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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y 05. 2020

일본과 아이비 스타일

Ametora (2015)

사실 일본의 아이비 스타일에 관한 포스트는 추후로 미뤄두려 했다. Ametora라는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책 한 권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은 힘들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주제로 포스트를 작성하던 중, 우연히 아메토라를 펼쳤고, 낭패스럽게도 빠져들고 말았다.


재미있는 책이다. 독자를 따분하게 하는 통계와 사건들을 나열하는 ‘객관성’의 연기가 아닌, 일본 아이비 문화의 중심적 인물들을 조명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서술 방식을 선택한 이 아메토라라는 책은  특별히 아메리칸 스타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늘 포스트는 아메토라 일부의 요약본이라 해도 무관할 테다.




책은 ‘스타일이 없는 나라’(A Nation without Style- Ch. 1) 일본이 미국식 남성 복식을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단계를 거쳐 끝내 미국으로 그들의 스타일을 역수출하는 나라로 변모하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무엇보다 책의 매력은 이러한 극단적인 변화가 몇 명의 인물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옷을 향한 열정을 밀어붙인 데서 왔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저자 데이비드 맑스(W. David Marx)의 인물 중심적(반-아카데미적) 관점이다.



교복이 썩 잘 어울리는 중학생 시절 켄스케 이시즈다. (출처: Ametora)


그가 지목한 이들 중 일본 아이비 스타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단연 켄스케 이시즈(1911-2005)다.


켄스케 이시즈는 1911년 일본 오카야마에서 부유한 종이 도매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다이쇼 시대(1912-1925)와 함께 성장한 이시즈는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적으로 서구화되고 있던 일본에서 빠질 수 없던 존재, 서양식 복식, 서양식 음악, 서양식 음식을 포함한 모든 서양식 문물에 열광하던, 모던보이(모보)로 자라난다. 그는 교복에 금장 버튼이 달린 교복을 입기 위해 부모님께 전학을 요구할 정도로 일찍부터 서양식 옷에 유별난 접착을 보이던 소년이었다. (그는 동네 재봉사를 동원하여 교복 바지 뒤주머니에 플랩을 달고, 밑단을 넓혔다고 한다).  


당시 일본 청소년 모두의 유니폼, 가쿠란 교복을 입고 있는 대학생 켄스케 이시즈. 벌써'모던보이', 하면 떠오르는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 (출처: Ametora)


1929년, 이시즈는 ‘학업을 마친 후 돌아와 가업을 이어받겠다’는 약속과 함께 동경의 메이지 대학으로 떠난다.


“나의 대학 생활은 환상적이었다. 난 단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복싱 코칭, 대학 최초의 모터사이클 동아리 조직, 무허가 택시 회사 운영 등으로 청춘의 에너지를 마구잡이로 방사하는 대학 시절을 보낸다. 당시 그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에는 지나치게 산만한 대학생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학생활은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1932년, 그는 약속한 대로 오카야마의 종이 공장으로 귀환한다. 예상 가능하듯 시골 종이상의  ‘더럽게 지루한 ’(‘boring as shit’)삶에 만족하기엔 이시주는 지나치게 열정적인 사내였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밤에는 게이샤 하우스를, 주말에는 도금공 학교를 찾았고, 테일러된 슈트로 그의 워드로브를 채우며, 옷을 직접 제작하는 일을 꿈꾸었다.



