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스프레차투라
아이비 스타일은 193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아이비리그 대학 캠퍼스 유행을 주도하던 남성복 스타일을 가리킨다. 현재 남성복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비 스타일이 완성된 형태로 동부의 캠퍼스들을 점령하게 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 일어난 일이다.
아이비 스타일은 그것이 포괄하는 의복을 통해 어렵지 않게 규정될 수 있다. Ancient Eight이라 불리던 당시의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브라운, 유펜, 콜럼비아, 다트머스, 코넬의 여덟 대학에 재학하던 학생들은 크고 화려한 워드로브를 자랑하는 남성들이 아니었다.
플라넬 슈트, 트위드 재킷(해리스 혹은 쉐트랜드), 네이비 블레이저, 쉐트랜드 트위드 크루넥 스웨터, 쉐트랜드 터틀넥. 스쿨 레터 스웨터, 플라넬 바지, 카키 바지(플릿과 턴업이 없는 스트레이트 핏), 더티 화이트 벅스, 페니 로퍼, 버튼 다운 셔츠, 여름용 버뮤다 반바지와 가을-겨울용 발마칸 소매 트렌치코트, 더플코트, 폴로 코트. 그 이상의 아이템은 학생들에게 요구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캠퍼스는 캐주얼한 우아함이 사랑받는 곳이다. 20세기 중반, 특히 4-50년대 EEE(Eastern Eastblishment Elite 동부 기득권 엘리트)의 남성복 유행을 주도하던 아이비 대학생들은 그들의 옷차림이 졸업 후 시작될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대도시의 비즈니스 세계는 우스티드 네이비 슈트와 그레이 플라넬 슈트로 대표되는 사뭇 다른 유니폼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그에 반해 캐주얼함이 사랑받던 아이비 캠퍼스에서 통용되던 옷차림은 영국 상류층이 그들의 시골 별장에서 즐기던 트위드, 플러스 포, 컨트리 부츠의 스포츠용 복장을 닮아 있었다. 실제로 여덟 대학 중 대다수는 작은 캠퍼스 타운에 고립되어 있었고, 그들의 스타일은 영국 귀족의 컨트리-룩과 많은 요소를 공유했다.
아이비의 컨트리적 성격을 방증하는 것은 당시 아이비 스타일을 가장 충실하게 대표하던 대학이 뉴저지 프린스턴에 고립돼 있던 프린스턴이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뉴욕시에 위치한 콜럼비아 학생들은 맨해튼의 수많은 아이비 스토어(아이비 스타일의 남성복을 판매하는 Brooks Brothers, J. Press, Chipp과 그 외의 남성복/액세서리 가게들)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타 아이비 대학과 같은 스타일의 통일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뉴헤이븐의 예일과 프린스턴의 프린스턴이 그들만의 드레스코드를 확립하고 지켜내고 있던 것에 반해 콜럼비아 학생들의 스타일은 다문화적이고 도시적인 뉴욕의 그것을 닮는 일을 피하기 어려웠다. 케임브리지의 하버드, 필라델피아의 유펜 역시 프린스턴만큼 탁월한 스타일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시 아이비 대학의 복장 규율은 오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슈트와 타이를 착용하고 강의에 참석했고, 주말에도 블레이저 타입의 재킷을 입어야 했다. (남성복 작가 브루스 보이어는 50년대의 대학생은 강의에 타이 없이 참석했다고 주장한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규율은 조금씩 느슨해진 듯하다.) 가끔씩 찾아오는 교수와의 식사, 교내 행사 등에는 언제나 슈트를 입어야 했다.
따라서 학생들은 클래식 남성복의 기본 양식을 지키는 동시에 캐주얼함을 추구해야 했다. 재킷-타이-팬츠-구두의 공식을 준수했지만, 실크 타이, 레이스업 구두, 소모사 슈트, 트윌 조직 셔츠의 포멀함보다는 거친 질감의 트위드 재킷, 플라넬 팬츠/카키 팬츠, 옥스퍼드 셔츠, 레프 조직의 타이가 선호됐다. 이러한 제품들은 브룩스 브라더스, 안도버 스토어, 제이 프레스, 칩(Chipp)과 같은 캠퍼스 내 아이비 스토어들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아이비 스타일은 의복과 액세서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학생들이 보여주던 착장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새 옷보다는 낡고, 편한, 오래 입은 옷을 멋지다고 규정한 그들의 취향이었다.
새 옷은 지나치게 뻣뻣하기에 멋지지 못하다는 아이비의 이념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다. 19세기에 시작된 하버드와 옥스퍼드 간의 조정 경기에서 옥스퍼드 조정팀의 '절제된 멋'은 대서양 반대편의 옥스퍼드가 되고자 한 하버드의 학생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전통과 역사의 깊이에 있어서 '모국'의 옥스퍼드와 경쟁할 수 없었던 하버드 학생들에게 이 사건은 '전통적인 것이 멋진 것'이라는 이념을 확고하게 심어준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결국 새 옷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인식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Esquire).
