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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Sep 08. 2020

암흑시대의 피렌체

피렌체 2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서양사 500년(476-1000)은 암흑시대(Dark Ages)라 불렸다. 무려 5세기의 역사를 통째로 암흑기라 명명한 결정의 이면에는 로마라는 절대적 구심점의 소멸이 불러온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빛'의 몰락을 어둠에 빗대어 표현한 페트라르카(1304-74)가 고안한 암흑시대의 개념은 로마-그리스 시대를 기억하던 중세 유럽인들에게 있어 그들 시대의 척박함은 끔찍한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본격적으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이들이 페트라르카의 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보카치오와 같은 피렌체인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중세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 서양 사관에 있어서 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국의 비호 아래 상업 도시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던 피렌체 역시 로마의 멸망과 함께 곧장 퇴화의 길로 돌입한다. 2만에 달하던 피렌체의 인구는 이탈리아 반도를 휩쓴 전란을 거치며 천 명 수준으로 급감했고, 5-8세기를 아우르는 3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통틀어 피렌체는 폐허가 된 옛 도시의 잔재 속에서 그 명맥을 지키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토마스 콜, 1836)


나는 여기서 암흑기 이탈리아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이 시기 피렌체 역사는 이탈리아 전역에 불어 닥친 전란과 온전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학계가 암흑기에 새로이 부여한 이름은 '초기 중세’ (Early Middle Ages), 또는 이주의 시대(Migration Period)다. 후자는 이 시기 유럽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던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이동을 가리키고 있다. 중세 서유럽의 역사, 특히 이탈리아 역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일어난 북방민족의 대규모 이주는 향후 1400년(즉 476-1861년의 역사)의 큰 흐름을 결정짓게 된다.


서기 476년,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사건(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상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테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몇 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점차적인 과정의 결산이었다. 서기 3세기,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이분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 내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었고, 계속되던 게르만족의 침공 아래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로마의 몰락 이후, 서유럽은 게르만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역사학자 남경태의 주장처럼 그것이 차라리 통일 ‘게르만 제국’의 건국으로 이어졌으면 좋았으련만. ‘게르만’은 로마의 관점에서 로마 북쪽의 ‘이방인’을 가리키는 호칭일 뿐이었다. 서기 5세기, ‘게르만’의 이름이 포괄하는 북방 유목 민족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로마의 공백을 메워가고 있었다. 도나우강 연안의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엘베 강 유역의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 영토를, 오늘날의 벨기에와 독일 북부 출신의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은 브리타니아를, 흑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각각 점령하여 그들의 왕국을 세우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동로마 제국의 서방 원정(서기 526)


이탈리아를 점령한 동고트족의 통치는 안정적일 수 없었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으나, 비잔티움의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건재했고, 동로마의 성왕, 유스티니안 황제의 치세(527-565)하에 동고트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비잔틴 군과 20년에 걸친 전쟁(535-552)을 치러야만 했다. 격렬했던 전쟁은 이탈리아 전역을 남김없이 초토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긴 전쟁의 승자는 비잔틴/동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동고트족을 물리친 로마(비잔틴)는 겨우 수복한 반도의 주도권을 금세 다시 내어주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게르만 민족, 롬바르드 족이 오늘날의 헝가리 서부에서부터 남하하기 시작했던 것. 동로마 제국은 이들과 이탈리아의 주도권을 두고 전쟁에 돌입했고, (568-605) 라벤나 인근 지역과 반도의 남부 (오늘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영토를 모두 롬바르드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라벤나의 성 비탈레 바실리카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와 대주교를 묘사한 모자이크화  (서기 6세)


동고트족, 비잔틴 제국, 롬바르드족 사이에서 유린당한 5-8세기 이탈리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들 중 그 누구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한 세력 아래 통합하지 못했다는 것일지 모른다.


비잔틴의 잔여세력을 라벤나를 위시한 북동부 지역으로 몰아낸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의 이름은 여기서 기원한다- 창이라는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 파비아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왕국을 북이탈리아에 세우게 된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분열의 역사가 시작된 것 역시 바로 이 시기다. 상당 부분 ‘로마화’된 민족으로서 로마의 제도와 법령을 그대로 유지한 동고트족에 비해 통솔력이 부족했던 롬바르드족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전역을 롬바르드 ‘공작’들과 지방 호족들의 영주령으로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서기 700년 이탈리아 지도