1932년 그의 결혼식 사진이다. (윗줄 맨 오른쪽) 화려하게 차려 입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는 모닝코트에, 특별 제작한 아스콧 차림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시주를 구해준 것은 30년대 급격하게 돌아가던 국제 정세였다. 중국으로의 ‘진출(침략)’을 꿈꾸던 일본은 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37년 중국을 상대로 본격적인 전쟁을 개시했다. 1939년 10월, 이시주는 당시 텐진에서 백화점 사업을 하고 있던 고향 출신 지인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고, 그것을 승낙한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시골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던 모던보이다운 결정이었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특히 나는 매일 같이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했고, 자유분방했던 텐진으로 떠나고 싶었다.” (켄스케 이시즈)



(저자는 그에게 떠나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당시 오카야마에는 그가 아끼던 게이샤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이시주는 그 진위가 확인되기를 두 손 놓고 기다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텐진 시절의 이시즈. 사진으로 분간하긴 어렵지만, 화이트 재킷에 투톤 스펙테이터를 착용하고 있는 듯하다. 스트라이프 타이도 멋지다.(출처: Ametora)


40년대의 텐진은 연미복 차림의 영국 상류층에서부터 비렁뱅이 모양새의 러시아 이민자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서양인들이 거주하던 자치구를 갖춘 국제 항구도시였다. 이시즈는 즉각 백화점에서 남성복 판매에 착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꾸던 슈트 제작을 맡게 되었다. 그는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물자 이동에 차질이 생기자, 고향 오카야마의 테일러를 텐진으로 데려와 그곳에서 슈트를 만들어서 판매할 정도로 슈트 제작과 판매에 열을 올렸다.



그에게 있어 텐진에서의 생활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웠을 테다. 그는 근무 시간 외에는 일본인과 교류하지 않고, 서양인들과 지속적으로 친분을 쌓았다. 기본적인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우고, 텐진의 게이샤에게서 중국어도 배우고 있었다.



텐진에서 보낸 근 7년 동안 이시즈는 서양 문물을 서양인들을 통해 직접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서양식 옷을 판매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1945년이 도래했을 때, 그는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하고 있었다.



텐진 시절의 이시즈.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 클럽 칼라와 더블브레스트 슈트를 착용하고 있다. (출처: Ametora)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의 전세가 기울게 되면서 그 역시 머리를 깎고 해군에 입대하지만, 그가 한 일이라곤 설지-양모로 제작된 댄디한 제복을 맞추고선 글리세린 공장 관리를 맡아, 생산 기계를 변형시켜 프랑스식 향의 비누를 생산한 것 뿐이었다 – 그는 훗날 태평양 전쟁 시기 자신의 행실에 대해 “난 조국을 위해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나와 같은 젊은이들 때문에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었을 테다”라고 고백한다.)



1946년, 모던보이 이시즈는 서른다섯의 나이로 일본으로 귀환한다. 돌아온 조국의 현실은 참담했다. 고향 오카야마는 모조리 불타버렸고, 전 일본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호의호식하던  이시즈 역시 텐진에서 일본으로 넘어오는 거친 뱃길에서 나름의 '고생'을 경험해야 했다. 오카야마의 참상을 눈으로 본 그는 조국의 어려워진 사정을 직면해야 했다 (이시즈는 직접 가난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텐진에서의 사업을 정리하면서 마련한 27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일본으로 직접 가져왔다)

 

마드라스 재킷을 입고 있는 이시즈(좌). 상당히 '아이비'스러운 선택이다.


이시즈는 같은 해 가문의 사업을 정리하고, 속옷 회사인 Renown에 취직한다. 그 다운 선택이었다. 이곳에서도 수완을 발휘한 그는 일을 통해 알게 된 오사카 최고의 테일러들과, 해밀턴이라는 군인을 통해 미국 PX에서 확보한 옷감들을 활용하여 당시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품질의 옷들을 생산해낸다.


결국 텐진에서의 경험과 Renown에서 얻게 된 정보를 통해 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얻게 된 그는 먹을 것 걱정에 급급하던 1949년의 일본에서 고가의 서양식 옷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회사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시즈 스토어였다.


옷과 음식을 위한 지출의 비율이 1대 40에 육박하던 철저한 빈곤 속의 조국을 눈앞에 목격하면서도 그에게는 ‘최고급 슈트’를 찾는 남성들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던 듯하다. 군 시절에도 멋진 제복과 좋은 향의 비누에만 집착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낙관적 관측이었을 테다.

