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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Mar 14. 2021

위대한 자 로렌초 -1

피렌체 9




"그는 진중한 북부 민족이 아닌 날렵한 남부 민족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매 순간 그의 몸과 정신을 송두리째 한 가지 일에 집중시키는 행복한 재능을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중요한 임무를 위해 타국으로 떠나는 대사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일, 새로이 발굴된 고서를 검토하는 일, 그리스 철학에 관해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하는 일, 친구들과 함께 사냥 여행 계획을 짜는 일을 아무 문제없이 신속하게 하나씩 해치우곤 했다"
(Ferdinand Schevill)




    '위대한 자'(il Magnifico) 로렌초 메디치는 르네상스 세계의 심장, 꽃의 도시 피렌체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갖췄던 남자였다. 그들의 도시를 더없이 사랑했던 피렌체인들은 도시의 통치자 로렌초에게 '위대한 자'라는 애칭을 부여했다. 은행가 가문 메디치는 국왕의 품격을 타고난 성웅, 로렌초의 등장과 함께 피렌체의 왕조로 거듭나게 된다.


피에로 메디치


    그 어떤 난제 앞에서도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늘 한 발 앞선 혜안으로 피렌체의 앞길을 밝혀주던 난공불락의 존재 코시모 메디치를 쓰러뜨린 것은 그가 각별히 아끼던 아들 지오반니의 죽음이었다.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잔병치레가 잦았던 지오반니는 영리하고 포부가 큰 코시모의 성품을 가장 많이 닮았던 아들이었다. 그의 미래에 큰 기대를 품었던 코시모는 (그는 지오바니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다) 지오반니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을 극복해내지 못했고, 지병인 통풍에 극심하게 시달린 끝에 지오반니가 사망한 그 다음 해인 146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새로운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서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은 장남 피에로였다.  유럽의 경외심을  몸에 받았던 피렌체의 군주 코시모가 도시  반대세력의 도전을 거듭해서 물리쳐야 했다는 사실을 돌이켜 봤을 , 코시모만큼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그의 장남 피에로의 앞날이 순탄치 못했음은 당연했다. 코시모가 숨을 거두기 무섭게, 피렌체인 특유의 시기심은 피에로에게 칼을 겨눈다. 얄궂게도 피에로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나선 이들은 코시모의 심복이었던 루카 피티, 디오티살비 네로니, 아놀로 카사노였다.


    이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대한 긴 설명은 불필요할 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피렌체의 통치권을 잠시나마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의 뜻을 접어야 했다. 연설가이자 철학자였던 니콜로 소데리니를 새로운 지도자로 앞세운 반 메디치 세력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고,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재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피렌체 정치 섭리는 여전히 유효했다. 결국 반-메디치 파는 민심을 얻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피에로의 기습 공격에 완벽하게 와해돼 버렸다. 주도자들은 황급히 망명 길에 올랐고, 노쇄했던 루카 피티만이 일찌감치 피에로에게 투항의 뜻을 전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남으로써 피렌체에 남을 수 있었다. 그는 피티 궁전을 완성하는 일에 전념하며 조용히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반정의 파도를 다시 한번 무탈하게 넘겨낸 메디치 가문은 이제 피렌체의 ‘지배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됐다. 가문의 미래 역시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메디치 세력과의 갈등 내내 피에로의 곁을 지키며 그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한 인물 바로 스무 살이    그의 아들 로렌초였. 피렌체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던 동생 줄리아노 역시 온화한 성품과 수려한 외모로 시민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줄리아노 메디치


    피렌체 시민은 어느덧 메디치 가문이 그들의 '대표'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이제 지오반니와 코시모를 규정하던 겸손, 조심성, 검소함은 더 이상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덕목이 아니었다. 시민들 역시 그들의 지도자에게서 중세의 ‘엄중함’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요구하고 있었다.  로렌초는 이러한 기대에 부합해주기에 알맞은 성품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1468, 열아홉 살의 로렌초는 피렌체의 미녀 루그레치아 도나티를 위해 선사하는 커다란 토너먼트를 개최한다  다음 해에는 그와 로마의 대표적 귀족 가문 출신의 클라리체 올시니의 혼인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제가 열리게 된다.  그의 동생 줄리아노 역시 형의 전철을 따라  차례  도시가 참여하는  축제를 주최한다. 형식적으로는 보통 시민이었던 피에로 메디치의  아들이 이처럼 일찍부터 공식적인 행사를 통해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하기 시작했음을 알린다 (코시모의 치세에는 상상할  없던 일이었다).


