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8
“꽃불이 차례로 밤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지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육십 년 동안 계속된 [시대였다]” (시오노 나나미)
코시모 메디치가 피렌체의 권좌에 오른 1434년부터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숨을 거두게 되는 1492년까지, 피렌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한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프랑스 역사가들이 고안한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시기 유럽의 문화 운동은, 누가 뭐라 해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탈리아에서 가장 황홀하게 그 빛을 뽐낸 인류사의 축제였으며, 그 정점은 바로 언덕 위에 올라서면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작은 도시, 하지만 이미 세계 그 어떤 도시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던 피렌체에서 현현하고 있었다.
이번 포스트와 다음 포스트에서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코시모 메디치와 로렌초 메디치의 치세를 살펴보려 한다.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가로서의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다)
국가의 지배자... 모든 정치적 사안의 결정은 그의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간택하는 이만이 공직에 올랐고... 평화와 전쟁을 선택하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으며, 법 역시도 그가 지배했다... 그의 머리는 명석하여 놓치는 것이 없었다. 종종 밤을 전부 지새우면서도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그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코시모 메디치]는 호칭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제왕으로서 군림했다.” (교황 파이우스 2세)
우연히 듣게 된 한 팟캐스트에서 난 코시모 메디치가 영화 <대부>의 마이클 꼴레오네와 비교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 중 나온 말이었지만, 그 나름 적절한 비유라고 느껴졌다. 부유한 아버지 아래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라나, 정적들의 음모에 의해 타지로 쫓겨나지만, 귀환과 함께 그의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고선,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30년간 절대 권력자로서 피렌체를 통치한 빈틈없는 냉혈한 코시모의 족적은 분명 영화 속 마이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메디치 가문을 시칠리아의 마피아 패밀리에 빗대는 '무례함'을 코시모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의문이지만)
교황 파이우스 2세는 코시모 메디치를 무관의 제왕이라 칭했다. 그러나 친 포폴로 성향 가문 출신으로서 '공화정' 피렌체를 이끌어야 했던 코시모는 공공연히 그의 힘을 과시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피가 뜨겁고 질투가 많은 피렌체 시민을 이해하고 있던 코시모는(그들은 얼마 전까지 스스로 영웅으로 추양 했던 인물의 피를 탐하는 잔인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라도 그에게 칼 끝을 겨눌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코시모의 세력적 기반인 메디치당 내에서도 그의 실권을 모색하는 이들은 그의 치세 내내 끊이지 않고 출현하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 산재하던 콘도티에리(용병대장) 출신 독재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통치자가 돼야만 했다.
난 지난 포스트에서 피렌체 대중이 그의 귀환을 열띠게 환영했음을 언급했다. 하늘을 치솟던 코시모의 인기는 친-민중 세력의 대표로서 메디치 가문이 받고 있던 명망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지오반니 메디치가 그의 아들 코시모에게 남겨준 가장 값진 유산 중 하나였다.
코시모는 '통치하지만, 군림하지 않는 공화정의 독재자'라는 역설적인 지위에 걸맞은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1434년 이후로도 수수한 차림으로 피렌체의 거리에서 소상인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을 즐겼던 그는 공식 석상에서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메디치 가문의 남자답게 추남이었던 그는 사실 연설에 별다른 소질이 없었다) 반면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교회, 수도원, 도서관 등의 공공 건축 사업에 기여하는 일에는 심혈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지도 아래서 피렌체가 후세에 남긴 건축품과 예술 작품들은 권력자에게 능력뿐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희생정신을 강요하고 있던 피렌체의 전통에 부합하기 위한 코시모의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베일에 싸인 '절대자'로서 한 도시를 30년간 통치했다는 점에서 코시모는 분명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마피아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사랑하는 내게 있어 코시모가 연상시키는 인물은 소설 속 인물 마이클 꼴레오네가 아니라 뉴욕 마피아의 전설 감비노 패밀리의 칼로 감비노다. 외부 노출을 꺼렸으며, 오직 그의 집안 밀실에서 고개짓만으로 뉴욕의 지하경제 전체를 수십 년간 통치했던 '온화한 얼굴의 할아버지' '돈 칼로(Don Carlo)'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권위를 자랑했던 인물이었다- 생김새 역시 얼추 닮은 듯하다)
공화정 체제의 수호자를 표방하는 동시에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일에는 무시 못할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 두 달에 한 번씩 새로운 곤팔로니에레/프리오리가 선출되는 피렌체의 추첨제는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도시의 지도자로 선출될 가능성은 코시모에게 있어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정적 알비치 가문의 몰락을 가져온 사건 역시 친 메디치 파 프리오리/곤팔로니에레 선출이라는 불상사였다. 과거 숙적의 실수를 반복하며 추첨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적 절차'에 그의 정치 생명을 내맡길 정도로 코시모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이 피렌체 특유의 추첨 제도에 그만의 안전장치를 설치하기로 결심한다. 우선 헌법에 우선하는 유일한 기구인 비상회의, Balia가 소집됐다 (‘혁명/쿠데타-> Balia의 소집-> 개헌‘ 은 오랜 관례와도 같았다). 전 피렌체 시민이 시뇨리아 광장에 모여 개헌을 논하는 이 대국민 회의에서 코시모와 메디치 정당은 선거 위원회, accoppiatori의 개설안을 통과시킨다.
