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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Jan 09. 2021

민주정의 몰락과 메디치 가문의 부상

피렌체 7


     15세기 피렌체인들은 그들이 공화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12세기 코뮤네 출범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밀라노 공국, 수많은 콘도티에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화정을 필사적으로 수호해낸 도시 국가 시민의 프라이드는 남다른 것이었다.



     공화정의 기치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피렌체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해상 강국 베네치아였다. 오랜 세월 상인 세력의 이권을 대변한 도제(Doge) 체제 아래서 La Serenissima – 가장 평온한  - 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했던 베네치아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공화정은 큰 자랑거리였다.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상업적 이득만을 추구했던 탓일까, G.F. Young은  그의 <<메디치 가문 이야기>>에서 돈만을 숭상해온 베네치아가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세계사에 내세울만한 정치인, 예술가 등을 극소수밖에 배출하지 못했음을 언급한다. 반면, 공화주의의 수호자를 표방한 피렌체가 르네상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던 메디치 가문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사뭇 아이러니하다.

    

    공화주의자 피렌체인들이 동경해 마지않았던 고대 로마 공화정이 카이사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탄생과 함께 그 막을 내렸듯이, 메디치 가문의 득세는 피렌체 민주정의 몰락과 함께 일어난 사건이었다. (물론 카이사르가 '황제'직을 극구 거부했듯이, 메디치 가문 역시 공화주의의 원칙을 부정하는 '독재자'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 제국의 거대한 영토를  통솔할 정치적 구심력에 대한 요구가 카이사르를 등장하게 했다면, 메디치가의 급부상 역시 도시 국가의 지도자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강요하던 시대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5세기 초 피렌체 - 과두정의 귀환



15세기 초 피렌체의 대표적 상인 가문 중 하나였던 알비치의 문양


    난 지난 포스트에서 1343년에 탄생한 마이너 길드들이 주도하는 '민주정'(대다수 노동자가 소외된) 체제가 1382년 까지 이어졌음을, 또한 그들이 국정의 방향성에 있어서 이전의 길드 정부와 별다른 차이점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이야기했다.  


     40년간 이어진 마이너 길드/쁘띠 부르주아의 통치는 공화주의자였던 피렌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일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집권의 당위성을 국정의 역량으로써 꾸준히 증명해야만 했고, 대외 정책에서 발생한 실패의 책임을 비싸게 치러야만 했다.  


1494년 이탈리아 지도 (출처: Wikipedia)

  

    15세기 초,  이탈리아의 패자 자리를 탐내던  피렌체의 라이벌은 넷으로 축약될 수 있었다. 호시탐탐 남진의 기회를 노리던 비스콘티/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지중해 전통의 강호로서 거대한 해상 제국을 구축하고 있던 베네치아,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통치하던 나폴리 왕국, 마지막으로 60여 년에 걸친 아비뇽 교황청 시대에 안녕을 고하며 중부 이탈리아의 강호 자리로 복귀한 교황청이 있었다. 물론 여태껏 토스카나의 피사, 루카, 시에나조차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 피렌체에게 있어서 이들과 같은 반도 전통의 강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웅을 다투는 일은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초상화. 밀라노에서 활약했던 르네상스 화가  Giovanni Ambrogio de Predis (1455 – 1508)의 작품


   각각의 야심에 불타는 강대국들이 공존하던 이탈리아 반도에서 평화는 가끔씩 찾아오는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했다. (피렌체 역시 외적의 침략이 잦아들기 무섭게 주변 도시들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14세기 말-15세기 초, 교황청이 남부-중부 이탈리아로 통하는 피렌체의 무역로를 막아섬으로써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교황파 구엘프의 도시 피렌체는 교황에 의해 고용된 용병들과 치열한 전쟁에 돌입해야 했다.  그뿐 아니었다. 1402년에는 파죽지세의 기세로 이탈리아 전역을 전란으로 몰아넣고 있던 비스콘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고,(만약 공화주의의 최후의 보루였던 피렌체가 홀로 남아 서까지 끝끝내 밀라노를 상대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북부 이탈리아 전체는 비스콘티 가문의 지배 아래 통일됐을 테다) 1408년에는 나폴리의 북진을 견제해 내야만 했다.


