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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pr 03. 2020

캐리 그랜트 Cary Grant

새빌로의 탄생 10

캐리 그랜트는 스타일의 시작이자 그 끝이다. (알란 플루서)




프레드 아스테어 포스트를 위한 리서치 과정에서 가장 자주 접한 표현들이 '그는 잘 생기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지 않았다. 그는 카리스마가 없없다.' 따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예고되는 수식어들이었다면 캐리 그랜트의 스타일을 다루는 글의 대다수가 "그가 그저 잘 생겨서 멋지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혹은 "그것이 타고난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라"의 으름장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큰 키, 구릿빛 피부, 잘 생긴 얼굴"을 모두 갖춘 배우 캐리 그랜트의 특출난 외모가 그가 활동하던 시절, 그의 스타일보다 각광받았던 일은 어쩌면 당연할 테다. 그러나 사진 한 장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그의 멋진 스타일을 이토록 열성적으로 '변호'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짐작컨데 프레드 아스테어는 사람들이 그의 부족한 외모를 속속들이 따져 드는 일을 원치 않았을 테고, 캐리 그랜트 역시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쏟아야 했던 시시콜콜한 노력을 대중이 전부 발굴해내는 것을 원치 않았을 테다.   


아무튼 이와 같은 '남성복 작가'들의 '과민 반응'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 캐리 그랜트는 남성복 애호가들에게 있어서 아스테어, 윈저 공작, 지아니 아니엘리와 더불어 남성 복식의

이상향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To Catch a Thief>> 속 캐리 그랜트의 휴양지 '룩'이다. 골드 버튼이 달린 언-컨스트럭티드 플라넬 재킷에 오픈 넥 셔츠, 아스콧, 브라운 로퍼를 매칭했다.



캐리 그랜트가 멋지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많지 않을 테다. 다만 연이어 맞닥뜨리는 "잘 생긴 얼굴, 멋진 외모, 거부할 수 없는 매력"등의 단어들은 내게 있어 작은 의문을 안겨준다. '내가 캐리 그랜트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살지 않아서 일까?)'


수많은 영화를 통해 내가 접한 캐리 그랜트는 클래식 남성복 착장에 있어서 '노력이 필요 없는 외모'를 타고난 배우는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어울리는 슈트를 입었을 때 빛이 나는 남성' 이지, '무엇을 입어도 빛이 나는' 아니엘리 류의 남성은 아니다. 난 그가 슈트를 입었을 때 슈트 본연의 아름다움 그 이상을 끌어내는 우아함을 갖춘 남성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내 취향에 있어서 (영국 출생인) 그는 지나치게 미국적이다.


물론 전성기 시절 캐리 그랜트의 사진들만을 보면서 이러한 점을 감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르첼로 마스트리아니. 슈트를 입으면서도 캐주얼함을 추구했던 미국 배우들과 달리, 그는 지나치게 편안해 보이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Plein Soleil(1960)에서의 알렝 들롱.  블레이저의 화려한 패턴이 눈에 띄지 않을 지경이다.


"파티에 그가 등장하면, 그는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여자를 포함해서. " 그는 "여자들은 내게 미쳐있어요"라고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리플리>>의 주드 로. 사석에서는 이만큼의 멋진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태닝과 클래식 스타일로 입히는 것만으로도 빛을 발하는 주드 로다.



입고 있는 재킷과 바지까지 담고 싶었지만, 클로즈업 샷이 젊은 시절 그의 수려한 외모를 잘 전달해주는 듯하다. (다만 셔츠 칼라가 조금 짧아 보인다)



위의 사진 속 배우들과 (젊은) 캐리 그랜트 사이의 차이를 집어내기 위해선 대단한 안목이 필요치 않다. 캐리 그랜트의 외모는 '스크린' 위에서 우아함을 뽐내기에는 지나치게 남성적이다. 중요한 점은 당시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 역시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


브로드웨이 연극배우였던 28살의 캐리 그랜트는 1932년, 영화배우로 데뷔하기 위해 치른 첫 스크린 테스트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먹는다.  스튜디오는 그의 커다란 머리와 지나치게 굵은 목, 나온 배, O자 다리를 지적했고, 그는 훗날 이 테스트가 "끔찍한 경험"이었음을 고백한다.


