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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Oct 01. 2020

공화정 피렌체 1: 귀족

피렌체 3

중세 서양을 대표하는 통치 제도는 봉건제다. 유럽 전역을 다스리던 봉건 통치의 본질은 왕, 영주, 기사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 관계에 있었다.  영주는 왕으로부터, 기사는 영주로부터 하사 받은 봉토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되,유사시 주군의 명에 따라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신하의 본분을 다하는 봉건 체제의 확립은 서유럽 세계를 수천의 봉토로 파편화 시키고 있었다.


봉토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는 당시 유럽이 농노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농경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11-13세기, 서유럽 세계 내 가장 보편적인 사회 구조였던 시골(콘타도) 영지는 영주가 사는 (Castle)과 그 밖을 둘러싼 장원(Manor)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의 성은 영주의 주거 공간이자 농노들로부터 영주를 보호하는 울타리였고, 영주는 그곳에서 장원 내 농토를 포함한 방앗간, 대장간, 양조장 등의 시설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조달받았다.


성과 장원으로 대표되는 중세 장원 경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낸 15세기 그림


이처럼 장원 경제의 기본원칙은 ‘자급자족’이었다.(남경태) 지역 간 물자 교류가 존재했지만, 그 수준은  미미했다.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농민들은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드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식기, 농기구, 가구에서부터, 털옷, 가축, 주택까지,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마을 내에서 혹은 옆 마을에서 조달돼야 했다. 상업의 부진은 10세기 이전까지 중세 서유럽이 도시의 비율, 상업, 금융업, 도시 문화에 있어서 모두 고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했다. ‘암흑기’의 오명(?)이 시사하는 바처럼 문명화의 관점에서 서유럽은 분명 한 걸음 퇴보를 경험하고 있었다. (암흑기 당시 피렌체가 겪었던 몰락처럼, 로마의 멸망 이후 영국, 프랑스, 스페인 전역의 도시들 역시 소멸되고 말았다)


분열된 유럽 세계의 구심점이 돼 준 것은 그리스도 교회와 교황이었다.당시 교회의 역할은 영적 생활에 국한되지 않았다.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장인 동시에 교황령을 통치하는 유럽의 가장 강력한 봉건영주 중 한 명이었고, 그에게 충성과 세금을 바치던 고위 성직자들 역시 각 지방 교회와 수도원 주위의 토지를 관리하는 영주 역할을 병행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중세 피렌체에 있어서도 교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오늘날 피렌체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두오모(Santa Maria del Fiore)는 피렌체가 주교(Bishop)를 두고 있는 주교구임을 말해준다. 대성당(Cathedral)은 오로지 주교구(Bishopric) 내에만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교구로서의 피렌체 역사는 서기 393년 (고대 로마) 밀라노 출신 암브로스 주교가 도시 북부의 작은 교회를 성 로렌초에게 봉헌한 후 제노비우스를 피렌체의 주교로 임명하면서 시작된다. (311년에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피렌체 교회는 암흑시대의 전란 중 도시의 소멸을 막아낸 최고 공신이었고, 공화정 설립 이후에도 주교는 산타 레파라타 교회(13세기 두오모의 전신)에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세례를 받는 제노비우스와 피렌체 주교로 임명되는 제노비우스 (보티첼리)

교황이 12세기 유럽 최대 봉건 영주였다면, 공화정 초기 피렌체 주교는 도시 최고의 자산가였다. 그는 피렌체의 그 어떤 이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토지로부터 오는 수입 외에도 시민들의 십일조, 교회 소유 토지 내 상점들의 임대료, 상업에 부과되는 상품 거래에 부과되는 세금을 모두 그의 수입원으로 두고 있었다(George W Dameron).


