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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Apr 19. 2021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피렌체 14

   


    건축 이론가 타푸리는 르네상스 건축을 두고 “근대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일어난 아방가르드 문화”라 평했다. 르네상스 건축은 그만큼 갑작스레 나타난 급진적인 움직임이었다. 학파, 집단, 사회가 만들어낸 점진적인 '진화'가 아닌, 단 한 사람의 강한 의지가 내디딘 도약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건이었다. 르네상스 건축의 탄생은 피렌체가 낳은 위대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15세기 이전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건축 양식은 단연 첨두아치, 플라잉 버트레스, 늑골 궁륭을 이용해 드높은 탑을 쌓아 올리는 고딕 건축이었다. 구름 너머 천국을 향해 첨탑을 쌓아 올린 후, 신의 영광에 걸맞은 화려한 장식과 커다란 창문을 배치시켰던 이 건축 양식은 12세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이후로 서유럽 전역의 종교 건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천국이 자리하는 하늘을 지향해야 하고, 신이 깃드는 공간에는 장식이 화려해야 하며, 신의 축복인 빛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딕 양식이 완연하게 꽃을 피운 북유럽은 남유럽에 비해 빛이 잘 들지 않는/큰 창문을 필요로 하는 지역이었다)는 중세적 세계관을 반영한 건축 양식이었다. 


높이 솟은 고딕 건축물의 수평 압력을 견디게 해주는 플라잉 버트레스


쾰른 대성당

   

     고트족의 양식이라는 뜻에서 이와 같은 건축물에 ‘고딕풍’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붙인 것은 이탈리아인들이었다. 특히 로마의 후예를 자청하던 르네상스 피렌체인들에게 있어서 게르만족의 건축 양식은 응당 폐기돼야 할 악습이었다 (그들은 15세기 이후로 지나치게 ‘게르만스러운' 건축물을 짓는 건축가들을 해고하고 있었다).  중세적 세계관을 부정한 휴머니즘의 도래는 중세적 건축 양식인 고딕의 지양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의 건설 기술이 모두 유실됐고, 체계적 공학적 지식 체계 역시 확립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당시 건축가들의 파라다임을 지배하던 고딕 건축을 지양할 새로운 '시도'는 용기를 넘어선 '만용'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피렌체인들 역시 그들 도시의 지평선이 대부분 14세기에 완성된 고딕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역시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제외한 그 전체 구조에 있어서는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15세기 피렌체의 특별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교도였던)로마 공화정의 후예임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신이 그들의 도시를 축복하고 있음을 확신하던 그들의 미래에 대한 낙관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는 그들이 감행한 피렌체 두오모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의 기획이었다. 


    피렌체 두오모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공유하는 특이점은 이 두 작품이 피렌체인들이 스스로가 그것을 완성할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추진했던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이다. 지름 45m의 거대한 돔 (15세기의 기술로도 완공이 불가능했던 이 거대한 쿠폴라는 무려 1298년에 기획됐다)과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조각상을 제작할 채비를 마치고선 인류 역사 최고의 작품을 기대하며 그것을 완성해줄 위대한 예술가의 도래를 기다렸던 피렌체인들은 “우리의 도시에는 영웅이 도래해줄 것이다!”라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 신은 피렌체를 사랑했다. 인류사 최고의 예술가들은 어김없이 이 꽃의 도시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었다.  


 

 반면 서울의 기괴망측한 교회들은 우리의 도시를 멸시하는 신을 향한 신도들의 소심한 복수일지 모른다.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돔의 거대한 규모는 이웃 도시 시에나와 피사의 대성당을 넘어서는 성당을 건설하기를 원했던 피렌체인들의 야망의 산물이었다. 직경 45m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설계된 이 어마어마한 골칫거리를 건설해내고야 말겠다는 피렌체인들의 다짐은 대단한 것이었다. 1418년, 두오모 건설 위원회(Opera -복수 Opere)는 돔 건설을 위한 목재의 확보를 위해 미리부터 피렌체 근교의 숲을 사들였다. 


