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10
로렌초에게 있어서 튀르크의 이탈리아 침공은 운명의 여신의 미소와 다를 바 없었다. 1480년, 범 이탈리아 동맹의 결성을 선언한 교황청이 피렌체와 국교를 재개함으로써 아르노의 도시는 파치 음모와 함께 시작된 긴 전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피렌체 시민은 긴 전쟁과 혼란, 무엇보다 높은 과세에 지쳐 있었다. 로렌초 역시 전쟁이 강요하는 출혈을 뼈아프게 실감하게 됐다. 이후 그는 가까스로 찾은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하게 된다. 물론 그의 노력만으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오랜 악습이 고쳐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로렌초는 1480년 이후로 반도 내 분쟁이 발발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자청함으로써 전쟁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1480년, 목숨을 건 나폴리와의 담판에서 평화를 쟁취해낸 로렌초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망명지에서 귀환한 그의 할아버지가 그리했듯이, 로렌초 역시 그의 입지를 한층 더 단단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뇨리아 광장에 전 시민이 소집됐다. 개헌을 위한 Balia가 소집된 것이었다.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로렌초와 메디치 당은 완벽하게 새로운 구성의 신 정부의 출범을 선언했다.
우선, 기존의 모든 정치 기구에 우선하는 70인의 평의회 – 고대 로마의 원로원을 연상시키는 –가 탄생했다. 5년 임기직의 의원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피렌체 정부 그 자체를 의미했다. 이 평의회로부터 파생된 외교를 담당하는 8명의 위원회, 내정과 경제를 담당하는 10인 위원회 역시 새로이 구성됐다. 이전까지 피렌체의 통치권을 행사하던 포데스타, 프리오리, 곤팔로니에레 등의 직위는 이제 유명무실해졌다.(로렌초 역시 이 새로이 탄생한 평의회의 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 피렌체의 모든 권력은 70인-평의회에 집중됐다. 70명의 위원을 전부 충성스러운 친 메디치 성향의 인물들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이와 같은 정부 구성에는 다소의 위험이 존재했으나, 하나의 기구에 국가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메디치 당은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됐다.
도시의 절대자로서 로렌초가 유감없이 그 역량을 과시한 분야는 단연 외교였다(르네상스 예술의 후원가로서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포스트를 통해 다루도록 하겠다). 치세 초기의 실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로렌초는 1480년, 나폴리와의 협상을 통해 할아버지 코시모가 처음 결성한 바 있는 밀라노-피렌체-나폴리의 삼국 동맹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동맹은 남은 치세 내내 그의 외교 전략의 부동의 기반이 돼준다. 무엇보다 이 삼국 동맹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존속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었던 프랑스를 견제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100년 전쟁의 승리와 함께 중앙 집권 국가로 거듭난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코뮤네/도시국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상징했다. 갖은 외교 협상을 동원하여 반도 내 이권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교황청, 나폴리 사이의 혼란을 구실 삼아 발루아 가문의 대국이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온다면, 이는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을 의미할 것이었다.
거대 중앙 집권 국가 프랑스의 위협은 자명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멀리 있는 적에 대한 상상 속에 눈앞의 이권을 포기할 정도로 대국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끊임없는 갈등/비방, 외교전(동맹/배신), 용병전은 중세 내내 갈고닦은 이탈리아의 전매특허 상품과도 같았다. 반도 내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 급급했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게 있어서 프랑스의 존재는 반도 내 이권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막강한 카드와도 같았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프랑스 사이에서 유지되고 있던 긴장은 마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와 당나라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반도 내 상황 속에서 로렌초에게는 탁월한 혜안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군주이기도 했다. 12세기부터 오랜 세월 프랑스 시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피렌체 상인들의 통행을 허락해준 것 역시 프랑스 국왕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상인들에게 있어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메디치 가문과 루이 11세의 친분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메디치 가문의 문양에 프랑스의 왕조를 상징하는 백합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줄 정도였다. 그는 로렌초와 메디치 가문이 이탈리아 내 친프랑스 세력을 대표하고 있음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교황 식스투스 4세가 로렌초를 파문시켰을 당시, 피렌체는 가장 성스러운 국왕인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로렌초를 지지하고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피렌체의 자주독립을 지켜내기 위해서 로렌초는 친-프랑스 세력의 맹주를 연기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단합을 필사적으로 도모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프랑스군이 알프스를 넘어오는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로렌초가 가장 큰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밀라노-피렌체-나폴리 삼국 동맹을 유지하면서 교황청의 호의를 사는 일이었다. (모든 외교 관계에 있어서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상업국가 베네치아를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더라면 로렌초는 그들의 협조를 구하는 데에도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식스투스의 후임자 이노센트 8세에게 갖은 조공을 바치는 동시에 그의 딸 막달레나를 교황의 아들 프란체스체토와 혼인시킴으로써 피렌체-교황청 간의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그에겐 교황청의 잠재적 힘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두 번 저지를 의사가 없었다.