     피에로 메디치의 별명은 Gouty였다, 메디치 가문의 지병이기도 했던 통풍을 평생 지독하게 앓았던 그는 반정을 진압한  3 만인 1469,  53세로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후계자가 누가  지에 대한 논의는 있을  없었다. 피렌체는 이미 시민들 사이에서 위대한  –il Magnifico라는 영광스러운 애칭으로 불리고 있던 로렌초 메디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일 마그니피코의 호칭을 로렌초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다는 설도 있다)


로렌초 메디치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자), 로렌초 디 피에로(피에로의 아들) 메디치(Palle!)는 ‘르네상스 맨’의 원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었다. 일찍부터 문학에 조예를 보였던 그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수많은 시인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정도로 언어에 있어서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야외 활동과 운동을 즐기는 호탕함 역시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을 매료시킨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그의 삶에 대한 열정이었다. 피렌체인들은 예술, 사냥, 외교, 정치에 모두 열정적으로 임하는 그의 열정적인 성품을 사랑했다. 그것이 르네상스 피렌체 시민이 꿈꾸던 그들의 이상향에 부합했기 때문이고, 그들 역시 그의 삶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종류의 ‘유희’를 즐기던 그는 정치가이기에 앞서 은행가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소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그가 수지타산에 밝지 못했다는 사실은 훗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지만...). 다만 팔방미인이었던 그의 외모가 그토록 ‘불균형’ 적이었으며, 목소리와 걸음걸이 역시 그 어떤 ‘조화로움’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 남을 미남이었던 줄리아노의 초상화들을 보았을 때, 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위대한 자, 로렌초가 유별난 추남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줄리아노와 로렌초


    로렌초는 매우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던 남자였다. 그가 치세의 군주였다면, 그는 그가 사랑했던 예술과 사냥에 온전히 전념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적들 앞에서 스스로의 ‘위대함’을 증명해야 할 운명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로렌초는 피에로의 사망 당시 '마지못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의 역할을 받아들이며, 체념하듯 - “피렌체에서 권력 없이는 부를 지켜낼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정치적인 힘 없이는 막대한 부를 향해 쏟아지는 시기심을 견뎌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권력 없이는 메디치 가문 역시 그들의 힘 앞에서 몰락한 라이벌 가문들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 뻔했다) 스스로의 ‘위대함’을 증명할 기회는 그가 권좌에 오르기 무섭게 찾아오게 된다. 피렌체인 특유의 시기심이 파치의 음모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

    사실 파치 음모는 범이탈리아적 사건이었다.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목숨을 노린 살해 음모인 이 사건의 조짐은  피렌체가 아닌 로마, 식스투스 4세의 취임식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1376년, 아비뇽-로마 분열을 종식시키고 로마로 귀환한 교황청은 이전의 세속적 권력을 되찾고자 했으나 당시 중부 이탈리아에는 이미 그곳의 영주로 자리를 잡은 귀족 가문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교황에게 어느 정도의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형식적’으로 교황청 영토에 속했던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로렌초의 아내 클라리체의 오시니 가문이었다)


    식스투스의 전임자들은 기존의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현실에 체념한 채 교황으로서의 ‘상징적’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어부 가정 출신으로서 유별난 권력욕의 소유자였던 식스투스 4세의 추진력은 남달랐다. 그는 지역 귀족 가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던 중부 이탈리아 지역의 재산과 권력을 전통 영주들의 손에서부터 탈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그의 가문 델라 로베레와 사돈 가문 리아리오 가문, 특히 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영토와 부를 집중시킴으로써 교황청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의 기존 귀족 가문들은 교황청의 패기 앞에서 하나 둘씩 무릎을 꿇고 있었다.