  신은 이 대책 없는 피렌체인들에게 욕심 많고, 괴팍한 데다 늘 허름한 옷차림을 고집했던 추남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선사했다. 그는 그의 삶 전체를 그의 과업에 바친 피렌체 특유의 추남-천재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조토, 미켈란젤로, 메디치 가문의 남성들까지, 피렌체에서 두각을 드러낸 남성들 중에서는 유난히 추남들이 많았다. 심지어 피렌체인들은 수려한 외모의 라파엘로가 나타났을 때, 잘생긴 남자가 그토록 뛰어난 예술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구심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공증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탁월한 손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금세공인으로서 처음 장인의 길에 들어선 그는 1401년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문 장식을 두고 열린 경연대회에서 로렌초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사건을 계기로 건축가로 전향하게 된다. 


왼쪽이 브루넬레스키, 오른쪽이 기베르티의 출품


    1401년, 흑사병으로 도시의 인구가 고갈되다시피 하고,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대군이 피렌체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던 상황에서 신의 은총을 얻고자 했던 피렌체인들은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문을 완성할 조각가를 찾기 위해 경연대회를 열었다. 참가한 7인 중 마지막 후보로 남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중, 승자의 영광은 기베르티에게 돌아갔고, 이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브루넬레스키는 다시는 조각에 손을 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로마로 떠나게 된다. 후세의 인류에게 있어서 그의 패배는 천운과도 같았다. 그가 로마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대의 건축물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 


    

    로마를 찾은 브루넬레스키와 그의 벗 도나텔로는 삽을 들고서 로마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그들 작품의 영감을 줄 유적을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들의 옷차림과 행색을 본 로마인들은 그들을  “보물 사냥꾼”이라 불렀다. 하지만 로마에서 브루넬레스키를 매료시켰던 것은 웅장한 모습 그대로 남아있던 로마의 건축물들이었다. 1401년 당시 로마는 아비뇽으로 떠나간 교황청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폐허와 같은 상태로 방치돼 있었지만, 그곳에는 콜로세움, 아퀴덕트, 포로 로마노, 무엇보다 팡테옹이 여전히 고대 그대로의 모습으로 건재하고 있었다. 고딕 건축물에서 볼 수 없었던 원형 돔, 원형 아치, 높이 세운 로지아, 완벽한 비율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던 코린트, 도리아, 이오니아 양식의 균형미에 브루넬레스키는 매료되고 만다. 그가 로마에서 피렌체로 귀환한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고국 피렌체를 위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적어도 브루넬레스키의 추종자 조르지오 바사리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브루넬레스키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준 경연대회로부터 17년이 지난 1418년, 피렌체에는 또 한 번의 경연대회가 열렸다. 피렌체의 오랜 숙제, 대성당의 꼭대기를 장식할 쿠폴라/돔을 올리는 작업의 적임자를 선별하기 위한 경연대회였다. 어느덧 중년(당시로 따지면 노년)의 남성이 된 마흔 하나의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숙원사업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로마로 떠나기로 결심한 1401년에도 두오모의 쿠폴라를 완성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다. 


   당시 두오모 건축 위원회는 그들이 커다란 난제에 봉착했음을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전술했듯이 그들은 경연대회를 앞두고 미리 피렌체 근교의 숲을 사들인 바 있었다. 돔 건설에 사용될 나무 프레임이 요구하는 목재의 양이 엄청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무 프레임을 먼저 설치한 후 그 위에 벽돌을 올리는 고딕적 건축 방식을 가정할 경우, 45m 직경의 두오모를 건설하기 위해선 전 이탈리아의 모든 나무를 구입해와도 목재가 모자랄 지경이었다(경연 참가자 중 한 명은 목재 프레임 대신에 흙을 쌓아 올려서 쿠폴라를 받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심판관들은 쿠폴라를 완성한 후 드높이 쌓인 막대한 양의 흙을 제거하기 위해선 흙 속에 금 조각들을 묻어두고, 피렌체 시민들에게 마음껏 흙을 가져가라고 공포해야 할 것이라며 그를 조롱했다). 게다가 쿠폴라 아래에 11m나 되는 받침대가 추가되는 바람에 만약 일반적인 건축 방식으로 돔을 건설하기 시작하다면, 돔이 완성되기도 전에 건축 도중에 막대한 무게의 돔의 무게에 의해 받침대가 붕괴될 것이 뻔했다.


