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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Nov 21. 2020

이탈리아의 상업 혁명

피렌체 5

 

    자치 공화국 피렌체가 길드 정부 체제를 확립하게 된 사건은 귀족과 성직자가 아닌 상인 세력이 정치권력의 주체로서 등극하게 됐음을 알리고 있었다. 중세의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사회 구조는 새로운 피렌체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장원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역시 북부 이탈리아에서만큼은 종말을 맞이하게 됐다. 코뮤네 체제는 분명 상업의 비약적 성장이 탄생시킨 새로운 사회의 모델이었다. 중세 후기(High MIddle Ages), 북부/중부 이탈리아의 번성은 중세의 종말을 예고하는 전조일 수밖에 없었다.


    전란의 종식 -> 인구의 증가 -> 잉여 농산물의 축적 -> 상업의 부활이라는 간단한 공식만으로도 중세 유럽 경제사의 큰 맥락을 이해하는 일에 큰 어려움은 없을 테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어버린 상업 발전의 실상을 이와 같은 축약된 공식을 통해 가늠하는 일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전 유럽을 주름잡던 피렌체의 거대 상인, 거대 은행가들의 등장을 가능케 한 변화는 무엇이었으며, 이탈리아 내륙의 작은 도시 피렌체는 중세 유럽의 경제에 있어 어떤 역할을 수행했던 것일까?


중세 베네치아의 지도 - Georg Braun (1541-1622)


    상업 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분명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이었다. 12세기부터 중세의 쇠퇴까지, 지중해, 흑해, 아드리아 해를 아우르는 해상 무역의 패권은 명실공히 북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들에 있었다. 무역에 있어서 유럽의 그 누구도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아의 물동량을 따라갈 수 없었으며, 전 유럽의 정세를 주무르는 은행업의 주도권 역시 피렌체와 루카 등지의 이탈리아 국제 은행가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나폴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세력 사이의 전쟁,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 모두 피렌체 은행가들의 자본 없이는 지속될 수 없었다).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Nostra Mare)라 선언한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의 깃발은 이슬람, 프랑크, 비잔틴의 대제국 조차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하 도시 국가들의 성장은 신성 로마 제국/프랑크 제국의 등장과 함께 찾아온 정치적 안정과 인구의 증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럽보다 먼저 정치적 안정 -> 인구의 증가 -> 잉여 농산물의 축적 -> 상업의 활성화를 경험한 중국과 이슬람 제국의 경우 상업의 발전은 물자 유통을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는 적정선(‘Golden Average’)을 뛰어넘는 도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유럽 내에서 농산물의 생산량과 소비량에 있어 선두를 구성하던 프랑스 북부, 영국 남부, 독일 서부에서도 상업의 활성화는 일정선에 도달한 이후로 더 이상의 큰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자료를 통한 입증이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으나, 우리는 중국, 이슬람, 비잔틴 제국, 유럽의 강대국들에서 상업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를 그들을 다스리던 국가 권력의 성격을 통해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전통적 농업 국가 중국(당, 송)과 프랑스, 독일 등지의 유럽 국가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상업을 장려하지 않았고, 범국가적 정책을 통해 상업을 지원하는 시도 역시 찾아보기 어려웠다. 신정 통치에 뿌리를 둔 이슬람 제국, 로마의 율법에 그 기반을 둔 비잔틴 제국의 경우도 상황은 유사했다.


    중세 유럽의 경우, 서방 세계의 구심점 역할을 맡고 있던 가톨릭 교회가 ‘거래’를 통해 ‘이득’을 탐하는 상업을 공공연히 금기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상업을 억제하는 추가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교회는 천국에 입성할 날을 기다리며 ‘정직한’ 노동에 임해야 하는 신도가 상업에 종사하는 일은 명예롭지 않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사회에 사고파는 자의 자리는 마련돼 있지 않았기에 초기 중세 사회에서 상인은 걸인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되고 있었다. (빈민층은 천국의 주인이었으며, 그들에게 자선을 베푼 부자들의 천국 입성에 힘을 보태주는 교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세 초기, (10세기 이전까지) 지중해 무역은 대부분 비잔틴 제국에 속한 그리스 상인들과 시리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태인


