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11
정치인 코시모와 로렌초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만으로 르네상스 피렌체에 관한 포스팅을 마무리 하기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느꼈다. 부족하게나마 몇 편의 포스트를 통해 르네상스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우선 르네상스 피렌체의 문화사를 탐색하는 몇 편의 글을 써내 보려 한다.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먼저 르네상스의 문을 연 것은 문학운동이었다. 휴머니즘이라 불리던 문학운동을 주도한, 즉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가치의 추구를 주장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브루니 등의 피렌체 출신 휴머니스트들은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린 서양사의 영웅들이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휴머니즘을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고전적 세계를 부활시키려 했던 운동으로 정의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 작가들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 작가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이상향을 찾았고,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문체와 사유 방식, 스타일과 취향을 모방하려 했다. 신 중심의 세계관을 거부한 르네상스의 이념은 분명 중세와의 단절을 표방하고 있었다. 고전 문학의 재발견, 고전적 가치에 대한 탐구, 고전적 세계에 대한 숭배를 그 중심으로 하는 이 휴머니즘 '운동'은 분명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그러나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두리뭉실한 단어다. 하나의 운동, 사상, 이념을 암시하는 단어의 뉘앙스와는 달리, 르네상스 유럽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이 움직임은 특정한 계층과 정치적 성향에 국한되지 않던, 르네상스 이탈리아 전역에서 발견되던 지적 풍토였다.
르네상스의 시대가 막을 연 정확한 날짜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1341년 부활절 일요일(4월8일)일 것이다. 바로 피렌체 출신 시인 페트라르카가 로마에서 Poet Laureate의 명예를 수여받은 날이다. 한 시인이 문학상을 받은 사건이 르네상스의 시대의 개막을 상징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든 이탈리안 도시 국가들의 마음의 고향인 로마에서 휴머니스트 학자가 천 년 만에 Poet Laureate의 상을 수여한 사건의 상징성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페트라르카는 고전을 발굴, 연구한 첫 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 플라톤 세네카, 키케로 등 고전 작가들의 서적을 발굴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던 그의 연구, 번역, 집필 활동은 그 누구의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었고, 국적이 없는 망명자로서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며 그의 고전 사랑을 각지에 전파한 그의 영향력은 그의 사망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나간 고전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다만 내게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고전 사랑'이 유독 피렌체에서 그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1. 상업 도시 피렌체
페트라르카가 르네상스의 개벽을 알리기 전, 피렌체에는 이미 13세기부터 로마와 그리스 고전의 교육적 가치를 주장하며, 실용적 라틴어뿐만이 아니라 라틴어 고전의 교육이 필요함을 주장한, 스콜라 학문의 권위에 도전했던, 게리 다레초 등의 인물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고전의 교육적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다가올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 대한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의 대열에 포함될 수는 없었다.
14세기 이후, 페트라르카의 추종자들이 전파하던 고전 세계를 향한 열망은 이탈리아 각지에서 고전 교육 운동으로 이어졌다. 스콜라 학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고전 교육(실용적 라틴어뿐만이 아니라, 고전 작가들의 스타일과 그들의 세계관/교훈에 대한 교육)은 이탈리아 반도 내 중등교육 과정의 주요 과목으로 자리 잡게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14세기-15세기 초기까지 피렌체 내 고전 교육에 대한 열기가 이탈리아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상업 도시 피렌체의 시민 대부분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시민 남성 대부분은 상업활동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14세기 초반부터 이미 피렌체 남성 중 무려 80%가량이 문자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지오반니 빌라니는 1330년대에 8천-1만 명의 소년 소녀들이 피렌체에서 글자 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기록을 남겼고, 그의 주장에 대한 의문 역시 제시됐지만, 15세기 당시 피렌체 남성들 중 80% 이상이 그들의 세금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빌라니의 통계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레초, 아시시 등 상업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도시국가에서 라틴어 공부를 통해 휴머니스트 학자, 의사, 법관 등으로 거듭나는 일이 매력적인 일이었다면, 출세의 길이 명확하게 제시돼 있었던 피렌체에서 상업 이외의 길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시민 중 80%가 중등 교육을 받는 당시로선 엄청난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라틴어 교육으로 구성된 초등 과정을 마친 피렌체 시민의 대부분은 상업 기술을 교육 받는 Abacus 학교로 진학했고, (Abacus 학교가 처음 탄생하고, 그것이 가장 큰 성장을 이룬 곳이 바로 피렌체와 그 외 토스카나의 도시들이었다) 더 이상의 라틴어 교육은 전혀 받지 않았다. 