584년에 시작된 프랑크족과의 분쟁을 계기로 롬바르드족은 뒤늦게 국왕을 선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결속력 있는 정치 체제를 확립하지 못했다. 롬바르드 영토 내 대표적 도시들이었던 루카(당시 토스카나 주의 수도), 베로나, 밀라노, 토리노 등은 모두 사실상 자치권을 행사하던 영주/호족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족과의 전쟁이 일단락된 605년 이후, 이와 같은 분열화의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들이 그려놓은 공작령의 경계선/국경은 롬바르드 왕국의 몰락 이후로도 수백 년 이상 유지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러한 분열의 현상은 비잔틴 통치령에서도 발견되고 있었다. 라벤나, 베네치아,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중부 지역과 나폴리를 위시한 남부 지역은 라벤나라는 수도를 가진 비잔틴 제국의 총독령(Exarchate)으로  형식상 통일된 행정구였으나(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는 별도로 관리되고 있었다), 반도 내에서 그 세가 기울고 있던 비잔틴 제국의 총독(Exarch)에게 이탈리아 각지의 영토를 직접 관리할 역량은 없었다. 결국 비잔틴 총독령 내 지방들에서도 지방 호족들과 영주들이 그들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잦았고, 8세기 당시 이탈리아 내 가장 큰 도시들에 속했던 나폴리와 베네치아를 지배하던 공작들 역시 비잔틴의 간섭에서 벗어나 거의 완벽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영주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것은 역시 이탈리아 내 최대 도시인 로마를 통치하던 로마의 교황이었다. 로마 역시 형식상으로는 비잔틴 황제가 임명한 공작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그는 교황만큼의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고, 사실상 교황은 로마의 영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이처럼 도시의 주교가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 역시 이탈리아 각 지역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되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 근방에서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서유럽을 이슬람으로부터 지켜내고 있는 샤를마뉴 Albrecht Altdorfer (1480–1538)


이탈리아를 중세의 질서로 완벽하게 편입시킨 사건은 프랑크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건국이었다.


롬바르드와 비잔틴 사이의 계속되던 세력 다툼은 751년 롬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함으로써 그 막을 내리게 된다(이후로 비잔틴 제국의 세력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로 제한되게 된다). 남진을 계속하던 롬바르드족의 위협 앞에서 다급해진 교황은 체면을 몰수하고 몸소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족의 피핀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요청에 응했다. 오늘날 프랑스의 어원이 되는 프랑크족의 국왕 피핀은 몸소 남하하여 롬바르드족을 퇴치하고 라벤나를 교황령으로 희사했으며, 774년,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가 이끄는 프랑크 군은 파비아를 점령함으로써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를 프랑크 왕국 소유로 편입시킨다. 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답습하여 교황에게 호의를 보이는 일 역시 잊지 않았다. 그는 피핀이 교황에게 증여한 라벤나 유역의 영토에 추가적으로 로마를 위시한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교황령’으로 기증한다.


이로써 시작된 외지의 왕국의 통치를 받는 북부, 교황령이 위치한 중부, 북부와는 별도로 외세의 통치를 받았던 남부(이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로 나뉘게 되는 이탈리아의 삼분할은 중세, 르네상스, 근대로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큰 정세를 이루게 된다.


로마 교황의 손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 샤를마뉴의 대관식 (라파엘로)


서양의 중세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는 봉건주의와 교회다(남경태). 오늘날의 스페인-프랑스-독일-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을 설립한 샤를마뉴였지만, 프랑크 왕국에겐 이 거대한 영토를 직접적으로 통치할 역량은 없었다. 결국 황족과 프랑크 왕족 사이의 무자비한 통혼 정책으로 왕족의 수를 급격하게 늘린 샤를마뉴는 이들을 영주로서 제국의 각지에 파견했고, 이들은 그들의 영토 내에서 완벽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작은 왕으로 거듭나게 됐다. 사실상 수백 개의 조각들로 분열되게 된 프랑크 제국에 구심점을 행사한 존재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수장이었던 교황이었다. 이로써 중세의 질서는 완성되었다.


뒤러 (1511-13)가 그린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샤를마뉴


여기까지가 중세 초기 이탈리아의 운명을 결정 지었던 서유럽 역사의 큰 흐름이었다. 이 시점에서 피렌체로 귀환하여 중세 피렌체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프랑크 제국의 비호 아래 봉건적 질서가 확립된 사건은 피렌체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동고트족- 비잔틴- 롬바르드족의 통치 아래서 롬바르드 공작 – 피렌체 추기경과 같은 호족/교회 세력에 의해 겨우 도시의 전통만을 유지해오던 북부 내륙의 소도시 피렌체에게 있어서 성장을 꾀할 수 있는 길은 상업의 활성화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주 시대/초기 중세 내내 피렌체가 철저히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유 역시 롬바르드-비잔틴 전쟁의 격화에 의해 파리-밀라노-피렌체-로마를 연결하던 로마의 도로가 수송과 상업의 통로로서 외면됐기 때문이었다.


프랑크 제국의 지도 9세기에 이르러 프랑크 제국은 이탈리아 북부를 전부 제국이 영토 내로 (형식상) 편입시키게 된다.
지중해-피사-피렌체- 아레쪼를 이어주는 수로로서 중세 내내 중요한 상업로 역할을 해준 아르노 강.