이렇게 탄생하게 된 Accoppiatori의 역할은 프리오리와 곤팔로니에레 후보자의 명단을 검열하는 것이었다. 추첨용 가죽 가방에 들어갈 프리오리/곤팔로니에레 선거 후보자들의 이름을 미리 선별함으로써 추첨 제도가 내포하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코시모의 구상이었다. 이 새로운 위원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친 메디치 정당의 인물들이었음은 물론이었다. 5년에 한 번씩 선출되는 Accoppiatori의 선출권을 독점하는 한, 코시모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의한 반정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Accoppiatori의 손으로 새로운 지도자의 이름을 추첨한다 하여 a mano로 불린 이러한 선거 방식을 확립시킴으로써 코시모는 그의 절대 권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코시모는 동시에 중요한 사안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어떤 반대도 무릅쓰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실리주의자이기도 했다. 정치가로서 그의 진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는 바로 그의 외교정책이었다.
1447년 비스콘티 가문의 필리포 마리아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응당 밀라노에서는 도시의 권좌를 둔 귀족/군벌/시민들 간의 다툼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코시모 메디치는 이 분쟁에서 군벌 스포르차를 지지하기로 결정한다. 콘도티에리 출신인 스포르차에 대한 그의 지원은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메디치 은행의 대규모 융자와 피렌체 국고의 상당분이 스포르차 지원에 투입되고 있었다.
스포르차에 대한 원조를 통해 피렌체의 오랜 숙적 밀라노와의 동맹을 꾀하는 그의 외교 전략은 피렌체 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와 내밀하던 상대가 전통의 비스콘티 가문도, '밀라노 코뮤네'를 선언한 밀라노의 시민 세력도 아닌 콘도티에리 출신의 군벌 스포르차였다는 사실은 공화주의의 뿌리가 깊은 피렌체의 시민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게다가 밀라노와의 동맹을 꾀하는 일은 전통의 우방 베네치아를 배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시모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는 오랜 동맹 관계(베네치아는 그가 망명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이기도 했다), 공화주의 이데올로기, 피렌체 내 민심 중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다. 쏟아지는 비난 앞에서 그는 피렌체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베네치아가 밀라노를 손에 넣게 될 것이고,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통일이 낳게 될 신 강대국은 피렌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임을 피력했다. 피렌체 최대의 은행가이기도 했던 그는 레반트 지방의 무역권을 독점하려 하는 베네치아는 우방이 아닌 잠재적 경쟁상대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앙주 가문의 실권 이후로 나폴리 역시 더 이상 피렌체의 우방일 수 없는 상황에서 밀라노라는 동맹국이 절실함을 주장했다. 코시모는 자신이 그의 동료들보다 한 발 앞서 내다보고 있었다고 믿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계산은 옳았다. 코시모의 파격적인 지원과 함께 스포르차는 1450년, 밀라노의 권좌를 찬탈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코시모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았고, 두 도시는 1450년 피렌체-밀라노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관례를 깨는 이와 같은 돌발행동은 경쟁국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곧 전쟁으로 이어졌지만, 베네치아-나폴리 군은 피렌체-밀라노의 군대 앞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실력 발휘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1453년 흑해에서부터 날아온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가져온 충격과 함께 1454년, 이탈리아 내 모든 도시국가들은 교황청의 주재 아래 평화조약에 서명하게 되고, 코시모는 남은 통치기간 동안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의 치세 30년 중 코시모가 공직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한 기간은 도합 6개월, 1435, 1439, 1445년 한 차례씩, 곤팔로니에레 직을 맡았던 것이 전부였다. 그는 심지어 Accoppiatori를 포함한 중요 공직에 오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했다. 바로 피렌체의 재정 위원회 격인 Monte의 위원 자리였다. 그는 이 직위를 통치 기간 내내 고수했고, 임기가 다하기가 무섭게 스스로를 재임명하고 있었다. (이미 피렌체의 모든 정치적 사안에 관한 결정이 그의 승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그가 경쟁자들의 공격에 노출되면서까지 Monte의 위원 자리를 고집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모든 결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외교 정책과는 달리 피렌체의 재정에 관한 사안들은 소수의 위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졌고, 메디치는 이 위원회의 회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믿었다. 응당 그의 정적들은 이와 같은 구실을 놓치지 않고, 그가 Monte의 기능을 남용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그를 위원직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코시모가 피렌체의 재정을 마치 자기 재산처럼 부리고 있으며, 도시 운영 자금 역시 착복하고 있다는 식의 중상모략을 지속적으로 퍼부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개적인 힐책에도 불구하고 코시모는 Monte의 위원직만은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던 혐의가 사실인지에 대한 입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코시모는 피렌체의 세금 정책을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조세 제도는 각자가 자신의 재산에 비례하는 만큼 세금을 지불하는 Catasto였는데, 이것은 얼핏 보면 공평한 제도였으나, 코시모는 재산 조사를 임의로 실행할 수 있는 그의 힘을 '악용(?)'하고 있었다. 신흥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두고 있던 코시모는 그가 피렌체로 돌아오기 전의 기록인 1431년의 재산 조사 내용에 입각해서 세금을 거두는 일을 지속함으로써 그의 정적인 기존 부유층에게 '세금 폭탄'을, 그의 친구들에게는 '감세' 특혜를 안겨줌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에게 도전하는 반정의 싹을 자르는 일에 있어서도 그가 가장 애용한 무기는 바로 불시에 실행되는 '재산 조사'와 '세금 폭탄'이었다.