그러나 교회가 영주의 역할을 겸하던 아레쪼와 같은 도시와 달리 피렌체의 주교는 도시내 권력을 독점하는 정식 영주가 아니었다. 846년 피렌체가 신성 로마 제국의 후작령(토스카나)으로 거듭나게 된 이후,  주교는 루카에 머물던 후작이 피렌체를 방문할 때마다 그에게 도시의 통치권을 양보해야 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마틸다 후작부인이 피렌체를 토스카나 후작령의 수도로 선포했을 때 주교는 그녀에게 도시의 최고 권력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이것이 마틸다의 사망 이후 피렌체가 종교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고,  곧장 공화정인 코뮤네 체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였다. 교회는 피렌체인들의 삶에 계속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14세기에도 피렌체 주교는 피렌체 내 25-33%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Dameron)), 12세기 이후 공화정 피렌체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귀족들과, 새로 부상하게 된 시민 계급이었다.  (물론 중세-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흑사병 등의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교회는 다시금 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된다)



15세기 피렌체를 묘사한 목판화


샤를마뉴의 대관식(800)과 함께 찾아온 상대적 평화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이탈리아 북부에 인구와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는 950년경부터 시작된 중세의 상업 혁명(Commercial Revolution)(R. 로페즈)으로 이어졌고, 응당 상업의 부활을 가장 먼저 경험한 것 역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이었다. 11-13세기 이탈리아 북부는 ‘정치적 분열’과 함께 폭발적인 ‘상업적 확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11세기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걸쳐 신성 로마 제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 이탈리아 지도.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북부의 공화국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도의 출처를 정확히 찾을 수 없었다 : Google Search)


따라서 중세 유럽의 ‘농경 세계’의 모델을 가장 먼저 탈피한 것 역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일 수밖에 었다.  이 지역에서 기하급수적으로 탄생하고 있던 자치 공화국들은 북부 이탈리아가 전원적 세계를 이루던 서유럽의 타 지역들과 완벽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던 대도시, 로마,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외에도, 토스카나 주 내에만 시에나, 피사, 루카, 프라토 등의 도시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서유럽의 다른 그 어떤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집중적인 도시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던 나폴리가 이탈리아 남부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봉건 군주가 상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이 지역엔 나폴리 외 대규모 도시는 드물었다)


난 지난 포스트에서 12세기 피렌체에는 150개 이상의 타워 존재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피렌체의 하늘을 빼곡 채웠던 이 7-80미터의 전투용 건물들은 역설적이게도 상업 도시로서의 피렌체의 번영을 방증하고 있었다. 타워들은 모두 콘타도에서 피렌체로 이주해온 귀족 가문들의 주택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타도의 영지를 관리하던 영주 가문 귀족들이 그들의 성과 장원을 뒤로하고 피렌체의 타워로 이주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은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던 피렌체의 성벽 내에 거주하는 것이 그들의 세력 확장에 있어 필수적이라 믿었다. 11세기를 통틀어 열 다섯 이상의 전통 영주 귀족 가문이 피렌체 성벽 내로 이주했고, 작은 도시 안에서 공존하게 된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목숨을 건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는 결국 150개가 넘는 타워의 건설로 이어졌고, 라이벌 가문의 귀족들은 타워 위에서 서로에게 돌을 던지고, 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았다.


잘 보존된 산 지미냐노의 타워들


우리는 피렌체의 상류사회 가문들에 대해서 좀 더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마틸다 후작부인의 사망(1115) 이후 자치도시 코뮤네로 거듭나게 된 피렌체 사회에 있어서 주도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은 바로 피렌체인들이 ‘Grandi’라 부르던 이 귀족 가문들이었기 때문이다.


(리서치 중 자료의 많은 부분을 John M. Najemy의 A History of Florence 1200-1575에서 찾을 수 있었다.)


(Najemy는 피렌체인들이 그들의 명문가를 부르던 이름, grandi를 elite families로 번역한다. grandi를 직역하여 great(위대한 가문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Nobel/Aristocratic 등 '귀족'의 표현이 암시하는 혈통을 강조하는 계급적 지위의 의미 역시 들어맞지 않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Elite Families의 표현을 직역하면 상류층/엘리트 가문이 된다. 그러나 상류층 가문/ 엘리트 가문의 표현은 피렌체의 귀족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던 ‘작위’의 의미를 희석시키기에(물론 그들이 모두 봉건 작위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여기서는 ‘귀족 가문’의 표현을 고집하기로 한다)


공화정을 표방한 피렌체 코뮤네 내에서 귀족은 도시의 법이 인정하는 지위가 아니었다. 게다가 성과 장원의 분리가 확실했던 콘타도에서와는 달리 상업의 도시 피렌체에서 생활하던 귀족 가문 남성들은 일반 시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공존하고 있었다. 봉건 영주로서 콘타도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과거에 하사 받았던 기사 칭호를 자랑스럽게 과시하던 그들이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본업은 상업길드 활동에 있었다.


