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빌로의 탄생 9
할리우드에 관련된 많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시상식 시즌마다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프레드 아스테어가 평생 소유했던 것보다 많은 수의 턱시도가 전달됨에도 불구하고, 아스테어가 여전히 남성 복식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반면, 오늘날 LA에는 최소한의 스타일이라도 보여주는, 아니면 타이라도 하나 소유하고 있는 배우가 조지 클루니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제임스 셔우드)
남성 복식의 황금기(1930-50년대)는 할리우드의 황금기와 함께 찾아왔다. 더글라스 페어뱅스, 험프리 보가트, 프레드 아스테어, 빙 크로스비, 개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캐리 그랜트, 지미 스튜어트, 그레고리 펙, 프랑크 시나트라가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던 할리우드의 대표 남성 배우들이었다.(훗날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로널드 레이건이 영화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그의 경쟁상대들을 감안했을 때 이해할 만한 것이다.)
당시 할리우드의 생태계는 오늘날의 그것과는 달랐다. 영화계를 주도하던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배우들은 스크린 밖에서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스타 다운 워드로브를 갖춰야만 했다. 그들에게 있어선 성가신 일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스타일과 이미지에 대한 인식은 이 시기 할리우드 남성 배우들을 모두 비스포크 테일러, 특히 영국 새빌로 하우스들의 고객들로 만들어 주었다.
난 이 시기의 영화들을 즐겨보는데, 단역들마저 완벽한 착장을 갖추고 있는 30-50년대의 영화 속 남성들의 의상은 어마어마한 칼라-갭, 지나치게 짧은 재킷, 너무 슬림한 바지, 격식에 전혀 맞지 않는 신발 일색인 21세기 할리우드 영화 속의 남성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다.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의 의상 버젯이 천문학적이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영화 업계의 천박함에 환멸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다고 1930-50년대의 영화가 모두 훌륭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급된 배우들 중 해쉬태그 멘즈웨어 운동과 함께 스타일 아이콘으로서의 부활을 맞이하고 있는 배우는 단연 프레드 아스테어와 캐리 그랜트다. 아스테어가 앤더슨 앤 쉐퍼드의 오랜 고객이었으며, 춤을 출 때에도 재킷 칼라가 목에서 떨어지지 않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런던의 피팅룸에서 춤을 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스타일 아이콘으로서의 아스테어를 다루는 글들은 보통 그의 춤, 혹은 그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로 그 운을 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Fred Astaire Style의 저자 브루스 보이어는 캐리 그랜트, 게리 쿠퍼, 그레고리 펙, 클라크 게이블과 달리 프레드 아스테어는 키가 크지도, 피부가 구리 빛을 띠지도, 잘 생기지도 않은 배우였다고 말한다(당시 남자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선 셋 중에 둘 이상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심지어 한 브로드웨이 비평가는 그의 두상을 배(pear)에 비교했고, 그의 스크린 테스트에 참석한 MGM 스튜디오 직원은 그에 대해 "연기도 못하며, 머리가 빠졌고, 거기다 춤도 춘다"라고 평했다. (아스테어는 이 혹평을 종종 스스로 언급하곤 했다)
보이어는 키도 크지 않고, 탈모가 있는 데다 잘 생기지도 않았던 그의 성공은 ‘스타일의 승리’ 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분명 특출 날 것 없는 그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크린 위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그는 근 30년 동안 할리우드의 대표 스타로 활동했으며,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던 그를 모르는 미국인은 없었다.
