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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pr 11. 2020

1930년대 미국의 복식 문화와 에스콰이어

새빌로의 탄생 11

많은 복식 역사가들은 1930년대를 남성 복식에 있어서 비할 데 없는 최고의 시대라 호명한다... 세계 경제는 대공황을 겪고 있었지만, 남성복 유행은 유럽의 귀족 계층, 실버 스크린 위 할리우드 배우들, 그 외 상류층을 위해 제작된 맞춤복을 모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30년대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교훈은 상류층의 소수가 극도로 수준 높은 취향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남성들의 평균적 의복에 대한 감각이 그들에 비해 많이 뒤처지지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이 스타일에 있어 올바른 조언을 받았고, 우아한 남성들을 스타일의 귀감으로서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알란 플루서, <<Style and the Man>>)


오늘날 1930년대 미국의 복식문화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대다수의 남성들이 매우 엄격한 복식의 룰을 인지하고, 그것을 따르던 시대. 일반 남성들이 슈트와 모자를 걸친 채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트위드 슈트 차림으로 산책을 즐기며, 골프, 테니스, 낚시 전용의 스포츠 코트를 갖추고 있던 시대.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의 미국인 역시 당시의 미국을 상상할 수 없을 테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자리했던 20년, 전무후무한 수준의 남성 복식 문화가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일반 남성(average Joe)들 역시 나름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었다" (알란 플루서) (출처: Dressing the Man (DTM))


플루서가 주장하듯 오늘날 많은 이들이 1930년대를 남성 복식의 황금기로 꼽는 이유는 바로 대다수의 대중이 보여주던 수준 높은 취향이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오늘의 미국 남성들을 떠올리며, 나는 그들의 고조부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스타일리시한 시대를 구현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딘 애치슨(1893-1971). 우리에겐 애치슨 라인 선언(1950)이라는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겼지만, 소프트 숄더 헤링본 슈트가 당시 정치인들의 취향의 수준을 방증한다.(DTM)



알란 플루서는 이 시기 미국 일반 남성들의 탁월한 스타일을 가능케 한 세 가지 요소를 "다수의 스타일리시한 롤모델의 존재,  비스포크 패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취향의 기준" (Dressing the Man)으로 규정한다.


그의 주장처럼 역시 가장 큰 공은 그들이 늘 접하고 있던 시각 교재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영화, 텔레비전, 신문, 잡지, 그 외의 출판물에서 지속적으로 탁월하게 스타일리시한 인물들을 접하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 유니폼: (왼) 리넨 재킷, 플라넬 바지, 와인 색과 흰색이 섞인 매우 가벼운 양모 머플러, (오른) 브라운 가버딘 재킷, 크림 가버딘 바지  (1935)


난 지난 포스트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캐리 그랜트의 스타일을 다룬 바 있다. 그러나 만약 수준 높은 스타일의 롤모델이 오직 실버스크린 위의 할리우드 배우들과 텔레비전의 셀레브리티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면, 그 파급력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30년대 당시 매우 높은 수준의 복식 문화가 미국 전역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데에는 남성 복식의 기준을 확립하고, 비스포크 유행을 이끌던 세련된 취향을 갖춘 남성들이 바로 사회의 특권층 (악명 높은) WASP들이었다는 사실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20년대까지 여름 디너파티에 애용되던 블루 블레이저와 흰 플라넬 바지는 (위대한 개츠비(1974)의 닉의 파티룩을 떠올려 보라) 흰 디너 재킷에 의해 교체되었다.


플루서는 이 시기가 상류층의 취향이 일반 대중에 의해 받아들여진 마지막 시대였음을 주장한다. 미국의 1930년대는 특정 계급이 생산자, 미디어, 대중 위에서 취향의 권위를 독점하던 마지막 시대, 옷차림과 매너가 남성의 계급을 정확하게 밝혀주던 마지막 시대,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모든 남성(유색인종을 제외한)에게 상류층의 복장과 매너를 답습하는 것이 요구되던 마지막 시대였다.