(철저한 실리주의를 추구했던 베네치아는 반도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그들의 석호 위에서 관조하며, 약자 쪽에 힘을 보태는 식으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에 전념하고 있었다 – 그러나 피렌체 역사 최대 위기 중 하나였던 비스콘티 침공 당시 베네치아는 너무 허무하게 피렌체를 배신해 버렸다- 결국 존망의 위협으로부터 또 한 번 피렌체를 구원해준 것은 역시 피렌체의 수호신이었다. 비스콘티는 토스카나에서 북부 이탈리아 통일의 마지막 과제였던 피렌체 침공을 준비하던 도중 1402년 갑작스레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피렌체의 숙적 피사로 옮겨졌다.)

   

    토스카나 내의 상황 역시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1406년 비스콘티를 물리친 여세를 몰아 피사를 함락시킨 피렌체는 수 세기 동안 그들을 괴롭힌 정적을 굴복시켰다는 환희에 휩싸였지만, 통일된 토스카나의 맹주로 거듭나고자 했던 그들의 꿈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피렌체를 상대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던 루카와 시에나는 강대국 피렌체의 위협 앞에서 신속히 단합했고, 전세가 위험해진다 싶으면 밀라노 공국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피렌체의 야욕을 성공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묘석


   (르네상스 유럽의 세계에서 금융업, 용병전, 외교전은 모두 이탈리아의 전매특허 상품이었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내 도시 국가들은 이권, 혹은 생존을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고, 콘도티에리를 고용했으며,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은행가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 다른 유럽 국가들도 사정은 비슷했으나,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도시국가들이 한 곳에 밀집돼 있던 이탈리아의 상황은 분명 특별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용병전과, 외교전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지던 온갖 중상모략으로 얼룩진 이탈리아의 정세를 헤쳐나가야 했던 피렌체 정부는 쉴 새 없이 그 역량을 시험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에겐 내부의 적이 존재했다. 피렌체의 물동량을 담당하고 있던 상인/은행가 (은행가 = 상인, 상인 = 은행가이다. 상업 혁명 포스트에서 설명했다)들이 2개월에 한 번씩 선출되는 프리오리-(7명의 메이저 길드 대표와 14명의 마이너 길드 대표로 구성된 의회의 의원들)와 그 대표인 곤팔로니에레가 이끄는 민주정의 무능함에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거대 상인들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1343년 이전의 과두정 체제를 복귀시킬 기회를 끊임없이 탐색하던 '반역 세력'이기도 했다.


    분명 과두정은 민주정에 비해 도드라지는 몇몇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가 대표하는 길드의 손익을 위해 움직이던 14 명의 마이너 길드 출신 Priori(의원/장관)들은 종종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그에 비해, 일곱 메이저 길드로 대표되는 실리주의자 국제-상인들은 의견 일치가 빨랐고, 일사불란했다. 국제 상인들의 상업활동은 12만 인구의 대도시 피렌체를 지탱하는 기반과도 같았고, 상인들은 사실상 피렌체의 운명을 손에 쥔 것이 그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도시의 행정에서도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고픈 야욕은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비뇽으로 떠나버린 교황청을 그리워하는 로마를 검은 옷을 입은 과부에 빗댄 그림. 그림의 배경은 로마의 지도다.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과두정의 가장 결정적인 이점은 반도 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던 전쟁의 주인공이었던 용병들을 다루기 위해선 민주정보다는 과두정이 용이하다는 사실이었다. 군인 출신인 콘도티에리들은 그들의 수당과 지위를 보장해줄 고용주가 2개월 후 다른 인물로 교체될 민주정의 지도자이기보다는 지속적인 관계를 기대할 수 있는 과두정의 우두머리인 편을 선호했다. 이러한 사실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14세기 유럽 최고의 명성/악명을 자랑하던 용병단, White Company의 수장, 영국 출신 존 호크우드와의 일화가 있었다. 그는 교황청과의 전쟁을 위해 피렌체 민주정에 의해 고용된 용병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382년, 상인 세력이 민주정을 상대로 일으킨 봉기에서 고용주인 민주정을 저버리고, 쿠데타 세력에 힘을 보탬으로써 상인들의 반정을 결정적으로 지원한다.  (그 후 그는 남은 평생을 피렌체 과두정을 위해 싸우는 일에 바친다. 피렌체 명예 시민권까지 받게 되는 그가 1394년 사망했을 때, 피렌체 과두정은 국장의 예로 그의 오랜 충성에 보답한다)


존 호크우드

  

  흑사병, 비스콘티와의 전쟁 등, 피렌체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던 대재앙 앞에서 대상인 세력의 정권 찬탈 계획은 보류돼야 했으나, 그들에게 있어서 위기 때마다 나타나는 민주정의 무능함은 그들이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확신에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결국 1378년, 상인 세력 중 극우파를 구성하던 구엘프당 (Parte Guelfa)은 교황청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민주정을 상대로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획책한다. 그들은 피렌체의 휴일인 Saint John Day(6월24일)을 거사의 날로 결정했다.