29살의 캐리 그랜트. 할리우드 배우로서 데뷔한 지 갓 1년이 지났을 때의 모습이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바지 다림질'로 생업을 이어가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본명은 아치발드 리치다) 16살에 집을 떠나, 소년 시절을 보드빌 극단의 단원으로 보냈고, 그 과정에서 받았던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근육질의 몸과 굵은 목을 얻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 그의 남자다운 얼굴과 커다란 몸은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에서 관객을 매료시키던 무기였지만, 스크린 위에선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를 실제로 접한 여성들은 그의 '남자다운' 몸을 사랑했다. 훗날 슬림해진 그를 본 영화배우 캐서린 햅번은 일찍이 그녀가 알던 '근육질 남자'를 잃은 일을 안타까워했다고



촬영장에서 할리우드의 수많은 여성 배우들을 첫눈에 반하게 만들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갖췄던 그였지만, 그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스크린 위에서도 최고의 스타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캐리 그랜트는 '연기파 배우' 또는 '캐릭터 배우'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할리우드의 '리딩-맨' 자리를 탐했던 그는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오로지 대중적 인기와 영화의 상업적 성공만을 염려했던 배우였다.



그랜트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카메라와 조명이 노출시켜버린 브리스톨 악센트, 굵은 목, 큰 머리, 휜 다리는 그가 아직 시골 소년 '아치 리치'의 허물을 완전히 벗지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본모습'으로는 할리우드의 탑스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스튜디오는 "키가 크고, 구리 빛에, 잘 생긴" (Tall, Dark and Handsome) 남성일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자신감까지 갖춘 이상적인 남성을 찾고 있었고, 영국 청년 아치 리치에게 그 소질이 없다고 판단했다.



대부분의 배우 지망생들에겐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일은 영화계 진출의 꿈을 박탈 당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발명'해야만 했다. 브리스톨의 아치 리치는 할리우드의 캐리 그랜트로 거듭나야 했다. 그의 변신은 두 번째 스크린 테스트에서 스튜디오 측의 권유로 '캐리 그랜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오늘날 남성복 작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캐리 그랜트의 스타일은 아치 리치가 '캐리 그랜트'로 변신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진화의 결실이었다.




하운즈 투스 트위드 재킷에 오픈 넥 셔츠 차림의 캐리 그랜트다. 물론 멋지지만 187에 달하는 키와 타고난 체격은 샤프한 우스티드 슈트 아래서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변신을 꿈꾸던 그는 다행히도 걸출한 스타일 아이콘이 군림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미국을 찾은 영국 출신 시골 소년 아치 리치는 당시 영국의 왕세자로서 북미를 종종 방문하고 있던 윈저 공작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왕세자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스테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렌트에게도 윈저 공작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오늘날 스타일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할리우드 스타에겐 각종 스타일리스트들이 달라붙을 테지만, 그의 경우, 그러한 쓸데없는 소란은 필요치 않았다. 그랜트는 윈저공을 위시한 수많은 댄디들의 전철을 밟기로 결정했다. 그를 구원해줄 손길을 찾아 모국의 수도, 런던 새빌로, 윈저 공의 셔츠 테일러인 Hawes & Curtis와 Jeremyn가의 Turnbul & Asser를 찾았던 것.



1919년, 왕세자 시절 캐나다를 방문한 윈저 공작이다. 어쩌면 그는 국왕보다는 영화배우가 더 적성에 맞았을 듯하다.




Hawes & Curtis와 Turnbull & Asser는 그의 17.5인치 목과 큰 머리를 상쇄시켜줄 높은 칼라를 제작해 주었다. 목을 가리는 다방면의 노력의 과정에서 그는 핀-칼라를 착용하기도 했으나, 클래식한 스프레드 칼라와 버튼 칼라 이외의 스타일은 두꺼운 그의 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중년의 캐리 그랜트는 오직 스프레드 칼라와 버튼 다운 칼라 셔츠만을 착용하게 되고, 이것은 그의 '남자다운'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지적받은 배를 없애기 위해 즉각 실행한 식단 관리와 운동의 지속 덕분에 그는 커리어 내내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중년 캐리 그랜트의 작품들 속에서 가늘어진 몸매와 함께 한 결 얇아진 그의 목 역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일찍이 들어선 목을 감추는 습관은 50년대까지 사라지지 않았고, 영화 속 캐리 그랜트는 타이를 풀어 던진 경우에도 셔츠 칼라를 치켜세우거나, 스카프로 목을 감싸는 일을 잊지 않았다. )