30년대 미국 사회의 상류층은 대공황이 서민들의 삶을 황폐화시키던 나날들을 롱 아일랜드, 플로리다 팜 비치, 프렌치 리비에라에서 호화롭게 탕진하던 최고 부유층과, Exeter, St. Paul, Andover와 같은 뉴잉글랜드의 기숙학교와 아이비리그 대학 학생의 주류를 이루던 그들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언론은 그들이 즐기던 파티들을 두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이처럼 사치스러운 파티들은 없었다"라고 평했다)


팜 비치의 세미-포멀 이브닝 웨어, 흰 숄칼라 디너 재킷, 검은색에 적갈색 무늬가 들어간 실크 양말, 패턴트 레더 펌프스 , 적갈색의 포켓 스퀘어(1935, 펠로우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의 대중이 그들이 부리던 사치에 반감을 품지 않았다는 점이다. 30년대의 일반 미국인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충동 속에서 사교계의 화려한 삶을 훔쳐보며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30년대 미국의 중산층 가족은 어려운 가계부 사정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영화관을 찾던 영화 팬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Screwball Comedy 장르(완벽하게 테일러 된 연미복/슈트를 입은 남성이 아름다운 가운을 입은 여성을 쫓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아스테어의 Top Hat, Swing Time, Shall We Dance 등의 영화들이 대표적 예시)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이들이 대공황이 그 어떤 힘도 행사하지 못하는 우아한 세계의 삶을 관조하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었다.




골프 유니폼: (왼) 패치 포켓, 놋쇠 버튼이 들어간 트위드 재킷, 그레이 플라넬 바지, 브라운 스웨이드 구두. (오른) 노르웨지안 골프 슈즈, 알파카 카디건, 그레이 플라넬 바지


1934년 6월, 남성 잡지 에스콰이어는 미국 내 '스타일의 중심지'인 9개 지역을 나열한 바 있다.


1. 웨스트베리, 롱 아일랜드: 폴로를 즐기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휴양지.


2. 라이(Rye), 뉴욕: 미국 내 가장 중요한 스타일 중심지 중 하나인 볼티모어 컨트리클럽이 자리하는 곳.   


3. 뉴욕 스탁 익스체인지:  뉴욕-스타일의 근원지


4. 예일: 월스트리트 커리어를 앞두고 있는 학부생들이 일찌감치 전형적인 뉴욕 브로커의 옷차림과 매너를 모방하고 있는 캠퍼스.


5. 사우스햄튼, 롱 아일랜드:  플래티넘 모래와 사파이어 바다가 펼쳐진 해변 리조트 .


6. 뉴포트, 로드 아일랜드:  추잡한 90년대(Gay Nineties/Naughty Nineties)의 400인 (1890년대 당시 뉴포트의 가장 큰 연내 행사였던 아스터 볼룸 파티에 초대되고 있던 400명)에서 부터 시작된 상류층 혈통이 흥분의 30년대 (Thrilling Thirties)까지 이어지고 있는 곳.


7. 파크 에비뉴: 젊은 주식 브로커들의 주거지이자 그들의 놀이터. 밤의 월 스트리트.


8. 팜 비치, 플로리다: 패션에 있어 팜비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일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9. 프린스턴: 대다수 학생이 미국의 사회, 경제, 외교 분야의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곳. 이들은 그들의 휴가를 해외에서 보내며, 기성세대의 복식과 매너를 젊은 세대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30년대의 리비에라. 팜비치, 사우스햄튼의 스타일은 프랑스 리비에라의 유행을 철저하게 모방하고 있었다. "아침 후 점심이 따라오듯, 팜비치는 리비에라를 뒤쫓는다"(에스콰이어)


위의 지역들이 대표하는 '상류 사회' 미국의 부유층은 Gilded Age(1870-1900)와 함께 출현한 록펠러, 카네기 등의 신흥 자본(Nouveau Riche)과 이들보다 앞서 18세기부터 미국의 최상위 계층을 독점하던 전통의 권문세가(Old Money)의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중 진정 사교계의 취향을 결정하고 있던 권문세가(Old Money)의 또 다른 이름은 아메리칸 젠트리였고, 그들은 이름이 시사하듯 생활양식과 취향에 있어서 대서양 너머 영국 상류층을 철저하게 답습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 유행하던 비스포크 유행 역시 사회의 주류였던 이들이 대서양 너머 런던 새빌로에서 그들의 슈트를 주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었다(미국 내에서 큰 인기를 끌던 Brooks Brothers를 위시한 기성복 스토어들 역시 새빌로 슈트를 모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대공황이 세계 경제를 초토화시키는 가운데 미국 남성복 유행은 여전히 새빌로에서 슈트를 주문할 정도의 부를 향유하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베네치아의 호텔에 도착하는 제트족 남성. 크림 칼라 더블브레스트 디너 재킷에 검은 보타이, 카네이션, 화이트 포켓 스퀘어를 착용하고 있다.(1938)


당시 미국의 제트족(jet-set)이 선호하던 스타일 역시 그들이 새빌로의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었다. 30년대 미국 시장을 지배하던 슈트와 재킷의 실루엣은 숄티와 앤더슨 앤 쉐퍼드로 대표되는 소프트 드레이프 스타일이었다.