“일본에서 누군가 제대로 된 서양식 옷을 판매한다면 그것은 그(이시즈)가 되어야만 했다”.(W. 맑스)



역시 그에게는 운이 따르고 있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예견하지 못한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다주었다. 개전과 함께 한국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일본을 그들의 생산 공장으로 삼았고, 엄청난 양의 물자가 미국에서부터 일본으로 유입됐다. 전쟁 내내 일본 생산 전체량의 75%가 한반도로 투하됐고,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 현금이 일본에 축적되고 있었다.



1954년의 켄스케 이시즈. 라펠 롤이 첫 버튼까지만 내려오는 정통 쓰리 버튼 재킷을 입고 있다. 가슴과 힙 포켓이 모두 패치 포켓이다. (출처: Ametora)


6.25는 일본을 끼니 걱정에서 구제해 주었다. 이시즈는 한국 전쟁을 예견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국제 정세는 다시 그를 위해 움직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급 남성복’을 판매하고자 했던 그의 앞에 놓인 장애물은 여전히 높았다.


경제난을 벗어난 50년대 중반부터 영화를 통해 파리의 최신 유행을 접하고, 프랑스 패션에 열광하고 있던 일본 여성들에 비해 대다수 일본 남성들은 ‘신사복’에 대한 인식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남성에게 있어 '복장'보다 간단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젊은 남성들은 학창 시절 착용하기 시작한 가쿠란–교복을 대학에서까지 사시사철 입어야 했고(날씨가 더워지면 재킷을 벗었고,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여름용 복장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규격화된 슈트를 사서 입은 후, 그것을 평생 벗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절대적 다수의 남성에게 있어서 옷차림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요구되는 순간은 단 한 차례도 찾아오지 않았다.


“남성복은 균일화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었다. 싱글-브레스트 차콜 그레이 슈트, 네이비-블루 슈트, 어두운 색상의 타이와, 어두운 색상의 구두... 화이트 셔츠의 판매량은 색상이 가미된 셔츠의 그것을 20배 이상 웃돌고 있었다.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는 일 만으로도 남성들은 직장에서 곤란함을 겪었다.” (W. 맑스)



또 다른 장애물은 일본 남성들이 가지고 있던 '고급-슈트는 테일러된 슈트/맞춤 슈트'라는 인식이었다.  기성복 사업을 꿈꾸던 이시주에게 있어서 일본 남성들의 이러한 ‘확고한’ 신념은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큰돈을 벌게 된 일본 사회 부유층을 상대로 고급 스포츠 코트를 판매하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일본의 중산층을 고급 기성복이라는 사치품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아오야마의 Van Jacket 사무실 (1964) (출처: Ametora)


기성세대 일본인들이 스스로 그의 ‘훌륭한’ 옷을 알아봐 주지 못한다면, 직접 고객층을 세뇌시켜야만 했다. 만화 잡지의 이름을 딴 Van(공식명은 Van Jacket)으로 브랜드의 이름을 바꾼 이시즈는 그가 만드는 옷이 훌륭하다는 확신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프로파간다 작업에 착수했다.



1954년, 그는 막 탄생한 Otoko no Fukushoku라는 남성복 잡지에 원고를 투고하기 시작한다. 일본 내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남성복 잡지였던 Otoko no Fukushoku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즈 특유의 추진력에 의해 Van의 광고부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잡지 전면에 Van의 광고와 모델 샘플이 종횡무진했고, 이시즈는 너무나 많은 칼럼을 직접 작성한 나머지 각종 우스꽝스러운 필명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 중 하나는 에스콰이어의 이름을 딴 Esu Kaiya였다고 한다).



Otoko no Fukushoku의 첫 이슈 (1954) (출처: Ametora)


일본 내에서 서양 복식에 관한 그의 권위에 도전할 이는 없었기에 경쟁자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서양 복식에 대한 확신을 잡지 전면에 담아내었고, 잡지 부수의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여 Van의 스토어에서 직접 판매했다.  