1946년 <<Notorious>>의 한 장면. 목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보기 드문 샷이다. 이미 젊은 시절보단 많이 야윈 모습이지만 과연 17.5인치 목은 시선을 집중 시킨다.
쓰리 피스 슈트와 클래식한 옥스포트 구두 차림의 캐리 그랜트다. 물론 멋지지만, 칼라 사이의 공간이 좁은 핀-칼라 셔츠는 그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코트와 셔츠의 칼라를 전부 치켜세워 올린 모습이다. <<To Catch a Thief>>(1955)
중년의 그는 벨트나 서스펜더보다는 사이드-어드저스터가 부착된 바지를 즐겼다. 나이와 함께 그의 취향은 간소화 일변도의 길을 걸었다.

 


그의 큰 머리를 상쇄시켜줄 재킷의 제작은 새빌로의 킬고르(Kilgour, French & Stanbury)가 맡았다. 당시 많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워드로브를 담당하고 있던 킬고르는(프레드 아스테어 역시 연미복 제작을 킬고르에 맡기고 있었다) 패딩이 가미된 넓은 어깨와 높은 암홀의 수트를 그를 위해서 제작해 주었고, 그것은 상대적으로 그의 머리를 작아 보이게 하면서 그의 체형을 슬림하게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캐리 그랜트 역시 다수의 테일러에게 그의 워드로브를 맡기고 있었다. 그는 Kilgour 이외에도 새빌로의 Hawes & Curtis, 새빌로 컷을 모방하는 일에 전문가였던 뉴욕과 엘에이의 테일러들, 브룩스 브라더스,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던 홍콩의 천재적 테일러들에게서 옷을 주문하고 있었다.


 

쓰리피스 슈트에 클래식 오버코트를 걸친 캐리 그랜트.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기장에 상당히 두꺼운 패딩이 추가된 전형적인 영국식 코트다.



리딩-맨으로 변신하기 위해선 머리 스타일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리 그랜트의 이미지는 칼 같은 오른쪽 가르마를 타고 있는 모습이지만, 할리우드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아치 리치'는 왼쪽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Blonde Venus>>를 촬영하던 어느 날, 감독 Joseph Von Sternberg는 캐리 그랜트의 얼굴이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선, 직접 빗을 들고 캐리의 머리를 반대쪽으로 넘겨버리고, 이 한 번의 빗질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를 탄생시키는 기적의 손길로 남게 된다. 그는 성형 수술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완벽한 얼굴을 탄생시켰고, (토레그로사, Cary Grant: A Celebration of Style) 그 후 캐리 그랜트의 오른쪽 가르마 사이드 파트 머리는 그의 얼굴 위에 영구적으로 안착하게 된다.


젊은 시절 그는 곱실거리는 그의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영화에 출연하곤 했다. 아무리 봐도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머리 스타일이다.



가르마의 방향을 바꾼 것 이외에도 그의 머리는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했다. 젊은 시절 곱슬거리던 그의 머리는 스크린 위에선 영 어색해 보였는데, 그는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코미디 배우였던 맑스 브라더스의 막내 제포 맑스가  광택제 Brilliantine으로 머리에 광을 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것을 흑인 배우들이 주로 사용하던 Dixie Peach 와 섞어 오늘날의 포마드를 연상시키는 끈적거리는 제품을 고안해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미지에서도 알아볼 수 있듯이, 더글라스 페어뱅스, 클라크 게이블과 달리, 그에게는 소년처럼 곱실거리는 머리보다는, 반듯하게 빗어 넘긴 '신사다운/어른스러운' 포마드 스타일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어쩌면 그의 외모가 중년이 돼서야 진정으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은 일찍이 예견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로맨틱한 곡선의 머리카락 흐름을 받아내기에는 그의 머리가 지나치게 크다. 목도 굵고, 몸도 크다.
커리어 초기, 그랜트의 라이벌 중 하나였던 더글라스 페어뱅스 주니어다. 조금 느끼하지만, 캐리 그랜트보다 조금 더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의 외모를 갖추고 있다





<<Gunga Din>>에 함께 출연한 더글라스 페어뱅스 주니어와 캐리 그랜트. 스프레드 셔츠와 재킷의 도움 없이는 머리가 지나치게 커보이던 그랜트.