최소한의 패딩만이 추가된 넓은 어깨와 넓은 라펠, 어깨에서 볼륨감 있게 시작해서 점점 좁아지는 소매, 앞면과 옆면에서 확연하게 조여진 허리로 대표되는 자켓과, 두 개의 플릿, 넓은 통, 밑단에 커프가 잡힌 바지로 구성된 ‘드레이프 룩‘은 이 시기 미국 남성복 시장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드레이프 룩의 유행은 이러한 실루엣과 어울리는 솔리드 트윌, 헤링본, 작은 패턴이 가미된 옷감의 유행을 가져왔다. 작은 패턴이 가미된 옷감들 중 가장 널리 사랑받는 색상 조합은 검은색과 흰색, 회색과 흰색, 탠 색상과 흰색, 명도가 다른 두 가지의 브라운 색상, 푸른빛을 띠는 회색과 푸른색이었다.)


(왼) 샤크스킨 피크 라펠 쓰리 피스 슈트, 어깨 주위의 볼륨이 드레이프 스타일의 슈트임을 말해준다.


잉글리시 드레이프 룩이 미국 스타일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상류층의 생활방식과 잘 어울렸다는 사실이었다. 비즈니스를 위한 자리에서나 사적인 모임에서나 항상 우아한 차림을 갖추고자 했던 이들은 포멀 슈트만큼이나 캐주얼한 자켓과 바지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스포츠 코트(단품 재킷)와 슬랙스 바지(단품 바지)의 조합의 유행 역시 이들이 남긴 유산이었다.



여름용 슈트가 스타일리시한 남성의 필수품으로 등장한 것도 3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20년대부터 여름용 원단으로 널리 활용됐던 프레스코 이외에도 가버딘, 리넨, 시어서커로 제작된 여름 슈트들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여름에도 스타일리시한 차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당시 남성들의 불편함을 한결 덜어주었다(이전까지 뉴 잉글랜드의 남성들은 가벼운 소재, 혹은 시어서커/리넨으로 제작된 구겨진 슈트를 입느니, 차라리 중량감 있는 소재의 슈트를 입고 더위를 참는 일을 택하고 있었다). 이처럼 소수의 특권층이 '스타일'의 권위를 독점하는 일은 옷차림에 있어서 그들을 더욱 과감하게 만들고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들의 '상대적 여유'를 과시하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여름 슈트 용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내추럴 색상 가버딘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애용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은 패치-포켓의 쓰리 버튼 버전이었다 (1935, 펠로우스)


 

물론 남성복 스타일을 이끌어가던 특권층 내 모두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상류층에게도 모방의 대상으로서의 스타일 아이콘이 존재했다.



우리는 다시 윈저 공작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기존 미국 복식 문화의 규격에 새로운 요소들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윈저 공작만큼 많은 혁신을 가져다준 남성은 없었다. 두 세계 대전 사이 20년 동안 그가 복식문화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었다.


우선, 전편에서 다루었듯이 미국 시장을 점령한 잉글리시-드레이프 룩은 숄티와 왕세자의 합작품이었다. 이전까지 미국에서 유행하던 좁은 라펠, 좁은 어깨, 밀착된 가슴 라인에 허리 라인을 잡아주지 않는 내추럴-숄더 슈트를 제치고 드레이프 룩이 미국 시장을 정복하는 데 있어서 윈저 공의 공헌은 결정적이었다.  



좁고 둥근 노치 라펠에 직선으로 떨어지는 내추럴 숄더-스타일, 단추 세 개를 모두 잠그는 것이 정석이었다.  통이 넓은 바지도 유행하고 있었다.   (1926)


그는 '지나치게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던 빨간색 타이, ‘천박하다’고 여겨지던 스웨이드 구두, '유행 지난 골동품'으로 취급되던 파나마모자를 그가 단 한 번 착용하는 것만으로 최고의 인기상품으로 거듭나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1924년 미국 방문 중 페어아일 스웨터 차림으로 골프 코스에 등장하여 단박에 쉐트랜드 섬의 경제난을 해결해 주었고,(그 후 페어아일 스웨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미국 전역에서 한 벌당 35달러라는 고가에 판매 된다(에스콰이어)) 미국 방문 중 그가 즐겨입었던 플라넬 수트들은 20년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미국의 초크 스트라이프, 글렌 체크 플라넬 슈트의 유행을 낳았다. 그는 런던 남성복 산업 최고의 세일즈맨이었고, 새빌로 최고의 모델이었다.


