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4
중세 후기 내내 이어진 피렌체 내 귀족들 간의 갈등은 교황파와 황제파의 전 유럽적 분쟁 속으로 피렌체를 밀어 넣고 말았다. 기벨린과 구엘프의 이름이 시사하는 바와 달리 황제와 교황을 향한 별다른 충성심을 보여주지 못했던 피렌체의 귀족들이었으나, 그들이 황제파와 교황파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13세기 피렌체는 황제와 교황 간에 벌어진 전투들의 참혹한 후폭풍을 매번 겪어내야만 했다(물론 전 유럽에 걸쳐 벌어진 이 싸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란 어려웠을 테다). 유럽의 패권을 사이에 둔 이 힘싸움은 새로운 황제, 새로운 교황의 즉위와 함께 그 판도가 완벽하게 뒤집히기 일쑤였고, 싸움에서 주도권을 거머쥔 강자가 피렌체로 그 손을 뻗치는 일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황제 프레데릭 2세의 치세(1220-1250)는 기벨린의 강세가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1237년, 그는 자신의 사생아 프레데릭을 피렌체의 행정관(Podesta)겸 토스카나 영주로 임명함으로써 피렌체를 그의 세력권 아래 안착시켰고, 강력한 황제의 카리스마에 힘입은 피렌체 내 기벨린 가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구엘프를 향한 탄압의 기치를 올렸다. 구엘프는 강하게 저항했으나, 열세를 면치 못했고, 결국 1248년 2월 벌어진 치열했던 전투를 끝으로 도시 밖 시골 영지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장악한 기벨린은 떠난 구엘프 가문 소유 36개 이상의 타워와 수백 채의 저택을 파괴했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이제 피렌체는 기벨린의 것이었다.
그러나 고작 2년 후인 1250년,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프레데릭 2세가 사망한 것이었다. 같은 해 그의 아들 프레데릭 마저 토스카나를 떠났다. 원수를 갚을 기회를 잡은 구엘프 가문들은 피렌체 남부 Figline에서 기벨린 군대와 전면전을 벌여 그들을 격파했고, 기벨린 가문들을 남김없이 피렌체 바깥으로 몰아냈다. 이제 구엘프가 기벨린에게 받은 몫을 되돌려줄 차례였다. 피렌체의 하늘을 수놓던 기벨린 소유의 타워들과 주택들이 남김없이 허물어졌다.
이와 같은 도시의 산발적 ‘재개발’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반복됐다. 1260년, 기벨린파 도시 시에나를 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피렌체 군은 (시에나는 우베르티 가문을 포함한 망명한 피렌체 기벨린 귀족들의 피난지이기도 했다) 절대적인 군사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이 패배는 곧장 기벨린의 피렌체 탈환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무려 백 개 이상의 성(Palazzi), 600채 이상의 저택, 90개 가까운 타워, 수많은 점포와 공장들이 기벨린의 손에 의해 파괴됐다. 구엘프는 복수를 다짐하며 다시 한번 아페나인 산맥을 향해 망명 길에 올랐다(C. 히버트).
결국 기벨린-구엘프의 치열한 줄다리기는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트 4세의 지지/사주를 등에 업은 프랑스 국왕의 동생 샤를 드 앙주/샤를 1세의 군대가 1267년 피렌체 시내로 입성하면서(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행군 중이었다)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번에도 기벨린의 저택과 타워들은 파괴됐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됐다. 긴 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구엘프는 Parte Guelfa라는 정치 정당의 깃발 아래 집결하여 피렌체 지배를 공고히 하였고, 이후 기벨린은 다시는 피렌체에서 정치적 세력으로서 부활할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이 피렌체 내 귀족들 간의 분쟁의 끝일 수는 없었다. 머지않아 피렌체를 장악하게 된 구엘프 내에서 내분이 시작됐고(1300), 흑파와 백파로 갈라진 옛 구엘프 귀족들은 구엘프의 전통이 무색하게도 황제 지지파와 교황 지지파로 나뉘어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백파 소속 단테 역시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이러한 귀족들의 끝없는 자존심 싸움은 구엘프에도, 기벨린에도 속하지 않은 중산층 시민들에게 있어서 소모적인 분쟁일 뿐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그들은 대개 구엘프적 성향을 보였으나, 그보다 더 그들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던 것은 쓸데없는 소란을 일삼는 귀족 가문들을 향한 반감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시민 계층을 일컫는 명칭은 포폴로였다. 피렌체 시민 모두를 가리키는 단어인 동시에 길드 멤버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던 '포폴로'는 가장 보편적으로 상업과 길드 활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귀족 가문과 거대 상인 가문에 속하지 않았던 중산층 시민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13세기 말 구엘프 통치 하에서 피렌체는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도시의 은행가들은 교황, 프랑스 국왕, 시칠리아 국왕 등 유럽 각지 영주들과의 거래를 통해 커다란 부를 축적했고(이 시기 이루어진 은행업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상인들은 향료, 염료, 가죽, 실크, 견직물, 태피터 등을 주변국과 활발하게 거래했으며, 무엇보다 피렌체의 양모상들른 유럽 양모 산업의 절대적인 일인자의 자리를 굳히는 작업에 돌입하고 있었다(C. 히버트).