(여기서 저자 W. David Marx가 지적한 일본 잡지와 서양 잡지의 차이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30년대 미국에 관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처럼, 서양 남성 잡지 사설은 이미 남성복에 관한 수준 높은 지식을 갖춘 남성들을 상대로 옷에 대한 단상을 '공유’하는 접근을 채택하고 있었다. 제품이나 이미지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의 톤으로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남성다운 접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잡지는 전혀 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잡지라기보다는 지켜야 될 규율들을 하명하는 교과서로서 독자들을 대하고 있었다. 어떤 옷이 멋진 옷이며, 그것을 어떻게 입어야 하며, 어디서 구매해야 하고, 그것이 왜 훌륭한 것인지를 명시하는 잡지에게 있어 이상적인 독자란 잡지가 하사하는 최신 정보를 정확히 답습하는 ‘학생’이었다.


Van의 종이 쇼핑백. 고가 브랜드 Van의 쇼핑백 역시 당시 동경의 청소년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출처: Ametora)

 


50년대에 등장한 ‘잡지가 스타일을 전파하고, 대중이 그것을 답습하는’ 형태의 패턴은 그 후로도 수십 년간 일본 남성복 시장을 지배한다(W.D. 맑스) -미국의 스트릿-스타일(street style)에 관한 잡지 기사가 거리에서 발견된 젊은이들의 복장을 포착하여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라면, 일본의 스트릿 스타일 칼럼은 아직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스트릿 스타일’을 잡지가 규정하고, 잡지가 그 스타일에 필요한 규칙에 대한 인식을 독자에게 교육시킨 후, 그것을 철저히 답습한 젊은이들이 잡지를 통해 배운 ‘스트릿 스타일’ 차림으로 ‘스트릿’에 등장하는 과정을 거쳤다.)


 

Men's Club의 1964년 7월 이슈.


Van의 광고매체로 거듭난 오토코 노 푸쿠쇼쿠는 올바른 복식을 전파하는 동시에 그것을 어디에서 구매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 역시 제공해주었다. 자연스레 Van의 도매와 소매 매출은 급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본 중년 남성들의 ‘고급 남성복은 맞춤복’이라는 믿음은 견고했다. (아마 맞춤복에 익숙한 올드-머니 출신의 이시즈 역시, 그러한 믿음의 타당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나설 수는 없었을 테다.) 결국 이시즈는 공략 연령층을 낮추는 결정을 내린다. 그는 잡지 표지에 Men’s Club이라는 영어 타이틀을 추가하고, 본격적으로 일본의 청춘들을 그의 영향력 아래로 포섭하는 작업을 기획한다.



당시 넓은 어깨에 좁은 허리, 과장된 V라인을 강조하는 매우 과감한 실루엣을 전면에 내세웠던 Van의 기존 라인은 교복만을 입던 대학생들에게는 지나치게 화려한 옷이었다. 그들은 또래들 사이에서 '돋보이고' 싶어 했지만 '지나치게 튀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한 ‘적당한’ 스타일의 옷을 찾는 일이 필요했다. 물론 일본 내에서 그러한 스타일을 탐색해 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48세의 이시주는 1959년 그 다운 결단을 내린다. 한 달간 직접 유럽-미국 전역을 돌며 일본의 청춘에게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을 탐색하기로 결정한 것.


