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1
사르디니아 왕국의 전 수상이자 이탈리아 통일의 1등 공신 카보우르(1810-1861)의 전임자 마시모 다젤리오(1798-1866)는 1866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세웠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드는 일이 남았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과 같은 이웃국가들에 비해 근대식 중앙집권 국가 건설이 뒤늦었던 이탈리아는 근대 유럽 역사를 통틀어 ‘약소국의 비애’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1847년,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 공작이 수많은 자치도시, 공작령, 왕국으로 분할된 '이탈리아'를 그저 "지리학적 표현일 뿐" "une expression géographique"이라 매도(?)한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이탈리아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었지만, 메테르니히는 근 1400년간 통용된 정설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1861년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 통일운동)까지, 이탈리아는 단 한 차례도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지 못했다.
1400년 내내 독립된 세력으로서 자치권을 행사해 온 이탈리아 내 각 지역과 도시들은 각각의 독립된 정체성을 갖춘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긴 세월에 걸쳐 서로를 상대로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지속해야만 했다(만약 미국의 각 주들이 미국 역사의 6배의 시간을 적으로 보냈다면,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14세기 피렌체인 단테는 수 천 가지의 언어가 공존하는 이탈리아의 분열을 안타까워했지만, 동시대의 제노베세, 나폴레타노, 밀라네제, 시칠리안에게 있어 ‘이탈리아’라는 실체 없는 관념은 그들의 삶과 무관한 것이었다.
통일 이탈리아 건국 후로 160년이 지난 오늘, 서방 세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을 국가가 도래하는 데까지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오늘의 '이탈리아인'들에게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기 충분한 비극일 테다(그러나 사실 21세기 이탈리아인들이 스스로를 ‘이탈리아인’으로 규정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앞선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들의 역사를 탐색하려는 내게 있어 그들이 보여주는 뿌리 깊은 다양성은 막연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피렌체의 역사를 통해 베네치아의 이야기를 도매금으로 넘길 수 없고, 나폴리의 과거를 살펴보는 일을 통해, 시칠리아의 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탈리아 내 국가들 사이의 독립성은 앞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즐거움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제부터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볼 계획이다. 기본적으로 각각의 도시들의 발전사를 충실히 따르는 방식으로 포스트들을 준비할 예정이다. 이와 같은 접근이 도시의 다양한 면모를 찬찬히 고찰해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 구미가 돋는 주제를 발견하는 경우 잔가지로서의 포스트 역시 기획하게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각 도시의 역사를 서술하는 내용이 그 주를 이루게 될 테다. 이쯤에서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첫 번째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첫 도시는 피렌체다. 인구 40만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 그러나 도시를 인간에 빗대어 말할 수 있다면, 피렌체는 명실공히 서양사 최고의 영웅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피렌체의 아담함은 도시의 인지도를 생각했을 때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르네상스의 화려한 전성기 시절에도 피렌체의 인구는 10만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Covid-19 팬데믹 이전까지 매년 1600만 명의 관광객을 맞이하던 이 작은 도시의 위상은 그 크기와 무관한 것이다.
근대 유럽이 이룬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 도약의 기반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일 수밖에 없었고, 르네상스의 근원지는 그 누가 뭐래도 피렌체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 서유럽의 심장으로서 궁중 문화와 예술이 꽃을 피웠던 파리, 산업혁명 이후 유럽 최강국의 수도로서 세계 증권가의 메카 역할을 도맡았던 런던과 같은 메트로폴리스들의 영광 역시 피렌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가능할 리 없었다.
이번 포스트에선 피렌체의 탄생을 다루게 된다. 화려했던 르네상스 피렌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기원전 600년경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인들이 오늘날 피렌체의 북동쪽 경계지역 언덕 위에 작은 마을, 피에솔레를 건설하면서 피렌체의 역사는 시작된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 에트루리아 왕정은 이탈리아 반도 내 최강의 세력을 자랑했고, 토스카나의 산악지역은 에트루리아인들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처음 자리를 잡은 지역이었다. 그들은 사방이 완만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르노 강가의 평야(현재 피렌체의 위치)가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아보았다. 이들은 기원전 200년 피에솔레에서 내려와 아르노 평야에 처음 그들의 마을을 세우게 된다.
오늘날 피에솔레와 아르노 유역의 작은 마을의 존재는 최소한의 유적들을 통해서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피렌체를 인류 역사에 처음 편입시킨 에트루리아인들이 이 도시에 별다른 그들만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을 테다. 로마를 맞닥뜨린 고대의 모든 민족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에트루리아인들은 피렌체 역사의 주인공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건국 초기의 로마인들은 정복과 승리에 굶주린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훗날 향락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로마인들이지만, 세 차례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공화국 시기 (기원전 6세기- 1세기)의 로마는 화려한 그리스 문화를 배척하고, 경건함, 검소함, 엄격함, 소박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숭상하며, 모든 성인 남성(시민권을 가진)에게 10년의 군 복무를 강요했던 군국주의 국가였다(우리에게 익숙한 고대 로마의 정치인/저술가들은 모두 10년의 군 복무를 마친 남성들이었다).
기원전 3세기, 본격적으로 제국 건설의 야망을 드러낸 로마는 기원전 272년 포 강 이하의 이탈리아 반도를 그들의 세력권 아래로 통합시킨다. 로마 군단의 막강함 앞에 토스카나의 에트루리아인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물론이었다. 기원전 2세기, 아르노 유역의 피에솔레와 토스카나의 그 외 지역은 모두 로마 소속으로 편입된다.
