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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pr 16. 2020

2차 세계 대전(1939-1945)과 새빌로

새빌로의 탄생 12


1차 세계대전이 유럽 사회의 ‘구질서’에 입힌 타격은 결정적이었다. 천만 이상의 사상자를 낳은 초유의 물량전은 열강의 생태계가 더 이상 조지안-빅토리안 시대를 관할하던 ‘신사들의 협약’으로 조율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새로 태어난 유럽의 새빌로 역시 더 이상 귀족 혈통의 신사들에게만 그들의 존명을 의지할 수 없음을 인지해야 했다.


2-30년대 새빌로가 직면하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하우스들이 큰 위기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폐위(1936) 이전까지 세계적 스타일 아이콘으로 군림하던 윈저 공작의 존재, 기존의 복식문화(프락 코트와 연미복으로 대표되는)를 고수하려 한 영국 귀족들의 보수성, 할리우드의 스타들과 새로이 부상한 부르주아들의 출입을 ‘허락한’ 새빌로가 실행한 ‘최소한’의 변화가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새빌로에게 가한 폭력은 조금 더 직접적이었다.



“히틀러는 영국 원단을 선호하는 편이었고, 그의 측근들 중에는 다수의 새빌로 고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사정을 루프트와프(독일 공군)의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리처드 워커)

“만약 그들이 새빌로를 계획적으로 괴멸시키려 했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임스 셔우드)



브리튼 전투(Battle of Britain)(1940)와 함께 시작된 독일군의 런던 공습은 추천장 없는 신사들을 문전박대하던 저명한 하우스들을 무차별적으로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헨리 풀 초크스트라이프 쓰리 피스 슈트를 착용한 채 머신건을 만지는 처칠이다. 고상하지 못한 취향, 대금 납부를 미루는 습관, 과체중의 몸매-그는 최악의 고객이었다.



기브스의 14개 공방과 올드 본드가의 가게가 폭파되었고. 디즈 앤 스키너의 스토어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몰트 앤 마이어의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부가 보 브루멜의 외상 빚과 함께 먼지가 되어버렸다. 윈저 공작의 재킷을 재단하던 프레데릭 숄티 역시 폭격의 충격으로 가게의 후면 벽면에 처박히고 있었다.



1944년의 헨리 풀 공방. 폭격으로 갈 곳을 잃은 테일러들 중 많은 수가 헨리 풀 공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개전과 함께 다시금 다수의 테일러들이 전장으로 징집되거나 지방의 공방에서 군용 의복을 제작하는 일에 투입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점차적으로 진행된 의복의 간소화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엄격한 규율로 자리 잡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물량전'을 일치감치 경험했던 영국은 전쟁의 개전과 함께 전 국민에게 ‘절약정신(던커크 이후로 던커크 정신으로 불리게 된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부는 옷감과 인력의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시 남성복의 규격을 제시했고, 낮은 양모 함량의 브라운, 네이비, 그레이 싱글브레스트 유틸리티 슈트(British Utility Suit)가 배급되었다. 옷감을 절약하기 위해 턴업과 플릿은 금지됐다. (물론 몇몇 남성들은 그들의 사이즈보다 긴 바지를 주문하여, 직접 턴업을 추가하고 있었다.)


British Warm이라 불리는 짧은 코트. 다리를 드러냄으로써 활동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싱글 몽크 스타일의 신발 역시 전시 유행을 반영하고 있다. (1941, 에스콰이어


1945년, 영국이 종전을 맞이했을 때, 새빌로는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일터로 귀환한 테일러들의 몰골을 닮아 있었다.