1964년 첫 출간된 남성 패션 잡지 Heibon Punch. Men's Club보다 살짝 가벼운 접근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시즈는 Heibon Punch에도 원고를 기고했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시즈는 유럽식 슈트를 사랑했던 남성이었다. 미국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던 당시 일본의 대중과는 달리 유럽식 슈트와 함께 성장한 이시주는 미국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타일리시한 미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계 답사의 종착지였던 미국에서 발견한 프린스턴의 스타일리시한 대학생들은 그의 편견을 바꾸어놓았다. 검은 양모 가쿠란 재킷 일색인 일본의 캠퍼스 스타일에 비해, 프린스턴을 수놓고 있던 블레이저, 플라넬/코튼 팬츠, 버튼 다운 셔츠 차림의 아이비 스타일은 모던했고, 자연스러웠으며, 우아했다. 큰 어깨와 드레이프, 좁은 허리를 강조한 Van의 기존 모델에 비해 특별한 보형물 없이 신체의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Sack-Suit의 부드러움은 지나치게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학생들의 염려를 덜어줄 수 있을 터였다. 또한 많은 용돈을 받지 못하고 있던 일본의 대학생들에게 있어 약간의 관리만으로도 오랜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양모와 코튼 소재의 옷은 경제적으로도 훌륭한 선택이 되어줄 것이었다.



 

Men's Club의 일러스트 아티스트이자 쿠로수의 친구 카주오 호즈미의 일러스트 Ivy Boy.



결정적으로 이시즈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동부 학생들의 ‘헌 옷 사랑’이었다. 낡은 트위드 재킷, 페니 로퍼, 버튼 다운 셔츠를 입어내는 아이비 학생들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우아함은 평생 남성복을 사랑해온 이시즈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신발에 구멍이 나고, 셔츠 칼라가 해지고 , 재킷에 엘보-패치가 꿰매진 아이비 학생들의 스타일에는 어떠한 우아함이 있었다. 일본의 졸부들은 이러한 검약함에 경악했을 테지만, 올드-머니 출신의 이시즈는 해진 옷을 즐기는 미국 엘리트 학생들과 낡은 교복을 멋대로 걸친 반항아적인 모습으로 그들의 권위를 자랑하던 20세기 초 일본의 엘리트 학생들이 서로 닮아 있음을 눈치챘다. 아이비 스타일은 복식의 유행인 동시에 착용한 옷의 미세한 차이를 통해 착용자의 신분을 드러내는 미묘한 게임이었다. 올드 머니 혈통(”old money blood“)의 이시즈는 그것을 감각할 수 있었다.” (W.D. 맑스)

이시즈는 일본의 청년들을 위한 스타일을 유럽이 아닌 미국 아이비의 성지 프린스턴에서 찾아냈다. 1959년, 그는 일본의 그 누구보다 먼저, 아이비 스타일을 대중에 전파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이 Men’s Club으로 재탄생한 그의 잡지를 통해 아이비교의 신도들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부흥과 함께 일본 전역에 솟아나기 시작한 남성복 가게들은 어느새 일본 최고 권위의 남성복 잡지로 거듭난 이시즈의 Men’s Club에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를 의존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잡지에 원고를 투고하던 이들이 모두 Van Jacket의 직원이었으며, 그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연한 편파성에도 불구하고 Men’s Club을 통해 아이비에 대한 정보를 접한 남성복 스토어들은 Van에 물밀듯이 밀려와 옷을 주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이시즈 역시 나이 쉰의 중년 남성이 돼 있었다. 일본의 청춘을 Van의 새로운 상품들로 안내하는 임무를 직접 수행하기에 그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와 Van에게는 젊은 기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아이비 스타일을 '사업적 아이템'으로 포착한 이시즈는 사실 대륙식 슈트를 더 선호했던 남자였다. 일본의 아이비-부흥을 이끌어줄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 예고되고 있었다.


토시유키 쿠로수가 조직한 Traditional Ivy Leaguers. Men's Club에 실린 사진이다. 사다리 위 모자를 쓴 남성이 쿠로수. (출처: Ametora)


