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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Dec 19. 2020

용병의 등장과 피렌체의 파산

피렌체 6

    14세기 피렌체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려 한다. 르네상스를 앞둔 마지막 글이 될 듯하다. 메디치가와 함께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하기에 앞서 피렌체는 몇 차례의 고난을 더 겪어내야만 했다.  도시의 흥망성쇠에도 “비 온 뒤 땅 굳는다”는 우화를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이번 포스트의 주된 내용은 ‘비’에 관한 것이 될 테다.


    모국 피렌체의 역사를 정성스레 서술한 중세의 역사가 빌라니는 1341년을 도시 최고의 전성기로 규명한 바 있다. (그는 1348년, 흑사병으로 사망한다) 분명 경제력만을 두고 보자면 14세기 초반 피렌체는 도시 역사상 전무후무한 호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노 강변의 도시가 이 시기에 직면하고 있던 상황은 고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국력의 객관적 척도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빼놓을 수는 없을 테다. 양모 사업으로 대표되는 상업과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금융업을 앞세운 피렌체의 경제력은 전 유럽에서 그 적수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반면 군사력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코뮤네 초기, 피렌체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것은 기사 가문 출신의 귀족들로 구성된 기병과 농기구 따위를 손에 쥔 평상복 차림의 시민들이었다. 제대로 된 훈련도, 지휘 체계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 시민군이었으나, 피렌체의 주적이었던 주변 도시들의 상황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그들의 결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14세기 초반, 중세의 전쟁사는 커다란 도약을 앞두고 있었다.



용병대장과 시뇨레/(Condottieri e Signore)



    12세기까지 피렌체를 좌지우지하던 토착 귀족은 툭하면 도시 곳곳에서 결투를 벌이는 말썽꾼들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피렌체를 향한 애국심과 중세적 공명심에 불타는 호전적 기사들이기도 했다. 허나 상업 혁명과 함께 찾아온 피렌체  사회 질서의 변화는 그들을 상인/은행가로 변모시켰고, 14세기가 도래할 무렵 이들의 후손들은 Cavallata 의무(상류층에게 부여된 말을 키우고, 유사시에 기병으로 전쟁에 참전할 의무)조차 직접 이행하기보다는, 대신 말을 키워줄 마부와 대신 싸워줄 군인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피렌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30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경제력과 빈약한 군사력이 공존하는 도시들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렇다 할 상비군을 갖추지 못한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등의 도시들이 그들의 막대한 부를 활용하여 타지 출신의 군인들을 그들의 세력 싸움에 투입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럽게 찾아온 변화였다.


    14세기 초 처음으로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 유럽의 용병단은  십자군 원정단의 잔병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상당수는 ‘군대’라기보다는 강도 떼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잘 훈련된 기병대를 갖춘 기강 잡힌 용병단 역시 존재했다. 초기의 용병대장들은 독일 출신 기사들이 그 주를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용병대의 지휘관들은 유럽 전역에서, 특히 중앙집권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내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자치 도시들은 이들을 전쟁 시에 고용하거나 반영구적으로 도시 내에 주둔시킴으로써 도시의 상비군으로 삼기 시작했다.


1436년에 완성된 전설적인 콘도티에로 존 호크우드 경의 기념비

    

    용병의 등장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정세를 거세게 뒤흔든 사건이었다. 타지 출신 용병에게 국방의 전권을 맡기는 선택이 일으킬 부작용을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용병대장들은 금세 그들의 고용주들이 무력 앞에서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이를 악용하여 도시의 권좌를 찬탈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무력으로 빼앗은 도시를 지배-통치하는 독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Signore(Lord)였다.)  12-13세기 북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 체제가 공화정이었었다면, 14세기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대다수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군벌(Signore)의 독재 체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콘도티에리(Condottiero/ Condottieri(plural))라 불리던 용병 대장들이 14세기 이탈리아를 그들의 무대로 삼게 된 계기는 늘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정복 전쟁이었다. 영주와 황제 간의 상호 계약에 따라 황제는 그가 지휘하는 원정에 영주 휘하의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지만, 14세기 유럽의 징집군은 최소한의 ‘시늉’만을 보이고선 약속된 기한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기 십상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황제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로 직업 군인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131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7세는 피렌체를 위시한 북부 이탈리아의 구엘프파 코뮤네들을 징벌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남하한다. 파죽지세의 기세로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굴복시킨 그는 아무 문제없이 로마에까지 입성했다. (롬바르디아는 여느 때처럼 이탈리아 반도에 찾아온 이와 같은 거센 기류에 가장 먼저 휩쓸리고 있었다. 1277년부터 밀라노는 무력으로 Signore자리에 오른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통치된다)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로 남하하는 헨리 7세와 제국군


    


    그러나 구엘프 세력의 맹주 피렌체와의 결전을 앞둔 1313년 8월, 헨리 7세는 시에나를 상대로 공성전을 지휘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다. 존망의 위기를 운 좋게 넘긴 피렌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단테는 적절한 시기에 찾아오는 적의 수장의 예기치 못한 사망이야말로 피렌체의 오랜 수호신이라 말한 바 있다)  헨리 7세의 죽음이 가져온 후유증은 14세기 초반 토스카나를 전란 속으로 인도하게 된다.