보이어는 아스테어의 평범한 외모는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을 제시한다고 평한다. 그를 보고 있자면 우리도 노력만 한다면 그처럼 멋진 스타일을 갖출 수 있으며, 진저 라저스와 같은 여성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스테어는 윈저 공작, 캐리 그랜트, 지아니 아니엘리와 함께 20세기 남성 스타일의 정점에 자리했던 남성 이었다. 오늘날 보이어가 말하는 '꿈'을 현실화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남성 복식의 교과서 Dressing the Man의 저자 알란 플루서는 "난 남성들을 프레드 아스테어로 변신시킬 수 있는 방법의 매뉴얼을 쓴 것이 아니다. 나는 보통 남성이 지킬 수 있는 룰을 전수했을 뿐이다. 아스테어는 역사상 그 어떤 이보다도 스타일리시한 남자였다"라고 말한다. 그 역시 아스테어 정도의 스타일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테어와 같은 엔터테이너는 아마 다시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오늘날 그 어떤 배우도 동시대 최고의 발레 댄서 루돌프 누레예브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댄서’라 칭한 프레드 아스테어처럼 춤을 추는 일을 바랄 수 없다. 그의 스타일이 그의 성공을 만들었다면, 그의 스타일을 만든 것은 그의 음악적 역량이었다.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소질을 보였던 아스테어는 그의 누나 아델 아스테어와 함께 1917년부터 영국과 미국의 스테이지에서 춤과 노래로 공연을 시작했고, 1933년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인 1935년의 탑 햇, 1936년 스윙 타임에 등장하는 아스테어는 이미 20년 이상의 무대 경험을 갖춘 베테랑이었다.
배우로서 아스테어가 선보이는 ‘분위기’ 역시 독창적이었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대다수의 남주인공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얇았고, 그의 캐릭터는 지나치게 가벼웠으며, 지적이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따라서 배우로서 그가 구축한 이미지는 캐리 그랜트, 그레고리 팩 등의 배우들이 연기한 전통적 남자 주인공의 그것과도, 그의 뒤를 따른 제임스 딘, 말론 브란도의 '반항아' 이미지와도 상반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계보를 이어받은 배우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린 영화 속 그가 그 누구보다도 스타일리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스테어는 오늘날까지도 지나치게 마르고, 목소리도 가늘며, 잘생기지도, 심지어 지적이지도 않은 남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탁월한 스타일 만으로 다다를 수 있는 어떠한 경지의 상징으로서 존재한다.
그의 매력은 그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과는 무관하다. 그는 ‘절대적으로’ 최고의 댄서였고, ‘절대적으로’ 훌륭한 스타일의 보유자였다. 미국인 특유의 가벼움을 좋아하지 않는 나 역시도 탑 햇에서 연미복을 입고 춤을 추는 그의 모습에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아스테어의 스타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그가 동시대의 많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윈저 공작의 팬이었으며, 그의 스타일을 철저하게 모방하고자 했던 남성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하겠다.
아스테어는 1924년, 당시 왕세자였던 윈저공을 만나게 된다. 찰스턴과 재즈를 사랑한 윈저공은 런던에서 아스테어 남매의 쇼를 관람했고, 백스테이지까지 그를 찾아가 그의 쇼를 직접 극찬했다
아스테어는
“HRH(왕세자 전하)는 영국에서 가장 멋진 남성이었다. 난 그가 입은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를 위해 특별 제작된 웨이스트 코트의 라펠은 정말 멋졌다. 웨이스트 코트의 앞면은 코트의 그것보다 1인치도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내 마음에 들었다”
라고 회상한다.
(아스테어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윈저공 역시 처음 만난 아스테어의 스타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드레스룸에 걸려 있는 아스테어의 바지들에 각각 그 바지만의 서스펜더/브레이스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후 그것을 모방하게 된다.)
