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디즘 2
새빌로의 탄생 11편, 1930년대 미국 편에서 난 당시 미국 남성들이 보여주던 복식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을 언급한 바 있다. 일반 남성들마저 쓰리 피스 슈트를 걸치지 않고서는 집 밖을 나서지 않았던 남성 복식의 ‘황금기',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남성지 에스콰이어는 오늘날까지 남성복식 문화와 남성복 잡지의 '다시 도래하지 못할' 이상향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로렌스 펠로우스가 이끌던 초창기 에스콰이어 일러스트 팀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남성복 애호가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고, 이는 1930년대 복식문화와 30년대 에스콰이어의 위상을 방증한다.
전설이 된 일러스트 팀과 함께 에스콰이어를 남성 잡지의 최고봉으로 거듭나게 한 이들은 남성복에 대한 그들의 단상을 칼럼 속에서 매력적으로 설파한 '스타일 작가'들이었다. 같은 포스트에서 지적했듯이, 초대 에스콰이어 편집장 아널드 깅그리치는 옷의 이미지들에서 묻어나는 '라벤더 향'을 걷어내기 위해 헤밍웨이, 다니엘 헤멧, 알렉산더 울콧 등 남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던 작가들에게 원고를 요청하고 있었다.
오늘날 30년대 에스콰이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로렌스 펠로우스의 일러스트라면, 20세기 중반의 에스콰이어를 기억하는 남성들은 미국 역사 최고의 스타일 작가라 불렸던 조지 프레이져(George Frazier 1911-1974)의 칼럼을 향한 그리움을 고백한다. (알란 플루서, 브루스 보이어의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의 이름은 친숙할 테다)
오늘도 그의 글은 수많은 스타일 블로그에서 쉽게 발견된다. 그는 스타일의 절대 권위자로서, 너저분한 옷차림의 남성들을 향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고, 그가 우아하다고 느끼는 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예찬을 정당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별난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우아한 남성은 우아할 뿐이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어차피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재즈 비평가로 글쓰기를 시작한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그는 그가 규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멋진 남성들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설명하기 위해 'Duende'라는 단어를 고안해내기도 했다. (Duende는 '매혹적인 카리스마/매력'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테다) 프레이져에게 있어서 남성은 Duende가 있는 남성과 없는 남성으로 구분됐다. (그는 "프레드 아스테어에게는 Duende가 있고, 진 켈리에게는 없다! 등의 선언을 즐겨 사용했다 ) 확신에 찬 문체로 그의 미적 취향을 수많은 대중, 특히 5-60년대의 젊은 세대에게 관철시켰던 그의 글은 오늘날에도 그만의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에 대한 포스트를 기획하던 중, 그의 글 중 하나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이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각종 서양 남성복 블로그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스타일에 관한 그의 대표적 사설, "The Art of Wearing Clothes"를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우아한 남성'의 정의를 곱씹어볼 기회를 제공하는 그의 글에서 난 60년대 미국 사회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예상치 못한 재미를 경험한다. 문맥상 불필요한 문장들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국 내 남성복 스토어들에 관한 지나치게 디테일한 이야기들을 삭제한 것 외에는 사설의 전문을 번역했다.