 


밀라노의 강력한 구엘프  Guido della Torre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헨리 7세의 제국군을 묘사한 그림



     헨리 7세는 객사했지만, 황제를 따라 알프스를 넘어온 독일의 기사들은 주군을 잃은 채로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를 표류하고 있었다. 무장한 떠돌이 신세가 된 이들은 주인을 잃은 사냥개처럼 손쉬운 사냥감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장군들 중 한 명인 우구치오네(Uguccione)가 피사를 점령하면서, 토스카나 역시 첫 Signore의 탄생을 맞이하게 됐다.  우구치오네는 그의 부관이었던 카스트루찌오의 손에 의해 얼마 지나지 않아 실권하게 되지만, 피사를 버리고 루카에 주둔한 카스트루찌오 역시 토스카나 내 전통의 강자 피렌체를 노리고 있었기에, 피렌체의 입장에선 군벌의 위협에 대한 해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점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랜 적수 루카가 강력한 군벌의 지배를 받게 된 사건은 피렌체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상업 도시 피렌체의 오합지졸 시민군이 십자군 원정으로 단련된 기사들을 앞세운 용병단의 적수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2개월에 한 번씩 선거를 치러야 하는 길드 정부 체제 역시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피렌체 정부는 고대 로마의 전철을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쟁-지도자 (Capitano di guerra)—를 선출하여 도시의 통치권을 일임했으나, 이 역시 절대적인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게 해 줄 묘책일 수 없었다.


구리 조각술로 깎아낸 카스트루찌오의 초상화  Antonio Locatelli, 1837.


        14세기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피렌체의 이와 같은 무력함을 두고 훗날 마키아벨리는 길드 정부가 행한 개혁의 폐단을 비판했으나, (그는 명예롭지 못한 전쟁을 일삼던 용병대를 향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던 르네상스 사상가 중 하나였다) 토착 귀족으로 구성된 기사단이 남아 있었다고 한들 정세는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용병단을 상대로 때때로 말 위에 올라 과거의 향수에 젖어 기사도의 낭만을 즐기는 귀족들이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피렌체는 1313년, 구엘프 소속 나폴리의 국왕, 앙주 가문의 로베르토 (Roberto d'Angiò)를 도시의 군주(Signore)로 초빙하여 도시의 통치권을 넘겨주는 대신 피렌체의 안전을 보장받는 협약을 체결한다. 물론 계약의 유효기간은 5년으로 한정됐다. 그는 피렌체의 시장(Podesta)을 직접 임명하되, 도시의 헌법을 위반하는 정책과 인사를 시행할 수는 없었다.


나폴리 왕국의 국왕. 앙주가의 로베르토


    독립국으로서 유별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던 피렌체의 입장에서 타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는 일은 굴욕적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은 옳았다. 이후 근 15년간 전개된 루카와 피렌체 간의 분쟁은 치열한 것이었다. 1318년 피렌체는 로버트와의 계약을 4년간 연장하여 1322년까지 나폴리 왕국/앙주 가문의 보호를 받게 된다(이는 그들이 루카에서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던 카스트루찌오의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피렌체가 자존심을 완전히 꺾은 것은 아니었다. 1322년, 로베르토와의 계약이 종료됐을 때, 피렌체의 길드 정부는 카스트루찌오의 위협이 여전함에도, 길었던 나폴레탄 섭정에 안녕을 고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홀로 선 피렌체는 곧장 그들의 역량을 증명해야만 했다. 1325년, 카스트루찌오는 피스토이아를 점령함으로써 피렌체 침공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루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피렌체의 길드 정부의 반응 역시 신속했다. 그들은 피스토이아 함락 바로 다음날 카탈로니아 출신 장군 레이몬드 카르도나를 그들의 전쟁 지도자(Captano di Guerra)로 초빙하여, 유럽 각국의 용병들로 구성된 피렌체 군사의 지휘를 일임했다.