1482년 베네치아-교황청이 페라라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 1485년 일어난 교황청과 나폴리 사이의 전쟁으로 볼 수 있듯이 로렌초는 혼자의 힘으로 반도 내 평화를 조율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쟁이 생길 때마다 중재자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이 확산되는 일을 막아내곤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그는 이탈리아 나침반의 바늘이라는 애칭 역시 얻게 된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은 역사의 흐름에서 보았을 때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1494년, 즉 로렌초 사망 후 2 년 뒤 벌어진 사건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국가 지도자로서 그 어떤 소양도 갖추지 못했던 그의 아들 피에로는 어리석게도 1494년, 알프스를 넘어온 프랑스군에 맞서 직접 출전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을 맞닥뜨린 프랑스 국왕 찰스 8세는 격렬한 배신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게 오랜 세월 공을 들인 로렌초의 노력은 물거품이 돼버린다)
국제 외교의 나침반 역할을 수행하던 로렌초에게도 도드라지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코시모, 아버지 피에로가 가지고 있던 은행가로서의 수완이었다. 피렌체 최고의 시인이었으며, 학자들과 플라톤 철학을 매일 논하고,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에 직접 디자인한 도면을 그려내기까지 하던 팔방미인 로렌초에게 결여된 것이 있었다면, 바로 매일같이 들어오는 메디치 은행의 각 지점의 보고서들을 차근차근 읽어낼 참을성이었다. 그는 도무지 은행 업무에는 관심이 없었다. 15세기 피렌체는 14세기와 다름없이 전 유럽의 심장으로서 피렌체 금화 플로린이 지중해 전체에 통용될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나, 로렌초를 수장으로 둔 메디치 은행은 오직 뼈저린 출혈만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메디치 가의 대리인 역을 수행했던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메디치 은행 경영의 전권을 맡기다시피 했고, 코시모, 피에로 수하에서 유능한 오른팔이었던 사세티는 결정적인 실수를 번복하며 메디치 은행을 극심한 자금난으로 이끌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사세티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그는 “나는 그런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네”라고 답했다고 할 정도로 그는 은행가 가문 메디치의 수장으로서는 낙제 점수를 면치 못했다.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국제 은행 경영의 제1 원칙은 왕가에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왕족들은 돈을 갚지 않기로 유명했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얽히고설킨 한 가족과 다름없었다). 그들과의 거래에는 높은 수익, 각종 혜택 등의 유혹이 따랐으나, 르네상스 유럽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극도로 위험한 투자를 의미했다. 그러나 각 지점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관리하던 코시모와 피에로의 감시가 사라지자, 메디치 은행의 직원들은 수익과 혜택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영국과 프랑스의 왕가에 거액을 융자해주기 시작했다. 결국 이는 결국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었던 에드워드 4세, 루이 11세, 버건디 공작의 몰락은 메디치 은행의 런던, 파리, 브루게 지점을 파산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로렌초는 직접 메디치 은행의 경영난을 타개해야만 했다. 바로 이 시기가 로렌초의 정적들이 그가 정부 자금을 횡령하고 있다는 비난을 전개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 없었다. 메디치 은행의 경영자금과 피렌체의 국고는 코시모 시절부터 사실상 한 몸과도 같았다. 다만 코시모의 시대에는 불황에 빠진 피렌체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메디치 은행의 돈이 피렌체의 국고로 투입되고 있었다면, 로렌초가 수장으로 있던 메디치 은행에게는 피렌체의 재정 상황을 지원할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없음에도 우리는 정황상 로렌초의 정적들의 주장이 꽤나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다.
