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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y 12. 2020

일본과 아이비 스타일 2

Take Ivy



켄스케 이시즈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다. 스스로의 취향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그의 자신감은 '소심한' 남성들을 향한 내 악의에 훌륭하게 부합해준다. (다만 서양을 답습하려 했던 일본인이었던 그에겐 그의 '확신'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슬픈 한계 역시 존재했다)


젊은 시절 켄스케 이시즈의 모습.



그에겐 Van Jacket의 제품 보다 기존의 남성복을 선호하는 남성들과 비행 청소년들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Van을 탄압하던 관헌은 계몽되어야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금장 버튼이 달린 교복의 꿈을 꾸던 모던 보이는 어느새 일본 최고 서양 복식 권위자로 거듭나 있었다.



1964년 Heibon Punch의 창간호 커버다. 아이비 스타일의 영향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64년은 일본 아이비 스타일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시즈, 토시유키 쿠로수, Van, Men’s Club의 활약에 힘입어 60년대 초반 일본 남성복 시장의 중요 트렌드로 각광 받고 있던 '아이비'는 64년, Heibon Punch의 등장과 함께 그 전성기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남성복 애호가들을 위한 잡지 Men’s Club과 달리 Heibon Punch는 정치, 유행, 섹스 등 남성잡지의 전통적 이슈를 다루는 주간지였다. 하지만 헤이본 펀치와 기존 주간지의 차이는 전자가 일본의 15-30세 청년 세대를 공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시점에 가판대에 올라선 헤이본 펀치는 청춘을 검약하게 보낸 기성세대와 달리 경제 재건과 함게 성장한 일본의 신세대가 소비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신생 주간지는 대학생들과 갓 사회에 진출한 젊은 남성들에게 ‘소비를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주문했고, ‘여유로운 소비’로 그들을 이끌기 위해 ‘패션’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물론 헤이본의 패션 칼럼이 독자들에게 권유한 것은 아이비 스타일이었다. (켄스케 이시즈가 헤이본 펀치에 칼럼을 기고했고,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쿠로수의 동아리 Traditional Ivy Leaguers의 멤버인 일러스트 아티스트 카주오 호즈미가 일러스트를 맡았다) 아이비 스타일에 대한 전문적 지식보다는 아이비의 기호 아래 유통되던 이미지들과 신형 포르셰, 토플리스 여성의 사진들에 탐닉하는 일반 남성을 겨냥한 헤이본 펀치는 첫 이슈부터 62만부가 팔려나갔고, 2년 안에 판매부수 100만을 기록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Van의 스토어로 몰려들었고, Van의 블레이저, 코튼 치노, 마드라스 재킷으로 무장한 수천의 청소년들이 긴자의 번화가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미유키 거리를 점령했던 미유키족 역시 이러한 젊은이들 중 한 부류였다)




1980년 3월 둘째주 발간된 Heibon Punch의 커버. 창간호에 비해 조금 더 전형적 남성지 커버의 구성에 가까워졌다.


64년 이전의 1세대 아이비 애호가들이 이시즈와 쿠로수의 프로파간다를 통해 아이비를 학습한 Men’s Club과 Van의 ‘매니아’들이었다면, 새로이 등장한 2세대 '아이비족'은 Heibon Punch 지면을 통해 접한 이미지와 주변 친구들의 옷차림을 모방하려 한 아이비의 '캐주얼 팬'들이 절대적 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매출의 성장은 반길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벌어진 미유키족 단속 사건이 방증하듯, 아이비에 대한 오해 역시 깊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급작스럽게 ‘대량생산’된 2세대 ‘아이비족’의 ‘아이비’에 대한 의식은 형편없었다.


“전 아이비가 뭘 뜻하는지 몰라요 – 하지만 멋지잖아요? 안 그런가요?”


라고 고백하는 한 10대 청소년의 인터뷰가 담긴 아사히 신문 사설은 그들의 의식수준을  반영하고 있었다.



Van의 로고 for the young and the young-at-heart. 그 위로 아이비 보이 일러스트가 보인다. 2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라쿤 코트가 눈에 띈다.

아이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아이비 대학들의 존재에도 무지하면서 버튼 다운 셔츠와 마드라스 자켓에 용돈을 탕진하던 일본의 청년들, 신문 사설에서 접한 ‘아이비’를 비행 청소년을 가리키는 비방어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기성세대, 아이비족, 미유키족, 그 외 배부른 청년 세대 를 비방하는 사설들을 써내던 기자들은 모두 ‘아이비’에 대한 심각한 무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계몽’을 위한 더 많은 노력이 켄스케 이시즈와 Van의 지도부에 요구되고 있었다.