    그러나 그리스와 시리아의 상인들은 유럽 세계 내로 깊숙이 침투하여 상업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상인들의 주 고객은 어디까지나 비잔틴 제국의 귀족들이었고(비잔틴 황제의 명이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시리아 상인들은 이슬람 제국의 등장과 함께 개방된 동방 시장으로 그들의 활동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가톨릭 세계는 그들만의 상업 네트워크와 시장을 개척해 줄 상인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상술한 바처럼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 활동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중세 초기, 물자를 가톨릭 유럽 내의 각 지역으로 보급하는 역할은 사회 전반의 멸시를 무릅쓰고 이득을 추구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이들의 몫으로 떨어졌다. 가톨릭 사회 내에서 공공연히 ‘이단’의 교리를 따르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지켜내고 있던, 글과 셈에 밝은 민족, 유태인보다 상업에 더 적합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을 이슬람 제국, 비잔틴 제국, 인도, 중국과 이어주는 교두보의 역할은 점차적으로 유태인 상인들에 의해 독점되기 시작했다.


 

중세 독일 유태인들이 써야만 했던 모자 Judenhut을 쓰고 있는 유태인 시인 Süßkind von Trimberg


    중세 유럽의 유태인들은 사실상 상업을 그들의 천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가톨릭 세계 내 만년 하층민이었던 그들에게 토지 소유권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런 그들에게 상류층 진출의 길이 닫혀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토지와 재산을 언제건 몰수당할 수 있는 위협에 노출돼 있었던 그들에겐 농업의 길마저 마땅한 선택지일 수 없었다(유태인에게 고용되는 일을 반길 그리스도인들은 드물었기에, 농업에 종사하는 유태인들은 늘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태교 교리의 학습을 통한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에게 중세 초기, 상업과 고리대금업, 전당포 사업은 그들이 손쉽게 뛰어들 수 있는 직업군이 돼주었다(그들의 성직자 랍비 역시 종교 활동을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생계를 위해 상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으로서 그 어느 나라의 시민권도 얻을 수 없었던 유대인들의 신분은 그들에게 유럽 어느 국가의 관습에도 복종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특권을 안겨주었고, 국제 무역에 있어서는 적국 혹은 경쟁국 소속의 상인으로 분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여러 지역의 언어를 습득하는 데 익숙했던 그들은  중세 세계의 필요악 상업을 수행하는 필요악적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기회를 잡아낸 것이었다.



이탈리아


    서유럽에 만연했던 상업을 경외시 하는 경향이 지속됐다면 분명 유태인들은 상업 활동을 독점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0세기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서는 예외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중세 제노아 (Christoforo de Grassi)


    그리스도교로서의 보편적 삶으로부터 소외된 이방인 유태인들이 상업으로 내몰리고 있었다면, 마땅한 경작지를 확보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들의 지역적 특성은 그들에게 상업 도시로서의 운명을 강요하고 있었다(석호 위에 세워진 도시 베네치아, 이슬람 군의 상습적인 공격을 받고 있던 제노아와 피사가 대표적이었다). 이방인으로서의 신분이 유태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듯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국의 위치를 유지하며 모든 국력을 상업에 집중시켰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자국의 상인들에게 가능한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모국의 외교력과 군사력 지원이라는 이점을 십분 활용하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해안을 마음껏 누비던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 아말피의 상인들은 11-12세기를 기점으로 강대 세력들의 틈새 사이에서 공격적으로 상업적 이득을 확보해내기 시작했다.

 

평민에서부터 상류층까지 거의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상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장인들 역시 그들의 생산물을 판매하는 파트-타임 상인들이었기에), 피렌체의 길드 정부, 베네치아의 도지 정부와 같은 장인-상인들의 권익을 우선적으로 대변하는 정부를 보유하고 있던 북 이탈리아의 사회 구조는 이탈리아 외부 그 어느 곳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두고 한 독일 역사가는 “다른 곳이라면 전염병처럼 피할 인물들을 지도자로 내세우는 체제”라 비판하기도 했다(Lopez).


