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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pr 05. 2021

휴머니즘과 피렌체 2

피렌체 12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부활'을 맞이한 고대의 수많은 작가들 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감을 과시하던 존재는 단연 키케로였다. 고대 로마 공화정의 변호사, 사상가, 정치가인 동시에 문장가이자 웅변가였던 그는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살루타티, 브루니를 포함한 모든 휴머니스트의 영웅인 동시에, 휴머니즘 이념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르네상스 피렌체 사회의 규범이었다.



    페트라르카(1374) 보카치오(1375) 사망 이후 이탈리아  휴머니즘 운동의 배턴을 이어받은 이들은 콜루치오 살루타티, 니콜로 니콜리, 레오나르도 브루니 등의 피렌체/토스카나 출신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페트라르카의 가르침을 신봉했고, 그가 주장한 고전적 지식, 아름답고 명료한 언어, 개인의 (현세 ) 자기실현의 가치를 설파했다. 다만 그들과 페트라르카 사이에는  가지 차이가 존재했다. 그것은 방랑자 페트라르카와는 달리 그들이 조국 피렌체를 사랑했던, 피렌체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페트라르카에게 있어서 스토아주의자 키케로의 정치 참여는 사상가로서는 씻을  없는 오욕을 의미했지만(그는 죽은 키케로에게 편지를 써서  문제를 추궁하기까지 한다),  살루타티와 브루니  15세기 피렌체의 휴머니스트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공화정을 위해 투쟁했던 정치인 키케로는 그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귀감이 되고 있었다.


콜루치오 살루타티

    

    15세기 피렌체의 휴머니즘은 페트라르카의 휴머니즘이 아닌, 살루타티와 브루니의 휴머니즘, 즉 피렌체 코뮤네를 위한 공동체적 가치를 앞세우는 시민-휴머니즘의 성격을 띠게 된다. 20세기 역사 학자 한스 바론은 이러한 시민-휴머니즘이 피렌체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밀라노의 절대 군주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야욕을 상대로 거둔 1402년의 승리였음을 주장한다. 피렌체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굴복시킨 갈레아초를 상대로 공화정의 기치를 수호해낸(갈레아초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라는 천운에 의한) 이 승리는 피렌체 시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자부심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밀라노 두오모의 건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건은 피렌체의 승리인 동시에 권선징악의 신념 아래 피렌체 공화정의 승리를 자부했던 휴머니스트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전쟁 당시 보카치오의 유지를 이어받아 1375 서기관의 자리에 오른 살루타티의 붓은 강력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갈레아초를 위시한  도시의 군주들 역시 그에 대한 경외심을 고백하고 있었다)  전쟁 이전부터 공화정 피렌체가 고대 로마와 아테네의 부활이라 주장해온 휴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골리앗을 상대로 거둔 1402년의 승리는 그들의 '휴머니즘' 담론을  자신감있게 설파할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부풀어오른 자긍심과 함께 피렌체의 시민들 역시 휴머니스트의 '2 아테네/로마' 담론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이는 휴머니스트들로 하여금 피렌체를 진정 2 로마로 변모시켜줄 작업에 착수할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피렌체의 시민-휴머니즘(Civic Humanism – (Hans Baron)) 사상을 정립한 것은 갈레아초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역사가, 레오나르도 브루니였다. 그는 아이리우스 아리스티데스의 <<아테네 찬가>> <<피렌체를 향한 찬사>> 번역하여(노골적인, 하지만 의도된 표절), 이를 통해 공화정의 수호자 피렌체가 2 아테네임을 주장했고, 직접 집필한 <<피렌체 역사>> 통해 피렌체가 고대 로마 공화정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그는 피렌체가 카이사르가 아닌 로마 공화정에 의해 탄생했음을, 샤를마뉴에 의해 재건되지도 않았으며, 교황의 영향 역시 미미했음을 주장했다) 그의 역사서에는 피렌체가 사적인 야욕으로 타국을 침략한 역사가 없다는 식의  왜곡된  내용 역시 포함돼 있었지만, 이러한 '선의의 과장' 피렌체 시민들의 자부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서기관에 취임한 1427년에서부터 그가 사망하게 되는 1444년까지 브루니가 이룩한 가장  업적은  피렌체인들의 자의식을 확립함으로써 피렌체가 르네상스 유럽의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로 거듭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난 지난 포스트에서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휴머니즘 사상이 피렌체에서 이루어낸 현실적인 변화는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언급했다. 키케로가 피렌체 시민들의 이상향으로 자리잡았다 한들, 기본적인 문법 교육 외 모든 라틴어 고전 교육이 상류층 가정에서 사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어 교육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고전 교육의 보편화는 15세기 말, 로렌초 시대에서야 이루어진다). 따라서 제2의 로마의 ‘모범 시민’의 꿈을 품을 수 있던 것은 상류층의 자제들과 상류층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휴머니스트 예술가/시인/학자들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르네상스 피렌체의 이념이었던 시민-휴머니즘의 엘리트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15세기 피렌체의 상류층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소수 상인 가문(Popolo Grasso) 지칭했다. 따라서 피렌체  휴머니즘의 부상 역시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휴머니즘이 소수 상인들을 위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선 이해될  없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인 세력의 다수는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길드 정부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가정과 가문의 명예와 부를 책임지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소수이지만 몇몇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부를 축적하여 신분상승을 이뤄낸 인물들이었다 - 코시모의 아버지 지오반니 메디치의 경우 역시 그러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와 왕권의 권위를 강조하, 수도승들의 금욕적 삶의 고귀함을 찬양하는 동시에, 모든 '세속적 성공' 괄시하던 중세적 세계관은 그들의 현실부합해주지 못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도였던 그들에게 있어서 사후세계에서의 ‘구원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와 동시에 이들은 현세에서의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기여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인준해줄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세속적 성공, 가족의 육성, 정치적 참여가 모범적인 시민의 덕목이며,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설파하던 휴머니스트들의 글과 연설은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휴머니스트들의 영웅 키케로는 그들과 같은 공화주의자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재산을 증식시켜, 원로원에까지 입성했으며,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교육했던 현세  자기실현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코시모 메디치에 관한 포스트에서 난 15세기 피렌체가 길드 중심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음을 언급했다. 분명 르네상스 피렌체는 경제 구조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피렌체 출신 양모 공예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한 끝에 피렌체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성장한 영국과 에스파냐의 부상은 (게다가 이들은 양모 원산지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의 양모 산업의 수익률을 떨어뜨리고 있었고, 어려움 속에서 피렌체의 상인들은 이전까지 생산력을 집중시켰던 고급 양모 제품 생산이 아닌 품질이 떨어지는 양모 원단을 튀르크 시장에 판매하는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동시에 15세기 피렌체의 상인들은 점차적으로 양모가 아닌 실크 산업에 대한 비중을 높이고 있었다. 이는 피렌체 경제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변화였다. 실크 산업은 양모 산업에 비해 훨씬  적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실크의 가공은 매우 수준 높은 공예의 숙련된 기술자를 요구했지만, 양모와 달리 대규모의 노동 인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양모 산업에 지출되는 비용의 60-65% 노동에, 30-35% 양모를 포함한 재료에 투여됐다면, 실크 산업에 투입되는 비용에서는 30-35% 노동에 65-70% 값비싼 실크와 기타 재료에 구입에 사용되고 있었다(John M. Najemy).    