“유명 작가 쇼타로 야수오카는 긴자에서 Van의 프린스턴 스웨트 셔츠를 입은 10대 청소년을 목격하고는, 경제 재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청춘들이 여전히 전후 시기의 구호품을 번화가에서 입고 다닌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했다.”(W.D.맑스)


같은 해 여름, 이시즈는 아이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그는 당시 일본 내 몇 안 되는 남성복 디자이너로서 일본 올림픽 팀의 개막식 의상을 디자인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가 정형화시킨 TPO에 입각해 주최팀인 일본 올림픽 팀이 덴노, 일본 국민, 전세계 시민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해야 하는지를 고심했다.


“이시즈의 답은 아이비였다. 그는 금 버튼이 달린 눈부신 붉은 색 블레이저를 선택했다... 1964년 10월 10일, 일본 올림픽 대표팀은 화이트 코튼 팬츠/스커트, 네이비-레드 스트라이프 타이, 흰 모자와 신발, 골드 버튼이 달린 쓰리 버튼의 붉은색 자켓을 입고 스타디움에 입장했고, 텔레비전 앞 수천만의 일본 국민이 그들을 환호로 맞이했다” (W.D. 맑스)


1964년 10월 10일, 빨간 블레이저 차림으로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서는 일본 올림픽 팀.



이시즈의 새빨간 블레이저는 일본내 원로파의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기자들은 붉은색이 너무 여성스럽다는 이유를 들었다). 물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옳았다. 대부분 국가의 올림픽 대표팀들이 그들의 국기에서 따온 색상의 블레이저를 입고 등장했고, 네팔과 멕시코 팀은 일본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붉은색 자켓을 선택했다. 이시즈의 예상대로 블레이저는 올림픽 개막식의 TPO에 전적으로 적합한 복장이었다.



일본 대중들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었다.이시즈는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아이비 블레이저에 대한 전국민적 인준을 받아냈다. 토시유키 쿠로수는


“개막식 직후, [금장 버튼을 교체하라고 요구하던] 백화점의 바이어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어요. 전화를 걸어서는 ‘당신이 판매하던 블레이저, 멋지던데요. 우리 쪽으로 물건들 좀 보내주세요. 빨리’라고 요구하곤 했죠”


라고 회상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아메토라 출판 이후, 켄스케 이시즈가 올림픽 개막식 유니폼을 디자인했다는 일화가 거짓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자 W.D. 맑스의 반박 역시 제시됐다.)


1964년 일본 올림픽팀의 레드 블레이저. 주로 비스포크 자켓에서 발견되는 디테일인 하나뿐인 소매버튼이 발견 된다. 패치 포켓과  주름이 잡힌 소매가 인상적이다.


일본 국민의 아이비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두 번째 마케팅 캠페인은 이시즈의 아들 쇼수케 이시즈가 Van의 기획부에서 던진 막연한 제안에서 시작됐다.


“진짜 아이비리그로 가서 학생들 영상을 찍어오는 게 어때?”


미국 최고 대학들이라는 본래의 환경에서 직접 포착해온 아이비의 ‘진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일보다 일본 내 팽배한 아이비에 대한 편견을 효과적으로 해소해줄 묘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쇼수케 이시즈의 발상은 빤하면서도 기발했다. 1964년부터 새롭게 가능해진 비행기 여행은 이 무모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일을 가능케 해주었다. 다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쇼수케와 쿠로수는 이 프로젝트에 대략 천만엔(2015년 기준으로 20만 달러) 상당의 비용을 예상했다.


그러나 크고 야심찬 계획보다 켄스케 이시즈가 더 사랑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즉각 비용을 마련해 주었고, 이시즈의 텐진 시절 술친구의 아들 하지메 하세가와가 통역으로 합류했다(그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쓰는 가정에서 자랐고, 60년대 초반까지 산타 바바라 대학을 재학한 후 Van에 입사한 광고부 직원이었다). 1965년 5월 23일, 8인 팀의 멘스클럽 직원들은 보스턴행 노스웨스트 항공편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아이비 팬들의 경전이라 평가받는 Take Ivy의 탄생 배경이었다. (Take Ivy는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50년이 흐른 오늘, 사진책이 더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2010년 출판된 영문판 Take Ivy. 1965년 일본판과 같은 표지 사진을 사용하고 있다.