이처럼 캐리 그랜트는 스타일에 있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해낼 줄 알았고, 그것을 위해 유행과 반대되는 길을 따르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았던 배우였다.



이러한 그의 안목은 그가 착용하는 액세서리에서도 발휘되어야 했다. 커리어 초기, 그는 할리우드 남자 주연에게 요구되던 액세서리들의 착용을 전부 시도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늠름한 체형의 그에겐 타이 핀, 타이 클립, 부토니에레, 화려한 포켓 스퀘어와 같은 '장식용' 아이템들의 과다한 활용은 아무래도 썩 어울리지 않았다. 캐리 그랜트는 점차적으로 그중에서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걸러내야만' 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아이템은 단연 모자와 보타이였다.

 


모자를 제대로 쓰지도 못한 것 같아 보인다. 라펠 홀에 꽂은 카네이션도 캐리 그랜트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토레그로사는 캐리 그랜트의 구릿빛 피부가 그의 얼굴로 하여금 모자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불화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올바른 의복과 매너가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던 1920-40년대 미국에서 공공장소에 모자를 쓰지 않고 나타난 신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텔레비전 토론에 등장한 케네디 대통령의 갈색 머리가 여성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 전, 남성들은 실내에서도 모자를 즐겨 썼고, 남자 배우들에게도 모자를 쓰는 일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지에서 보는 바처럼 캐리 그랜트의 머리 위에서 모자는 매번 짝이 맞지 않는 뚜껑과도 같은 모습을 면치 못했다. 배우의 감정과 신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소품이 되어줘야 할 모자(영화 카사블랑카 속 험프리 보가트의 손에 든 담배와 눌러쓴 모자를 떠올려보라)가 캐리 그랜트의 머리 위에서는 쓸데없이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족으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 수많은 비스포크 모자 장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그가 그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아하지만, 그는 30년에 걸친 그의 커리어 내내 모자를 멋지게 쓰는 모습을 선보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장면을 최소화하는 길을 택했고, 관객들은 아주 가끔씩만 모자를 쓴 캐리 그랜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에겐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구릿빛 피부 외에 그 어떤 추가적 소품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서부/카우보이 영화를 단 한 편도 찍지 않았다)




모자와 보타이를 모두 착용하고 있는 캐리 그랜트. 아직 할리우드 배우보다는 보드빌 단원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보타이 역시 그가 스스로의 스타일을 찾기 위한 여정 속에서 거쳐야 했던 시행착오 중 하나였다.


남성 복식의 황금기였던 20세기 초기 미국에서는 보타이 착용을 즐기는 남성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그랜트는 (위에서 언급한) 제포 맑스의 보타이 스타일을 모방하고자 했고, 다수의 영화에서 보타이 차림으로 출연하며 '보타이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보타이는 캐리 그랜트의 잘 생긴 얼굴을 지나치게 익살스러워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블랙 타이 차림을 제외하고선, 슈트에 롱 타이가 아닌 보타이를 매칭 하는 차림은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굉장히 남성적인 그의 얼굴과 체형은 '진중하지 못한' 모든 아이템과 불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결국 턱시도를 제외한 모든 타이-착장에 있어 롱 타이로 일관하게 되고, 그가 중년에 주로 착용했던 심플한 무지 실크 타이는 솔리드 슈트, 하얀 셔츠와 함께 우리가 알고 있는 캐리 그랜트의 이미지를 완성시켜주었다.


보타이, 카네이션, 포켓 스퀘어에 짙은 검은색의 머리. 흑백 스크린 위에서도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들이 전부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라글란 슬리브 코트 역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메트로-섹슈얼한 착장과는 연이 없는 듯하다.