 

살베스트로 메디치




    그러나 그들은 그 시기를 잘못짚었다. 1378년 6월 당시 피렌체의 곤팔로니에레는 친 민주정 지지세력의 핵심 인물이자 피렌체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살베스트로 메디치였다. 그는 일찌감치 그들의 계획을 눈치챘고, '반역 세력'의 거사 날짜 일주일 전, 피렌체 민중 앞에서 그들의 계획을 폭로하며 열정 어린 연설로 반역자들을 징벌할 것을 호소했다.


 

<<치옴피의 난>> 19세기 화가 쥐세페 로렌초 가테리의 작품

    


    이 사건은 훗날 Ciompi의 난으로 유명해지는 피렌체 민중 봉기의 도화선이 된다 (메디치 가문의 이름이 피렌체 역사에서 처음으로 조명받게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구엘프당의 쿠데타 계획을 알게 된 피렌체 시민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격분한 민중은 거리로 나섰고, 그들 중 일부는 약탈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구엘프당 소속 상인들은 도시 밖으로 피신함으로써 겨우 목숨만을 건졌다고 전해진다. 도시는 혼란에 빠졌고, 오랜 세월 핍박받은 양모 노동자들은 그들이 기다리던 기회가 도래했음을 확신했다. 그들은 1378년 7월, 도시가 혼란해진 틈을 타 일제히 봉기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단숨에 개혁을 단행하여 기존의 길드에 노동자 길드 셋을 추가하여 노동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 곧 이루어진 선거에서는 맨발로 피렌체 시내를 거닐던 미켈레 디 란도가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됐다. 피렌체에 노동자 정부가 들어서게 된 순간이었다.


미켈레 디 란도의 동상 (16세기 완공된 피렌체의 Loggia del Porcellino 건물)


    코뮤네 역사를 통틀어 늘 권력에서 철저히 소외돼 왔던 노동자 계급의 봉기라는 점에서 치옴피의 난의 상징성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혁명은 성공할 수 없었다. 노동자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던 피렌체의 상인 세력은 그들의 공장과 상점들을 닫아버림으로써 노동자 정부를 상대로 전면적인 저항을 전개했고,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곧장 기아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급박해진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1378년 8월 말, 오직 정부만이 그들의 고용주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노동자들은 곤팔로니에레의 관저인 Palazzo Pubblico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 중 급진 세력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광장에서 피렌체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공화정의 곤팔로니에레라는 권위에 취한 미켈레는 이 도전을 두고 볼 수 없는 반역 행위로 규정했다 (한 달 전까지 맨발로 피렌체 거리를 전전하던 그로서는 대담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피렌체 시민들을 향해 국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함께 반역자들을 몰아낼 것을 호소하며, 말에 올라 타 시위대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호기 좋게 질주하는 그의 패기에 감화된 피렌체의 시민들은 그의 뒤를 따랐고, 시민들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광장의 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로써 양모 노동자들의 봉기, 치옴피의 난은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치옴피 난의 종식을 1382년 (민주정의 실권)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양모 노동자/치옴피 길드는 1378년 여름 이미 혁명 세력으로서의 추진력을 완벽하게 상실했다) 난을 일으킨 치옴피 세력에 대한 단죄로써 정부는 치옴피 길드를 해산시켰고, 이로써 피렌체 민주정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다수와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게 됐다. 치옴피 난 이후로 그 입지가 더욱 위태로워진 민주정은 1382년, 그란디(부유층) 세력이 일으킨 단 한 번의 군사 행동에 무너지고 만다 (전술했듯이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용병장 호크우드와 그의 화이트 컴퍼니 용병단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부상