중세 유럽의 시장을 묘사한 그림


그들을 일반 시민들과 구분해준 것은 물론 대대로 상속되던 그들의 재산과 동반되는 명성이었다. 귀족 가문들은 우선적으로 혈연으로 묶인 하나의 협력체였다. 부계 가족의 남성들로 이루어진 문중을 중심으로 그들은 도시 내 한 구역에서 뭉쳐서 생활하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법과 관습은 장자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들 사이에서 공평하게 나누어져야 했다(피렌체 법은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결혼 후 그들의 재산이 타 가문으로 이전될 것을 우려했던 귀족 가문들은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일을 기피했다. 모계 가족과 인척에게도 상속권은 없었다). 이와 같은 관습은 쉽게 분할될 수 없는 타워, 저택 등, 가문의 위상을 상징하는 재산이 공동 소유의 형태로 가문 구성원 전체에 의해 관리돼야 함을 의미했다.


자기 몫의 토지와 타워, 저택 (Palazzo) 등의 재산을 가문의 동의 없이 처분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귀족 가문의 남성들을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결집시켰다. 그들의 강력함은 이와 같은 피렌체의 상속법이 강요한 경제적 자원의 집중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가문의 깃발 아래 결집한 귀족들은 도시 내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주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현상은 그들 사이에서 성(姓)의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345년 피렌체 산토 스피리토 구역의 2000여 명의 시민 중 오직 258명이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258명 중 60퍼센트 이상이 피렌체 최대 귀족 가문에 속했던 바르디, 프로스코바르디, 네를리와 로시의 네 가문에 속했다) 1427년에는 피렌체 인구 중 세금을 납부하는 가구 중 37%가, 1480년에는 50%가 성을 가지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은 상류사회와 나머지 시민을 가르는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귀족 가문들 사이의 경쟁은 세력의 확장을 위한 혈연과 계약으로 이어졌다. 이는 ‘콘소르테리아’라고 불리는 탑상 주택-집합체를 탄생시켰다(손세관),

 


언급한 바처럼 귀족 가문은 ‘봉건 영주/기사’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실제로 코뮤네가 전쟁에 임할 때면 그들은 무장한 기병으로서 피렌체 공화국의 기사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기사'로서 그들의  활약은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말해주기보다는, 창, 갑옷, 말이 값비싼 사치품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말과 갑옷을 마련할 수 없었던 일반 시민들은 전쟁 시 코뮤네의 깃발 아래 평상복에 구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선 전쟁에 투입됐다.


더 이상 전쟁은 피렌체 귀족 가문들의 본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사도의 기풍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용맹했던 그들 조상의 영웅담을 과시하는 일을 즐겼다. 그들에게 있어 조상의 용맹함과 전공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남부의 귀족들과 봉건적 궁중 문화를 향한 노스탈지아를 공유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많은 경우 피렌체의 귀족들이 그들 가문의 역사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꾸며낸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그들의 허세는 사실 이들 가문의 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Najemy).)


자칭 용맹한 '기사'의 후예였던 그들은 걸핏하면 칼을 뽑아 들고 결투를 벌이기 일쑤였는데, 이와 같은 가문들 사이의 다툼은 도시의 주도권을 사이에 둔 권력 경쟁의 일면이기도 했다. 결국 귀족 가문들이 노리고 있던 것은 도시 내 권력의 독점이었고,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보통 시민들의 지지였다. 그들은 싸움을 통해 어느 가문이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지를 시험할 수 있었고, 수많은 사상자를 동반했던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도시 내 장악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귀족 남성들의 이와 같은  '기사도 정신'은 14세기부터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점차적으로 상인/은행가의 역할에 안주하게 되는 귀족들은 14세기부터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보다는 용병을 고용하게 된다. 1280년 피렌체 내 기사는 250명에 달했지만, 1330년대에 그 숫자는 65명으로 크게 줄어들게 된다(Villani))


중세-르네상스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던 용병대 중 하나였던 스위스 창병 부대(좌).  1515년 마리냐노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다.