블랙, 레드, 화이트 글렌 체크의 쓰리 버튼 슈트. 윈저 공작을 연상시킨다. (1939 에스콰이어, 펠로우스)


이와 같이 윈저 공작이 입었던 제품이 시장을 강타하는 현상은 상류층 남성들의 스타일을 재빨리 대중에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당시 남성복 업계의 생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30년대 미국의 남성복 시장에 새로운 상품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의 상류층 남성이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인증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었고, 남성복 스토어들은 오직 새로운 제품이 뉴잉글랜드의 부유층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난 후에서야 그 제품을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었다(알란 플루서).  


만약 남성복 스토어가 그러한 인준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품을 판매했다면, 그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만약 제품이 결과적으로 보편의 취향에 부합하지 못한 것으로 증명될 경우, 30년대 미국 남성들은 더 이상 이러한 '무책임한' 가게를 찾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미국 전역에 확립된 스타일의 기준은 엄격한 것이었다. 남성들은 입어야 할 옷과 입어서는 안 될 옷이 존재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모든 남성이 갖춰야 할 '좋은 취향'이 매체들을 통해 미국 남성들에게 거듭해서 전수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인식의 확립에 일조하고 있었다.  


(왼) 더블브레스트 쉐트랜드 블랙 앤 브라운 헤링본, 티켓 포켓과 가죽 버튼, (오른) 플라이 프런트  코버트 코트, 그레이 색소니 슈트. (1936, 에스콰이어, 펠로우스)



당시의 신문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만큼이나 뉴 잉글랜드 사교계 남성들의 옷차림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남성 복식 문화 전파의 최전선에 있었던 잡지 에스콰이어였다.



1933년 출간된 에스콰이어는  Gentleman's Quarterly, Apparel Arts 등 이전까지 존재하던 업계지와 달리 대중을 겨냥한 첫 남성 잡지였다. 당시 출판계에 만연했던 보편적인 편견은 '남성들은 옷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남성은 잡지 지면 위 옷을 들춰보는 모습을 절대로 남들에게 들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스콰이어의 초대 에디터 아널드 깅그리치에겐 옷이 담긴 이미지들이 풍기는 '라벤더 향'을 상쇄시킬 전략이 준비돼 있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에스콰이어가 화려한 옷차림을 과시하는 일을 즐기는 'Fop'을 위한 매뉴얼이 아님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헤밍웨이, 다니엘 헤멧, 알렉산더 울콧 등 당시 남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작가들에게 원고를 의뢰했고, 자연스레 지면의 큰 지분이 스포츠와 같은 남자들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에 할애되었다. 헤밍웨이, 해멧 등의 글이 조성하는 남성적 분위기 속에서 에스콰이어는 그들이 제공하는 패션 콘텐츠를 정당화 했던 것이었다. 에스콰이어는 옷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상품의 광고가 아닌, 시대의 스타일리시한 남성들이 즐겨 입던 옷을 조명하며, 남성복 유행에 대한 이야기를 관조적으로 서술하는 '비평가'의 권위를 표방했다.


나소 (Nassau)의 해변. (왼) 실크/울 혼방 비치 셔츠, 화이트 에스파드릴, (오른) 당시 리조트 유니폼인 네이비 폴로셔츠+그레이 플라넬 바지, 블랙 앤 화이트 스포츠 슈즈


(물론 그들은 유럽의 귀족, 할리우드 배우, 미국 부유층의 옷차림을 지속적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에스콰이어 역시 윈저 공작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자주 꺼낼 수밖에 없는 불운(?)을 피해 갈 수 없었고, 1935년 4월 편에서 에스콰이어는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다룰 때마다] "다시는 왕세자의 이름을 꺼내지 않겠다"라고 다짐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독자들이 그의 이름을 듣는 것보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더 지겨워하고 있다.“(에스콰이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에스콰이어의 중요 지침 중 하나는 그들의 일러스트와 사진에 브랜드와 테일러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의 에스콰이어는 어디까지나 옷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지 않는 ‘남자다운’ 남성들을 위한 잡지를 표방했던 것이었다.  




그레이 플라넬 레드 스트라이프, 피크 라펠, 투 버튼 싱글브레스트 슈트, 와인색 양말, 브라운 몽크 스트랩 구두. (1936, 에스콰이어, 펠로우스)


1930년대의 에스콰이어는 오늘날까지 그 어떤 남성 잡지도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하나의 이상으로 남아있다. 당시의 인식 수준을 반영한 ’ 수준 높은 조언’과 저명한 칼럼니스트들의 존재와 더불어 당시의 에스콰이어를 특별한 존재로 격상시켜주고 있던 것은 페이지들을 채우고 있던 일러스트였다.