    1382년, 피렌체는 다시 과두정 체제로 회귀한다. 새로 창설된 노동자들의 길드는 모두 해산됐으며, 프리오리와 곤팔로니에레 선거가 여전히 두 달에 한 번씩 이루어졌으나, 진정한 의미의 정책적 논의는 늘 상인 세력 대표들의 저택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과두정 초기, 피렌체를 이끌던 가문은 알비치였다. 의회 내 큰 어른 격인 니콜로 우자노와 지노 카포니(이들 역시 거대 상인들이었다) 등을 위시한 피렌체 부유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알비치 가문은 무려 100명의 프리오리와 13명의 곤팔로니에레를 배출하고  있었다. 행정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는 늘 니콜로 우자노와 알비치의 팔라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피렌체 정부 내에서 행사하던 권위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또다시 남진을 시작한 밀라노와의 전쟁을 논의하기 위해 프리오리 회의가 소집됐을 때의 일이었다. 의원들은 외적의 위협 앞에서 한 명씩 나서서 참전, 또는 반전의 의견을 어필했고, 양쪽의 의견들은 분분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 회의실의 한쪽에서는 동료 의원들의 발언 내용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니콜로 우자노가 그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 후, 그의 발언 차례가 돌아왔고, 그는 어렵사리 잠에서 깨어나 참전을 지지하는 몇 마디의 말을 보탰다. 그의 발언이 있고 난 후, 더 이상의 논의는 모두 생략되었다. 피렌체는 밀라노와 전쟁에 돌입했다.


니콜로 우자노의 흉상 (도나텔로의 작품)


    이들이 피렌체의 권력을 독점하는 한 라이벌 세력이 피렌체의 패권에 도전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1417년 알비치 가문의 수장 마소 알비치가 사망하고,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그 대를 잇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리날도는 아버지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한 남자였던 것이다. 니콜로 우자노라는 유능한 참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알비치 가문은 점차적으로 민심을 잃고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지켜본 바처럼 소수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과두정 통치 하에서도 피렌체 시민 위에 오랜 세월 군림할 수 있는 지도자는 시민의 지지를 받는 '탁월한 역량'을 갖춘 인물들 뿐이었다. 마틸다 백작 부인 이후로 피렌체의 역사에 시민의 지지 없이 긴 세월을 득세한 지도자는 없었다) 알비치가 그 권위를 잃어갈수록 피렌체 시민들은 하나 둘씩 부유층인 그란디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그들의 관심은 피렌체의 또 다른 유서 깊은 가문이자, 친 포폴로 성향의 가문, 메디치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지오반니 디 비치 메디치 (16세기 피렌체 출신의 화가 Cristofano dell'Altissimo의 작품)


     치옴피 반란의 시발점이 됐던 살베스트로 메디치의 연설은 피렌체 역사에 메디치 가문의 등장을 알린 사건이었지만, 살베스트로는 훗날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는 메디치 가문과는 별도 계열의 먼 친쩍벌에 속했다. 우리가 아는 메디치 가문의 부상의 시작을 알린 인물은 지오반니 디 비치 메디치(1360-1429)였다.


    메디치 가문에게 있어서 지오반니는 그들의 시조와도 같았다. 젊은 시절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그는 피카르다 부에리라는 부유층 여성과 결혼하면서 큰 재산을 챙겼고, 이렇게 마련한 사업자금을 현명하게 투자한 결과로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게 됐다.  남다른 수완을 갖춘 그의 노력으로 그의 생전에 메디치 은행은 유럽 최대 은행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명망을 얻는 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부자일 뿐 아니라, 공직에 몸을 담은 인물을 여럿 배출해야만 한다"는 피렌체의 전통에 따라 지오반니는 여러 차례 프리오리직에 복무했고, 양모상 길드의 길드장 자리를 맡기도 했다.


    훗날 마키아벨리는 지오반니 메디치가 피렌체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밀란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427년 당시 Catasto 세금을 도입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반 시민들의 고초를 걱정한 그는 양모상 길드의 수장으로서 소유 재산에 비례해서 세금률을 결정하는 직접세인 Catasto의 도입을 추진했고,  거대 상인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이 직접세의 도입을 입법화시켰다. 이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기득권 세력의 대항마로서 시민들의 머리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그에게 매우 높은 세금을 의미할 것이 뻔한 이와 같은 정책을 일반 시민들을 위해 도입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의 결정은 피렌체 내에서 그에게 큰 명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반면 잔존하는 자료는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피렌체 의회 토론의 기록에 따르면 Catasto 세의 도입을 추진한 것은 알비치와 이콜로 우자노를 위시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 밀라노와의 전쟁은 그들이 벌인 것이었기에, 그들에겐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오반니는 두오모 세례당을 장식하는 기베르티의 문의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두 개의 문의 건설에 들어간 비용 중 대부분이 지오반니의 기부를 통해 채워졌다고 전해진다.