왕세자의 셔츠와 웨이스트 코트를 제작하는 가게의 이름을 알아낸 아스테어는 다음날 곧장 그곳을 찾아가 같은 웨이스트 코트 주문을 의뢰했지만, 왕세자의 로열 워렌트를 지니고 있던 콧대 높은 새빌로의 Hawes & Curtis는 그의 의뢰를 거절한다. (여기서 전기들의 이야기는 엇갈린다. 그 중 몇몇은 아스테어가 Hawes & Curtis가 오늘날까지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고객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전 편에 다루었듯이 새빌로의 테일러들이 쇼-비즈니스 종사자들의 주문을 거절하는 일은 20세기 초기까지 종종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새빌로에도 할리우드의 마케팅 효과를 반기는 하우스들은 다수 존재했다. 아스테어는 곧 앤더슨 앤 쉐퍼드에서 그의 슈트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윈저 공작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동시에 할리우드 최고의 ‘댄서’이고자 했던 프레드 아스테어에게 있어서 더 훌륭한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숄티를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그는 아스테어를 문전박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영화 속 아스테어의 팔과 다리는 매번 새로운 발레, 재즈, 볼 룸, 탭 댄스의 움직임을 소화해야 했고, 그의 슈트는 그의 움직임을 따르되 그 모양새에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따라서 높은 암홀과 여유 있게 재단된 소매 입구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암홀이 높게 제작된 옷은 소매와 몸통의 분리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 주며, 따라서 움직임의 자유를 준다. 다만 소매가 암홀보다 더 크게 재단됨으로써 소매가 암홀에 달렸을 때 소매 쪽 여분의 옷감이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앤더슨 앤 쉐퍼드식의 소매는 암홀에 비해 보통 3인치 정도 여유 있게 재단된다.) 앤더슨 앤 쉐퍼드의 드레이프 컷은 높은 암홀, 여유 있는 어깨, 가슴과 등 쪽에 여분의 옷감이 가미되는 방식의 재단을 추구했고, 이는 왜소한 아스테어의 몸에 볼륨감을 더해주는 동시에 그가 움직일 때 슈트의 실루엣이 망가지는 걸 최소화했다. (드레이프 재단은 착용자가 팔을 뻗을 때, 옷 전체가 아닌 가슴의 여분 옷감이 움직이게 함으로써 슈트가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게 해 준다.)
물론 앤더슨 앤 쉐퍼드에게 있어서도 새빌로 카디건이라 불릴 만큼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강조하는 하우스 스타일의 장점을 프레드 아스테어 이상으로 탁월하게 설득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스크린 위에서는 마치 즉흥적으로 춤을 추듯, 더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아스테어지만, 그는 악명 높은 완벽주의자였다. 그 어떤 힘도 들이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는 그의 파트너 진저 라저스를 지나치게 혹사시킨 나머지 그녀의 발에 피가 나게 한 적도 있었다. (브루스 보이어)
물론 그는 그의 워드로브 선택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는 배우였다.
1940년 작품인 Second Chorus 한 편에 아스테어가 입고 등장한 의상들을 캡처해 보았다.
탁월한 스타일리시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의 옷차림에 있어서 매우 겸손한 남자였다. 그는 1957년 GQ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가끔씩 베스트-드레스드-멘 리스트에 오른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항상 놀라운 일이에요. 전 스스로를 빈틈없이 완벽한 옷차림을 한 멋쟁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의 취향을 만족시키면서 편안한 옷차림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죠"
라고 고백한다.
테일 코트와 탑 햇을 쓴 캐릭터를 연기하며 유명세를 얻은 아스테어는 실제로 포멀 이브닝 착장보다는 편안한 복장을 즐겼다. 그는 그가 모방하고자 했던 윈저 공작처럼 플라넬과 트위드 소재의 슈트/재킷을 즐겨 입었다.
그의 워드로브는 대략 두 벌의 연미복 (영화 촬영 이외에는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 두 벌의 더블브레스트 디너 재킷, 스무 벌의 슈트, 열 두 벌 정도의 스포츠 코트에 각종 그레이 플라넬 바지와 면바지로 구성돼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슈트 여섯 벌 정도를 나눠줬어요. 난 입지 않는 슈트가 그저 옷장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는걸 정말 싫어해요."라고 말했다.