피렌체, 밀라노, 제노아, 베네치아를 위시한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유럽, 아프리카, 동방의 강대국들에 비해 가지고 있던 이점은 그들이 철저하게 상업 위주의 정책을 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범국가적 정책의 추진 속에서 도시의 권익을 희생시키는 중앙 집권 정부와는 달리,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아는 상업적 이득을 위한 정책을 가장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정부를 출범시켰고, 상업적 이득을 위해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일도 불사할 정도로 스스로의 ‘상업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무역량과 해군력에 있어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들이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던 대제국들을 앞서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조선업과 무역에 국력을 집중시킨 응집력에 있었다. 여전히 상업과 조선업에 대한 멸시를 극복하지 못한 비잔틴 제국에 비해 (고대 로마법에서 내려오는 비잔틴 제국의 법은 상류층의 ‘무역’을 금하고 있었다) 조선과 무역에 국력을 집중시킨 베네치아, 제노아, 아말피는 무역과 약탈로 확보한 부를 더 큰 해군력과 무역량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군용 배와 무역용 배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무역을 수행하던 베네치아, 제노아의 선박들의 규모는 그들의 강한 해군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은 힘을 바탕으로 베네치아와 제노아 등의 항구도시들은 타국의 무역항 내에서 그들의 신앙, 법률, 관습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특할 구역을 확보해 내었고, 점차적으로 동방의 향료, 실크, 아이보리, 유럽의 철, 목재, 노예를 운반하는 중개 무역의 강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베네치아 무기고 출입구 (Canaletto 1732)


 

(그들이 스스로의 '무역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은 영지의 확장보다는 상업적 요충지로서의 항구들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던 그들의 정복 전쟁 패턴이었다.  강력한 해군을 바탕으로 아드리아해의의 항구들을 완벽하게 독점하고 있던 베네치아, 리구리아 해변의 항구들을 그들의 관할령으로서 관리하고 있던 제노아 모두 해안선 넘어 내륙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5-16세기 베네치의 관할령 아래 있던 식민지와 항구들을 표시한 지도 (Wikipedia)


    지중해 무역의 패권이 돌이킬 수 없이 이탈리아로 넘어온 것은 11세기 말의 일이었다. 1082년, 동쪽의 투르크족, 서쪽의 노르만 제국의 압박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에게 대대적인 해군 원조를 요청했고, 이에 응한 베네치아는 그 대가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비잔틴 제국 내 관세를 면제시켜주는 혜택을 요구했다. 이렇게 체결된 협약은 베네치아 상인들로 하여금 비잔틴 제국 내에서 비잔틴의 상인들보다도 더 유리한 위치에서 상업을 전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로부터 6년 후(1088), 피사, 아말피, 제노아 역시 그들의 도시를 지속적으로 침공해 온 이슬람군의 본거지인 아프리카 마디야(오늘의 튀니지)를 강력한 해군력을 통해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어냈고, 이를 통해 북아프리카 무역항에서 압도적인 특혜를 확보해냈다. 지중해가 명실공히 이탈리아의 바다(Nostro Mare -우리의 바다)로 거듭나게 된 사건이었다. 1082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지중해 최대 도시로 남을 수 있었으나, 지중해를 통치했던 것은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의 갤리함들이었다.