바지의 너비 역시 수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통 넓은 바지가 아닌 슬림한 바지가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이상적 남성'을 연기해야 했던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숙제는 슈트를 입고 자연스러운 자세를 연출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멋진 외모를 과시하는 일 역시 그에게 있어선 오랜 시간의 연마가 필요한 '기술'이었다. 데뷔 초기,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땀에 잔뜩 젖어서 손을 다시 꺼내기가 힘들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슈트를 입고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는 일을 어려워했다.



어려서부터 유니폼과 슈트를 즐겨 입던 그였지만, (보드빌 악단 시절에도, 브로드웨이 연극배우 시절에도 그는 턱시도와 슈트를 입어야 했을 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담아내는 카메라 앞에서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연출하는 일은 굉장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난 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기 사이의 작품에서 캐리 그랜트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모습들을 캡처해 보았다. 토레그로사는 당시 유행하던 벤트-리스 재킷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지나치게 많은 옷감을 허리 주위에 뭉치게 만들며, 그것이 그랜트의 자세를 어색하게 만들었고, 그가 사이드 벤트가 들어간 자켓을 주문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엔 문제는 조금 더 근본적이다.





재킷 단추 세 개를 다 잠그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의 모양새는 주방장이 앞치마를 두른 채 그 아래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측면에서 봤을 때도 그의 자세는 정말 어색하다.  캐서린 햅번의 꽁무니를 쫓으면서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벤트-리스 재킷의 단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나치게 넓은 어깨와 핀 칼라의 셔츠, 통이 넓은 바지 역시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여배우이자 캐리 그랜트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베치 드레이크는 '신인 배우 캐리 그랜트'가 굉장히 "뻣뻣했었다"라고 회상한다.


손의 위치와 무관하게 그 어떤 자세에서도 당시 캐리 그랜트의 손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경험의 부족에 따른 자신감의 부족이 어색함의 원인으로 보인다.

 


토레그로사가 말하듯 깊은 사이드 벤트는 분명 손을 주머니에 넣고 빼는 일을 수월하게 만들어주었을 테다. 그러나 50대에 들어서도 그랜트는 깊지 않은 리어-벤트, 혹은 벤트가 없는 벤트-리스 슈트 재킷을 여전히 즐겨 입었고, 자연스런 포즈를 연출해 주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충분한 연습과 그것이 주는 자신감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리어-벤트로 제작된 재킷을 입고 자연스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중년의 캐리 그랜트. <<An Affair to Remember>>(1957)의 한 장면.




1952년에서 55년까지 3년간의 공백 이후 <<To Catch a Thief>>(1955)와 함께 돌아온 50대의 캐리 그랜트에게선 그 어떤 '어색함'도 찾을 수 없었다. 중년의 캐리 그랜트는 재킷의 벤트 형태와 무관하게 언제나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으며, 물론 주머니에 손을 넣는 장면들 역시 멋지게 연출해냈다.



<<North by North West>>에서 벤트리스 재킷을 입은 채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캐리 그랜트
이 재킷에도 아주 짧은 리어 벤트가 있을 뿐이다.
벤트리스 턱시도를 입은 캐리 그랜트




그러나 우리는 하마터면 윗 이미지들이 선보이는 '완성된'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는 1952년,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관해선 초연한 자세를 유지했던 그였지만, 박스 오피스의 흥행 여부는 그의 자존감과 직결된 문제였다. 1952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세 편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는 참패를 맛본 후, 그는 "대중이 더 이상 나를 원치 않는다"는 체념 하에, 48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의 그는 영화 출연료와 적재적소에 투자한 비즈니스들 덕에 오늘날로 따지면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축적한 자산가이기도 했다. 은퇴 후 그는 베벌리 힐즈의 맨션에서 여가 생활을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무기한 영위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선 나쁠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퇴직 배우 그랜트를 다시금 실버스크린 위로 끌어낸 것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집요함이었다. 그는 새로이 구상하고 있던 영화 <<To Catch a Thief>>가 '캐리 그랜트 영화'라 믿었고, 그랜트만이 자신이 그린 청사진을 실현시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팜 스프링 저택에서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휴가를 즐기고 있던 캐리 그랜트의 마음을 돌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거듭해서 캐리 그랜트를 설득했고, 히치콕을 신뢰했던 그랜트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히치콕의 작품  <<이창>>에서 켈리와 호흡을 맞춘 지미 스튜어트가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히치콕은 그가 '너무 늙어 보인다'는 이유로 제외시킨다. (그는 그랜트보다 4살 아래)