The Art of Wearing Clothes
By George Frazier
조지 프레이져
에스콰이어 1960 년 9월
150년 전, 직접 디자인한 군복을 착용할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지 브라이언 (보) 브루멜이 경기병 장교직을 사퇴한 이후, 수없이 많은 남성복의 유행이 꽃을 피웠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남성의 우아함 혹은 천박함을 결정하는 기준은 그(브루멜)가 그의 완벽한 장갑 핏을 위해 한 장인에게 그의 손가락 가봉을, 다른 이에게 그의 엄지 가봉을 맡겼다는 소문이 유행하던 시절의 그것으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50년 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흠잡을 곳 없이 우아한 옷차림을 갖춘 남성들에게는 바이런을 브루멜의 숭배자로 만들었던 “세련된 단정함”이 발견된다. 브루멜은 언젠가 “만약 행인이 그대를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면, 그대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것이다. 그대의 옷차림은 너무 뻣뻣하거나, 너무 타이트하거나, 너무 화려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브루멜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 그가 구현한 우아한 간소함은 변덕스러운 유행의 범람 속에서 그 빛이 바래지 않는 남성 복식의 유일한 규율로 남아 있다. 그 어떤 새로운 트렌드도- 그것이 얼마나 극단적이건 간에- 그것을 구시대의 전유물로 만들지 못했다. – 맥스 비어봄이 묘사하는 “귀여운 아이를 무릎에 앉히는” 상상만으로도 시대의 댄디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로 지나치게 슬림한 바지 스타일을 자랑하던 에드워드 시대의 슈트도, 프린스턴 비어 재킷의 캐주얼한 세련됨도, 늘 떠올랐다가는 침몰하곤 하는 ‘이탈리안 스타일’도, 혹은 “아이비 리그”라 불리는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건 간에, 그 올바른 명칭은 여전히 브룩스 브라더스 No.1 색 슈트인- 자연스러운 어깨선의 재킷과, 플릿이 없는 바지도 브루멜이 확립한 ‘단정함’의 가치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
브루멜이 등장하기 전까지 남성들은 터무니없이 ‘과한’ 의상을 즐겼다. <<Hayden’s Dictionary of Dates>>는 월터 라레이 경의 옷차림을 묘사한다:
“손목까지 내려오는 소매가 달린 흰 새틴 장식의 베스트, 정교한 꽃문양과 진주로 수를 놓은 더블렛, 모자의 깃털에는 큰 루비와 작은 진주들이 부착돼 있었다. 모두 흰색으로 끝단 처리가 돼 있는 브리치와 스타킹, 희귀한 보석들로 뒤덮인 가죽 구두(그 가격은 6600 파운드를 웃돌고 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갑옷, 다이아몬드, 루비, 진주로 빛이 나던 검과 칼집”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던 버킹햄 경 역시 절제된 우아함의 모델이 되어주지 못했다. 버킹햄 경은 “그의 망토 위 다이아몬드들을 가볍게 부착시킨 후, 망토를 흔들어 몇 개의 다이아몬드를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림으로써 그것을 줍기 위해 달려온 이들로부터 그가 원하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폰 코니츠 왕자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가발에 원하는 명도를 연출하기 위해 그의 하인들로 하여금 각각 다른 색상의 파우더를 뿌리게 한 뒤 가발을 쓴 채 그들 사이를 앞뒤로 거닐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브루멜의 등장 이전의 남성들은 '화려함'을 추구한 공작새들이었고, 당시의 잡지 <<더 타임스 오브 런던>>은 그들의 옷을 여성의 옷 만큼이나 매우 세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었다.
남성 복식에 ‘절제’라는 절대적 규율이 자리 잡게 된 것은 보 브루멜의 등장과 함께 일어난 변화였다. 남성 복식에 있어서 브루멜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어떤 중요한, 혹은 가치 있는 업적 하나 없이도 그는 ‘권위자’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 사이를 거닐고 있다”라고 그를 평했다. ‘간소함’이 well-dressed man (우아한 남성)의 각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영향력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 그 우아한 남성이 멜버른 경이라는 이름의 수상이건, A.J. 드렉슬 비들이라는 이름의 미국 장군이건, 딘 애치슨이란 이름의 전 국무장관이건 프레드 아스테어라는 오마하 출신의 ‘song-and-dance man’이건 간에 말이다.