    피렌체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루카의 군벌은 급조한 용병대장과 용병군으로 퇴치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1325년 9월, 카르도나가 이끄는 피렌체 소속 용병 군단은 카스트루찌오의 전략에 휘말려 궤멸당하고 말았다. 루카군은 피렌체의 성벽까지 진격했고, 피렌체는 도시 교외 지역이 초토화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결국 존명의 위협 아래서  피렌체는 다시금 앙주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한다. 1325년 12월, 피렌체는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의 아들/후계자, 칼라브리아 공작 샤를에게 휘하의 프랑스 기사들과 용병단을 피렌체에 주둔시키는 대가로 향후 10년간 시장(포데스타), 장관(프라이어)을 포함한 모든 최고 관료를 임명할 권리, 20만 플로린(금화)의 연봉, 참전과 외교권을 포함한 도시의 통치권을 전부 바치는 협약을 맺는다. 그의 아버지와 맺은 협정이 동맹의 서약이었다면, 1325년의 조약은 완벽한 투항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들의 뒷마당에서 그들을 도륙할 기회만을 노리는 전제 군주 카스트루찌오의 위협 앞에서 피렌체는 다시 한번 그 자존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칼라브리아 공작, 앙주의 샤를. 초상화


    결과적으로 피렌체는 턱밑에 닥친 위협을 모면할 수 있었다. 1328년에 카스트루찌오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같은 해 샤를 역시 사망하면서 불필요해진 독재 체제 역시 그 끝을 맞이하게 됐다. (피렌체의 수호신이 두 번이나 그 솜씨를 발휘한 셈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루카와 피렌체 사이의 갈등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정권을 탈환한 피렌체의 상인들은 카스트루찌오의 죽음을 피렌체가 토스카나의 패권을 거머쥘 절호의 기회라 믿었고,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영토의 확장은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길드 정부는 막대한 자원을 쏟아 루카를 함락시키기 위한 정복사업을 15년간 이어가게 된다.


    그 후로 벌어진 피렌체와 루카, 피렌체와 피사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자세히 묘사하는 일은 미뤄두기로 한다. 다만 피렌체는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서도 결국 루카를 1343년 피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토스카나의 패자로 거듭나기 위한 그들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이 뼈아픈 실패는 피렌체 내의 정치적 상황에 예기치 못한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과두정 vs 공화정



    토착 귀족 가문과 대형 상인 가문들에게서 참정권을 앗아간 개혁(Ordinance of Justice)이 선포된 1295년 이후, 피렌체는 2개월에 한 번씩 선출되는 장관(Prior)을 중심으로 하는 길드 정부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사전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듯이-, 피렌체의 자랑이었던 공화정 체제 역시 순수한 의미의 ‘국민에 의한' 정부일 수 없었다. 장관(Prior)직은 오직 7개의 메이저 길드, 그중에서도 그들을 주도하는 대표 가문들과 그들의 지지세력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고, 14개의 소규모 길드들, 길드 소속의 사업체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절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피렌체 내에서 사실상 그 어떠한 정치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렌체는 분명 민주주의보다는 소수 가문들에 의해 통치되는 과두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내세울 만한 천연자원조차 찾아볼 수 없는 내륙의 소도시 피렌체를 유럽을 대표하는 상업 도시로 부상시킨 길드 정부의 역량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도시 운영에 있어서 그들은 분명 그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교외를 포함한 피렌체 인구는 1341년 기준 12만에 달했으며, 200여 개의 양모 공장에서는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양모를 매일 같이 가공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에게 막대한 자금을 차용해주던 피렌체의 은행가들 덕에 피렌체의 상인들은 영국 양모를 독점적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피렌체 정부가 매년 세금으로 올리는 수입은 30만 플로린 금화에 달했고, 이는 드넓은 나폴리 왕국을 통치하던 피렌체의 Signore, 로버트가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는 유럽 최대의 상업 도시 중 하나였던 피렌체의 위상을 증명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도시 행정에 필요한 비용은 5만 플로린에 불과했다. 그러나 14세기 초, 여분의 25만 플로린은 피렌체의 금고에 축적되거나 공공사업 등의 재정에 투입될 수 없었다. 1328년까지 피렌체의 여분 재정은 루카의 카스트루치오로부터 도시를 지켜내는 국방 사업에 투입돼야 했고 (앙주가의 샤를에게 지불됐던 20만 플로린의 연봉은 어마어마한 금액인 셈이었다) 카스트루치오의 사망 이후, 같은 금액은 피렌체의 정복 전쟁을 위해 지불되고 있었다. 14세기 초반, 상업 도시 피렌체는 무역과 은행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끊임없이 용병전에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고도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한 정복사업의 실패는 너무나 큰 손해를 낳은 뼈아픈 재앙이었다(1343년 피렌체인들에게 있어서 피사가 루카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빌라니는 신의 가혹함을 한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길드 정부에게 있어 진정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준 사건은 피렌체로부터 천 오백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영국에서부터 찾아왔다. 피렌체 은행가들에게 차용한 금화에 의지하며 프랑스와의 백년 전쟁을 지속해왔던 에드워드 3세가 1339년, 채무 불이행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피렌체의 은행가들에게서 막대한 돈을 차용해간 왕족들이 하나씩 차례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기 시작했고, 이 참사는 피렌체 도시 전체를 파산으로 몰아가고 말았다. 바르디-페루치등의 대표 은행가뿐만이 아니라 80개가 넘는 은행들과 도시 내 대부분의 사업체와 수백 명이 넘는 투자자들이 모조리 파산하고 있었다. 피렌체는 처음 경험해 보는 깊은 공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340년대 피렌체에 불어닥친 어려움은 과두정이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는 길드 정부를 진두지휘하던 피렌체의 기존 상류층의 권위가 위협받게 됐음을 의미했다.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생활고로 내몰린 것은 물론 일반 시민들이었다. 호황기에는 과두정의 통치 아래 생업에 전념하는 백의종군의 역할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던 마이너 길드 회원들, 하급 기술자들, 노동자들은 1340년도에 들어서면서 지배층을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1312-1377)의 초상화