첫 촬영지는 케임브리지의 하바드 야드였다. 아이비를 동경하며 근 10년을 보낸 쿠로수는 설레는 마음에 밤잠까지 설친 채 촬영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하바드 야드는 그가 꿈꾸던 모습 그대로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의 마음은 곧 등장하게 될 하바드 학생들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월요일 아침 기숙사 건물 앞, 소르본 출신의 영상 감독 Ky Ozawa가 이끄는 촬영팀은 학생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을 준비를 마쳤다. 이제 쓰리 버튼 자켓, 코튼 치노, 옥스퍼드 셔츠, 레지멘탈 타이와 윙팁 구두 차림의 학생들이 하바드 야드를 가로질러 그들을 향해 걸어올 차례였다.


“난 그들이 얼마나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서는 충격을 받았어요. 완벽하게 절망했죠.”(토시유키 쿠로수)



그들은 낙심하고 말았다. 앞에 나타난  대학생들은 티셔츠, 해진 반바지, 낡은 고무 샌들의, ‘너저분한’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쿠로수는 ‘아마 이들은 캠퍼스의 문제아 패거리일 테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무리의 학생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 역시 처음의 학생들 만큼이나 형편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일본을 떠나기 전, 미국 대학 출신의 하세가와는 “자켓과 타이는 일요일 예배, 가끔 있는 데이트, 혹은 누군가에게 특별히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만 입는 겁니다”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이비에 대한 환상을 품어온 쿠로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뒤늦게 그 사실을 후회하고 있었다. 1965년 당시 아이비 스타일은 더 이상 대학 내 유행을 주도하지 못했고, 쿠로수는 그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것이었다.


코튼 치노와 반바지에 페니 로퍼를 매칭한 프린스턴 학생들


때는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1965년이었다.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 락앤롤이 청년 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캠퍼스에서 슈트와 타이를 입는 일은 스스로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쿠로수는 자신의 ‘오해’로 인해 Van의 광고비가 의미 없이 탕진돼 버렸다는 생각에 절망감에 빠졌다.



첫 날 촬영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Men‘s Club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아이비 대학의 유니폼이라 선전했던 쓰리-버튼 우스티드 슈트를 입고 아타셰 케이스를 든 학생은 캠퍼스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식축구를 하는 대학생들을 촬영하고 싶었던 이들은 그들이 '미식 축구 비시즌‘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받아야 했다. 그들의 미국과 미국 대학에 대한 정보는 여러모로 빈약한 것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이 아닌 교수들이 그들이 꿈꾸던 아이비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고, 캠퍼스에서 어두운 색상의 슈트와 타이를 하고 다니는 학생은 일본 교환 학생들 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맞닥뜨려야 했다. 일본 학생들은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무심하게 캠퍼스를 누비는 미국 학생들 옆에서 절망적으로 촌스러운(“hopelessly uncool”) 모습을 하고 있었다.


코튼 치노- 테니스 슈즈 - 티셔츠/골프 자켓/레인 코트 차림의 브라운 학생들




그러나 프로젝트 팀은 악조건 속에서도 애초 기획했던 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지속된 탐색 끝에 그들은 마드라스 블레이저와 카키 팬츠를 입고 교회를 빠져 나오는 학생들을 찾을 수 있었고, 턱시도 차림으로 졸업을 기념하던 4학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비 차림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연출해준 몇몇 학교의 협조와 캠퍼스 내 여전히 남아 있던 캐주얼한 아이비 스타일의 차림을 갖춘 학생들 덕분에 그들은 절망스러웠던 첫날의 충격에서 회복하여 (기존에 바라던 것과는 다르지만) 비교적 준수한 모양새의 영상과 사진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다트머스 학생들. 옥스포드 셔츠, 코튼 치노, 페니로퍼/컨버스 스니커즈를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촬영팀은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언급한 바처럼 그들은 히피 문화가 캠퍼스를 강타하고 있던 1965년 미국의 시대적 기류에 대해서 무지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들이 일본 브랜드 Van의 홍보팀이라는 설명을 듣고선 “그건 상업적 선전이잖아요. 난 광고에 나오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촬영을 거부했다. 그들은 결국 대부분의 영상과 사진을 ‘몰래’ 촬영하고선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게다가 촬영팀을 마주한 댄디한 차림의 학생들은 촬영팀이 기대하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쿠로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전혀 패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그들은 스스로가 스타일리시 하다는 사실에 전혀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죠. 그들은 멸시적인 말투로 “난 여기에 공부하러 왔을 뿐이에요. 무엇을 입는지에는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어요.

라고 회상했다. 그가 예일에서 짧은 기장의 코튼 바지를 입고 있는 남성에게 “굉장히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 보죠?”라고 물었을 때, 학생은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세탁할 때 줄어들었을 뿐이에요”라고 답했다.




1964년 발행된 Men's Club. Take Ivy의 사진들보다 확실히 더 포멀한 복장을 선전하고 있다.