어마어마한 양의 양모와 양모 원단이 매일 같이 피렌체로 군집하고 있었다. 피렌체 전역에 걸쳐 자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방들 내에서는 북유럽, 프랑스, 플랑드르, 스페인, 영국(13세기 이후 수입 양모는 거의 모두 영국산으로 교체된다)에서 수입된 양모가 쉴 새 없이 가공, 염색되고 있었다. 완성된 원단은 토스카나, 프랑스, 영국, 지중해의 시장에서 판매됐다.
황색 염료는 산 지미냐노, 붉은색은 지중해 연안과 마요르카, 주홍색은 성지 예루살렘, 염색 촉매제인 알로에 주스는 알렉산드리아와 레반트 지방에서 공수되고 있었다. 피렌체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상업 도시로 거듭난 것이었다. 계절과 날씨를 막론하고 염료와 타닌으로 오염된 아르노 강 위로 높이 쌓인 옷감을 실은 짐배들이 쉴 새 없이 피사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상업의 성장과 함께 찾아온 인구의 성장 역시 가팔랐다. 이제 피렌체의 인구는 45,000명에 달했다. 또한 타 도시들과의 활발한 거래로 인해 상당수의 피렌체인들이 지속적으로 해외에 주둔하고 있었다. (페루찌와 같은 다국적 은행의 해외 지부에 근무하던 피렌체 은행가들 중 다수는 생의 대부분을 로마, 밀라노, 브루지 등의 타지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피렌체인들을 두고 교황 Boniface VIII세는 "피렌체인들은 제5 원소와 같은 존재"라 말했다. 물, 불, 흙, 공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피렌체 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C. 히버트).
성장 일변도를 걷는 피렌체에서 상인 조합인 길드들이 득세하게 된 일은 어쩌면 당연했다. 당시 피렌체에는 7개의 메이저 길드(Arti Maggiori)와 불특정 다수의 마이너 길드(Arti Minori)가 존재했다. 가장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던 길드는 판사와 변호사들의 길드였던 Arte dei Gioudici e Notari였고, 그다음으로 양모, 실크, 수입 원단상 길드들이 있었다. 가정용품, 잡화, 의류 판매상들의 길드, 의사, 약사, 약품 상인들의 길드 역시 메이저 길드들에 속했다.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해당 업계에 종사하는 상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길드들은 업계 바깥의 사람들의 가입을 허락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회원에게 제공되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길드에 가입하고 있었다. (단테 역시, 정치적 이유로 Arte de Medici e Speziali의 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C. Hibbert))
반면 대길드에 비해 마이너 길드는 괄시의 대상이었다. 물론 상업적 성과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는 마이너 길드들은 예외에 속했다. 그중 하나는 Arte de Maestri di Pietre e di Legname, 석공과 목공을 제외한 건축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의 길드였다.
포폴로와 귀족은 이와 같은 메이저 길드 내에 공존하고 있었다. 극소수의 유서 깊은 길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길드의 경우 포폴로 출신 상인의 수가 귀족의 수를 압도하고 있었으나, 길드의 지도권은 귀족 가문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보통이었다(1293년 이전까지 그러했다).