당시의 패션 잡지는 사진이 아닌 일러스트를 통해 옷과 그 외 상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다(사진은 제한적으로만 활용됐다), 따라서 옷의 디테일을 올바르게 전달해줄 스타일리시한 일러스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시대를 대표하는 남성복의 실루엣과 그것이 구현하는 분위기를 지면 위에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로렌스 펠로우스, 레슬리스 살버그, 로버트 굿맨으로 구성된 에스콰이어의 전설적인 일러스트 팀은 탁월한 역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윗 줄 오른쪽 남성이 에스콰이어 일러스트 팀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작가였던 로렌스 펠로우스다(1911). 이번 포스트에 인용된 이미지의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



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로렌스 펠로우스는 잉글리스 드레이프 룩을 매우 절묘하게 묘사하는 화풍을 자랑했다. 그가 그려낸 남성들의 대부분은 키가 크고, 슬림하며, 무엇보다 나이가 든 중년의 신사들이었다. 이는 젊은 세대가 아닌 부유한 중년 남성들이 남성복의 취향을 결정하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30년대는 20년대와 차별화 된다. 재즈 에이지라 불리는 20년대는 Flaming Youth(불타는 청춘)라는 악명을 얻고 있던 젊은 세대가 복식의 유행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오른쪽 재킷은 디너 재킷이 아닌 레드 칼라 스모킹 재킷이다. 세미-포멀 이브닝 웨어에 해당된다. 영국에서 유행하던 스모킹 재킷은 30년대 당시 미국에까지 전파되었다.(1934)


펠로우스를 포함한 에스콰이어의 모든 일러스트 아티스트들은 규정상 모두 비스포크 슈트를 입어야 했고, 그들이 옷을 사랑하는 남성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묘사하는 옷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그려낸) 단추의 질감과... 구두 위 디테일들을 설명할 것인가?"(에스콰이어)


항상 일상 속의 남성을 그렸던 에스콰이어의 일러스트들은 독자들에게 상류층 남성들이 그들의 옷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들은 복식 문화는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분으로서만 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에스콰이어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한 부에 50 센트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높은 판매부수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까지도 디자이너, 테일러, 남성복 애호가들은 3-40년대 에스콰이어 일러스트들을 찾고 있다. 알란 플루서는 2015년, 올바르게 옷 입는 법을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 남성들에게 1945년 이전에 발행된 어패럴 아츠와 에스콰이어 이슈들을 모두 읽는 일을 권한 바 있다.


여름용(?!) 그린 플라넬 더블브레스트 슈트, 브라운 윙팁 구두. 허리선에 잡힌 주름이 정말 절묘하데 표현돼 있다. (1934 8월, 에스콰이어, 펠로우스)
여름용 크림색 가버딘 슈트, 브라운 앤 화이트 셔츠, 브라운 스웨이드 구두. (1935, 에스콰이어, 펠로우스)


2000년대부터 다시금 고급 남성복 시장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클래식 남성복과 그 유행을 선도하는 남성복 애호가들에게 있어서 1930년대 미국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다.


오늘날 글로벌한 유행으로 거듭난 이 움직임은 오직 자본을 위해 복무하는 '패션'의 위선을 고발하는 동시에 진정한 '스타일'로의 귀환을 호소하고 있고, 이러한 운동에 초기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남성 복식의 룰을 다시금 대중에게 '개방'한 알란 플루서의 드레싱 더 맨이었다.


우리가 기억해두어야 할 점은 이 책이 1930년대 미국의 복식 문화가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정점에 도달했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플루서는 30년대 남성의 우아함을 '설득'하기보단, 에스콰이어가 그리했듯이 그저 사진들과 일러스트를 통해 그것의 자명함을 증명하려 했고, 이에 수긍한 남성들의 움직임이 오늘날 그들만의 ‘매니아 시장'을 구축하게 됐다.


플루서는 스타일의 공부에 있어서 성급하게 '나만의 것', '나만의 스타일', '진정한 나'를 드러내는 일을 경계할 것을 주문한다. (아마 이것이 비교적 '소심한' 아시아 남성들이 클래식 남성복 착장에 있어서 놀라운 소질을 보여주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포스트를 위한 리서치가 내게 각인시켜준 것이 있다면,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스타일에 대한 '정보'에 있어서 30년대의 미국 남성들 만큼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펠로우스의 작품들이 묘사하고 있는 남성들의 우아함은 우리에게 실험보다 공부가 우선시 돼야 함을 어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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