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빌로의 탄생 8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국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 저는 왕위를 포기했습니다.”
1936년 12월 10일 국왕 에드워드 8세가 영국 국민에게 남긴 마지막 라디오 방송 내용이다. 히틀러와 독일 제3 제국의 위협이 전쟁의 가능성을 야기하고 있던 1936년,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한 그의 결정(물론 왕에게 호의적이었던 당시 여론의 일부는 수상 볼드윈과 그의 일당들이 왕의 퇴위를 강요했다고 주장했으나)은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은 배우 콜린 퍼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킹스 스피치>>의 못난 형, 데이비드를 기억할 테다. 에드워드 8세는 오늘날까지도 자발적으로 왕위를 포기한 유일한 국왕으로 영국 역사에 남아있다.
난 이번 포스트에서 그의 스타일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가혹한 처사는 아닐 테다. 스타일은 그의 최고 업적이었다. 첨부된 사진들이 증언하듯 그는 남성 복식의 아이콘으로서 부족한 점이 없었다. 다만 탁월했던 그의 스타일에 비해 그의 인품과 삶의 족적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그가 재치, 긍지, 더없이 높은 자존감을 갖추어야 하는 전통적 ‘댄디’의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고 단정한다.
이미 언급한 바처럼 그의 아버지 조지 5세는 전통 복식의 규범에서 어긋나는 그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던 보수적인 국왕이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아주 작은 일탈은 사적인 자리에서 때때로 연미복이 아닌 턱시도를, 윙 칼라 셔츠가 아닌 소프트칼라 셔츠를 착용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왕위를 물려받을 맏아들 데이비드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은 심각한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일찍부터 아들의 옷매무새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고, 데이비드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보모에게 주머니를 모두 꿰매어 버리도록 주문하기도 했다.
왕세자의 바지 취향 역시 조지 5세의 화를 돋우곤 했다. 그는 바지 옆면의 주름을 고집하던 아버지와 달리 바지 앞면에 주름이 잡힌 바지를 선호했는데,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데이비드는 재킷 하나에 바지 두 벌을 주문하여 한 벌은 옆면에, 한 벌은 앞면에 주름을 잡아,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는 후자를 착용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밑단에 커프/턴업이 있는 바지를 선호했는데, 어느 날 식사 자리에 도착한 그의 바지를 본 조지 5세는
“이곳에 비가 오고 있는 줄 아는 게냐? 물웅덩이를 건널 것이 아니라면 왜 바지를 그토록 우스꽝스럽게 접어 올린 것이냐?”
라고 아들을 호되게 나무랐다고 한다.
훗날 윈저 공작은 이러한 아버지의 엄격함이 그로 하여금 강한 반항심을 품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에게 있어서 "혼자일 때... 재킷을 벗고, 타이를 던져버리고, 칼라를 풀어버리고, 소매를 걷어올리는 일은 그저 편안함을 위한 것이 아닌 자유를 상징하는 제스처였다"(윈저 공작)
옷차림에 대한 꾸짖음을 그처럼 종종 겪어야 했다면, 그것을 미리 예측하는 일도 가능했을 법하다. 그러나 왕세자 데이비드는 (보 브루멜의 막역한 친구였던) 조지 4세 이후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옷을 향한 열정을 자랑하던 왕세자였다. 원하는 옷을 원하는 방식대로 입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즐거움이었던 듯하다.
로열 아스콧 행사(1919년 즈음으로 추정된다)에 대담하게도 그레이 색상의 라운지 슈트를 입고 등장한 데이비드는 또다시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고, 다음날 무조건 프록코트를 입으라는 왕의 명령이 그에게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당장 입을 수 있는 프록코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는 그의 군복 테일러 프레데릭 숄티에게 도움을 청했고, 숄티는 재봉사와 함께 밤을 새워서 다음날 아침까지 왕세자의 코트를 완성한다. 그 후 숄티는 40년 동안 왕세자-윈저공의 슈트 (재킷) 제작을 담당하게 된다. (왕세자 데이비드는 왕족/귀족으로는 드물게 제 때에 옷 가격을 지불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이상적인 고객이었던 셈이다.)