이처럼 단 한 사람의 독재자에 의해 대도시 피렌체가 완벽하게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5세기 피렌체가 14세기 피렌체와 사뭇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방증하고 있었다. 중세 피렌체의 상류층을 구성하던 귀족 출신의 상인 가문들은 그들에게서 참정권을 앗아간 1352년 선포된 Justice of Ordinance 이후 서서히 그 입지를 잃어갔고, 메디치 가문의 부상과 함께 15세기에는 신흥 상인 세력에게 그 자리를 영원히 내어주게 됐다(이와 함께 기벨린-구엘프의 구분 역시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 중세 당시 피렌체 정재계를 주름잡던 유서 깊은 가문들은 이제 그 명맥이 끊겼거나, 옛 영광과 거리가 먼 모습을 띠게 됐다. (코시모의 세력적 기반이 신흥 상인 세력이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5세기 피렌체가 겪고 있던 가장 큰 변화는 전세기 피렌체를 대표했던 길드들이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이너 길드들이 주도하던 민주정의 실각(1382) 이후 유명무실해진 프리오리/곤팔로니에레의 권위는 메디치 체제 아래서 더 심각하게 추락하고 있었다. 만약 피렌체의 경제가 이전과 같이 길드들에 의해 좌지우지됐었다면, 코시모의 절대 권력은 쉽게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길드의 몰락은 사실상 피렌체 내 경제 구조의 변화를 증거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상인들은 그들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자본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골치 아픈 규제와 관습을 고집하는 길드들에 ‘상품’의 생산을 맡기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 수단과 원료를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는 자본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길드들은 자유노동 시장의 이점에 눈을 뜨기 시작한 상인들을 저지할 수 없었고, 피렌체의 길드 시스템은 15세기 이후에도 그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지만, 14세기 길드 정부 당시의 위상을 다시는 회복하지는 못했다
코시모의 치세는 분명 경제적 호황의 시기였다. 점차적으로 흑사병의 영향에서 벗어난 피렌체는 약 7만의 인구 (이는 100년 후 피렌체보다 2만 명 이상이 더 많은 수치다) , 180개의 교회, 50개의 광장, 270개의 양모상, 그리고 33점의 은행을 갖춘 대도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부의 집중 현상 역시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1427년 당시 이미 피렌체 내 최고 부유층 100개 가구의 재산은 도시 전체의 1/4에 달하고 있었고, 메디치 가문 치세 아래서 이러한 흐름은 계속해서 가속화되고 있었다.
코시모의 오랜 치세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그가 대외적 정책과 내정의 관리에 있어서 발군의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오로지 장막 뒤에서만 도시를 통치한 그의 이미지-메이킹이 수행한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피렌체의 실질적 통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상술한 바처럼 피렌체의 주요 정책 논의가 모두 메디치 궁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프리오리와 곤팔로니에레 후보 역시 코시모의 검토 아래 결정됐으며, 피렌체를 찾은 타 국가의 외교사절들 또한 모두 메디치 궁전의 코시모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리주의자 코시모에게 있어서 '일반 시민'의 타이틀은 고수할 가치가 있는 꽤나 유용한 것이기도 했다. 1454년, 교황 파이우스 2세가 전 이탈리아가 참여하는 반 투르크 연맹에 피렌체 역시 동참할 것을 권유하며, 코시모에게 전투함의 동원을 요구했을 때, 코시모는 나름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마음의 고향, 로마 제국의 후예, 비잔틴 제국을 함락시킨 오스만은 분명 이탈리아 반도의 적이었지만, 피렌체에게 있어서 그들은 커다란 수익의 원천인 동방 무역의 파트너, 게다가 적국 베네치아의 세력을 견제해주는 적의 적, 즉 실질적 우방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가 교황 파이우스 2세에게 보낸 답신에서 우리는 정치인 코시모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교황께서는 마치 한 나라의 군주를 대하듯이 말하고 계십니다. 저는 한 국가의 일반 시민일 뿐입니다. 공화국의 일개 시민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이해하실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