중세 세계 내 영주들 간의 작은 분쟁은 물론 끊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비잔틴-동고트 전쟁과 같은 대규모 군사전이 이탈리아를 초토화시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찾아온 이동의 안전은 상업의 부활로 이어졌고, 이는 피렌체의 부활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부활의 시작을 알리고 있던 봉건 시대의 피렌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9세기 이후 피렌체는 프랑크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후작령 토스카나의 도시로서 형식상 신성 로마 제국 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 체제 아래 피렌체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봉건 영주는 마틸다 후작 부인(1046-1116)이었다. 대대로 토스카나 주를 통치하던 카노사 가문의 딸이었던 그녀는 남편을 잃은 후 토스카나 주를 몸소 통치한 봉건 영주였다. 피렌체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토스카나 주의 수도를 루카에서부터 피렌체로 옮겨온 영주이기도 했다.


12세기 제작된 그녀의 전기에 삽입된 마틸다 후작부인의 초상화


또한 그녀는 토스카나 출신 교황 그레고리 7세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이 극적으로 가시화된 사건이었던 카노사의 굴욕 당시 황제 헨리 4세는 마틸다 후작부인의 손님으로 카노사 성에 머물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를 찾아 성벽 밖에서 삼 일을 석고대죄해야 했다.


'카노사의 굴욕' 당시 클리뉘 수도사 원장 휴와 마틸다 후작부인에게 중개를 요청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4세



마틸다 후작 부인의 통치 아래 토스카나의 수도로 거듭나게 된 피렌체는 이전의 번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피에드몬트-밀라노-피렌체-로마로 통하는 육로와 아르노-피사-지중해로 통하는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던 상업 활동은 피렌체 내 상인계급의 급성장으로 이어졌고, 이는 피렌체가 승려-귀족-농민으로 나뉘는 봉건적 질서와 불화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11세기 피렌체의 인구 역시 이전 수준을 회복하여 2만 명을 웃돌기 시작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토스카나를 통치하던 마틸다 후작부인의 사망(1116) 이후, 피렌체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헨리 4세의 아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5세는 토스카나의 봉건 영주로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독일계 귀족을 임명했고, 피렌체의 시민들은 이 새로운 영주를 섬기는 일을 거부했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분쟁에서 교황을 지지했던 마틸다 후작부인의 전철 역시 피렌체의 이러한 반항적 성향에 기여하고 있었다.


로마 베드로 성당에 위치한 마틸다 후작부인의 묘석 그녀를 기리는 조각상은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16세기)


봉건제를 통해 유지되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동양식 제국의 그것이 아니었다. 형식상 황제에게 충성하는 제국의 영주도 그의 영지 내에서 완벽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왕과 다름이 없었다. 상업의 발달로 인해 큰 부를 손에 넣게 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에서는 이와 같은 지방 영주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12세기 피렌체의 시민들은 투표를 통해 선출된 Consul (집정관/대표자)이 통치하는 코무네 체제를 설립하게 된다. 시민 대표들은 일 년에 네 번 산타 레파라타 교회당에 모여 시정에 관한 정책을 논의했고, 이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전통적인 귀족 세력, 상인 계급, 그리고 새로이 떠오르기 시작한 장인(대장장이, 금 세공인, 가죽 가공업자, 직물 업자, 식품 상인, 건축 업자)들의 조합인 길드들이었다.


 중세 피렌체의 피아짜 시뇨리아 (Giusepe Zocchi, 18세기 초반)

중세 피렌체에서 이와 같은 상류층 계급은 시간과 함께 강력한 '가문'들의 집합체의 성격을 띠게 된다.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상인들은 그들의 딸을 귀족 가문에 혼인시키는 작업에 착수했고, 이는 도시 내 새로운 상류계급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부유한 상인들은 길드의 리더 역할 역시 병행했기에, 새로이 탄생하게 된 피렌체의 권문세가 가문들은 도시 내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됐다.


이렇게 태어나게 된 피렌체의 대표적 가문들 사이에서는 도시의 주도권을 사이에 둔 피할 수 없는 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분쟁의 치열했던 실상을 고백하고 있던 것은 피렌체 내 존재했던 수많은 타워들이었다. 1150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이러한 타워가 피렌체에 무려 140개 이상 존재했다는 사실은 도시 내 세력 싸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준다.


여전히 중세식 타워들을 찾을 수 있는 토스카나 주의 산 지미냐노


도시 내 타워들은 영주의 주거와 안전을 위해 건설된 중세 성의 건설과 그 의도가 같았다.  다만 도시 내에는 시골과 같은 공간이 부족했기에, 그들은 다리를 통해 출입할 수 있는 높은 타워에서 라이벌 가문들과의 전쟁을 지속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안전을 꾀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와 같이 코뮤네로 거듭나게 된 11-13세기 피렌체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운 시점에서 자세히 묘사해보도록 하겠다. 르네상스의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그 뒤를 따르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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