    피렌체, 아니 유럽 최고의 부호이면서 친 포폴로 성향의 명망 높은 정치가였던 그를 알비치 가문과 그 지지 세력이 견제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1429년 지오반니는 사망한다.  그가 남긴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조 중 장남인 코시모의 나이 마흔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오반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피렌체의 지배 세력은 반색했다. 그들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의 아들들이 지오반니와 같은 수완을 갖추지 못했으리라 넘겨짚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코시모 메디치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게 된 그들은 지오반니를 상대하는 편이 더 수월했었다고 입을 모으게 된다. 아버지 지오반니가 마련해준 기반 위에서 코시모는 매우 영리한 인물로 자라났던 것이다. (코시모 메디치의 성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서 이어가기로 하겠다)


코시모 메디치  (Jacopo da Pontormo)


    이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은 코시모였다. 그의 앞길은 험난할 것이 뻔했다. 메디치 가문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리날도 알비치는 지오반니가 사망하기 무섭게 코시모를 숙청하려 들었다. 그러나 니콜로 우자노가 이를 만류했다. 그는 피렌체의 민심이 코시모에게 있음을 알비치가의 젊은 수장에게 상기시켰고, 만약 그가 코시모와 정면 대결을 벌이게 된다면, 그 역시도 코시모를 지지할 것이라 경고했다. 마지막까지 메디치가와의 정명 승부를 말렸던 우자노는 그러나 1431년 사망하고 만다.


        니콜로 우자노의 사망 이후 리날도를 만류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1433년,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곧장 코시모 메디치가 피렌체의 독재자가 되려 한다는 혐의를 내세워 코시모를 팔라초 베키오의 타워에 감금한다. 당시 코시모가 메디치 가문 소유의 거대한 팔라초를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들에게 빌미를 제공했고, 그 누구도 공화정의 '평등 원칙'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을 내세운 알비치의 협작은 먹혀들어갔다.


    한 번 팔라초 베키오의 타워에 투옥된 사람이 살아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 다들 '자살'하게 되는데, 그것은 독살을 의미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영리했다. 그는 사흘간 그 어떤 음식에도 손을 데지 않고 버티며, 간수를 통해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해, 그의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코시모를 제거하려던 알비치의 시도는 무산됐다. 코시모는 사형 대신 추방령을 받게 된다.


팔라초 베키오와 코시모가 투옥됐었던 타워의 오늘날 모습


    난 공화정: 귀족 편 포스트에서 기벨린과 구엘프 파의 지루한 싸움의 과정에서 추방당한 세력의 (타워를 포함한) 모든 재산이 반대파에 의해 파괴됐음을 언급했다. 도시 국가에서 추방을 선고받는 일은 도시에 있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몰수당하게 됨을 의미했다. 만약 코시모가 그의 힘의 근원인 그의 재산을 몰수당하게 된다면,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게 될 터였다.


    그러나 코시모는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정적들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했던 것일까. 그는 체포당하기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그의 재산을 도시 외부로 빼돌리고 있었다. 그가 추방된 후, 그의 금고를 열어젖힌 그의 적들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여전히 피렌체의 정세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도 같았다. 게다가 정적으로서 리날도 알비치는 그다지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정책에 있어서 거듭해서 실각을 거듭한 젊은 알비치는 피렌체 시민들에게서 지속적으로 신뢰를 잃어갔고, 자연스레 시민들은 메디치가를 추방한 그들의 결정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파두아와 베니스에 머물고 있던 코시모는 이러한 정황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피렌체에 잔류해 있는 그의 친구들의 프리오리/곤팔로니에레 선거 유세를 금전적으로 지원했고, 그의 망명지 파두아와 베네치아의 정부를 동원하여 그의 추방 명령을 취소하도록 지속적으로 피렌체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그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434년, 친 메디치가 세력이 피렌체 정부의 주력으로 당선되고, 그는 같은 해 10월 5일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운집한 피렌체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피렌체로 귀환하게 된다. (그 어떤 개선 장군도 피렌체로 귀환하는 코시모처럼 환대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알비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할 차례였다. 명실 공히 메디치 가문의 시대가 밝은 것이었다. 코시모가 군림하게 된 피렌체는 분명 모든 권력이 그에게 집중된 과두정이었으나 그 누구도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민주정’의 파괴자로서 규탄할 수는 없었다.


다음 포스트는 메디치 가문의 기원과 그 인물들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로 꾸려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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