난 테일러링에 있어서 까다로운 편이에요. 보통 슈트를 받은 후에 테일러에게 적어도 여섯 번 이상은 다시 가져가죠 - 너무 어깨가 크거나, 너무 크거나, 너무 꽉 끼거나. 난 너무 많은 옷감을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지나치게 많은 옷감을 내 몸 위에 걸치는 걸 싫어하죠.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특별히 편애하는 옷감이 있다면 그것은 실크처럼 부드러운 비큐나일 것이라고 아스테어는 고백한다. (GQ 인터뷰) "가벼운 다크 블루 비큐나 오버코트처럼 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옷은 없죠"라고 그는 말한다.
옷차림에 있어서 그가 추구하는 바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난 내 슈트가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난 누군가가 날 거듭 훑어보면서 "대체 뭘 입은 거야?"라고 말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의 색상의 옷을 즐기던 윈저공의 팬이었던 아스테어에게도 보 브루멜이 확립해놓은 남성복식의 이념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어쩌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테다. 그는 그가 언제나 전통 영국식 복식을 지향했다고 밝힌다.
"우리는 그들(영국)의 공적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디자인과 테일러링에 있어서 언제나 일관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거의 변하지 않아요." (GQ 인터뷰)
따라서 그는 슈트에 있어서는 다크 블루, 다크 그레이, 다크 브라운 색상을 즐겼으며 ("밝은 색 중 제가 좋아하는 색상은 라이트 그레이뿐입니다."), 스트라이프 슈트 역시 좋아했지만 스트라이프 사이에 1인치 혹은 1.5인 치 이상의 간격이 있는 비교적 와이드 한 스트라이프 옷감만을 선택했다.
"그건(와이드 스트라이프) 영국식 스타일이죠. 우리는 스타일에 있어서 그들(영국)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거나, 조금씩 가까워지곤 하죠. 그러나 결국 그들의 옷에 관한 이념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스테어)
영국식 전통에 충실하려 한 아스테어는 슈트 재킷을 포함한 모든 재킷에는 7인치 정도 깊이의 사이드 벤트가 자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물론 그는 벤트가 없는 벤트리스 재킷도 즐겼다), 중년 이후로는 쓰리 버튼이 아닌 투 버튼 재킷을 선호했다.
"난 오로지 버튼 하나만을 잠급니다. 그게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
그의 바지에는 항상 커프가 잡혀 있었고, 볼륨감 있도록 통이 넓게 재단되었다. 다만 그는 대부분의 남성들의 바지 보다 약간 더 짧은 기장의 바지를 선호했다.
그는 "난 바지가 내 신발 위로 흘러내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아스테어)라고 설명한다. 현란한 발놀림을 연출해야 하는 그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테다. (그렇다고 서 있을 때 발목이 보일 정도로 짧은 바지를 입지는 않았다.)
그의 '의외로' 보수적인 취향은 보석에 있어서도 일관적이었다. 그는 프렌치 커프보다는 버튼 커프를 선호했고, 심플한 금반지와 타이 액세서리 이외에 그 어떤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았다. (물론 포멀웨어 착용 시 요구되는 루비-다이아몬드 셔츠 스터드와 커프링스는 제외였다) 몇 천 개의 타이를 소유하고 있을 법하지만 오직 50-100개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고, 짙은 색상의 아주 작은 무늬들이 가미된 타이만을 좋아했다. 그 외에 그가 속해 있는 클럽을 대표하는 레지멘털 스트라이프 타이를 두 개 정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셔츠에 있어서도 그는 화려한 탭/핀 칼라보다는 버튼 다운 혹은 스프레드-칼라 셔츠를 선호했다.