13세기-17세기 사이 제노아의 지중해 정복사 (Wikipedia)

    밀라노, 피렌체를 위시한 이탈리의 내륙의 도시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의 상업망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상업로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위성 도시-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기에 밀라노와 피렌체는 전쟁을 통해 주변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 지역을 통과하는 상인들에게서 관세와 통행료를 부과함과 동시에 자국의 상인들에게 관세 혜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내 상업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귀족 가문의 상속권이 없었던 아들들 중 다수는 성직자가 되거나, 이웃 영주의 휘하 아래서 기사로 활약하는 길을 택했다면, 같은 상황에 놓인 이탈리아의 상류층 자손들은 상업에 뛰어드는 길을 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상선에 올라 지중해를 탐험하며, 이민족과 해적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일은 낭만화된 기사의 이상 못지않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탈리아 도시 내 귀족 가문과 상인 사이의 신분의 벽을 허무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자치도시 피렌체에서 귀족 가문과 거대 상인들은 모두 상류층에 속했으며, 둘 사이에 신분적 차이는 법적으로 인준되지 않았다.)



화폐와 신용


    상업의 성장은 화폐의 사용을 보편화시키고 있었다. 중세 초기 금 부족의 현상으로 인해 서유럽에선 더 이상 금화가 주조되지 않았으나,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은화와 동화(은화 역시 음 함량이 매우 낮은 경우가 많았다)는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던 중세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낮은 가치의 ‘잔돈' 화폐 사용의 보편화는 직접 빵을 굽거나, 장작용 나무를 도끼질해오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농부들로 하여금 생필품을 구매하도록 만들었고, 소일거리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민들 역시 더 이상 그들을 고용해줄 영주/상인을 찾기보다는 상품과 서비스를 판매해 매번 임금을 제공받는 수당금 제도를 찾게 됐다.


     화폐의 주조량은 상품과 서비스의 폭발적인 증가가 출현시킨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화폐 부족의 현상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물가가 계속해서 치솟았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 내 화폐와 상품의 회전 속도가 굉장히 빨랐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화폐, 특히 금화의 부족이 낳은 어려움은 제한적인 양의 화폐를 동시다발적으로 활용하게 해 줄 은행가와 신용 거래의 필요성을 출몰시켰다. (금화 부족 현상은 1252년, 제노아와 피렌체가 그들의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하면서 부분적으로 해결된다)


중세 유럽의 은행가를 묘사한 그림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은 신용 거래의 탄생이었다. 높은 비용을 동반하는 동방으로의 왕복 여정은 선박 보험, 동업, 등의 형태를 취하는 대규모의 투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모험이었다.


    다만 중세의 은행가들은 오늘의 은행가들처럼 공공연히 대출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가톨릭 교리는 원금 이상의 이자를 받는 모든 행위를 ‘고리대금업’으로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고, 중세의 상인/은행가들은 그들의 활동이 고리대금업으로 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작은 규모의 전당포업, 고리대금업 등의 역할을 도맡았던 유태인들은 유럽 사회에 빼놓을 수 없는 ‘필요악’ 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세의 은행업은 사업의 위험과 이윤을 분담하는 동업(partnership), 선박 보험(무역을 떠난 배가 무사히 돌아오는 데에 돈을 거는 도박과 다름없었다), 혹은 한 도시의 화폐를 다른 도시의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 업무의 눈속임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부다(오늘날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했던 피렌체 무역 회사들(15세기)

   

    오늘의 은행과 비슷한 형태의 저축 은행 형태의 은행가들도 존재했으나, (이러한 은행들은 항구도시가 아닌, 시에나, 피렌체 등의 내륙도시에서 주로 발달했다) 교회의 감시 아래서 이들의 운영은 소규모 일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무역을 위한 투자는 국제 은행의 역할을 겸한 상업-회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실상 중세 유럽의 거대 상인과 거대 은행가는 분리시키기 어려운 관계에 있었다. 큰 무역을 위한 신용 거래는 환전-투자 등의 우회 수단을 필요로 했고, 대규모 자본을 움직이는 은행가는 유럽 내 각 지역에 지점을 보유해야 했다. 동시에 다방면의 무역에 투자하고 있던 은행가들은 실질적으로 무역회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상 가능하듯이 은행가는 특정 도시에서 받은 돈을 두 번째 도시의 돈으로 환전하면서 그에 따른 환전 비를 받고 있었다. 이는 이자가 동반되는 대출과 다름 없었고, 교회의 눈을 피하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환전의 기록을 장부에 남긴 후, 장부상으로 다시 그것을 최초의 도시의 화폐로 환전하는 방식으로 예금업을 진행하는 일 역시 비일비재했다(이렇게 받은 예금을 은행가/상인은 선박 보험/무역에 투자했다). 국제 은행가들로 하여금 이러한 수고를 무릅쓰게 할 만큼 ‘고리대금업자’로 규정되지 않는 일은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고리대금업자로 지목되는 일은 지옥으로 직행하는 일을 의미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은행가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들의 최대 고객은 각 지역에서 수금되는 조공과 세금을 로마로 송금해야 했던 로마의 교황과 가톨릭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향료와 공예품