이처럼 때때로 유치한 모습을 보이던 귀족들이었지만, 공화정 초기, 피렌체의 정세는 분명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시민 투표로 선출되던 도시의 집정관 콘술(Consul) 역시 오로지 대표 귀족 가문들에서만 선출되고 있었다. 물론 지속되던 가문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도시의 통치는 안정적일 수 없었다. 수많은 타워와 콘소르테리아 사이에서 지속되던 세력 싸움의 치열함은 13세기 초 기벨린 파와 구엘프 파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것은 서유럽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던 황제파와 교황파 사이의 충돌에 피렌체 역시 참여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13-14세기 피렌체 내 귀족 가문들의 타워와 주택의 위치를 표기한 지도 (출처: John Najmey, A History of Florence1200-1575 )



황제와 교황 사이의 세력 다툼은 중세와 르네상스 이탈리아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기 800년 샤를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력을 위탁한 이후, 명목상 그에게 세속적 권력을 모두 이전한 교황은 교황령 바깥에서 권력을 행사할 모든 명분을 잃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주교, 추기경, 심지어 교황의 임명권까지 황제의 손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의 상징적 중심이었던 교황의 권위는 황제의 그것에 비하면 유명무실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1077년, 이와 같은 상황으로부터 반전을 꾀한 교황이  사제, 주교, 교황의 임명권을 교황이 행사해야 함을 주장한 사건은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카노사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수 세기 간 지속된 교황과 황제의 세력 다툼은 서유럽 세계 전체로 번져나갔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피렌체 내 기벨린과 구엘프 사이의 분쟁 역시 황제 지지 세력과 교황 지지 세력의 다툼이었음을 주장한다. 황권으로부터 하사 받은 작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전통 귀족 세력이 황제파 기벨린을, 상업, 금융업에 종사하는 시민 세력이 교황의 지지세력인 구엘프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 도시 내 상황을 고려했을 때, 피렌체의 기벨린과 구엘프 사이의 분쟁은, 라이벌 가문들 간의 갈등이 기벨린과 구엘프의 칭호를 입게 된 것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피렌체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황제, 교황을 향한 충성보다는 옆 타워에서 호시탐탐 나와 나의 가족들의 몰락을 꾀하는 라이벌 가문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피렌체의 귀족 가문에게는 더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Giovanni Domenico Tiepolo (18세기)가 그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붉은 수염)의 결혼식


게다가 기벨린과 구엘프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216년 당시 구엘프의 핵심을 구성하던 서른 여덟 가문과 기벨린을 구성하던 서른 하나의 가문들이 모두 콘타도에 영지를 두고 있던 토착 귀족 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Villani), 귀족 계급이 기벨린을, 시민 계급이 구엘프를 대표하고 있었다는 분석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구엘프 가문들과 기벨린 가문들은 양쪽 모두 봉건 영주 출신으로서 도시에서 상업, 길드 활동에 참여하던 피렌체의 전형적인 귀족들이었다. 가문들 사이의 인척 관계와 그 동안 쌓인 서로간의 앙금 외에 한 귀족 가문이 구엘프를 지지할 것인지, 또는 기벨린을 지지할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Najemy)


이처럼 12-13세기 당시 피렌체 귀족 가문들 사이의 투쟁은 그 어떠한 이념적 차이가 아닌 가문 간의 라이벌 의식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상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은 1177에 일어난 대표적 기벨린 가문이었던 우베르티의 반란이었다. 피렌체 최대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우베르티 가문은 자신들이 집정관 선거에 제외됐다는 것을 빌미로 1177년 도시의 라이벌 가문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2년간 지속된 이 반란은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도시 곳곳을 훼손시켰지만, 긴 싸움 끝에 우베르티 가는 결국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1180년 이후 우베르티 가문과 동맹 가문들의 남성들은 콘술 선거에서 종종 승리하게 됐다.  스스로를 피렌체 내 가장 정의로운 세력으로 규정한 우베르티 가문은 그들의 득세를 위해서 콘술과 시민들의 권위를 완벽히 무시했고, 도시 내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벌인 전쟁을 2년이나 지속했다. 이런 그들에게 있어서 기벨린의 친황권 이념은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14세기 볼로냐 코무네에서 벌어진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


