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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pr 12. 2021

15세기 피렌체의 공예와 예술

피렌체 13

“고대의 고결함이 르네상스의 천재성 안에서 동면 상태로 숨 쉬고 있으며, [고대의 부활을 위해선] 그것을 일깨우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은 이탈리아 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던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페트라르카의 소넷 127번의 마지막 구절에서 발견되며 (‘고대의 용맹함은 이탈리아인들의 가슴속에서 아직 죽지 않았다’). 이 구절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결론에 인용되기도 한다. 후자는 조르지오 바사리보다도 더 강력하게 조형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도 [이탈리아인들이] 고대를 모방해야 함을 주장했다.”   (Julia Bondanella)



 로마 공화정의 혈통을 이어받은 피렌체인들의 가슴속에서 오랜 잠에 빠져 있는 휴화산을 깨우는 것만으로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페트라르카와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다소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그러나 페트라르카의 유지를 이어받아 고대 로마의 영광을 모방하려는 열정 속에서 서양 예술사 최고봉의 업적을 이룩한 르네상스 피렌체인들의 예술적 성취를 반추했을 때, '로마인의 피'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타당할 테다.  르네상스 이후로도 고대 로마, 고대 그리스는 서양 세계의 '이상'으로서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후세의 유럽인들을 괴롭히게 되지만, 결국 르네상스 피렌체의 아성에 도전할만한 예술적 성과를 올린 도시는 나타나지 못했다. 르네상스 피렌체는 휴머니즘의 영향 아래 ‘고대를 부활’시키겠다는 포부 속에서 인류사 최고의 예술가들이 황홀한 “불꽃놀이"(시오노 나나미)를 지속하고 있던 기적과도 같은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축제’에는 '로마의 피’ 이상의 것, 즉, 물질적 기반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호황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피렌체의 경제적 황금기인 14세기 초가 아닌 흑사병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4세기 후반- 15세기에 그 꽃을 피운 문화 운동이었다. 난 지난 포스트에서 르네상스 피렌체의 휴머니즘 운동이 피렌체의 경제적 양극화와 사치품 산업의 성장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르네상스 피렌체 예술의 역사적 성과 역시 이러한 사회, 경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1. 장인과 예술가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의 기반은 분명 오랜 세월 피렌체 경제를 주도하던 공예품 산업과 그것을 이끌던 길드 시스템에 있었다. 유럽 예술사 최고봉의 작품들을 가능케  것은  무엇보다 상업 도시 피렌체가 자랑하던 공예의 전통이었다. 유럽 최고의 장인들, 특히 사치품 산업에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던 공예인들이 피렌체에 주둔하고 있었고, 오늘날 예술(Fine Arts)가로 구분되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 역시 목공, 석공, 직조, 재봉, 재단가들과 함께 ‘장인으로서 피렌체의 공예 산업의 역군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상업 혁명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10세기에서부터 르네상스 초기인 15세기까지 변함없이 유효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던 예술가들의 등장과 함께 15세기 후반 16세기 초기 ‘예술가 개념이 도래하게 되지만, 15세기 당시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주문하던 상류층 사이의 관계는 주문한 작품을 생산하는 '장인' 가격을 지불하는 손님 사이의 그것 이상일  없었다(물론 코시모-도나텔로의 관계처럼 예외는 존재했다). 지오토를 포함한 14세기의 예술가들에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고, 16세기에  두각을 나타내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다빈치의 경우에도 상황은 조금 달랐지만,  계약한 작품을 정해진 시간 내에 합의된 소재와 인력을 동원해서 제작했다는 점에 있어서 그들의 '비즈니스' 오늘날의 ‘장인 그것을 강하게 연상시키고 있었다.


Today, you can  become a member of  Liverano guild via annual tuition of few euros.
FYI, il maestro wasn't born in Florence.