경제 재건을 도모하던 영국의 타산업과 마찬가지로 새빌로 역시 하루빨리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참혹했던 전쟁의 끝에서 영국 국민은 ‘최고급 슈트’의 향수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새빌로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과 1차 세계대전 사이 공통점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새빌로의 진정한 존명의 위기가 전후 시기에 도래했다는 점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집권 노동당은 경제 재건을 위해 1949년까지 의복 배급 정책을 유지했고, 전역 군인들을 위해 전역 유니폼(기본 규격의 핀 스트라이프 슈트)이 제공됐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6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익숙해진 '편리함'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전통적 새빌로 실루엣(앤더슨 앤 쉐퍼드/숄티의 드레이프 룩과 상반되는)의 ‘딱딱함’은 그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6년부터 1952년까지 집권했던 조지 6세. 그는 형과 달리 복장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취향을 고수했던 남자였다. (지루한 이미지가 콜린 퍼스와 잘 맞아떨어진다)



또한, 이전까지 모든 근검절약 운동의 ‘성역’이었던 웨스트엔드의 하우스들에게도 전례 없는 무자비한 가격 통제가 강요되고 있었다. 그들에겐 오직 전쟁 이전 가격의 110%의 가격 인상만이 허락되었고, 슈트에는 15 파운드, 재킷에는 9파운드 이상이 책정될 수 없었다. (리처드 워커)




1950년대 큰 인기를 누렸던 프랑크 시나트라. 큰 패딩이 추가된 넓은 어깨와 풍성한 가슴 드레이프가 인상적이다. 그는 미국 이탈리안 코사 노스트라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전후 런던은 더 이상 에드워드 7세와 윈저 공이 군림하던 시절의 도시가 아니었다. 식민지들의 독립과 함께 찾아온 대영제국의 몰락은 새빌로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대서양 너머 미국에서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호황과 함께 프랑크 시나트라로 대표되는 여유 있는 실루엣(넓은 어깨, 큰 드레이프, 넓은 통의 바지)이 유행하고 있었고, 크리스찬 디올을 위시한 프랑스의 쿠투리에들이 여성복 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남성복 시장에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로마의 브리오니 역시 이탈리안 테일러링의 대표로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1945년 탄생한 브리오니 브랜드의 초창기 고객이었던 클라크 게이블. 브리오니의 테일러가 그의 슈트를 가봉하고 있다.



새빌로에는 변화가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알맞은 답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빌로의 테일러들은 근본적으로 변화에 배타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언론에 노출되는 일을 극도록 꺼려했고, 셔츠 커프의 촬영조차 거부할 정도로 테일러링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리처드 워커). 모든 새로운 테크닉, 실루엣, 고객층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냉소를 샀고, 잡지들은 이들을 인터뷰하는 일을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전쟁 내내 수수한 유틸리티 유니폼만을 입어야 했던 여성들은 전쟁의 종식과 함께 풍성한 어깨, 가슴과 패딩이 추가된 힙 라인을 강조한 크리스찬 디올의 스타일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한 상황은 절박했다. 새빌로 하우스들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Mens Fashion Council’이라는 협회를 조직했고, 이 기구를 통해 얻어낸 합의를 바탕으로 데이비스, 킬고르, 헨리 풀, 등 열 곳의 대표적 하우스들이 그들의 하우스 컷을 선보이는 패션쇼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획기적인 시도였던 이 '쇼'는 새로울 것이 없는 전통적 새빌로 실루엣만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언론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변화를 꾀하는 과정에서도 새빌로는 그 특유의 보수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 쿠트리에에서 테일러 하우스로 사업을 확장한 하디 에미스가 패션쇼를 열고, 기성복 라인을 출시하는 시도를 통해 새빌로 14번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을 때에도, 새빌로는 그의 전철을 따르는 일을 고려하기 보단 그를 향한 신랄한 비웃음을 보내는 일로 일관하고 있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천박한 별종일 뿐이었던 것이었다. (밀리터리 룩, 드레이프 룩, 헌츠맨 룩 등, 새빌로에서 출현한 모든 새로운 변화는 출현 당시 대다수 테일러들의 비아냥을 샀고, 이러한 새빌로의 보수성을 지적한 업계지 Tailor and Cutter는 "처음으로 양모 원단을 가위로 자르는 것을 제안한 테일러 역시 새빌로의 비아냥을 샀을 것"이라 평했다.)