     이러한 경제 구조의 변화는 인구 감소 현상과 임금의 동결이 동시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유발하고 있었다. (피렌체 인구는 1379년에는 5 5, 1427년에는 3 8천으로 10만을 웃돌던 14세기 초의 인구에 크게  미치는 것이었다)(John M. Najemy)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인구의 감소는 임금의 상승으로 이어져야 했지만, 단순 노동력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 실크 산업으로  중심을 옮겨간 경제 구조의 변화는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있어 임금 동결로 이어졌고, 이어진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피렌체 시민들  다수를 생활고로 내몰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소수의 숙련된 기술을 갖춘 장인들에게는 호재로 작용했으나, 상승하는 물가와 세금 대다수 시민의 생활고와 내수 시장의 축소로 이어졌다. 이는 피렌체  산업이 실크, 의류 등의 사치품 생산에 대한 의존도를 더더욱 높이는 결과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부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으로 이어졌다.


    1427년의 Catasto (세금 보고서) 따르면 당시 양모 산업에 종사하는 전체 가구  무려 53%  어떤 세금도   없는 빈곤층에 속한 반면 최고 부유층 100가구 (피렌체 인구 1% 속하는) 도시  재산의 26.5%, 피렌체 세력권 전체의 부의 17% 소유하고 있었다(지방과  도시를 포함). 도시의 부의 50% 이상이 최고 부유6%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상류층 가문들이 일반적으로 다수의 가구를 아우르며, 가문들  다수가 하나의 은행에 소속된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 부의 집중 현상은 더더욱 극심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르네상스 피렌체의 지배 이념 휴머니즘의 성장은 부유한 상류층의 이권을 옹호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브루니를 포함한 휴머니스트들은 이러한 부의 집중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예시로 1420, 브루니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입각한 고대 경제서를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국부 증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여전히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던 탁발 수도원적 청렴과 빈곤을 앞세운 중세적 세계관을 부정하며, 위대한 도시는 건축과, 예술의 후원을 통해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빛나게 해줄 부유한 인물들을 필요로 함을 주장했다. (Kenneth R Bartlett) )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인 세력이 휴머니스트 학자들의 후원자로서 피렌체 휴머니즘의 성장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코시모 메디치가  수집에 그의  재산과 평생을 바쳤던 니콜로 니콜리의 서재 전체를 구입하여, 근대 유럽 최초의 공립 도서관을 설립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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