숄티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네덜란드 태생인 그는 코크가에 그의 첫 가게를 열었고, 곧 그 실력을 인정받아 헨리 풀의 맞은편, 새빌로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제복 테일러이기도 했던 그는 영국 호위병의 제복에 큰 영감을 받았고, 사복인 라운지 슈트에 제복의 수려함을 도입하는 일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한 그의 시도가 탄생시킨 것이 오늘날 영국식 드레이프 컷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슈트다. 드레이프 컷의 슈트는 여유 있게 재단된, 하지만 자연스러운 어깨 라인, 볼륨 있는 가슴과 등,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실루엣을 추구했고, 이는 전쟁 이후 새로이 각광받고 있던 ‘남성적’ 실루엣과 잘 맞아떨어졌다. 가슴과 어깨 blades 쪽에 여분의 옷감을 남기고, 암홀을 매우 높게 재단하여 움직임에 편리함을 주는 숄티의 재킷은 오늘날 새빌로의 대표 하우스 중 하나인 앤더슨 앤 쉐퍼드의 하우스 스타일로 유명세를 올리고 있다. (앤더슨 앤 쉐퍼드의 스타일은 숄티의 스타일에서 유래했으며, 창업자 펄 앤더슨은 숄티 밑에서 기술을 배운 인물이었다. 앤더슨 앤 쉐퍼드는 숄티가 창안한 드레이프 컷의 적통 후계자인 셈이다.)
윈저 공은 숄티를 두고 그를 위한 완벽한 재킷을 만들 줄 아는 인물이라 평했고, 1919년 이후 40년 동안 꾸준히 그에게서 재킷을 주문했다. 물론 그는 당대의 관습대로 다수의 테일러에게 그의 워드로브를 맡기고 있었다. 그의 포멀 슈트를 담당하던 하우스는 숄티의 라이벌인 새빌로의 킬고르였다.
윈저공의 독특한 취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보통 연내 행사에만 마지못해 킬트를 입던 나머지 왕족들과 달리 평소에도 스코틀랜드 킬트를 입는 일을 즐겼고, 캐주얼한 트위드 재킷에 플러스-포 차림으로 골프를 쳤다. 스포츠를 즐길 때면 그는 매우 화려한 체크 무늬의 의상을 착용하곤 했는데, 실제로 "스포츠용 옷의 체크는 화려할수록 좋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편안함은 옷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공공연히 "부드럽게 옷을 입는다(Dress soft)"는 원칙을 내세웠고, 그런 그가 즉위 후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궁중 내에서 프록코트를 착용하는 전통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더블브레스트 슈트를 입었을 때 웨이스트 코트/조끼가 불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선 그 후로 웨이스트 코트의 착용을 거부했고, 빳빳한 윙 칼라 대신 소프트한 칼라의 셔츠를 선택했다. (그는 "만약 내가 풀 먹인 칼라를 입고 있다면 내 소매 커프는 소프트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편안함'을 위해 그가 시도한 변화 중 몇몇은 오늘날 남성복 애호가들조차 놀라게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 서스펜더/브레이스를 착용하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그는 벨트로 허리를 고정하는 미국식 바지를 선호했는데, 심지어 바지 웨이스트-밴드에 고무줄을 넣어 입는 일 역시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킷은 숄티에게 맡겼지만, 영국식의 포멀한 바지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1940년대부터 뉴욕의 H. 해리스에게 그의 바지를 제작했고, 새빌로는 이 ‘배신’을 영원히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버튼 플라이가 아닌 지퍼 플라이를 처음 바지에 도입한 '선구자' 이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영국과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비스포크 테일러가 버튼-플라이를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는 극도록 '편안함'을 중시했던 남성이었던 듯하다. 게다가 당시의 지퍼는 오직 가방에만 활용되던 것이었기에, 바지에 적용됐을 때에는 그다지 편리하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55벌의 라운지 슈트와 15벌의 이브닝 슈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 산 옷을 평생 버리지 않고 입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아내 월리스 부인은 그와 결혼한 뒤 남성복 유행을 주도하던 그가 새 슈트를 잘 사지 않는 남성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회상한다.) 그가 평생 슬림한 체형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즐기던 그였지만, 슈트의 핏과 디테일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재킷의 소매 커프에는 정확히 4개의 버튼이 자리해야 했고, 타이 노트를 볼륨감 있게 맬 수 있도록 타이에는 두꺼운 라이닝이 들어가야 했다(그는 그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달리 윈저 노트로 타이를 맨 적이 없다.) 재킷의 주머니는 언제나 플랩이 없는 제트-포켓이어야 했고, (오늘날까지도 새빌로의 하우스들에서 가장 선호하는 선택지가 커다란 플랩이 달린 포켓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취향은 전통적 영국의 그것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바지 왼쪽 뒷주머니의 입구는 오른쪽의 그것보다 크게 만들어져 그가 담배 케이스를 넣고 꺼내는 일을 편리하게 해주어야 했다(그는 악명 높은 애연가였다). 그는 매번 재킷 한 벌에 바지 두 벌을 오더 했고, 균일하게 교대로 착용하여 한쪽이 먼저 낡는 일을 방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커프 링크스와 반지 외(블랙 타이 착장 시의 셔츠 스터드를 제외하면) 그 어떤 보석도 착용하지 않았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바는 잘 알려진 그의 플라넬 사랑이 참 유별났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오직 여름에만 착용되던 플라넬이 여러 계절에 걸쳐 활용되는 옷감으로 거듭나게 된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으리라 추측해본다. 샤프한 우스티드보다는 방모사의 트위드와 플라넬을 선호한 일은 분명 ‘편안함’을 매우 중요시했던 그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그는 당시 매우 이색적으로 4 on 1 형태의 더블브레스트 재킷을 즐겼는데 (그의 동생이 바로 더블브레스트 재킷 최하단의 단추를 잠그는 유행을 선도한 켄트 공작이었다), 이는 보편적인 선택인 6 on 2 (6개의 버튼 중 2개 중 하나를 선택해서 잠글 수 있는) 보다 더 캐주얼한 재킷의 형태를 구현한다.