    1474년, 식스투스가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로마놀레의  도시 이몰라의 군주로 임명하면서 교황청과 피렌체 사이의 갈등은 불거져 나오게 된다. 피렌체의 통치자 메디치 가문에게는 도시의 안전을 도모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교황청의 다섯 세력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불안정한 반도 내 상황에서 그것은 최대한 넓은 보호령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볼로냐, 페루지아, 파엔자 등이 당시 피렌체의 영향권 아래 있던 대표적인 도시들이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 하사한 이몰라는 피렌체의 보호령에 속해 있던 도시였고, 교황청의 부상을 새로운 적국의 등장으로서 경계하던 로렌초에게 있어서 이몰라에 대한 도전은 묵인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야욕에 찬 교황의 심중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몰라를 빼앗기게 된다면 근접 도시인 파엔자와 포를리의 운명 역시 장담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교황 식스투스 4세와 그의 조카들


    첫 분쟁에서 로렌초는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몰라는 교황청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된다. 이제 피렌체는 명실공히 반도 내 새로운 주적을 맞닥뜨리게 됐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지나치게 초조함을 느꼈던 것일까. 여기서 로렌초는 그의 치세 최악의 악수를 두게 된다. 1474년 11월, 그는 코시모가 확립한 밀라노-피렌체-나폴리 삼국 동맹 체제를 저버리고 교황청에 대한 적대심을 공유하는 베네치아, 밀라노와 함께 밀라노-피렌체-베네치아의 신 삼국 동맹을 결성한다. 로렌초는 전통의 강국 밀라노-베네치아와의 협력이 피렌체의 안전을 보장해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위대한 자’의 계산은 어긋나고 있었다.


    우선 이 신-삼국-동맹의 결성은 교황 식스투스와 나폴리의 국왕 페르난테의 격한 분노를 샀다. 두 국가는 곧장 합심하여 교황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피렌체로 칼끝을 돌렸다. 그리스도교의 수장으로서 교황이 전용하는 상징성의 위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피렌체를 위시한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메디치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로렌초의 동맹국에서 터져 나오고 말았다.


    피렌체에게 있어서 신 3국 동맹의 기반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과 메디치 가문의 오랜 친분이었다. (철저하게 자국의 이득만을 취하는 데 이골이 나있는 상인들의 국가 베네치아는 위기시 의지할 수 있는 동맹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1476년 12월 26일, 휴머니즘 이념에 충만한 세 젊은이가 고전 작가들의 독재자 암살에 대한 찬사에 영감을 받아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를 살해했을 때, 이는 로렌초의 한 팔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고 말았다(폭정을 일삼던 전형적인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갈레아초 마리아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 이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밀라노의 통치권은 고작 세 살에 불과한 갈레아초의 아들에게 상속됐고, 밀라노는 그의 어머니에 의한 섭정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자연스레 어린 군주를 둘러싼 세력싸움이 벌어졌고, 어린 공작의 네  삼촌들이 밀라노의 지배권을 두고 격렬한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우방인 밀라노를 정치적 혼란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은 이탈리아 내에서 로렌초의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만다.



    파치 음모는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다. 메디치의 라이벌 가문의 이름인 파치의 이름을 딴 이 사건의 전개는 로렌초와 교황청 사이의 갈등을 간과하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암살 계획을 주도한 것은 교황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파치 가문의 프란체스코 파치였다. 교황의 조카이자 이몰라의 군주 질로라모 리아리오에게 있어서 세관 직원/식물점 조수에 불과했던 그를 도시의 군주로 임명해주었던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적 로렌초는 제거돼야 할 대상이었고, 피렌체의 유서 깊은 가문 파치(그들은 메디치 가문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했던 가문이었다)의 일원 프란체스코 파치에게 있어서 로렌초는 파치 가문의 득세를 위해 제거돼야 할 오랜 라이벌 가문, 라이벌 은행의 수장이었다(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사돈 지간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란체스코의 동생 굴리에르모 파치의 아내가 바로 로렌초의 누이 비앙카 메디치였다) 그 동기는 달랐으나 그들은 타도 메디치의 깃발 아래서 힘을 모으게 된다.


