ‘캐주얼화’의 움직임을 막아줘야 할 ‘규범적 존재’의 부재는 그들의 근심을 깊어지게 하고 있었다. 20년대와 30년대의 스타일을 주도하던 ‘댄디’들은 더 이상 보 브루멜의 전통을 계승하는 ‘금욕적 댄디’가 아니었다. 규격 속에 갇힌 절제된 멋보다는 캐주얼한 슈트의 편안함을 사랑한 왕세자 데이비드, 윈스턴 처칠 등의 영향은 프록코트와 뻣뻣한 풀 먹인 칼라를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고 있었고, 전후 세대에게 있어 ‘슈트’는 오직 라운지 슈트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복식의 유행을 주도하는 힘은 젊은 남성들에게 있었다. 맏아들의 옷차림을 훈계하던 조지 5세마저 말년에 이르러 라운지 슈트를 입고 공식 석상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전통의 프락 코트를 사랑하던 새빌로 역시 시대가 변했음을 인지해야만 했다.



빙 크로스비와 프레드 아스테어


이러한 캐주얼화의 영향 속에서 남성복 유행의 주도권은 점차적으로 대서양 너머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들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루돌프 발렌티노, 험프리 보가트, 프레드 아스테어, 게리 쿠퍼, 빙 크로스비, 캐리 그랜트(영국 출신)와 같은 전설적인 할리우드 스타들은 세계대전의 종결을 기점으로 모두 새빌로 하우스들의 소중한 고객들로 거듭나게 됐다.


물론 새빌로가 처음부터 이들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하우스들, 특히 헨리 풀을 위시한 오랜 전통의 새빌로 하우스들은 전통적으로 할리우드 스타들을 포함한 모든 쇼-비지니스 종사자들의 오더를 공손히 거부하고 있었고, 이는 오직 상류사회의 ‘신사’들만을 섬기던 새빌로의 전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새빌로의 '배타적' 문화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당시 영국의 농담 중에는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가 굴복시킨 색슨 호족에게서 헨리 풀 추천장을 받아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영국 출생으로 훗날 미국으로 귀화하는 캐리 그랜트. "모두가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어 한다. 나도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다"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남겼다.


그러나 새빌로의 하우스들은 더 이상 그들의 배타적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귀족 혈통의 고객들이 점점 고갈돼고 있는 상황에서 '평민' 고객들의 수혈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헨리 풀이 확립한 전통에 따라 모든 광고와 쇼윈도 진열이 금기시됐던 새빌로의 하우스들에게 있어서 고객층을 넓히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빌로에서 슈트를 주문하려면 추천장이 있어야만 한다", "미국 사업가 존 몰간(JP Morgan의 창립자) 역시 문전박대당했다"와 같은 소문들은 새빌로의 사업에 그 어떤 도움도 되어주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소문을 부인하고자 새빌로의 ‘큰 어른’, 헨리 풀의 하워드 컨디는 이례적으로 언론에 헨리 풀의 고객 명단부를 공개하며, 미국인 '존 피어폰트 몰간'이 1857년부터 헨리 풀의 고객이었으며, 헨리 풀은 그 어떤 추천서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했다(리처드 워커).


오늘날까지 많은 남성복 애호가들의 '이상'으로 남아있는 1930년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찰스 2세가 1666년 궁중의복의 새 기준을 확립한지 약 250년만에 남성복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라운지 수트의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어질 포스트들에서는 남성 복식 문화의 전성기라 불리는 30년대와 4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 에드워드 8세와 할리우드 스타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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