    

    상인들에게 그들 제품의 판매와 유통을 일임해야 했던 타 도시의 공예품 제작자들과 달리 피렌체의 장인들은 모두 그들의 공방에서 조수를 고용하고, 도제를 교육하는 동시에 고객과 주문 계약 사항을 직접 조율/흥정하는 사업가들이었다. 뿌리 깊은 공예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타 도시들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길드 전통에 따라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을 학습, 단련, 반복한 공예가들이었다. 원단(특히 양모 염색), 모피, 의복, 보석, 가구, 목공품, 조각품 등의 제작에 있어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장인들을 보유하고 있던 피렌체는 최고의 재료와 최고의 장인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였고, 이러한 조건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들을 고용하는 상류층에게 있어서 ‘장인’들 사이 직업의 귀천은 존재하지 않았다(Najemy). 르네상스 초기 피렌체에서 장인의 권위를 결정하는 잣대는 소속된 업계가 아니라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기술의 수준이었다)  



      르네상스 피렌체의 예술적 업적은 당시 도시의 권력과 경제력을 완벽하게 독점하고 있던 상류층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한 피렌체의 경제적 양극화를 고려했을  당연한 것이었다.  조각품, 그림 등의 공예에 있어서 고가의 제품은 모두 상류층의 주문을 통해 제작되고 있었고, 주문 없이 임의로 제작된 제품들은 되려 일반 시장에서 판매되는, 질그릇 토기, 작은 성화 ,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지만, 가격이 낮고, 품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이었다(Najemy). 부유층의 주문을 통해 제작되는 고가 공예품은 가격, 기간, 재료, 인력에 있어서 세밀한 계약과정을 거쳤고, 이러한 공예품 판매의 양식은 중세를 거치면서 확립된 것이었다.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15세기 피렌체는 경제적 구조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건축, 조각, 회화를 다루던 예술가들이 15세기-16세기에 들어 각광받기 시작한 현상은 14세기-15세기에 걸쳐 일어난 양모 산업의 축소와 사치품 산업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많은 양의 단순 노동력보다는 소수의 숙련된 장인들의 손기술이 각광받는 당시 피렌체의 문화는 실크 직조 , 금박 제조, 테일러링 등의 공예에서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들이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고,  예술가들이 상류층이 주문하는 건축물, 조각, 그림을 통해 그들의 기술을 맘껏 과시할 여건이 갖춰줬음을 알리고 있었다.


  


2. 예술의 후원



 14세기까지 피렌체  대형 건축 사업의 후원은 주로 Opere(단수: Opera, 복수: Opere) 불리던 시민 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길드 정부의 주관 아래 4, 6, 혹은 8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opera 피렌체 대성당, 오르산 미켈레 성당과 같은 공공건물, 또는 교회 건축 등의 공적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예상, 지출하는 기능을 맡아 수행했다. 임기는 보통 4-6개월 정도였다.


    13-14세기에 건설-증축된 피렌체의 지평선을 채운 대형 건축물들의 대부분이 해당 Opera 의해 계획됐고 실행에 옮겨졌다. 많은 경우 Opera 선출되는 시민들은 건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의 선출은 세심한 선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으며, 많은 수의 위원들이 Opere 참여하는 동안 설계자/건설자들의 임금, 공공건물/건축물의 미적, 기능적 요소들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고, 그중 다수가 후속 Opere 재차 임명됐다. Opere제도는 실무에 무지한 관료들이 임의로 상정한 예정안을 건축가들에게 강요하는 비합리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수의 시민이 도시의 예산을 합당한 사업에 할당하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제도였다(Najemy).