이탈리아 내 대부분의 중등 교육이 라틴어 작문을 비롯한 라틴어 신택스에 대한 숙련도를 높이는 것에 집중했던 반면, 상업을 위한 기술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인 Abacus School (직역하면 주산 학교가 될 테다)에서는 대부분의 교과서가 자국어인 토스카나어로 구성돼 있었고, 산수와 회계 장부 정리 등 매우 실용적인 지식들의 교육만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14세기 피렌체 중등교육은 Abacus 스쿨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고, 대부분의 피렌체인들은 아주 최소한의 라틴어 외에는 그 어떤 라틴어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초등교육 교과서인 라틴어 교과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간단한 단어와 문법만을 습득한 후, 토스카나어로 모든 수업이 진행되는 Abacus 학교로 진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서 실무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러한 피렌체인들의 부족한 라틴어 실력은 심각한 것이어서, 그들은 심지어 라틴어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의사, 변호사, 공증인의 절대적 다수를 타지에서 수급해야만 했다.
제노아, 베네치아와 같은 상업도시들에 비해서도 피렌체의 라틴어 교육열이 저조했던 이유는 피렌체의 상업이 대부분 토스카나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4세기 이후부터 피렌체인들은 비즈니스에 토스카나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는 피렌체 외 이탈리아의 대표적 상업도시들과의 두드러지는 차이였다.
제노아와 베네치아의 소년들이 훗날 계약서를 읽고, 장부를 기록하고, 서신을 교환하기 위해 라틴어를 배워야 했다면, 대부분의 비즈니스가 토스카나어로 이루어지던 피렌체의 부모들은 그들의 아들들에게 기본적인 수준 이상의 라틴어를 교육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피렌체 내에서 심도 있는 라틴어 공부, 특히 키케로, 세네카와 같은 작가들의 고전을 탐독하는 휴머니스트 공부는 오직 상류층의 가정교육에서만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소수 대형 상인 세력이 민주정을 전복시킨 1382년부터 더 극심화됐는데, 민중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고 싶었던 피렌체의 상류층 (Poppolo Grosso)만이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비싼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고전 교육을 실행하고 있었다.
2. 아마추어 휴머니즘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특색은 15세기 후반, 피렌체에서 본격적인 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굉장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우선 볼로냐와 같은 대형 대학 시설이 부재했던 (제도적 학문에 대한 열정이 부재했던) 피렌체에서 시민들이 고전적 가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 대해 저항할 스콜라 철학자, 또는 휴머니즘을 제도화할 휴머니스트 학자가 부재했다는 사실은 반대로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그 영향력을 발산하기 시작한 (아마추어) 휴머니즘이 피렌체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정적인 요소는 피렌체가 공화국이었다는 사실이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발견되던 ‘고전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은 당시 고대 로마를 향한 경외심을 뜻했다. 신적인 권위를 이야기하는 중세적 스콜라주의와 황제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중세적 세계관은 더 이상 피렌체의 자유시민들에게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이 요구되고 있었다. 로마 공화정의 후예로 스스로를 규정한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들은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해주는 소중한 지침서였다.
국왕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나폴리 왕국, 비스콘티-스포르차 공작의 독재정 체제 아래 있던 밀라노 등, 15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시뇨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휴머니스트 학자들, 특히 교육에 있어서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던 나폴리, 밀라노 등지에 비해, ‘자유시민’ 임을 주장하던 피렌체인들에게 그들의 삶의 지침서가 돼줄 고전 문학, 특히 당시 유행하던 키케로, 리비(로마 역사), 세네카의 문장들은 그들의 의견을 직접 광장에서 어필해야 했던 그들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피렌체는 15세기 후반 고전적 세계관을 그들의 것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