    그들 못지않게 로렌초를 향한 증오를 불태우던 남자는 바로 교황 식스투스 4세였다. 그는 오랜 전통을 깨고 메디치 은행에 예치돼 있던 교황청의 재산을 파치 은행에 넘겨줌으로써 파치 가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로렌초를 견제하기 위해 피사의 대주교로 그의 충복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임명했다. 그러나 피사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로렌초가 그의 취임을 수년간 저지하며 그의 뜻에 저항하자, 식스투스는 로렌초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신념을 더 확고히 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질로라모 리아리오와 프란체스코 파치,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그들의 로렌초 살해 계획을 가지고 찾아오고, 식스투스는 ‘메디치 가문의 타도’를 전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음모를 최종적으로 승인한다 (그는 살해 음모를 말하는 파치 일당에게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이율배반적인 주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교황으로서의 직위를 의식한 위선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치 가문의 문양



    거사의 날짜는 1478년 4월 26일로 정해졌다. 줄리아노와 로렌초를 동시에 한 곳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데서 그들은 의견을 모았고, 장소는 몇 차례의 수정 끝에 피렌체 대성당으로 정해졌다. 그들은 장엄미사 중간에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해치울 작정이었다. 메디치 가문에 적개심을 품고 있던 사제들 안토니오 마페이와 스테파노 디 바뇨네가 로렌초의 숨통을 끊는 역을, 피렌체의 귀족 바론첼리와 프란체스코 파치가 줄리아노를 처치하는 역을 맡았다. 대성당 바깥에서는 대주교 살비아티가 메디치 궁전과 피렌체 정부 청사를 장악할 준비를 끝냈고, 야코포 파치(파치 가문의 수장이자 프란체스코 파치의 삼촌)가 반-메디치의 기치를 올려 대중을 선동할 채비를 마친 채였다. (계획을 앞서 주도한 질로라모 리아리오는 신변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거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계획의 규모로 미루어보았을 때, 암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26일 아침,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파치 일당들에 둘러싸인 채 피렌체 대성당에 들어섰다. 그들은 아무 것도 의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사의 시작과 함께 파치 일당은  품속에 숨긴 칼을 거머쥐었다. 약속된 신호는 성체 거양 의식의 시작이었다. 미사의 종소리와 함께 신부가 제단 위에서 성체를 들어 올렸고, 로렌초의 뒤에서 마페이와 스테파노가, 줄리아노의 곁에서 프란체스코 파치와 바론첼리가 칼을 뽑아 들었다. 오랜 세월 메디치 가문을 향해 품어온 광기 어린 살기가 유감없이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줄리아노의 몸에 무려 열아홉 개의 자상을 입혔고, 너무도 격렬하게 칼을 휘두른 나머지 자신의 허벅지에도 커다란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피렌체 최고의 미남 줄리아노의 생명이 열아홉 개의 자상에서 뿜어져 나온 피 웅덩이 속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반면 로렌초 쪽의 마페이와 스테파노는 프란체스코 파치만큼의 신속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의 회심의 일격은 로렌초의 목에 상처를 내는 데 그쳤고, 신속하게 칼을 뽑아 든 로렌초의 곁으로 그의 친구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이어진 칼싸움의 혼란 속에서 로렌초는 성구실로 황급히 피신할 수 있었다.


     대성당 안에서 격렬한 칼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살비아티와 야코포 파치는 정부 전복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민의 완강한 저항과 맞부딪치고 말았다. 정부 청사를 장악하기 위해 팔라초 퓨블리코 내부로 진입한 살비아티 피사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 서른은 정부군에 의해 즉각 체포됐고, 말에 올라타 피렌체 거리를 질주하며 피렌체 시민 세력의 전통 구호인 “Popolo!(포폴로!) Liberta!(자유!)를 외치며 대중의 봉기를 선동하려한 야코포 파치는 피렌체 시민들이 그를 향해 내지르는 "Palle! Palle!"(메디치 가문의 문양인 여섯 개의 구를 의미하는)의 고함을 맞닥뜨려야 했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로렌초를 살해하는 데 실패한 데다가, 피렌체의 민심을 장악하는 데에도 철저히 실패한 것이었다. 대성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식이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곧 피를 탐하는 폭도로 변모했다.