로렌초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교황청, 프랑스, 밀라노, 나폴리 사이의 힘의 균형을 지속적으로 조율해야 했던 로렌초에게 있어서 각종 융자금과 환전 서비스를 제공하던 메디치 은행의 존재는 그의 외교정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경영에 실수는 있었지만, 이 역시 유럽 내 왕족들과 친분을 유지해야 했던 피렌체 국가 원수로서의 로렌초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로렌초는 피렌체의 ‘어른’으로서 어마어마한 비용을 그의 주머니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지출해야만 했다. 피렌체를 방문하는 국가 원수, 외교관, 사제들은 언제나 피렌체의 손님이기에 앞서 메디치 가문의 손님이었고, 로렌초는 매번 ‘위대한 자’의 권위에 어울리는 손님 대접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와 행사들을 준비해야 했다. 이와 같은 의전을 위한 연내 지출은 천문학적이었고, 형식상 일개 시민에 불과했던 로렌초는 이러한 지출에 대해서 국가로부터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예술가들의 후원가로서 유명했던 그였지만, 예술가를 발굴하여 그들의 성장을 지원했을 뿐,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그는 많은 경우 그들의 작품을 주문할 수 없었다 - 대신 그는 다른 도시의 군주들에게 피렌체의 예술가들을 추천하는 일을 앞장서서 주선했다) 따라서 메디치 은행의 어려움이 가중되어 갈수록 로렌초의 경제적 상황 역시 극악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렌초가 그의 수족처럼 부리던 70인- 평의회를 통해 국가 자금을 횡령하여 메디치 은행에 수혈하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혐의는 어쩌며 합당한 의심이었다.
메디치 은행의 위기는 이탈리아 은행들의 유럽 내 위상의 추락과 맞물리고 있었다. 그러나 피렌체의 경제는 여전히 호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전통의 특산품 양모 원단은 피렌체의 기술자들을 영입하여 비등한 양모 상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양모 원산지 – 스페인과 영국의 도전에 이전과 같은 수입을 올려주고 있지 못했지만, 피렌체의 새로운 주요 수출품으로 등장한 실크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루카의 특산품이었던 실크는 루카 내 실크 산업의 몰락 이후로 루카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피렌체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옷감 생산에 있어서 언제나 탁월한 솜씨를 자랑하는 피렌체의 기술자들은 그들의 실크를 유럽과 동방 세계에 광범위하게 수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돼야 할 것은 바로 새로운 시장 레반트 지방에서의 피렌체 상인들의 활약이었다. 지중해 상권을 두고 베네치아와 늘 경쟁구도에 있었던 피렌체에게 있어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큰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레반트 지역의 상업을 주도하고 있던 베네치아는 적국 튀르크의 부상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적국 베네치아 대신 이탈리아 내 경쟁자 피렌체에게 호의를 보여준 튀르크 제국의 비호 아래 피렌체는 옛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의 빈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1469년 당시 피렌체의 무역 회사 중 37곳이 나폴리에, 24곳이 프랑스에, 무려 51곳이 레반트에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 레반트 무역이 피렌체의 경제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
가문의 지병인 통풍으로 고생하다 별다른 업적 없이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의 별명은 통풍 환자를 지칭하는 Gouty였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병약했던 그의 아버지보다 로렌초가 훨씬 더 일찍 요절했다는 것이었다. (피에로는 53세에, 로렌초는 43세에 운명한다) 로렌초는 못생긴 얼굴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집안 내력인 통풍 역시 물려받았고, 공작, 은행가, 시인, 철학도, 후견인 등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혼자의 힘으로 수행해야 했던 그의 분주한 생활 역시 그의 수명을 깎아먹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건강이 나빠질 때마다 Vigone, Spedaletto, Porretta, Bagno a Morba의 물을 찾아 요양했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치유일 수 없었다. 40대에 접어든 로렌초는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말년의 '위대한 자'는 공식석상에서 물러나, 메디치 궁전에서 집무를 이어가는 동시에 자식들의 앞길을 모색하는 일에 남은 힘을 쏟아 넣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파치 전쟁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된 교황청의 막강한 힘을 메디치 가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둘째 아들 지오반니를 추기경 학교로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그가 바로 훗날의 교황 레오 10세다).
22살에 권좌에 올라 권력의 중심에 서기 무섭게 파치 음모에 휩싸였던 로렌초에게 있어 그의 집권 20년은 쉴 새 없는 마라톤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그의 정적들은 그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했다고 주장하겠으나, 그의 치세 당시 시민들의 그를 향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피렌체, 더 멀리는 이탈리아 반도가 르네상스 시대에 경험하고 있던 평화와 번영은 로렌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후계자 운이 없었다.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는 뛰어난 점이라고는 메디치 가의 남자답지 않은 잘생긴 얼굴뿐이었던 그는 은행업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공무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매우 게으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 국가의 지도자에 어울리는 면모를 전혀 갖추지 못했던 것이었다.
'불운한 자' 피에로의 시대를 맞이한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앞날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음은 자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일시적' 몰락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다루기에 앞서 난 코시모-피에로-로렌초의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한 번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