1959년 새로이 Van에 입사한 토시유키 쿠로수는 갓 명문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였다. 입사 당시 그는 이미 그 누구보다 독실한 Van과 아이비의 신도였다. 이시즈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일찍이 가쿠란 교복을 향한 혐오 속에서 ‘진짜’ 슈트를 꿈꾸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1954년부터 Otoko no Fukushoku 잡지를 그의 바이블로 삼고선 일찌감치 아이비 스타일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대학 시절, 힘겹게 손에 넣은 미국 잡지에 나온 아이비 슈트를 모델로 삼아 제작한 슈트를 입고선, 슈트와 재즈를 향한 사랑을 공유하던 친구들과 “Traditional Ivy Leaguers Club”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했다. 그들은 매주 아이비 스타일과 재즈 음악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그들 중 누구도 미국에 가본 적도, 진짜 아이비 스타일을 경험해본 적도 없었으나, (그를 위해 일본 테일러가 만들어준 어깨 패딩이 잔뜩 들어간 '아이비 슈트' 역시 색-슈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아이비 스타일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청년 토시유키 쿠로수(좌)와 쇼수케 이시즈 (중간)의 모습이다. (1961)(출처: Ametora)


아이비에 미친 아이, 쿠로수는 우연히도 이시즈의 아들 쇼수케 이시주와 친분을 쌓게 되고, 그 계기로 1961년 Van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Van 종교의 아이비 계파 전도사로서 켄스케 이시즈가 계획하고 있던 '아이비 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맡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Men’s Club지를 통해 ‘아이비 전문가’ 로서 아이비 스타일의 훌륭함을 대중에게 호소하는 일이었다.


그는 1963년 봄,  "Ivy Leaguers on the Street"이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스트리트 패션' 칼럼을 기획한다. 사진작가와 함께 거리로 나간 쿠로수는 번화가 긴자의 젊은 행인들 중 아이비와 유사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실었고, 복장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



사실 1963년 도쿄의 거리는 아이비 스타일은 커녕 복식 문화에 관심을 가진 남성을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스타일의 사막이었다. 훗날 쿠로수는 긴자 거리에서 첫 스트릿-패션 칼럼을 준비하는 과정이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지면을 채워줄 스타일리시한 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준비한 칼럼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쿠로수는 그렇게 오늘날까지도 일본 패션 잡지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스트리트 패션 칼럼'을 탄생시키게 된다.



데이비드 맑스가 지적하듯 Van과 Men's Club은 남성복 유행의 흐름을 반영하기보다는 그것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이비를 일본에 소개한 이시즈와 Men's Club이 연출한 '거리의 아이비 스타일'이라는 억지 칼럼은 '거리의 아이비리거'를 직접 제조해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존재하지 않는 스트릿 스타일을 잡지가 먼저 다루고, 잡지에서 본 옷차림을 모방한 남성들이 거리로 나서고, 잡지가 그 모습을 노출시킨 후, 더 많은 청년들이 비슷한 옷차림으로 거리로 나서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미국의 복식 유행이 거리에서 시작되었다면, 일본의 그것은 잡지에서 시작되어 거리로 번지는 경향이 주도적이었다.  



60년대 일본의 아이비 스타일은 미국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포멀했다. 사진의 미유키족의 짧은 바지와 아타셰 케이스는 톰브라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아이비가 일본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더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미국의 아이비 스타일은 상류층의 유니폼이라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유통되고 있었고, 그것은 아이비 제품들의 폭넓은 인기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트의 옷을 '배타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던 Van의 제품들은 오직 일본 사회 최상층에게만 판매되고 있었고, 그들 역시 구입한 옷을 아이비 스타일의 형식에 맞춰서 갖춰 입지 못했다. 그들은 Van의 아이템들을 그저 그들의 부를 과시하는 도구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인기를 얻기 시작한 Van의 아이비 스타일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 역시 이시즈와 Van에게 있어서는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버튼 다운 칼라, 블레이저, 코튼 치노를 입고, 7대 3/8대2 가르마를 타고 긴자 거리를 서성대던 부유층 청소년들은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보편적 인식과 완벽하게 불화하고 있었고, 이것은 '아이비', '아이비 스타일', 그리고 그들이 늘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에 적혀 있던 로고, Van이 비행 청소년들의 반항의 상징이라는 인식을 전파시키고 있었다.