그러나 보 브루멜은 재야의 예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이미 전설이라 불리던 남성이었다 – 게다가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키우는 일에 직접 일조하고 있었다. 그가 그의 구두약에 샴페인을 섞었다는 이야기, 그의 머리를 세 명의 미용사에게 맡겼다는 이야기 (한 명은 정수리, 한 명은 관자놀이, 한 명은 앞머리를 담당했다고 한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귀족 여성을 오직 그녀의 양배추 먹는 모습이 참을 수 없다는 이유로 퇴짜 놓았다는 이야기 등의 소문들을 유행시킨 것은 그 자신이었다 -. 그러나 이러한 ‘소문’들의 진위를 떠나서 그는 진정으로 까다롭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벗은 모자를 다시 정확하게 같은 각도로 머리 위에 올리지 못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그가 여성들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던 사건은 유명한 일화이며, 오직 스스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을 오로지 그 중 한 명이 ‘굉장히 큰 푸른 코’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억에 의존해서 겨우 알아보곤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허세에도 불구하고, 그가 확고하게 주장하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민감성은 천재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브루멜의 코트의 핏은 너무나도 완벽했던 나머지, 바이런은 “마치 몸이 사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묘사했다.
바이런은 아마 보 브루멜 자신 다음으로 그의 가장 독실한 숭배자였을 것이다. – 바이런을 아는 많은 이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을 굴복시킨 사자였던 바이런은 그의 드높은 유명세, 수려한 외모, 탁월한 재능, 고귀한 혈통, 치명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 그는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바이런- (Byronic)- 스타일을 연출하기 위해 그의 머리를 컬-클립으로 말고선 잠자리에 들곤 했다 - 타이를 매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브루멜과 같은 수준의 기술을 터득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뒤척거림 속에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옷을 입는 데 세 시간이 걸렸으며, 하루에도 옷을 세 번 씩이나 갈아입었던 보 브루멜은 매일 아침 타이를 매는 일을 그만의 신성한 의식으로 격상시켰다. 그 덕분에 “국가 최고의 귀족 보다 [나의] 테일러와 허물없이 화목하게 지내는 일을 택하겠다”는 말을 남긴 왕세자 (조지 4세)는 그 ‘의식’을 참관하는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브루멜의 비법은 12인치 너비의 하얀 모슬린을 목에 감은 후, 턱과 어깨뼈 사이(대략 5인치 정도의 공간)의 공간으로 그것을 밀어 넣는 것이었다. 이 ‘주름 잡기’라고 알려진 그의 기술은 마치 면도를 하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머리를 젖힌 브루멜의 목에 하인이 모슬린을 감은 후, 그가 젖혔던 머리를 아주 조금씩, 매우 천천히 아래로 숙이면서 모슬린에 주름을 잡는 과정을 통해 완성됐다. 버지니아 울프는 “만약 주름 하나가 너무 깊거나 너무 얕다면, 옷감은 바구니에 던져지고, 과정은 처음부터 [새로운 모슬린으로] 다시 반복돼야 했다”라고 전한다. 어느 날 한 방문객이 계단을 내려오는 브루멜의 집사가 두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고선,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집사는 “이것은 저희의 실패작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계산된 무심함”이라고 통용되는 남성적 멋의 원형이다. 캐슬린 캠벨은 그것을 두고 “완벽한 예술”이라 표현했다.
“예술을 은폐하는, 우발적으로 완성되는 그것. 오직 심혈을 기울인 노력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
오늘날 이 ‘계산된 무심함’은 사소해 보이는 작은 요소, 우아한 남성이 행커치프를 그의 가슴 주머니에 넣는 방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잘못된 방식으로 행해졌을 때, - 행커치프가 그저 가슴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어졌을 때 - 행커치프는 네모나게 각진 모양새를 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무심히 찔러 넣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인위적으로 연출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이와는 달리 올바른 방법은 행커치프를 더없이 세심하게 부풀려 마치 그것이 그저 가슴 주머니 안으로 '무심하게' 쑤셔 넣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산된 무심함마저도 맥스 비어봄이 말하는 “신체적 탁월함,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그리고 현금, 혹은 신용”을 갖추지 못한 남성을 우아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 반면, 세월과 나이가 시들게 하지 못하는 위의 조건을 갖춘 남성이라면 (잘못된)맞춤-슈트 역시 그를 초라해 보이도록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우아한 남성”의 대부분이 40세 이상의 남성이라는 사실과 그들 중 기성복을 (가끔이라도) 착용하는 남성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우연일 수 없다. 그들은 멋진 외모와 옷에 대한 감각 이외에도, 거의 모두 뉴욕의 버나드 웨더릴, H. 해리스, 혹은 런던의 E. Tautz와 같은 탁월한 테일러들; 미국의 Dudley G 엘드리지, 브룩스 브라더스, Sulka’s와 런던의 턴불 & 아서와 같은 셔츠 메이커들; 세인트 제임스가의 Lobb(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게 중 하나이기도 한)과 같은 구두장인들;…그리고 그 못지않게 중요한 플라자 호텔의 저명한 빈센트 바딸리아와 같은 이발사들의 도움을 고용할 비용을 치를 수 있는 남성들이다.