    며칠에 걸친 피의 응징이 이어졌다.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성을 잃은 군중은 팔라초 푸블리코 앞 광장에 모여들었고, 그들 앞으로 살비아티의 추종자들이 한 명씩 팔라초 건물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마지막 순서로 밧줄을 목에 두른 피사 대주교 살비아티가 팔라초 퓨블리코 건물 벽에 내걸렸을 때, 군중은 프란체스코 파치 역시 그의 옆에 매달려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손에 의해 입은 부상으로 그의 저택에서 신음하고 있던 프란체스코 파치는 침대 위에서 저잣거리로 끌려 나왔다. 무참하게 도륙당한 그의 시체는 군중이 원하는 대로 시청 건물에 내걸렸다. 한편 실패를 직감하고 일찌감치 도시 바깥으로 피신한 야코포 파치는 무젤로의 산길을 헤매며 도주하던 와중 시민들의 손에 붙잡혀 피렌체로 호송돼 군중들에 손에 잔인하게 살해됐다. 그의 유해는 파치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산타 크로체 교회의 성구실에 안치됐으나, 반역자에게 그와 같은 영예로운 분묘를 허락할 수 없었던 군중은 그의 시신을 두 차례나 끌어내어, 철저하게 능욕한 후 그 잔해를 아르노에 던져버렸다.


야코포 파치의 시신을 무덤에서부터 파내고 있는 피렌체의 소년들(오도라도 브라니, 1864)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지만, 로렌초는 파치 일당의 손아귀에서부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전 피렌체를 휩쓴 혼란 속에서 시민들이 그를 향해 보낸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피렌체 내 그의 입지가 더욱 견고해졌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파치 사건의 뿌리는 로렌초와 교황 식스투스 4세 사이의 갈등에 있었다. 교황이 건재하는 한, 그가 타도 메디치의 뜻을 접지 않는 한, 피렌체와 로렌초의 입지는 안정적인 것일 수 없었다. 음모(스스로 승인한 것이기도 한)가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교황은 되려 로렌초에게 살비아티와 파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죄인 로렌초를 교황청에 출두시킬 것을 피렌체에 명했다. 명령이 거부되자 교황은 로렌초를 파문시켰고 피렌체에는 성무 금지령을 내려 가톨릭 세계에 대한 권리를 박탈했다.


    식스투스의 로렌초에 대한 적개심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는 파문과 성무 금지령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교황청과 나폴리의 연합군이 결성됐고, 교황과 나폴리 국왕 페란테 소속의 용병단이 피렌체를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동맹국 베네치아와 밀라노 역시 즉각 피렌체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으나,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 모든 국력을 쏟아붓고 있던 베네치아와 치열한 권력 싸움을 겪고 있던 밀라노가 피렌체에게 보내줄 수 있는 지원은 매우 미비했다. 피렌체는 이제 그들만의 힘으로 교황청과 나폴리를 상대로 도시의 긍지를 지켜내야만 했다.


  교황청-나폴리 연합군의 수적 우위는 결정적이었다. 그들이 만약 일사불란하게 북진하여 피렌체를 압박했던들, 로렌초 역시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럽에 있어서 전장의 주인공은 국가의 녹을 먹는 상비군이 아닌, 받은 만큼 일하는 ‘프리랜서’ 용병단이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쟁에 고용된 외부인을 투입해야 하는 피렌체의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은 못마땅한 것이었지만, 당장 전략적 이점을 십분 활용해야 하는 교황청과 나폴리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용병단의 행태는 야속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반, 전세는 피렌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페란테의 동생 칼라브리아 공작이 이끄는 나폴리 군은 단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피렌체 군을 궤멸시키고, 피렌체 시 부근까지 전진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동맹국의 지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피렌체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결국 용병전의 비효율성이 나폴리 군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별다른 행동 없이 지지부진한 움직임만을 반복하는 용병들 덕분에 1478년의 전쟁은 겨울의 시작과 함께 쌍방 간의 평화 조약 채결과 함께 끝을 맺게 된다.