훗날 그랜트가 회상하듯 히치콕은 "언제나 옳았다". 돌아온 캐리 그랜트는 나이만큼 성숙해져 있었고, 더 자연스러웠으며, 더 매력적이었다. 그는 '나이 든' 자신의 모습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걱정했지만, 관객들은 로맨틱 히로로서의 캐리 그랜트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To Catch a Thief>>와 함께 성공적인 컴백을 완성한 그는 50대 후반까지도 뭇 여성들이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남성 중 하나로 남을 수 있었다.


이 시기 그가 출연한 영화 중, 가장 큰 반향을 얻었던 그의 복귀작 <<To Catch a Thief>>에서 그가 입은 의상들을 캡처해보았다.


히치콕은 영화 워드로브를 담당하던 스태프들에게 그레이스 켈리의 의상 연출을 지시했지만, 캐리 그랜트의 의상 선택만은 전적으로 캐리 그랜트 본인에게 맡겼다.


스트라이프 풀오버에 풀라르 아스콧, 플릿이 안쪽으로 접히는 포워드 플릿의 바지에 갈색 에스파드릴을 신은 리비에라의  보석 도둑 존 로비.


젊었을 때보다 더 슬림해졌음을 알 수 있다. 리비에라의 빌라와 그의 구릿빛 피부가 잘 어울린다.



싱글브레스트 숄칼라 디너 재킷 차림의 캐리 그랜트다. 디너자켓 착장시에는 보타이가 잘 어울린다. 재미있다.




어김없이 아스콧으로 목을 가린 캐리 그랜트. 브레스트 포켓과 힙 포켓 모두 패치 포켓 구성이다. 그레이 재킷에 골드 버튼의 조합이 재미있다.


클로즈업 샷보다는 풀-샷이 더 멋진 캐리 그랜트다. 이 당시의 캐리 그랜트의 슈트는 몸에 잘 맞는 직선적인 실루엣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을 찾을 수 없다.
포켓 스퀘어를 생략하고 검은색 로퍼를 신었다. 남프랑스의 여름이라는  배경을 감안한 선택인 듯하다. 장례식 참석을 위한 착장이지만, 그는 실제로도 검은 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언급했듯이 캐리 그랜트는 비평가들이 선호하는 남자 배우가 아니었다. 그 역시도 연기적 실험을 위해 로맨틱 히어로의 이미지를 잃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 예로 그는 단 한 번도 악역을 연기하지 않았고,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히치콕조차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시상식이 제공하는 예술가로서의 인정, 혹은 비평가들이 선사하는 연기에 대한 호평보다는 대중의 인기와 극장가의 흥행에 관심이 더 많았던 배우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아카데미의 '잘 생긴 남자 배우'를 향한 멸시는 당시에도 존재했고, 캐리 그랜트는 무려 80편 가까운 출연작에도 불구하고 그의 커리어 내내 미국 내 주요 시상식에서 단 한 번도 수상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젊은 여자를 쫓아다니는 추잡스러운 아저씨"로 보이는 것을 피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그의 복귀작 <<To Catch a Thief>>의 극본은 프란시스 역의 그레이스 켈리가 캐리 그랜트를  유혹하는 스토리로 수정되어야 했고, '매력적인 중년 남성과 그를 쫓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구성은 그 후 오드리 헵번과 출연한 <<Charade>>, 에바 매리 세인트와 출연한 <<North by North West>>를 포함한 후기의 출연작에서 거듭 반복돼야 했다.



 

남성의 '우아함'이 옆에 선 여성을 빛나게 해주는 데 있다면, 영화 Charade에서 캐리 그랜트의 의상은 그 완벽한 정석을 보여준다.