하디 에미스 경. 1950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의 옷을 디자인했다. 남성복에 대한 철학을 책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새빌로에게 있어서 1950년대의 도래는 더욱 까다로운 장애물들의 등장을 의미했다.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고수하던 새빌로와 근대적 기술발전 사이의 불화는 19세기부터 이어져 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르렀을 때 전세는 급격히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신성한’ 새빌로 슈트 스타일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를 얻게 되기까지는 상류층 남성의 사망 이후, 그것을 집사/하인이 물려받고, 그것이 중고 시장에 도착하여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1-2세대에 거친 ‘대물림’의 과정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50년대가 이룬 기술의 발전은 최초로 디자인의 ‘표절’을 가능케 하고 있었고, 새빌로의 디자인은 발견대는 대로 복사되어 대중의 취향에 맞게 '각색된' 모습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전후 시기 미국에서 유행한 버튼 위치가 낮은 더블브레스트 실루엣,  여성 패션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스타일의 유행을 반영하고 있다 (에스콰이어 1945)



기술 발전이 탄생시킨 Made-to-Measure 테일러링 역시 새빌로의 매출에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영국 전역에는 ‘세미-비스포크’ 테일러 샵들이 개점하고 있었고, 고객이 옷을 오더하면 그의 치수에 맞는 슈트를 즉각 공장에서 제작해주는 Made-to-measure 방식의 테일러링 서비스는 50년대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남성의 절반 이상이 다수의 테일러에게서 그들의 옷을 주문하게 되었다.



분명 새빌로는 고립되고 있었다. 귀족 남성들은 더 이상 유행을 주도하지 못했고, 전쟁 기간 내내 낡은 슈트에 헤진 커프의 셔츠를 거리낌 없이 착용하던 국왕 조지 6세 역시 새빌로를 도울 수 없었으며, 영국 대중의 취향은 고상한 새빌로 슈트가 아닌 미국식의 여유로운 실루엣을 선호하고 있었다.




1955년 이탈리안 스타일을 소개하고 있는 남성 잡지.




아이러니하게도 새빌로를 구원해준 것은 그들과 영 어울리지 않던 ‘근대화’의 시도가 아닌, 새빌로를 대표하는 보수성과 엘리트주의가 제공하는 상징성에 굶주려 있던 미국인들이었다. 1950년대 미국은 바야흐로 건국 이래 최전성기의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대서양을 건너 런던을 찾는 미국인들은 더 이상 전통 상류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추락한 파운드 환율 역시 이에 일조하고 있었다)


빙 크로스비, 그레고리 펙 등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여전히 새빌로를 찾고 있었고, (새빌로 하우스들의 미국 트렁크 쇼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을 왕복하며 사업의 확장을 꾀하는 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미국 출신 고객들의 증가와 함께 전통의 헨리 풀, 데이비 등의 하우스들과 새빌로 최고가의 슈트를 만들던 헌츠맨과 킬고르가 매출의 상승을 경험하고 있었다.(1950년대에 이르러 킬고르는 미국인 상대 매출의 35% 성장을 보고했고, 헌츠맨 역시 매년 미국인 상대 매출의 10% 성장을 보고하고 있었다.). 런던을 찾는 미국인들은 전후 미국에서 볼 수 없는 '구 유럽'의 체취로 가득한 '퀘퀘한' 새빌로 슈트의 희소성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서양 너머에서 찾아온 구원의 손길은 새빌로에게 있어서 일시적인 효과의 진통제일 수밖에 없었다. 새빌로의 보수성이 미국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하우스들로 하여금 그들의 낡은 투더 왕조식 인테리어, 커튼을 드리워놓은 전방 윈도우, 전통적 실루엣을 고집하는 재단사들을 지나치게 오래 견수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이러한 새빌로의 '옛 것 지키기' 전략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그들을 위기에 빠뜨릴 것이란 사실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주요 고객층의 교체를 제외한다면 1950년대까지도 19세기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던 새빌로가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에서 접하는 '친절한 새빌로'로 거듭나기 위해선 1960-70년대와 함께 전 유럽을 휩쓸었던 젊은이들의 Youth Movement의 충격이 선행되어야 했다. 60년대의 새빌로와 이 시기에 등장한 새빌로의 '이단아'에 대해선 이후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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