이 시대의 가장 우아한 남성들은 거의 모두 예외 없이 오직 최고만을 소비하는 이들이다(그것은 언제나 가장 비싼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신발은 항상 완벽한 광을 자랑한다(‘뼈질’ 역시 자주 행해져야 한다). – Regency (조지 4세의 섭정 시대) 런던 근위 보병 1연대의 켈리 대령의 사망 소식이 런던의 모든 댄디들로 하여금 켈리의 하인– 구두에 탁월한 빛의 광을 내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소문난 - 을 고용하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그들의 ‘최고를 향한 고집’을 반영한다.
소문의 하인이 그를 고용하는 데 200 파운드의 연봉을 요구하자, 브루멜은 “[200]기니(guineas)라면 기쁘게 내가 그대의 시중을 들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는 어떤 불길함이 감돈다. 그것은 당시 브루멜이 남성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를 잃어가고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테일러, 코크가의 슈바이처 & 데이비슨에서 그의 신용을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의 날씬한 몸매 역시 잃게 될 터였다. 그는 더 이상 가장 우아했던 시대의 유행을 비추는 거울일 수 없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우아한 남성으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은 매우 소수의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항상 완벽하게 세련된 슈트, 셔츠, 타이를 갖추고 있는 뉴욕 광고 회사의 한 간부의 경우에는 그의 괴상한 신발 취향에 의해 그 자격을 박탈당한다. 특히 여름이면 그는 머레이 켐튼이 “저 망측한 통풍-신발”이라고 묘사하는 구두를 즐겨 신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소로의 “새로운 의복을 요구하는 모든 일을 경계하라”와 호손의 “옷을 삶의 주된 관심으로 삼은 이들은 그들의 옷 이상으로 가치있는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라는 경고에서부터 맥스 비어봄의 “직장과 가족에 신경이 팔리지 않을 만큼 자신의 옷차림을 의식하지 않고선 진정하게 멋진 모습을 연출할 수 없다”라는 주장까지, 남성복에 관한 무수하게 많은 종류의 잠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옷이 남성을 만들어주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이 훌륭한 옷이라면 남성에게 자신감과 만족감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우리는 모두 동의할 수 있을 테다.
디킨스 소설의 캐릭터 마크 테플리는 “남자는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을 때에만 좋은 기분과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딱히 훌륭한 일은 아니지”라고 말했다. 브루멜은 다른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옷차림을 자랑하는 남성들처럼, 그 어떤 도전도 거부하는 절대적 권위의 아우라를 뽐내던 인물이었다. 그는 스콧 핏츠제랄드의 “신사의 옷은 그가 지니고 있어야만 하며,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어야 하는 권위의 상징이다”라는 잠언의 빛나는 예시였다.
우아함만이 불어넣어 줄 수 있는 ‘확신’을 얻기 위해 세계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장교들은 흰색의 새 장갑을 끼고서 전장으로 출발했다. 사실 장갑은 새것이 아니어도 무관했다. -다만 그것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해야만 했다 – ‘세월’은 남성의 옷에 확신을 주는 특정한 빛을 입혀주기에(그것은 여성복에서는 비교적 매우 드물게만 해당 된다), 칼라일은 “오래된 옷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을 신뢰하지 말라”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견해는 “오래된 옷의 좋은 향기”라는 노래를 부른 루퍼트 브룩도 공유하는 바였다.