1216년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 전면전의 도화선이 된 '부온델몬테 살해 사건' 역시 구엘프 가문이었던 부온델몬티 가문과 기벨린  가문 아미데이 가문 사이의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격화된 것에 불과했다. 피렌체의 귀족 가문들이 모두 함께 모여 벌이던 연회 중 소동이 일어났고, 혼란 속에서 피렌체 구엘프 가문 중 하나인 부엔돌몬티가의 부온델몬테가 휘두른 칼이 기벨린파 아리기 가의 오도 아리기의 팔에 상처를 입혔다. 까딱 잘못하면 파벌 간의 전면전으로 번질 위험 앞에서, 연회 내 귀족들은 양쪽에게 타협책을 제시했고, 그들은 부엔돌몬테와 아리기의 인척인 아미데이 가문 사이의 혼인을 주선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해들은 피렌체의 또 다른 유서 깊은 가문 도나티 가의 부인 마돈나 구알드라가는 부엔돌멘테에게 "기사로서 결투가 아닌 결혼으로 분쟁을 무마시키려 하는 짓은 수치스럽다"며 아미데이 가와의 혼약을 파기하고, 도나티 가문의 여성과 혼인할 것을 제안한다. 부온델몬테는 당시의 불문율을 어기고 가문과의 상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도나티가의 여성과 혼인을 강행했고, 이 실수는 그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다.


결국 부온델몬테는 아메데이가 여성과의 결혼식에 통보도 없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아미데이가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게 된다. 이는 아리기 가문과 나머지 기벨린 가문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고, 끝내 부엔돌몬테는 아리기가와 동맹 가문 사람들의 손에 살해되고 만다. (아내와 함께 말을 몰고 있던 부엔돌몬테를 처음 가격한 이는 우베르티 가문의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로 피렌체의 귀족 가문들은 기벨린과 구엘프 파로 양분돼 수십 년에 걸친 싸움을 벌인다. 이것이 피렌체 기벨린-구엘프 전면전의 시작이었다.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알타무라(1822-1897)가 그린 부엔돌몬테와 도나티가 여성의 결혼식
끝내 기벨린가의 손에 살해당한 부온델몬테의 장례식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알타무라(1822-1897))


이처럼 피렌체 내 구엘프-기벨린 간의 투쟁은 도시 내 주도권을 사이에 둔 가문들 간의 파벌 싸움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다만 그 동기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친 황제 기벨린, 친 교황 구엘프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은 타 도시 기벨린, 타 도시 구엘프들이 피렌체의 내부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됐다.


따라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할 때마다( 1180년(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과 1230년(황제 프레데릭 2세)) 피렌체의 기벨린-구엘프 투쟁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황제 군의 승리는 기벨린파의 득세, 교황 군의 승리는 구엘프의 피렌체 장악을 의미했다. 수 세기간 지속된 황권과 교황권 사이의 엎치락뒤치락과 함께 피렌체의 내부 정세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롬바르디아 도시 연합군이 프레데릭 바르바로사의 신성 로마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레냐노 전투를 묘사한 Amos Cassioli(1860)의 그림


이러한 귀족 가문들 간의 잦은 싸움은 피렌체 내 새로이 부상하고 있던 또 다른 세력인 시민 계급(엘리트 가문과 함께 상업-금융업-길드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 상류 사회에 속하지 못했던 중간 계층)의 반감을 키우게 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귀족 가문들이 내세우던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귀족 작위, 유치한 자존심은 상업의 중심지 피렌체에 해가 되는 소동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피렌체의 시민 계급과 13-14세기에 걸쳐 벌어진 시민 계급과 귀족 가문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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