칼라브리아 공작


    피렌체는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로렌초를 제거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는 식스투스 4세 교황이 여전히 건재했다. 이대로는 앞으로도 피렌체가 지속적으로 전쟁에 휘말리리란 사실은 불보듯 뻔했다. 게다가 피렌체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칼라브리아 공작이 평화 조약 결성 이후에도 시에나에 머물며 피렌체를 함락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로렌초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교황청-나폴리와의 전쟁은 피렌체의 국고를 고갈시키고 있었다. 때마침 찾아온 기근과 역병에 피렌체 시민의 사기도 추락하고 있었다. 교황이 선언한 성무 금지령 역시 독실한 신앙심의 피렌체 시민들을 이끌어야 하는 로렌초에게 있어서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의 원수이자 집요하게 그의 목숨을 탐하는 식스투스 4세와의 화해는 고려의 대상일 수 없었다. 반면 로렌초는 나폴리의 국왕 페란테가 전쟁에 있어서 교황만큼의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로렌초는 밀라노의 권력싸움을 종식시킨 새로운 군주 로도비코에게 서신을 보내 나폴리와의 협상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밀라노의 군주, 루도비코

    

    로도비코는 만약 로렌초가 직접 나폴리의 페르난테 국왕을 찾아 간다면, 페란테가 그를 국가원수의 예로 맞아줄 것이며, 그것을 자신이 보장하겠다는 답신을 보낸다. 연락을 받기 무섭게 로렌초는 나폴리를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이와 같은 결정은 더없이 무모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서로 칼을 겨누었던 적국으로 향하는 일은 그들에게 그의 목숨을 내맡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로렌초는 로도비코의 중재의 효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바보가 아니었다. 협상 중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로렌초는 이러한 위험 요소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호남 로렌초에겐 이러한 모험을 반기는 성품이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나폴리행 선함에 몸을 실었고, 조국의 안녕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향하는 로렌초의 함선을 지켜보는 일은 그의 뜨거운 피를 공유하는 피렌체 시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피렌체의 명예를 지키면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무사히 귀환할 수만 있다면 그는 40년 전 그의 할아버지 코시모의 귀환과 같은 영광스러운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터였다.


나폴리 국왕 페란테/페르디난드 1세


 예상했던 바였지만 나폴리에서의 협상은 순조롭지 못했다. 나폴리 역시 국고를 바닥내면서까지 전쟁을 치른 참이었다. 페란테는 로렌초를 타국의 원수로서 예의를 다해 맞이해 주었지만, 그에겐 아무런 보상 없이 피렌체와 국교를 재개할 의향은 없었다. 협상은 몇 달에 걸쳐 이어졌다. 협상 과정에 대한 세부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데 있어선 천부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던 로렌초는 결국 큰 출혈 없이 평화를 조율해 내는 데 성공했다. 임무를 다하고 돌아온 그를 피렌체 시민이 격렬하게 환영했음은 물론이었다. 전란 속에서도 그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시민들 앞에서 그는 그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낸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로렌초를 향한 적개심을 거두지 않고 있던 교황이 존재했다. 그러나 하늘은 '위대한 자'의 편이었다. 1480년 오스만 튀르크 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상대로 대담한 상륙작전을 전개했고, 순식간에 나폴리 왕국의 도시 오트란토를 함락시켰다. 여전히 타도 피렌체의 기치를 거두지 않고 있던 칼라브리아 공작이 시에나에서부터 황급히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고, 교황 식스투스 역시 범 이탈리아 연합군의 결성을 위해 피렌체와 국교를 재개방하는 일을 허락해야 했다. 튀르크의 침공은 로렌초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호재로 작용했던 것이었다.


 1480년, 드디어 치열했던 파치 음모의  막이 내렸다. 로렌초는 가문의 유산인 피렌체 시민의 선망을 독점한 채로 르네상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위대한 자’는 절대 완벽한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없는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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