오래된 옷의 매력 중 하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오랫동안 의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증명한 존재들이다. 남성은 그들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도록 아끼는 재킷의 라이닝을 새로 달거나, 잘 재단된 셔츠의 해진 칼라와 커프를 뒤집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조셉 브라이언 3세의 옷장에서 발견된 물건 중 가장 매력적인 물건 중 하나는 라이닝이 새로 재봉되고, 버튼이 조여진 것 외에는 그의 아버지가 1912년에 주문한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디너 코트였다.
새로운 옷에는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가 요구된다. 디킨스가 그의 <<위대한 유산>>에서 언급한 바처럼
“손꼽아 기다린 새 옷은 항상 기대에 조금 못 미치기 마련이다”.
새 옷을 입는 일에는 이와 같은 위험이 존재한다. 반면 오래된 옷은 -그것이 최고급 품질의 것이라면- [거듭된 착용과 함께] 남성의 몸에 순응하여, 그에 알맞게 변형돼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최고급 테일러들은 고객이 완성된 옷을 대여섯 번 정도 착용하면서 발견한 사소한 결점들을 수정하기 전 까지는 스스로의 임무를 끝마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품질 좋은 슈트가 테일러의 자체적인 기준을 만족시켰다면, 그 관리는 품질이 떨어지는 옷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쉬워진다. 저명한 비스포크 테일러 하우스 F.L. Dunne의 디렉터 헤더링턴 턴불은 제작된 지 30년 된 그의 디너 코트를 단 한 번도 다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미국의 가장 우아한 남성들은 – 적어도 그 대부분은 – 유서 깊은 옷을 존중할 뿐 아니라, 유서 깊은 환경의 가치를 이해하는 남성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옷과 마찬가지로 깊은 역사를 가진 혈통을 자랑하는 남성들이다. 그들 중 과반수 이상은 세인트 마스, 그로톤, 세인트 폴과 같은 뉴 잉글랜드의 사립학교,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과 같은 아이비 대학의 졸업생들이며, 지나치게 젊고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도시에 거주하지 않는다. 이들은 로져 앤젤이 “퇴폐적인 동부”라 이름 붙인 지역–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그리고 롱아일랜드 내 상류층의 전용 관할구들을 가리킨다 -, 혹은 리치몬드와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세련된 전초지에서 발견된다.
그 중 상당수는 맨해튼의 Racquet & Tennis, Brook, 롱 아일랜드의 Southampton, 보스턴의 Somerset, 필라델피아의 Philadelphia와 같은 상류 사회 사교 클럽의 회원이며, Buck’s, White’s와 같은 런던 클럽들의 국외-회원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아름다움 사이를 거닐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해가 지고 나면 이들은 그들의 사교 클럽에서 주사위/카드 게임을 즐기거나, 뉴욕의 St. Regis, 보스턴의 리츠-칼튼과 같은 ‘선택받은’ 바(bar)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남성들은 그들에게 옷을 판매하는 이들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그들을 향한 지나친 애정을 품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것이다. -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방학에 방문하던 브룩스 브라더스의 추억과 그들을 예의 바른 꼬마 신사로 만들어준 런던 Rowes의 네이비 오버코트의 기억은 그들을 규정한다 -
이들에게 있어 결혼식 날 아침, 브룩스 브라더스의 직원이 그와 그의 들러리들의 아스콧을 매어주지 않는 결혼식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아한 미국 남성의 삶의 방식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J.P. Morgan 역시 브룩스 브라더스의 직원 중 한 명에게 “좋은 아침입니다, 웹 씨,”(“Good morning, Mr. Webb)라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웹은 그를 “안녕, 잭”의 인사말로 맞이하곤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항상 실천돼야 하는 것이었다.