    중세의 해상무역을 대표하는 상품은 단연 동방에서 수입되는 사치품이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향료, 실크, 아이보리와 같은 사치품에 집중했던 이유는 해상무역이 동반하는 높은 운송료 때문이었다. 위험과 비용이 높은 국제 무역에 있어서 희소성이 높지 않은 저가품은 알맞은 상품일 수 없었기에, 많은 경우 생필품을 포함한 저가 상품들은 지역 내에서 작은 규모로 교환-거래돼야 했다.


    은행가와의 협업(이자를 전제하는 사업-대출은 교회에 의해 금지됐기에)을 통해 이루어지던 동방무역은 고위험-고이윤의 성격을 띠었고, 해적, 이교도, 적국 함대를 마주칠 위험을 무릅쓰고 운송된 향료/아이보리/실크는 매우 고가의 가격으로 판매됐다. (운송비, 투자자들의 이윤, 상인들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서 높은 가격은 필수적이었다)


중세 양모 상인들의 일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Isaac Claesz. van Swanenburg 1537-1614)

   선박을 동방/아프리카까지 보내는 긴 여정에 들어가는 운송비를 고려했을 때(선원들과 선장에게 지불해야 하는 임금 역시 높은 편에 속했다) 물동량은 동방으로 운반된 물건과, 가져올 상품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교환물의 불균형을 조정해줄 금화의 부족은 이와 같은 균형을 더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동방의 사치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탈리아 상인들은 초기에는 유럽의 목재와 자연광물을 판매했고, 이들은 점차적으로 갑옷과 무기, 철제와 유리 공예품(베네치아), 무엇보다 유럽의 특산품인 양모와 리넨 옷감으로 교체됐다.


   이탈리아 각 지방의 특산품이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상업 혁명이 가져온 효과였다. 한 곳에서만 생산될 수 있는 특산품을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일은 전쟁을 통해 도시의 관할 영역을 넓히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사업적 이윤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루카는 최고의 실크를, 브레시아는 최고의 갑옷을, 볼로냐는 최고의 신발을 생산하는 도시로서 명성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특산물은 물론 양모 옷감이었다. 이러한 특산품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각 도시는 장인들이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막았고, 동시에 다른 도시에서 온 장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상품성이 훌륭한 특산물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상인들을 기다려야 했던 타 지역의 도시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도시들의 장인들은 상업을 겸하고 있는 상인들이었고, 자연스레 그들의 상품은 전 유럽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14세기 당시 10만에 달하던 인구, 5만 이상의 금화 플로린을 주조해내고 있던 피렌체는 매년 8만 필 이상의 양모를 유럽의 원단 시장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상업 혁명의 중심이었던 북부 이탈리아는 분명 독보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14세기 초, 인구 10만이 넘는 도시가 넷이나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제노아).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넷이 북 이탈리아 지역에 집중돼 있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의 인구가 10만에 미치지 못했고, 런던의 인구는 파리보다도 작았으며, 독일 도시들의 인구는 대부분 수천 명에 머무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상업 혁명 당시의 이탈리아와 유럽의 타 지역 사이의 격차는 산업혁명 당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그것과 비교될만한 것이었다. 1293년 제노아의 해상 무역량은 프랑스 왕국 전체의 총수입의 세 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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