단신인 그에게 있어서 4 on 1은 썩 잘 어울리는 선택인 듯하다. 내 눈에는 6 버튼의 더블브레스트 재킷보다 캐주얼한 4 버튼의 더블브레스트 재킷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
(사실 그에겐 안 어울리는 것이 없어 보인다 - 달리 말하자면 그는 안 어울리는 것을 걸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남성의 코트는 가능한 한 기장이 긴 것이 좋다. 코트가 너무 짧으면 반쪽짜리 코트가 돼버리고 만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코트들은 꽤나 그 기장이 길어 보인다.
코트에 있어서도 그는 버튼 6개보다는 4개의 버튼을 선호했던 듯하다. 4 버튼 코트는 4버튼 더블 브레스트 재킷처럼 6버튼 코트에 비해 캐주얼한 인상을 준다.
왕세자 시절 남성복 시장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19, 1924, 1927년 미국을 방문한 그는 가는 곳마다 굉장한 환영을 받았으며, 젊은 남성들은 그가 입고 있던 옷들을 모조리 답습하고자 했다. "왕세자가 입었던"의 수식어는 당시 최고의 선전 문구였고, 초크스트라이프 더블브레스트 슈트, 아가일 체크 양말, 페어 아일 스웨터, 타탄체크, 글렌 플레이드 등 그가 입고 등장하는 모든 제품은 최고의 인기 상품으로 부상했다. (그가 즐겨 입었다는 이유 만으로 글렌 플레이드 체크는 오늘날까지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 체크로 불리고 있다. )
심지어 그가 입은 옷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방하기 위해 자신의 테일러에게 '왕자가 입은 옷 모두를 그대로 똑같이 제작하라'는 오더를 미리 기입해둔 미국의 신사들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윈저 공작 역시 자신의 이러한 영향력에 무지하지 않았다. 그는 1950년대를 강타한 타탄체크 유행을 시작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야기인즉 어느 날 저택에 타탄체크 슈트를 입고 나타난 그를 본 친구가 패션 업계에 일하는 그의 지인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고, 그는 곧장 미국에 전보를 보내 타탄체크 슈트의 대량생산에 착수했다는 것이었다.
퇴위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더욱 편안한 복장을 즐겼다. 특히 스포츠를 사랑했던 그는 스포츠용 의상을 로마에서 제작했는데, 당시 로마 최고의 테일러였던 도메니코 카라체니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행을 즐겼던 그가 나폴리와 카프리에서 오늘날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나폴리 스타일의 슈트를 경험한 뒤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바하마 제도의 주지사 직을 잠시 수행한 것을 제외하면 윈저 공작은 퇴위 이후 오로지 스포츠, 파티 여가로 여생을 탕진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또 다른 책무를 맡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회상했지만, 여유로운 젯-셋 라이프 스타일은 느긋한 그의 성품과 잘 맞았던 것 같다.
그의 유별난 옷 사랑이 그의 뒤를 이은 왕가의 남성들로 하여금 스타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일을 꺼리게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왕세자-국왕 시절 받았던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만큼 퇴위 뒤 언론과 역사가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의 삶이 증언하는 그의 수많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남성 복식사에 있어서 그가 20세기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난 윈저 공작의 탁월한 감각에 감탄하면서도 그의 푸른 눈 뒤에 자리하는 졸렬함과 소심함에 거듭 실망을 금치 못한다. 전란의 시대에 국왕의 아들로 태어나 변변찮은 '한량'의 삶에 안주한 그의 삶은 그의 수려한 외모와 탁월한 취향의 매력을 반감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