이제 막 로마의 마을로 거듭난 피에솔레에 거주하던 에트루리아 인들은 89년, 집정관 술라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버리고, 지역의 모든 에트루리아인들은 피에솔레와 인근 마을들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피에솔레와 에트루리아인들은 피렌체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에트루리아인들이 떠난 아르노 유역에 도시를 건설한 것은 물론 로마인들이었다. 피렌체의 건설을 결정한 인물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로마사 최고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기원전 59년은 카이사르가 로마의 집정관으로 취임한 해이자, 그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로 출정한 해였다. 대규모의 정복전쟁을 이어가고 있던 로마에게 있어서 큰 근심거리는 카이사르와 폼페이가 거느리던 거대 군단에서 발생하는 퇴역군인들의 생계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위해 로마 제국 영토 곳곳에 도시들을 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아르노 유역의 새로운 도시의 건설 역시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로마의 퇴역 군인 중 상당수는 토스카나 지역에 정착했다)
로마는 아르노 유역의 이 신도시에 플로렌치아, 번성하는/피어오르는 도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로마인들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건축기술을 자랑했던 민족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 어떤 민족보다 그들의 건축물들을 자랑스러워했다(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수많은 로마의 유적들은 로마인들이 그들의 웅장한 걱축물들을 각별히 사랑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로마는 플로렌치아의 건설에 앞서 아르노 유역으로 탐사대를 파견했고, 그들은 2000년 도시의 심장이 되어줄 도시의 중심점을 찍어내는 일로 플로렌치아의 건설을 시작했다. 로마제국 도시의 사회, 경제, 종교 정치의 중심이었던 포럼이 위치했던 곳이자, 중세 피렌체의 구(舊) 시장이 자리했으며, 오늘날 피렌체의 피아자 델라 레퓨블리카의 프리 스탠딩 컬럼이 위치한 피렌체의 중심점을 처음으로 짚어낸 것은 로마의 탐사대였다. 그들의 선택은 철저한 로마식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 오래된 속담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려 200,000km에 이르는 길을 닦아놓은 대제국 로마의 도로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인들에 의해 건설된 플로렌치아의 위치 역시 ‘로마로 향하는’ 길의 좌표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피렌체의 대표적 관광명소 중 하나인 폰테 베키오는 1330년 경에 건설된 르네상스 초기의 다리다. 재미있는 사실은 ‘옛 다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다리가 사실 고대 로마인들이 놓은 다리를 대체한 ‘새 다리’라는 점이다. 무려 2000년 전부터 이탈리아 민족이 지속적으로 이곳에 다리를 설치한 까닭은 그곳이 아르노 강의 폭이 가장 많이 좁아드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리의 건설은 로마로 향하는 길이 이 다리를 거쳐야 함을 의미했고, 이는 플로렌치아의 위치와 방향 역시 폰테 베키오를 중심으로 결정될 것임을 암시했다.
스케치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플로렌치아는 격자판의 블록들을 사면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로 세로로 약 450m 길이의 정방형 형태의 플로렌치아는 전형적인 로마제국의 소도시였다.
정확하게 동서남북의 방향을 맞추고 있는 플로렌치아의 중심은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북문과 남문을 잇는) 카도와, 동서로 가로지르는(동문과 서문을 잇는) 데쿠마누스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심장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카도(남-북 도로) - 는 도시의 심장을 가로질러 남쪽의 성문과 연결돼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은 행인을 제국의 심장, 로마로 인도해 주었다. 이 길이 아르노를 횡단하는 다리와 연결돼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오늘날에도 피아짜 델라 레푸블리카 광장으로부터 남쪽 길을 따라 열흘간 걷는 일은 우리를 로마로 데려다줄 것이다.
도시의 중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데쿠마누스(데쿠-10-마누스-손 - 로마의 도시의 기본 규격이 10블록임을 의미한다)와 카도가 교차하는 지점은 바로 피렌체의 중심점이자, 고대 로마제국 내 도시의 정치, 경제, 종교, 사회의 중심지인 포럼이 위치하던 지점이었다.
카이사르가 계획한 도시는 전형적인 로마 제국 특유의 도시계획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피렌체가 ‘작은 로마’의 모습을 띠게 될 것임을 의미했다. 콜로세움을 답습한 원형 경기장 (오늘날의 산타 크로체 광장 근방)-, 공중 목욕시설, 목욕물을 조달해줄 18km 길이의 아퀴덕트가 건설됐고, 로마식 극장 역시 도시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현재 팔라초 베키오 근방).
물론 도시의 경제를 지탱해줄 수입원인 경작지에 대한 구상 역시 진행돼야 했다. 도시가 들어서기 전부터 피렌체 근방의 토지는 로마의 격자형 경작지 구획 방식인 ‘센투리아초네(centuriazione- 710미터를 기본 단위로 하는 정방형의 격자 체계)로 나누어졌고, (이것은 마을의 땅을 9 분할하여, 가운데 구역의 수확물만 중앙정부에 조세로 바치는 고대 중국의 정전법과 유사한 조세 제도였다(손세관))이와 같은 쎈투리아초네는 자연지형(아르노의 방향)을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그 구획선은 동서남북의 방향을 정확히 맞추어 기획된 도시의 성벽에 비해 30도 정도 기울어 있었다 (손세관).
로마 제국의 도시 플로렌치아는 빠르게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드리아누스(76-138) 치하에서 확장 공사를 걸친 플로렌치아는 서기 287년에 토스카나 주의 수도로 지정된다. 성장을 거듭한 플로렌치아의 인구는 서기 2세기 후반에는 이 만 명에 이르렀고, 로마 제정시대 중 플로렌치아는 성벽 밖의 동쪽과 동남쪽 지역까지 도시의 경계를 넓혀 그곳에 시민들의 주거지를 구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