50년대까지 이어진 '낡은 옷 사랑'은 새 옥스퍼드 버튼 다운 셔츠의 칼라를 사포로 갈아 내는 유행, 오직 엘보-패치가 추가된 해리스 트위드 재킷만을 입는 경향 등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오래된 편안함'의 추구는 오늘날 아이비를 각광받게 하는 ‘신경 쓰지 않은 듯한 멋’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4-50년대 아이비리그의 학생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슈트를 비스포크 테일러와 함께 고안했던 윈저 공작 등의 인물들과 다른 방식으로 스타일의 유행을 주도해야 했다. 그들은 주로 기성복을 구매해 입던 남성들이었다(아이비리그 스토어들이 트렁크 쇼를 통해 맞춤복 역시 제작하고 있었으나, 역시 기성복의 판매량을 따라가진 못했다) 따라서 아이비 스타일의 구현은 미국의 시장에 판매되고 있던 제품들에 의해 그 범주가 잠재적으로 제한되고 있었다. 학생들이 그들의 캠퍼스 생활에 적합한 워드로브를 꿈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남성복 업계가 그것을 유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했다. 따라서 아이비를 규정하는 제품의 등장은 아이비 스타일의 탄생/완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이기도 했다. 난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넷을 골라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색 슈트 (Sack Suit)
아이비 스타일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01년 브룩스 브라더스의 넘버 1 슈트 출시였다(Christopher Chevnold는 이것을 아이비 스타일의 빅뱅이라 말한다). 허리 다트가 생략된, 어깨에서부터 밑단까지 직선으로 떨어지는 모양의 재킷과, 플릿이 없고 직선으로 떨어지는 구조의 바지로 구성된 이 슈트는 실용성을 그 누구보다 중요시하던 미국인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고, 오늘까지 아메리칸-스타일을 대표하는 재킷의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 (재킷은 항상 리어-벤트 형태로 제작됐고, 라펠의 경계선을 따라가는 스티치가 가미됐다 그것은 재킷의 캐주얼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완곡하게 말하자면 여유 있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루와도 같은 형태의 색 슈트의 이점은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었고,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띄지 않는 유니폼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 포스트에서 다루었듯이 영국에서 처음 기성복이 백화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을 때도 이와 같은 여유 있는 핏의 슈트가 대량 생산되었고, 몸에 밀착된 귀족적인 프락 코트와 대조되는 이러한 헐렁한 핏의 슈트는 상류층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아이비 대학생들은 이러한 자루-모양의 슈트를 그들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편안함'을 중시했던 그들에게 색 슈트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아이비 스타일의 대표적 의류상으로서 영국의 버튼 다운 옥스퍼드 셔츠, Shetland 스웨터, 폴로 코트, 레프 타이, 아가일 문양의 양말 등의 영국식 의복-액세서리를 미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이비 스타일이 클래식 남성복 애호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오늘, 당시 남성들이 즐겨 입던 색 슈트가 아직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꼭 입어야 하는 유니폼을 찾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오늘의 클래식 남성복 애호가들에게 있어서 색 슈트의 지나치게 펑퍼짐한 실루엣은 그다지 매력적인 옵션은 아닌 듯하다. 아메리칸 스타일을 표방하는 Tailor Caid와 클래식하게 여유 있는 실루엣을 선호하는 피렌체 사르토리아 꼬르꼬스의 코타로 미야히라 역시 허리에서 좁아드는 선(Waist Suppression)을 완벽하게 제외할 정도로 펑퍼짐한 슈트를 만들지는 않는다.
2. 페니 로퍼
“1930년대 후반, 새로운 형태의 신발이 예일 캠퍼스에 등장했고, 단숨에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36년 팜비치에서 첫 모습을 드러낸 GH BASS &CO의 Weejun 페니 로퍼는 뉴 헤이븐의 학생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Christopher Chevnold)
등장과 함께 페니 로퍼는 아이비 스타일을 대표하는 신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모카신 형태의 구두로서, 페니 로퍼는 브로깅(구두 갑피에 추가되는 작은 구멍들), 레이스, 테슬, 캡, 윙과 같은 비즈니스 신발의 특징이 모두 빠진 것이
특징이었다. 위준 로퍼의 제작자 역시 이러한 성공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페니 로퍼가 누리던 선풍적인 인기는 오로지 아이비 학생들의 확고한 취향이 가능케 한 것이었다.