1964년 도쿄의 미유키 족. 아이비 스타일의 옷과 머리 스타일에 바지를 매우 짧게 입는 것이 특징이었다.


1964년 여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자행된 '미유키 족' 검거는, 일본 내 아이비 스타일에 대한 인식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곧 도착하게 될 외국인들에게 '모범적 시민'들만을 선보이고자 했던 일본 정부는 매일 같이 긴자 거리를 수놓고 있던 불손한 아이들, 아이비 스타일로 옷을 입고, Van의 종이 쇼핑백을 든 채, 할 일 없이 노닥거리던 미유키 족을' 무작위로 잡아들였다. 학생들의 부모님들에게 연락이 취해졌고, 그들은 엄중한 훈계를 받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해, 긴자 거리에서는 더 이상 미유키 족을 찾을 수 없었다. 일본 경찰과 대중은 이러한 비행 청소년들의 옷이 그들이 숭배하는 미국 상류층의 유니폼이라는 사실에 전혀 무지했다.


사업가인 동시에 서양 남성복 애호가였던 켄스케 이시즈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은 타개돼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쿠로수를 포함한 Van의 몇몇 직원들과 아이비 스타일의 규칙(Do's and Don't's)을 확립하여 전파하기로 결심한다.


"약에는 복용법이 언제나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만약 약을 올바른 방법으로 복용하지 않는다면 부작용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 옷을 입는 일도 이와 같다. 옷 입는 일에도 무시할 수 없는 규율이 존재한다. 규칙들은 스타일의 정설을 알려주고,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학습에 있어서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아이비 스타일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Men's Club)



노년의 토시유키 쿠로수. 윗 버튼까지 잠근 코듀로이 자켓, 터틀넥 차림이다. 라펠 핀이 인상적이다. ㄴ


이러한 계몽 운동의 일선에서 쿠로수는 Men's Club 지면을 통해 아이비의 최고 권위자로서 Q&A 칼럼을 진행한다. 그는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스포츠 셔츠와 타이를 매치시키지 말 것, 커프 링크, 타이 택/핀을 블레이저와 매치시키지 말 것 등을 주문했고, 동시에 아이비 스타일을 추구하는 남성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미국 동부 상류사회의 여유 있는 무심함임을 강조했다. 버튼 다운 셔츠의 버튼을 푸는 일에 관해 문의하는 독자에게 쿠로수는

"그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당신이 그걸 일부로 풀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토시유키 쿠로수)


라고 충고했다.  미국에 살아본 적도 없었고, 실제로 아이비 캠퍼스를 방문해 본 적도 없는 20대 청년 쿠로수가 아이비 스타일의 계명들을 선언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하지만, 당시 그의 '전문성'에 도전을 해온 인물은 없었던 듯하다. "그의 자신감은 수년간에 걸친 공부와 어느 정도의 허풍에서 나오고 있었다."(W.D. 맑스) 쿠로수의 친구 Men's Club의 일러스트 작가 카주오 호주미는 "우리는 그저 룰을 지어내곤 했어요, "버튼 다운 셔츠를 입었을 땐  윈저 매듭이 아닌 , 플레인 매듭으로 타이를 매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저희 말을 믿어버렸어요."



노년의 켄스케 이시즈 그는 2005년에 사망했다.

 

Van의 이러한 '아이비 계명'의 선언은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남성복 업계의 아이비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쿠로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에는 사람들이 Van의 블레이저에서 금 버튼을 떼어버리는 걸 요구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금 버튼이 달려 있기에 블레이저인 겁니다"라는 식으로 '규칙'에 호소해야 했어요. "블레이저에는 언제나 금 버튼이 달려 있다"라는 식의 룰들은 모두의 스타일에 대한 이해를 가속화시켰어요"라고 회상한다.