쿠로수는 미국에 와서야 켄스케 이시즈가 늘 강조하던 ‘아이비는 새로운 트렌드가 아닌 전통에 대한 존중이다’라는 주장을 이해하게 됐다. 일본 '아이비족'의 (공공연히!) 옷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태도는 아이비가 지향하는 우아함과 완벽하게 모순되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I4s-ju-c3M&t=50s

Youtube에서 찾은 Take Ivy 영상의 일부분(저해상도). 오리지널 영상의 길이는 30분이었다.


촬영을 마친 8인 팀은 일본으로 귀환했다. 쿠로수는 우선 일본 독자들을 안심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는 “아이비 학생들은 멘즈 클럽 지면 위 남성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해진 반바지와 샌들차림의 학생들은 Take Ivy의 영상에도, 사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캐주얼하지만 깔끔한 모습의 (연출된) 아이비 학생들의 이미지들은 그의 주장을 ‘나름’ 정당화 해주고 있었다. 물론 Men's Club과 Van에게는 어째서 미국의 아이비 학생들이 그토록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쇼수케 이시즈는 멘스 클럽을 통해 출판된 인터뷰를 통해 그것의 해결을 시도했다.


 “일본의 아이비 스타일은 사실 학생답지 않은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일본의 아이비-팬들은 더 스타일리시 합니다. 일본의 아이비-팬들은 학생이면서도 어른인 것처럼 슈트를 입죠.” (쇼수케 이시즈)


그들은 켄스케 이시즈가 6년 전 프린스턴에서 깨달았던 것과 같은 교훈을 얻어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아이비 스타일의 가장 큰 매력은 '옷차림의 작은 차이들을 '무심한 듯' 드러내며 상류층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쿠로수와 쇼수케는 아이비 스타일을 추구함에 있어서 이제 일본 역시 룰을 정확하게 지키는 학생의 딱딱한 태도를 벗어나, 미국 학생들의 여유를 배울 때가 되었음을 주장한다.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린 Take Ivy 팀.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진작가 테리유시 하야시다, 하지메 하세가와, 쇼수케 이시즈, 토시유키 쿠로수
백발의 노인들이 됐지만, (하세가와를 제외하곤) 여전히 아이비의 체취가 짙은 슈트를 입고 있는 (좌측부터) 테리유시 하야시다, 쿠로수, 쇼수케 이시즈, 하지메 하세가와



1965년 4월 20일, Van Jacket은 도쿄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Take Ivy”필름 상영회를 개최한다. 마드라스 자켓과 코튼 치노, 블레이저, 페니 로퍼 차림의 수백 명의 10대 청년들을 포함한 2000명 이상의 관객이 자리를 매웠고,  30분 길이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재즈 사운드트랙과 함께 상영됐다. 오늘날 아이비 스타일의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사진책 역시 1965년 말에 출판됐다. (이 역시 Van이 과반수 이상을 직접 확보하여, 스토어에서 판매했다)



Take Ivy 상영회에 참석한 일본 청년들. 신발 앞코가 많이 들려 있다. 아직 슈트리를 넣고 구두를 관리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듯하다.


Take Ivy 포토북과 Take Ivy 태그가 달린 마드라스 자켓.


뉴 잉글랜드의 아름다운 캠퍼스 위를 누비는 건장한 엘리트 미국 남성들의 ‘진짜’ 아이비 스타일을 목격한 일본 남성복 업계, 관헌, 대중의 반응은 예상대로 호의적이었다.


“우리는 [아이비 스타일에] 정당성을 제공해줄 필요가 있었어요. 정당성의 구심점이 필요했죠. ‘Take Ivy’는 그것을 해주기 시작했어요.” (하지메 하세가와)


‘Take Ivy’는 탁월한 한 수였다. 편견을 가지고 있던 도소매 업자들 중 상당수가 Van을 향한 태도를 바꾸었고, 더 많은 일본 청년들이 아이비 제품을 찾아 Van의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Van의 이러한 행보는 일본의 경제 성장과 그 합을 맞추고 있었다. 60년대 중반, 일본은 매년 10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고,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출과 함께 일본 정부는 국내 소비를 촉진시키는 데 힘쓰고 있었다. 일찍이 경험한 가난 덕분에 근검 절약이 습관화된 기성 세대와 달리, 일본의 청년 세대는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하고 있었다.