거의 예외 없이, [20세기 초/중반의] 가장 우아한 남성들은 간단히, 그리고 시쳇말로 말해, 어마어마한 품격을 갖춘 남성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고장의 영주와 같은 지위를 타고난 이들은 그들만큼의 자존감을 갖추지 못한 남성들에게서 발견되는 초조함과 무관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빤한 치장을 시도하지 않는다. Herbert Bayard Swope과 같이 값비싼 모노그램이 추가된 양말을 선호하는 일은 격식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A.J. 드렉슬 비들[50년대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손꼽히던 인물]이 필라델피아의 Jacob Reed’s에서 1달러에 판매되는 검은 리브 조직의 건염 물감으로 염색된 라일사 양말(발가락과 발꿈치에 나일론-패드가 추가된)을 낮에도 그리고 이브닝 웨어를 착용할 때에도 애용한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63세 펜실베니아의 부관 장군 A.J. 비들을 미국의 가장 우아한 남성으로 지목하는 일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일이겠으나, 미국, 심지어 전 세계를 통틀어 그보다 더 우아한 남성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잏일 테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인준하는 이들은 바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멋진 남성들이다. 그들 중 이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시켜준 이는 전 주미 터키 대사의 아들인 아멧 엘테군이었다. 몇 해 전, 엘테군은 런던의 E. Tautz에서 비들을 위해 제작된 슈트를 어떠한 계기로 손에 넣게 되었을 때, 곧장 그것에 셀로판 커버를 입혀 옷장에 걸어 두었다. 오늘도 그 슈트는 여전히 그곳에 보관돼 있으며, 그는 그 슈트를 오로지 격식 있는 행사에 참석해야 할 경우, 혹은 옷에 대한 인식을 갖춘 손님에게 그 탁월한 재단과 비교할 데 없이 훌륭한 바느질을 선보이기 위해서만 옷장에서 꺼낸다.
사람들은 이 남자, “토니” 비들이 옷들로 가득한 엄청나게 큰 옷장을 가지고 있으리라 예상할 테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백만장자>>라는 연극의 모티프가 됐던 아버지를 두었으며,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전공을 올린 군인 중 하나였던 이 필라델피아 출신 엘리트의 워드로브는 너무나 빈약한 나머지 바이런, 혹은 라파엘 트루히요 장군(전 도미니칸 공화국의 대통령)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를 옷 한 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남성으로 여겼을 것이다.
바이런의 전기 작가 레슬리 마르샨드에 따르면 1812년 6월 20일 바이런은 흰색의 고급 누빔 조끼를, 7월 1일에는 흰 실크 라이닝과 20개의 강철 버튼이 가미된 올리브 색 코트 드레스 코트를 구매했고, 추가로 매우 화려한 자수가 들어간 코트 드레스 조끼, 실크 소재의 검은색 고급 브리치스 역시 구매했다. 8월과 9월에도 수십 가지의 제품들을 추가로 구매했고, 9월 18일에 그가 구매한 물품의 총액은 243 파운드 10실링에 달했다.
트루히요의 경우, 그의 옷에 관한 취향은 다른 취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여성 편력을 지칭하는 듯하다 (역주))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그는 뉴욕의 테일러에게 한 벌당 285달러씩 하는 슈트를 14벌, 196달러 스포츠 재킷을 4벌, 20-30달러 스포츠 셔츠를 10장, 7.50 달러 타이를 50개, 88달러 슬랙 팬츠를 4벌, (한 번에) 주문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비교했을 때, 비들의 워드로브는 그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금욕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일곱 벌의 비즈니스 슈트 – 두 벌의 더블브레스트, 한 벌의 싱글브레스트 네이비 블루 서지 슈트, 한 벌의 더블, 한 벌의 싱글브레스트 다크-블루 핀 스트라이프 플라넬 슈트, 한 벌의 싱글브레스트 차콜 그레이 플라넬 슈트 (슈트들은 모두 뉴욕의 H, Harris -2피스 슈트 한 벌당 225달러 - 혹은 대부분의 최고급 런던 테일러가 그러하듯, 그보다 25%정도 저렴한 런던의 E. Tautz에 의해 제작됐다. 모든 슈트에는 스켈레턴 알파카 라이닝이 추가돼 있고, 소매에는 세 개의 버튼과 리얼-버튼홀이 자리한다. 싱글-브레스트 슈트는 모두 쓰리 버튼, 노치 라펠로 구성돼 있다). 포멀한 자리에서 그는 낮에는 차콜 그레이 체비엇 컷어웨이 모닝코트, 화이트 조끼, 넓은 스트라이프가 가미된 검은 바지를 착용하고(그는 이 조합에 검은 실크 아스콧과 와이드 윙 칼라를 매칭했다), 세미-포멀 주간 행사를 위해선 차콜 그레이 싱글-브레스트 체비엇 색(sack) 코트와 검은색, 혹은 케임브리지 그레이 색상에 넓은 흰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바지를 입는다.