페니 로퍼는 30년대에는 아가일 문양의 양말과 함께, 50년대에는 흰 스포티한 양말과 함께, 60년대에는 양말이 생략된 채 착용되었다. 오늘 이 신발은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80년대 이후부터 시장에 유통되는 페니 로퍼들은 이탈리안 스타일의 매우 날렵한 라스트의 로퍼인 경우가 많았고, 이와 같은 페니 로퍼들은 아이비 스타일의 색-슈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유행하는 페니 로퍼의 모델 중 알덴의 몇몇 라스트에서 볼 수 있는 뭉툭한 형태의 로퍼가 아이비 스타일의 로퍼의 명맥을 충실하게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3. 카키
1944년 통과된 G.I Bill은 아이비 스타일에 있어 큰 전환점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전역 군인들에게 대학 학자금 대출을 제공한 이 법안은 EEE를 상징하던 아이비 대학의 학생 구성을 민주화시켰고, 유럽과 아시아의 전장을 누비며 ‘실용적인’ 옷에 적응한 남성들이 캠퍼스를 침범하는 일을 예고했다. 그들은 군에서 애용하던 카키, 혹은 치노를 여전히 애용하고 있었고, 캠퍼스를 수놓게 된 카키 바지는 캐주얼함을 추구하는 아이비 스타일의 클래식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로서 트위드 재킷, 옥스퍼드 버튼 다운 셔츠, 치노 팬츠. 페니 로퍼라는 오늘날 아이비를 대표하는 아이비-룩이 완성되었고, 아이비 스타일은 5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당시의 카키는 오늘날의 청바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모든 슈트와 포멀 아이템들이 드라이클리닝 되어야 할 때, 카키 팬츠는 그저 손빨래되어 잘 말려두는 일 이상의 관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턴업과 플릿이 생략된 캐주얼한 카키 팬츠는 놀랍게도 트위드 재킷, 플라넬 재킷, 더플코트, 폴로 코트, 쉐트랜드 니트웨어, 화이트 벅스, 페니 로퍼를 포함한 모든 아이비의 아이템들과 훌륭하게 매칭 되었다.
4. 버튼-다운 칼라
버튼 다운 칼라의 원형은 역시 전설이 된 브룩스 브라더스 버튼 다운 셔츠다. 그것은 폴로 경기 중 셔츠 칼라가 얼굴을 때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칼라를 버튼으로 고정시켰던 영국의 폴로셔츠를 모방한 데서 기원했다. 1900년 처음 출시된 이 셔츠는 당시 시장에 판매되던 다른 모든 칼라와 달리 상당히 부드러웠고, 착용자의 움직임과 함께 움직여 주는 매우 편안한 착용감을 선사했다. 스포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이 칼라의 캐주얼함은 실용성을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고 1920년대부터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셔츠로 꾸준히 높은 판매수를 기록하고 있다.
아이비리그 스타일에 있어서 이 소프트한 버튼 다운 칼라는 어깨 패딩이 없고 매우 캐주얼한 색-슈트와 좋은 조화를 이루었고, 옥스퍼드 셔츠 감으로 제작되었을 때 트위드의 거친 질감과 매우 잘 어울리는
조화를 보여주었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오리지널 모델은 칼라의 포인트들이 비교적 길게 제작되었고, 이것은 칼라가 말리는 '롤'을 연출했는데, 부드러운 칼라 사이로 윈저 노트나 포-인-핸드 노트가 자리했을 때,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지금 현재 아이비 스타일은 '하이 앤 로우' 스타일과 함께 클래식 남성복 애호가들에게 크게 각광받고 있다. 에스콰이어의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닉 설리반은 "유행이 어디로 갈지 짐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유행은 한쪽으로(e.g. 캐주얼) 치우친다 싶으면 반대쪽(포멀)으로, 반대쪽으로(포멀)으로 치우친다 싶으면 다시 그 반대쪽(캐주얼)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클래식 남성복의 부활과 함께 크게 각광받던 포멀한 비즈니스 슈트의 유행이 현대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 지나치게 포멀했고, 그것이 캐주얼함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유행의 도래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해석 역시 가능할 테다. 도쿄의 남성복 스토어 브라이스 랜드의 에단 뉴턴은 주중에 포멀한 비즈니스 슈트를 입는 남성들 역시 주말에 입을 조금 더 캐주얼한 옷을 필요로 하며, 클래식한 스타일에 눈을 뜬 남성들은 주말 워드로브의 구매에 있어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난 아이비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클래식 남성복을 소비하면서 아이비 스타일이 선점한 아이템들과 사랑에 빠지는 일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버튼 다운 셔츠, 코튼 치노, 페니 로퍼, 화이트 벅스 등, 20세기 중반 아이비 학생들이 클래식 아이템으로 거듭나게 해 준 아이템들은 아이비의 클래식 아이템일 뿐만 아니라 남성복의 '기본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충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면, 아이비 스타일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또 하나의 포스트를 준비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