Arte dei Gioudici e Notari(법관과 공증인 길드)의 경우 소수에 불과했던 법관들은 거의 모두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반면 길드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공증인들은 대개 포폴로 출신이었다. 막강한 힘을 자랑했던 은행가 길드 내에서도 은행 사업의 소유권은 페루찌와 같은 귀족 가문들에게 있었으나, 절대적 다수를 이루던 은행 직원들 중 과반수는 포폴로에 속했다. 양모 상인 길드의 경우, 해외 고가 시장을 겨냥한 고가 원단을 취급하는 상인들은 주로 귀족들이었고, 비교적 저렴한 원단들의 가공-판매는 포폴로 상인들이 맡고 았었다. 그 외 Port Santa Maria 길드와 같은 실크 옷감, 셔츠 등을 가공하던 직공들의 길드, 그리고 의사, 약사, 수입품 , 그리고 모피 판매상들의 길드와 같은 메이저 길드는 포폴로의 수가 압도적인 길드들이었다.(John Najemy)
귀족들에게 재산과 정치력을 제공한 것이 그들의 가문이었다면, 포폴로의 세력과 부의 원천은 분명 길드에 있었다. Priori라 불리는 길드의 대표가 그들의 권익을 위해 정치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고, (길드원 투표로 선출되는 이 직위의 임기는 2달이었다) Sapiente라 불리던 회원들로 구성된 평의회가 Priori를 보좌했다. 무엇보다 각 메이저 길드는 그들만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성장한 길드들의 세력은 피렌체를 사실상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피렌체를 통치하는 것은 Priori로 대표되는 길드 정부였다. 물론 길드들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것은 귀족 가문들이었기에, 이러한 변화가 기득권 세력의 교체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피렌체의 귀족은 법적으로 인정된 계급이 아니었다. 따라서 세력을 키워가던 중산층 포폴로를 귀족들로부터 명확히 구분하는 일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피렌체의 메이저 길드들은 귀족 가문들과 포폴로를 포괄하는 거대한 정치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 새로이 등장한 정치 세력으로서 귀족들을 긴장시키던 '포폴로'는 분명 ‘귀족 가문 소속이 아닌 7개의 메이저 길드의 회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만큼 당시 피렌체 내 길드들의 세력은 막강했다. 13세기 후반, 피렌체의 포폴로는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는 귀족의 지배를 묵인하며, 나머지 비-귀족 계급을 소외시킨 채 귀족 가문들과 함께 과두정치에 참여했으나, 군사적, 경제적 위기에는 마이너 길드들을 포함한 나머지 시민 계급들과 단결하여 귀족 계급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1293년에 이루어진 시민정부의 설립은 후자의 대표적 사례였다.
구엘프 체제 하의 피렌체는 분명 공화정의 이념을 앞세우고 있었다(포폴로의 구엘프 성향 역시 여기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길드들에 의해 선출된 Priori와 그를 보좌하는 평의회, Sapiente, 길드의 권익을 지키는 사병은 피렌체의 행정관 Podesta와 함께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었다. 다만 1293년 이전까지 이러한 길드들과 Podesta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던 것은 구엘프 파의 귀족 가문들이었다.
궁중 문화의 향수에 젖어 상인들을 상대로 우월감을 드러내던 귀족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소란을 혐오했던 포폴로가 같은 길드 내에서 공존함은 필연적으로 노골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1293년, 아레초, 피사, 우르비노 군과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들이 시민들을 업신여기고, 폭력을 일삼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귀족과 포폴로 사이 갈등은 폭발하고 말았다. 피렌체 최대 길드 중 하나인 은행가/상인 길드의 리더, 지아노 델라 벨라는 마이너 길드의 회원들을 소집하여 사병을 조직했고, 기존의 (메이저) 길드 사병들과 그들을 합류시킨 뒤 귀족 가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승리한 지아노 델라 벨라와 포폴로 정부는 같은 해 Ordinance of Justice를 공화국의 법으로 선포한다. 이 법령은 150개 귀족 가문들을 Magnati, (이 법은 그들이 말썽꾼이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 내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 했고, 보증금 역시 지불해야 했다)로 규정하고, 이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이로써 길드와 피렌체의 주도권은 온전히 포폴로의 손으로 들어오게 됐다
잠시 고개를 숙였을지언정 귀족들이 저항 없이 도시의 패권을 빼앗길 리 없었다. 14세기 초기 피렌체 정세는 귀족들과 포폴로 사이의 밀고 당기기 속에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348년 불어닥친 흑사병은 당시 12만 명에 달했던 (당시 피렌체는 파리 다음으로 서유럽 제2의 도시였다) 피렌체 인구 약 절반의 목숨을 앗아갔고, 혈족 중심 사회인 피렌체의 기존 귀족 가문들은 이 타격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다.
14세기의 벽두의 피렌체는 서유럽 최대 대도시 중 하나로 변모해 있었다. 바르디, 페루찌 등으로 대표되는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유럽 최대 규모의 자본을 운영하고 있었고, 피렌체의 최대 산업인 양모 산업 역시 지속되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르네상스가 피렌체의 문화적 전성기였다면, 피렌체 상업의 전성기는 명실공히 14세기 초기였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중세 후기-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