비들은 아쿠아스커텀의 레인코트 외에 세 벌의 외투를 가지고 있다 – 더블브레스트 친칠라 코트 (E. Tautz – 175달러), 담갈색 싱글브레스트 코버트 코트 (H. Harris 225달러), 흰 뼈-버튼들이 추가된 더블브레스트 폴로 코트 (H. Harris 325달러)-. 또한 그는 트위드 캡 이외 4 개의 모자를 소유하고 있고, 모두 런던의 Lock’s에서 구매한 제품들이다. 하나는 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모자고, 하나는 오페라 모자이며, 나머지 둘은 홈부르크 모자로, 하나는 검은색, 하나는 녹색이다.
포멀 이브닝 웨어용으로 비들은 연미복 (E. Tautz, 175달러)과 새틴 숄 라펠로 구성된 더블-브레스티드 디너 코트(E. Tautz 150달러)를 갖추고 있으며, 따뜻한 날씨용으로는 두 벌의 싱글브레스트 숄-칼라 흰 가버딘 디너 코트(E. Tautz, 한 벌당 98달러)를 착용한다. 그는 그의 포멀 이브닝 웨어 용 셔츠로 셔츠 프론트에 주름이 잡힌, 소프트한 롤-칼라의 셔츠(뉴욕의 Dudley G. Eldridge 한 벌당 28달러)를 보타이와 함께 착용한다.
그는 스포츠용으로 세 벌의 트위드 재킷 (H. Harris 한 벌당 160달러), 세 벌의 차콜 그레이 플라넬 바지, 스페인에서 구매한 여섯 벌의 실크 버튼-다운 셔츠(G. Eldridge)를 애용한다. 그는 낮에는 그의 세 켤레의 검은색 구두를 활용하고, 그 외에 한 켤레의 패턴트 레더 슈즈, 런던의 Paulsen & Stone이 제작한 한 켤레의 카프스킨 이브닝 구두를 갖추고 있다. 그는 Paulsen & Stone에서 스포츠용 검은색 모카신, 검은색 로퍼, 두 켤레의 갈색 가죽 코와 고무 밑창의 흰 캔버스 신발(그는 이 신발을 흰 플라넬, 혹은 더블브레스트 라이트 그레이 샤크 스킨 슈트와 함께 신는다)을 제작한 바 있다.
비들의 넥-밴드 셔츠는 풀을 먹인 dickey bosoms (셔츠 가슴이 재킷의 가운데 버튼 아래를 지나서까지 내려가는) 혹은 세미-스타치(semi-starched) 처리된 주름 잡힌 형태로 구성된다. 셔츠의 커프는 흰색이고, 몸통은 회색이거나 라이트-블루 색상을 띤다. 셔츠들은 Eldridge에서 제작되며, 한 벌에 26달러씩이다. Eldridge는 비들의 빳빳한 화이트 칼라(3달러)와 타이(7.5달러) 역시 제작한다. 그의 타이들은 검은색 실크 무지 타이에서부터 희미한 쉐퍼드 체크까지 (그 화려함의 편차가 크지 않다(역주)) 다양하다. 타이들은 셔츠의 하드-칼라 사이에 알맞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작은 매듭이 지어질 수 있도록 재단되어 있다. 그의 속옷은 기성복이고, Jacob Reeds 제품이다.