    Opere에 의한 후원이 주를 이루던 14세기 당시 피렌체 부유층의 '사적' 예술 후원은 예배당, 성구실등의 장식을 통해 사후의 구원을 기원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적 후원에 의해 제작된 작품들의 테마와 형식은  상류층 가문의 취향과 개인적 기호보다는 교회의 교리와 사제들의 요구사항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 후원의 주체가 길드 정부에서 상류층의 가문들로 완벽하게 교체된 사건은 르네상스 예술사에 있어서 14세기와 15세기를 가르는 가장  차이  하나였다. 14세기 당시 대형 건축물  다수의 건설이 공적 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피렌체가 여전히 길드 정부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면, 15세기 대부분의 대표적 예술품/건축물들이 가문들의 사적 후원을 통해 제작됐다는 사실은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과두정 체제가 피렌체에 확립됐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길드들의 힘이  절정에 달했던 13세기 이후로 점차적으로 대형 자본가로 변모한 소수 상인 세력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던 현상은 15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됐고, 소규모 길드들이 주도하던 민주정의 실각 (1382) 이후, 피렌체의 과두정 체제 역시 안정화의 길에 접어들. 과두정 체제의 안정화는 피렌체 시내가  이상 권력싸움의 장으로 변모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비치-메디치가의 싸움, 파치-메디치 간의 싸움은 예외적 사건이었다). 중세 피렌체 시내에서 하루가 멀다 하게 벌어지던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이  튀기는 혈전은 이제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라는 간접적인 형태로 진화하게 됐다(이러한 예술품 건설/소비 경쟁은 도시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중세 귀족 세력이 경쟁 가문과의 전투를 위해 타워들을 건설했다면, 르네상스 피렌체의 부유층은 경쟁 가문들에게 그들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호화롭기 그지없는 팔라초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그들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저택을 건설하고, 교회의 예배당을 장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문의 재산과 권력의 '과시 위해 지어진 예술품들과 팔라초 등이 주로 공공장소에 전시되는 경우가 잦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과시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이러한 가문의 자산과 도시의 자산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기부한예술품이 많을수록, 가문의 지위도 상승하기 마련이었다). 도시에 대한 지분을 더더욱 높이기 위해  많은 건축물을 쌓아 올린 그들의 이러한 경쟁은 피렌체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일조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적 후원을 통해 제작되는 건축물과 예술품은 점차적으로 고객인 가문들의 미학적 선택을 반영하게 됐고, 메디치 가문의 여섯 구처럼 그들은 건축물들에 그들 가문의 문양을 공공연히 표시함으로써  권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가문 소속의 예배당을 장식하는 작품들의 테마의 선택에 있어서도 교회의 교리보다는 가문의 취향이 우선되기 시작한  역시 15세기에 이르러 나타난 변화였다.


팔라초 피티


    1434 이후 메디치 가문의 독재가 지속되면서 15세기 상류층의 '과소비' 경쟁은 더더욱 격화됐다.  이상 그들의 권력욕을 실현할  없는 상황 속에서 피렌체의 기존 상류층은 포폴로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해야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는 그들의 ‘사치벽 더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들이 작위를 가진 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불안 심리의 형성에 일조하고 있었다),  


 (난 Adieu Avvocato, 새빌로 탄생사의 초기 포스트들에서 이러한 과시적 소비 현상을 다룬 바 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상류층의 열정적인 과시적 소비는, 프랑스혁명, 산업 혁명과 함께 부상한 부르주아 세력이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시나브로 잦아들게 된다)



San Lorenzo Basilica


    물론 15세기 예술의 후원에 있어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이었다. 코시모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코시모 집권 시절 메디치 가문의 막대한 부는 피렌체 정부 운영 자금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440  로렌초 바실리카의 건축 사업의 전권이 코시모에게 위임된 사건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개인이 이와 같이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도맡는 것으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코시모와 메디치가는  로렌초 바실리카의 건설을 통해 도시  그들의 권위를 한층  공고히   있었다(바실리카 건설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 포스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를 계기로  점차적으로 그들의 후원의 범위를 넓혀나간 메디치 가문은 코시모와 로렌초의 치세를 거치면서 피렌체의 모든 명망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동시에 여섯 개의 구의 문양을  도시에 새겨 넣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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