캐리 그랜트는 Aquasutum 트렌치코트를 애용했다. 그의 이 브랜드 사랑은 유별나서 아쿠아스커텀의 슈트와 각종 액세서리 역시 즐겨 착용했다고 한다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서 피부색이 밝아졌다. 태닝이 여의치 않을 때 다른 배우들은 메이크업으로 피부색을 보완했으나, 캐리 그랜트는 그러한 가짜 '혈색'을 기피했다고 한다



그레이스 켈리는 "모두 나이가 든다. 캐리 그랜트를 제외한다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자면 당시 할리우드의 남자 배우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겪고 있던 '급격한 노화'는 혀를 내두르게 할 지경이었다. 술, 담배, 커피 외에도 각종 각성제들을 동원해서 살인적인 스케줄로 영화를 생산해내던 '황금기'의 할리우드는 영화배우들을 지나치게 혹사시키고 있었다. (캐리 그랜트 역시 1년에 6편의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관리에 있어서도 캐리 그랜트는 시대를 앞서던 인물이었다. 남성 중 대부분이 애연가였던 1940년, 캐리 그랜트는 건강을 위한 금연을 선언했고, 데뷔 초기 지적받았던 몸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체력 훈련을 중년까지 지속했다. 할리우드의 그 누구보다 태닝을 즐기던 그는 1924년, 더글라스 패어뱅스 시니어(주니어의 아버지)의 구릿빛 피부에 매료된 후, 노년까지 태닝 된 피부색을 유지했다.


<<North by Northwest>>의 한 장면이다. 만 55세에도 슬림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던 캐리 그랜트. 목과 상체가 많이 얇아졌다.
스물셋의 그레이스 켈리와 쉰 하나의 게리 쿠퍼. 당시 그는 51세.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그는 71세처럼 느껴진다. High Noon(1952) 촬영 당시



Love in the Afternoon (1957) 5년 사이 게리 쿠퍼는 더더욱 할아버지가 됐다. 그는 4년 후인 1961년,  전립선 암으로 사망한다.



파라마운트에 소속돼 있던 시절, 캐리 그랜트는 항상 이인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파라마운트의 일 번 배우는 언제나 게리쿠퍼였다.




철학자도 키스를 받고 싶다고 말하는 아스테어(58세). 오드리 헵번에게 키스 하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 그는 영화 출연을 고심하며 그녀와의 나이차에 대한 부담을 고백했다고.


그러나 그의 역할은 모든 여자를 사랑에 빠뜨리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느끼던 '부담'은 캐리 그랜트가 느끼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51세의 캐리 그랜트와 26세의 그레이스 켈리.
캐리 그랜트는 훗날 인터뷰에서 같이 연기했던 여배우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상대로 그레이스 켈리를 뽑았다.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며.



Charade (1963)에서의 캐리 그랜트. 익살스러운 코믹 신과 강도 높은 액션 신까지 소화하는 그는 도무지 (한국 나이) 60세의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


캐리 그랜트는'캐리 그랜트'로 거듭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살펴보며 난 캐리 그랜트가 그의 스타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그는 스크린 위에서 발하는 그의 아우라로 우리를 '매혹하고자' 했고, 스스로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의 흔적은 그에게 있어서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테다.  


스크린 위에서 보이는 '신사'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어린 여성을 '저돌적으로' 유혹하는 바람둥이이기도 했다(그는 통합 다섯 번의 결혼식을 올렸던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대중을 유혹하기 위해 그에게 요구되고 있는 역할과 이미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배우였다.


그는 언제나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면서도 당시 남성 배우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염색, 페이스-리프팅, 진한 메이크업을 거부할 줄 알았다. 중년의 그는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것은 오로지 '자연스러운 남자다움'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가. 이제

그는 이미지와 어긋나는 것을 시도하지 않는 그만의 '식견'을 발휘할 줄 알았다.


아마 우리는 그랜트가 30년간 지속해야 했던 '할리우드 최고의 남자 배우' 자리를 위한 경쟁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50대에 이르러서야 '발굴해낸' 그만의 심플한 스타일은 자신의 외모를 지속적으로 갈고닦은 남성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 '멋진 아저씨'가 사라진 오늘날의 남성들에게 하나의 '불편한' 예시로 작동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 된다.


실제로 나는 주드 로, 알렝 들롱 등의 배우들을 더 좋아하면서도, 캐리 그랜트의 사진을 훨씬 더 자주 찾아 보고 있다. 배울 것이 많은 쪽은 분명히 후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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