'룰'을 강조하는 관습은 여전히 일본 의류업계에 강하게 남아 있다. 미국의 아이비 스타일은 국가적 전통, 계급적 특권, 사회적 지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남성 복식의 양식이었다. 미국의 그 누구도 아이비 스타일에 대한 '매뉴얼'을 읽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아버지, 형제, 친구들의 옷차림을 모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달랐다. Van은 아이비의 모든 요소들을 조목조목 분석하여 새로운 '신도'가 미국인을 한 번도 접한 일 없이도, 실수 없이 아이비 스타일 착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했다. 미국 대학 스타일의 최고 강점은 그들의 '무심한 멋'이었지만, Men's Club과 쿠로수의 '룰'들은 아이비 스타일을 마치 세금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과 같이 매우 엄격한 규칙에 가두어 버렸다. (W.D. 맑스)



그러나 Men's Club의 독자들은  아이비 스타일의 '규율'들을 반겼다. "진정한 아이비 셔츠에는 locker loop이 달려 있다, 아이비-멘은 포켓 스퀘어를 아이비-폴드로 접어 넣는다, 아이비 스타일 넥타이의 너비는 정확히 7cm이며, 바지는 너무 짧지 않은 '전통적' 길이를 유지해야 한다. 재킷에는 훅이 가미된 센터 벤트가 자리해야 한다, 슬랜트 포켓은 '아이비'스럽지 않다" 등의 룰들은 점점 더 디테일해졌고, 이러한 규정들은 아이비 스타일을 답습하는 일을 '패션'과 '유행'이 암시하는 여성성에서 해방시켜주는 동시에 자동차 정비, 스포츠와 같은 남성적 취미로 변모시켜주고 있었다.


Van은 오로지 착장의 디테일에 관한 규율만을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1963년 켄스케 이시즈는 세 글자로 표현되는 서양 복식의 마스터 콘셉트, TPO (Time, Place, Occasion)를 남성 복식의 핵심 원칙으로 선언한다. Van의 제품을 형편없는 방식으로 입어대는 일본 남성들을 스스로 개조해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시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양 복식의 마스터 콘셉트를 단 세 글자로 요약해내는 재치를 발휘했던 것이었다.


그는 남성 복식이 단지 유행에 휩쓸리는 '여성적인' 멋내기가 아닌, 상황과 격식에 맞는 옷을 입는 예절의 준수임을 호소했다. 기모노와 같은 일본 전통의상을 입는 일과 마찬가지로 캠퍼스에서, 교회에서, 번화가에서 아이비 스타일로 복장을 갖추는 일은 그에 맞는 룰을 지키는 일을 요구했다. 이시즈는 이러한 TPO의 아이디어를 "When, Where, What to Wear"이라는 가이드북의 출판을 통해 규격화시켰고,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던 이 책을 통해 이시즈는 상황에 맞는 이상적인 옷차림, 코디네이션, 옷감, 올바른 핏에 대한 내용을 명시했다.


책은 "긴 여행, 짧은 여행, 유럽으로의 휴가, 하와이로의 휴가, 미국으로의 출장, 학부모 모임, 블라인드 데이트, 아이스 스케이트, 볼링"등의 자리가 요구하는 옷차림을 세세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등장과 동시에 곧장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의 인기는 대단했다. 소니는 모든 남성 직원들에게 이 책을 나눠주기까지 했다.


이시즈의 When, Where, What to Wear.


"이시즈는 아이비 패션이 그저 왔다갔다 하는 업계의 유행이 아닌 귀족적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통로라는 점을 호소했다. 뜨고 지는 과거의 패션 트렌드와 혼동되고 싶지 않았던 이시즈는 "나는 유행을 만들지 않는다 - 나는 새로운 관습을 탄생시키고 싶다"라고 주장했다." (W.D. 맑스)




1964년 초에 이르렀을 때, Van과 쿠로수, 이시즈는 일본 아이비의 집정관으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하게 됐다. Men's Club과 Van의 노력은 대중의 향상된 의식뿐만이 아니라, 폭발적인 매출의 증가라는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후 이어지는 Van과 이시즈, 쿠로수의 행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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