"나는 내가 슈트를 입었을 때 특별히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사실 꽤나 단정치 못한 편이에요. 캐주얼하죠. 난 나 스스로를 위해서 옷을 입을 뿐이에요. 옷에서 편안함을 느끼려고 하죠"
그에 대한 쇼 비즈니스 종사자의 평가 중 하나는: “옷이 잘 어울리려면 잘 생기고, 키가 크며, 날씬해야 한다. 세 가지에 모두 해당되지 못한다면 그중 하나에 있어서는 매우 특출 나야 한다. 프레드 아스테어는 잘 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침을 뱉어도 그를 맞추지 못할 정도로 날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맞춤-셔츠를 주문하기도 했지만 주로 기성-셔츠를 즐겨 입었다. 포멀웨어 착장을 제외하면 그는 핑크, 블루, 등 밝은 색의 소프트한 솔리드 셔츠를 즐겼고 "아주 가끔 스트라이프 셔츠도 구매한다"라고 밝혔다.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로열 웨딩(1951)에서 아스테어가 선보이는 그의 다양한 복장은 전술한 그의 의복에 대한 생각을 잘 반영한다. 그가 영화 중 선보인 옷차림을 캡처해 보았다.
신발에 있어서 그는 안무용 신발을 50 켤레 이상 가지고 있었고, 개인 소장용으로는 20 켤레 정도가 있었다. 그는 "그 정도 수의 신발을 가지고 있는 게 경제적으로도 현명합니다. 난 20년 된 신발들도 가지고 있어요. 어제 산 것처럼 멀쩡합니다. 장담하건대 전 그 신발들을 정말 많이 신었어요"라고 말했다. 몇 쌍의 신발은 그의 발에 너무 크고, 그는 그것을 신을 때면 양말을 두 겹으로 겹쳐 신었다. 그는 그의 신발을 모두 영국에서 맞춤-제작했다.
구두 소재로는 윈저 공과 마찬가지로 스웨이드를, 특히 로퍼 모델을 선호했다. 포멀 웨어용 구두를 제외하고 그의 구두는 모두 다크-브라운 색상이었다.
아스테어는 벨트보다는 실크 손수건으로 허리를 조이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은 오로지 실용성을 위한 선택이었는데, 그의 31인치 허리 사이즈는 그가 춤을 출 때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그럴 때 실크 손수건은 허리를 졸라매는 걸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는 "난 예전에는 넥타이를 사용했었는데, 손수건이 더 효과적이더군요”라고 말했다.
거의 모든 아이템에 있어서 그는 완벽한 재단과 보수적인 색상이라는 그의 철칙을 지켰다. 그러나 양말에 있어서는 약간의 일탈을 즐겼는데, 면이나 실크 양말보다는 양모 소재의 패턴이 가미된 양말을 좋아했다.
(평소에는 타이를 매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던 그 였지만 공공장소에서 반바지를 입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클래식한 옷감, 색상, 스타일의 슈트와 아주 작은 패턴들이 가미된, 혹은 무지 셔츠의 조합인 영국식 스타일을 그의 스타일로 규정한다. 복장에 있어서 그의 신념은 "'나'답게 입어라. 다만 눈에 띄지 말아라"였다.
아스테어는 "모든 여자는 그의 여자가 되고 싶어 했고, 모든 남자는 그가 되고 싶어 했다"의 표현으로 수식되는 캐리 그랜트 류의 '리딩 맨'이 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 남성복 애호가 중에서도 슈트를 갖춰 입고 집 밖을 나서면서, '나는 오늘 프레드 아스테어처럼 보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이는 극히 드물 테다.
그는 노동하지 않는 우아함의 예술가, 절대적인 자존감과 재치의 소유자,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전통적 댄디가 아니었다. 그의 스타일은 오로지 스크린 위 그의 모습을 향유하며 즐거워해 줄 관객을 위한 것이었다. 대중은 그를 스타로 만들어주었고, 아스테어는 엔터테이너로서 성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그가 혼신의 힘으로 구현해낸 아름다움을 접하는 일은 여태껏 격한 감동을 준다.
아직 보지 못했다면 (이미 봤더라도) 아래의 영상들은 무조건 시청하도록 하자. 후회 없을 테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KugrnvZAA
https://www.youtube.com/watch?v=3FoBdwjh__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