    피렌체의 과두정을 이끌던 거대 상인들에겐 시급한 대안이 필요했다. 마치 최악의 불경기를 초래하고서도 재정부에 구제를 요구했던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처럼 그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을 경제난으로부터 구원해줄 꼭두각시 독재자를 내세우기로 결정한다.


     그들이 선임한 피렌체의 새로운 지도자는 는 프랑스 출신의 브리엔 공작이었다. 그는  4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세워진 아테네 공국의(사실상 유명무실한)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아테네 공작이라 불렸는데, 용맹한 전사로서 명성이 드높았던 그의 등장은 상인 세력이 원하던 효과를 낳았고, 피렌체의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100년 전쟁의 대표적 전투 중 하나인 푸아티에 전투를 묘사한 그림(델라크루아)


    궁여지책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었으나, 피렌체 시민이 그에게 등을 돌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다할 국정 운영의 경험이 없었던 그가 피렌체 사상 최악의 경제난을 극복할 묘책을 보유하고 있을 있을 리 없었다. 굶주린 시민들은 공작의 공저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고, 공작은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국채 상환의 연기를 선언하면서 그를 초빙한 상인 세력마저도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결국 더욱 거세진 시위대의 기세에 떠밀려 그는 스스로 임명한 경찰 서장과 그의 아들을 군중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으로 바치고서야, 겨우 목숨만 건져서 피렌체를 탈출할 수 있었다.


아테네 공작을 피렌체로부터 추방한 사건을 기념하는 프레스코화. 피렌체 팔라초 베키오를 장식하는 벽화 중 하나다


    기득권층의 궁여지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제 권력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50년 전 피렌체 내 거대 가문들을 몰아냈던 개혁의 전철을 따라, 기존 길드 정부의 실세를 구성하던 대표 가문들은 참정권을 박탈당했고, 이로써 피렌체의 통치권은 소길드의 주축을 이루던 프티 부르주아에게로 돌아가게 됐다. 물론 도시의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선 그 어떤 변화도 체감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는 분명 소수의 대상인들에 의해 주도되던 과두정에 비해 민주화로 향하는 한 걸음인 것은 분명했다.



르네상스 피렌체를 묘사한 수채화 (1490)

 거듭된 원정의 실패와 섣부른 투자로 인해 거대 상인/은행가 계급은 피렌체의 권력을 내어주게 됐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부를 개설하게 된 프티 부르주아는 어떤 정책을 추구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의 정책이 과두정 체제의 상인들이 확립해 놓은 노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변화를 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거대해진 피렌체의 인구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를 의미했고, 이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선 국제 상인과 은행가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이들의 순조로운 활동을 위해서 (지난 포스트에서 서술했듯이 원활한 물자의 이동을 위해서는 주변 지역을 세력권 아래 두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토스카나의 패권을 둔 정복전쟁은 지속돼야 했다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1348년의 흑사병 이후에도,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타개되지 않았다 – 전염병이 가져온 일손 부족 현상은 임금의 상승으로 이어졌고, 소식을 들은 타 지역의 노동자들이 피렌체를 찾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피렌체의 양모 산업은 곧장 원래의 규모를 회복하게 된다).


 1343년부터 1382년까지 약 40년간 민주정 통치의 피렌체는 과두정 통치의 피렌체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외교정책을 펴게 된다. 길드 정부는 지중해 항구의 확보, 토스카나 내 패권의 확보, 밀라노로 대표되는 외세의 견제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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