그의 군용 워드로브 역시 레슬리 마르샨드가 묘사하는 바이런 경의 그리스 복무 시절의 그것
- 끈 장식이 달린 두 벌의 재킷, 네 벌의 바지. 붉은색 옷감과 검은색 끈 장식으로 제작된 재킷, 붉은색 옷감과 금색 레이스 장식이 들어간 재킷, 네 벌의 금색 레이스가 가미된 풀-드레스 유니폼, 두 벌의 골드 레이스 장식이 들어간 푸른색 바지, 금장식이 들어간 두 개의 투구, (금 투구 위로 깃털이 달린 호메로스 스타일의 헬멧...) 6벌의 금빛 견장, 한 벌의 은 레이스 견장... 열 자루의 검....“ -
과 비교했을 때,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비들은 단 다섯 벌의 군복으로 그의 군 생활을 마쳤다.
타고난 옷에 대한 감각을 갖춘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비들 역시 발목 양말(발목까지밖에 올라오지 않는 양말), 소재와 색상이 같은 타이와 행커치프 세트, 커다란 커프 링크, 지나치게 눈에 띄는 타이 클립, 그리고 그 무엇보다 끔찍한 셀로판 모자 커버를 기피한다. 우아한 남성들이 옷에 있어서 새로운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영국 해군에게 그 가치를 증명했던 더플코트처럼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물건을 발겼했을 때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비들의 재킷 소매는 주름이 잡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1인치도 되지 않는 아주 조금의 셔츠 커프를 노출시키는 기장을 유지한다 – 마찬가지로 목 뒤 재킷 칼라도 셔츠 칼라의 뒷면이 보일 수 있도록 재단된다. 그의 바지 통과 재킷 라펠의 너비는 극단적으로 좁아진 오늘날의 유행이 아닌, 그의 어깨의 너비와 그의 발의 길이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그는 그의 몸의 일부분이 되어줄 수 있는 옷들만을 선택한다. 비들과 같이 “깔끔하고, 멋지게 슬림하며... 모든 세련됨을 갖춘” 남성이 아니라면 그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일은 어리석은 시도일 테다. 다른 남성의 워드로브를 무턱대고 흉내 내는 일은 큰 위험을 동반한다.
영화 To Catch a Thief (1955)의 캐리 그랜트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cat burglar” (그의 캐릭터의 극 중 별명, 악명 높은 보석 도둑이었던 그는 Cat이라고 불렸다 (역주)) 로서의 과거가 아닌 영화 속 그의 의상이 너무나 많은 여성을 매료시킨 나머지, 지나치게 많은 남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워드로브를 모방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는 대부분의 경우 끔찍한 것이었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여성은 절대로 옷에 대해서 남성에게 충고를 건네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작가 Finis Farr은 “남성복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여성은 ‘사라짐’에 익숙해져 있다. 그녀는 ‘유행은 지나가게 돼 있다’라는 원리에 적응한 존재다. 우아한 남성은 가치가 있는 그 무엇도 절대로 진부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최고의 테일러의 작품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우아함(elegance)은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 버나드 웨더릴(뉴욕의 테일러), 브룩스 브라더스, E. Tautz(런던의 테일러), Dudley Eldridge (셔츠 메이커)는 고객의 취향에 맞는 옷을 만들 뿐이다. 우아함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을 완성시켰다면, 당신은 그것을 철저하게 사수해야만 한다 – 밤이면 구두에 뼈질을 하고, 슈트리를 넣어두는 일 역시 등한시돼서는 안 된다.-
우아함은 또한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한 라디오 진행자가 마이클 알렌에게 그가 에블린 워만큼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알렌은 “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 에블린 보다 옷을 잘 입죠”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우아함은 꼭 눈에 띄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모스 하트는 모노그램이 들어간 순금 칼라 스테이를 애용했고, 저명한 런던 댄디, 프레디 크립스 역시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그의 옷을 과시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옷차림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비엔나에서 만들어진 속옷 외에는 절대로 다른 것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봉을 위해 비엔나를 종종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우아함은 꼭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윌리엄 라인렌더 스튜어트에게 있어 우아함이란 저녁에 외출하기 전 그의 집사에게 그의 구겨진 지폐들을 다리미로 피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