Van Jacket의 지도부가 보여준 다방면의 노력은 그들을 호황의 직접적인 수해자로 만들어줄 여건을 모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54년 4800만엔에 그친 Van의 매출액은 1967년, 36억엔을 기록했고, 60년대의 끝에서는 69억엔을 넘어섰다. 아이비의 유행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6-7년, Van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아침에 스토어들에 도착한 상품들이 오후면 이미 모두 다 판매돼 버리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졌다(판매할 물건이 떨어진 판매 직원들에게는 휴가가 주어졌다고 한다). 당시 이시즈의 비서였던 타케요시 하야시다는 재고부족으로 인해 당시 Van의 직원들 중 그 누구도 Van의 물건을 구매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켄스케 이시즈와 그의 비서 타케요시 하야시다. 그는 Van의 1978년 파산 이후, 이시즈에게 사무실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쯤에서 Van과 켄스케 이시즈, 일본의 아이비 스타일, 아메토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미리 귀띔하자면, Van에게는 슬픈 결말이 기다린다. 1978년 Van Jacket은 파산을 맞는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매출액과 함께 지나치게 많은 방면으로, 지나치게 갑작스레, 지나치게 많은 자회사를 통한 확장을 꾀한 Van의 제품들은 사치품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했고, 70년대와 함께 일본을 침입한 리바이스, 레드윙 등의 진짜 미국산 제품들과의 경쟁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전문 사업가이기에 앞서 좋아하는 옷을 판매하는 일을 즐기는 남성이었던 켄스케 이시즈는 몸집이 너무 커져버린 Van을(1975년 Van의 수익은 452억엔에 이르렀다) 이끌어줄 ‘전문 상인’의 역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포스트를 위한 리서치 과정에서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Men's Club과 그외 잡지들이 수행한 주도적인 역할이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잡지, 특히 옷의 유행을 주도하는 잡지에 관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느 정도 옷에 대해 관심이 있는 남성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 그보다 앞서가는 스타일’을 찾기 위해 국산 잡지를 뒤적이는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알고 있을 테다.  옷과 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고찰보다는 광고수익에 더 혈안이 된 서양의 남성복 잡지들이 서구 남성복 애호가들의 신뢰를 잃은 것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스타일이 없는 나라'에서 아이비 스타일 최고의 권위자로 거듭나게 된 일본의 서사에는 스스로가 ‘족보 없는 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스승'인 서양을 철저하게 모방하는 일을 지속한 몇몇 남성들의 겸손하고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물론 멋진 옷을 선점하기 위해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멋진 자본가, 켄스케 이시즈가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해준 천운 역시 언급돼야 하겠다.


핀 칼라 셔츠, 헤링본 패턴 자켓, 좁은 폭의 타이를 맨 중년의 켄스케 이시즈.



오늘날 많은 남성복 잡지/블로그/전문가들은 옷을 ‘가볍게 즐길’ 것을 권유한다. 미국/유럽의 유명 블로거-스타일 작가들 역시 올바른 룰과 디테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obsession)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며, '즐기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옷 입기' 본연의 자세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즐기라!"의 주문보다 그 폐해가 큰 폭력은 없다. 스스로의 옷차림에 대한 확신이 결여된 남성이 그의 옷차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믿음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60년대 일본의 아이비족은 아이비 스타일을 향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올바른 삶'의 일환으로서 '여유 있는 소비'를 위해 아이비 스타일 이라는 '올바른 멋'을 추구했다. 물론 올바른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가 아닌 "그것을 올바르게 추구하고 있는가 (실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였다. 따라서 그들은 '룰'에 집착했고, 여유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결국 우아함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의식 저편에 자리하는 본고장 아이비 리거들의 멸시 담긴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50년이 지난 오늘, 아이비 스타일의 최고 권위자들을 보유한 일본은 드디어 아이비 스타일을 ‘즐길'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 식으로나마 접하는 그들의 모습을 관조하며, 난 그들이 오늘날에도 '즐기는' 일에 그 어떤 소질도 보여주지 못함을 발견한다. 역시 타고난 ‘학생'인 그들에게는 어떠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가 가시화하는 교육 과정의 비용은 옷 입기/멋내기의 향유를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학습 없이 ‘나 정도면 멋지지!’라는 확신 속에서 ‘나만의’ (스스로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스타일의 표현을 즐기는 일에는 탁월한 '둔감함'이 요구 된다. 슬프게도 그와 같은 감각의 상실 역시 오직 오랜 자기 기만의 '수행' 끝에서만 찾아와 주는 '노력'의 산물이다.


결국 "즐겨라!"의 주문은, "눈을 닫으라! 멍청해져라!"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권유하는 ‘향유’가 멍청해지지 못한 이들에겐 '천박함'으로 비칠 것이라는 것쯤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그렇게 해서 행복하다면야'의 타협이 따를 차례다.


그러나 '행복'이 그토록 가치있는 것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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