브루넬레스키가 제출한 돔의 모델

 이러한 난제 앞에서 브루넬레스키는 그가 나무 프레임 없이도 돔을 완성할 수 있는 묘책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했다. 프레임 없이 거대한 돔을 쌓는다는 전례 없는 주장에 건축 위원회, 피렌체 시민, 브루넬레스키의 라이벌들이 모두 불신의 소리를 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비책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면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여기서 나온 일화가 바로 우리에게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로 알려진 사건이다. 아직 그에게 쿠폴라 건설이 일임되기 전, 브루넬레스키는 경쟁자들과 경연 위원들 앞에서 

“이 달걀을 곧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돔을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오”라고 제안했고,  그의 경쟁자들이 차례로 실패하고 난 후, 달걀 끝부분을 깨어뜨려 달걀을 세워낸다.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도 했을 것이오”라고 불만을 표하자, 

브루넬레스키는 “마찬가지로 쿠폴라에 대한 내 설계를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그것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콜럼버스와 연관돼서도 종종 등장하지만, 그 원조는 브루넬레스키다.)


 우여곡절 끝에 브루넬레스키는 돔 건축을 위임받게 된다. (기베르티와 공동 책임자로 선임되는 굴욕, 인부들의 파업, 등등의 불운의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르네상스 건축의 탄생에 필수적인 내용이 아니기에 생략하기로 하자) 모두가 의심해 마지않았던 그의 묘책은 바로 돔의 기반을 4.3m의 두꺼운 벽으로 만들어 막대한 돔이 만들어내는 수평과 수직 압력을 견뎌내게 한 뒤, 돔의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겹과 외겹, 즉 2.3m의 내겹, 1m의 외겹, 그 사이에 1m의 공간을 두는 방식으로 돔을 설계하여 돔의 전체 무게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벽돌 역시 수직과 수평식으로 교차하는 헤링본 기법을 활용해 쌓아 올림으로써 거대한 돔이 만들어내는 수직과 수평의 압력을 프레임 서포트 없이 견뎌내는 것을 가능케하도록 했다. 


   

 내벽과 외벽 사이 공간이 표시돼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러한 건축 기법을 로마의 고대 건축에서부터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팡테옹의 돔 역시 6m 두께의 외벽이 높이 올라갈수록 점차적으로 얇아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꼭대기에서는 1.6m까지 얇아진다). 헤링본 패턴의 벽돌 배열 또한 고대 로마가 아랍의 건축 양식에서 차용했던 기법이었다. 물론 원형 돔이 아닌 높이 솟은 첨두아치를 팡테옹의 외벽보다 얇은 4.3m의 외벽이 견뎌내도록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의 돔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쾌거였다. 


    외벽에 갑작스레 금이 가고, 쿠폴라가 거듭해서 벼락을 맞는 등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결국 그의 과업이었던 쿠폴라를 완성한다 (그는 돔 최정상에 위치하는 랜턴의 완성까지는 목격하지 못하고 1446년 사망한다) 르네상스 피렌체의 건축가/철학가 알베르티는 이 거대한 돔을 두고 "이 거대한 성당은 마치 피렌체 전체를 그 그늘로 두고 있는 듯하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돔은 오늘날까지 피렌체의 중심에 우뚝 서서 그 위엄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아눈치아타 광장

   로마의 건축물들에서 고대적 질서와 조화의 원리에 깊은 감명을 받은 브루넬레스키는 새 시대를 맞이한 그의 도시가 질서와 조화를 원칙으로 재정립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질서와 균형의 추구야말로 그가 탄생시킨 르네상스 건축과 고딕 건축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는 이상적인 양식의 도시의 확립을 위해 도시 곳곳에 강력한 ‘질서의 힘’을 발산하는 건축물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건설한 두오모의 돔, 피렌체 시립 고아원, 산 로렌초 바실리카 등이 이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피렌체 시립 고아원

    1418년, 대성당의 돔보다 먼저 완성되는 ‘최초의 르네상스 건물’(페브스너), 피렌체 시립 고아원 역시 이러한 균형미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이다. 계단 위로 높이 올라선 아홉 개의 아치가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로지아(건물 정면의 열린 공간)는 노골적으로 고대적 건축의 영향을 가시화하고 있다.  (로마 시대의 건축물은 계단을 활용하여 건물 입구를  높이 세움으로써 건물의 위엄을 강조했다.) 아눈치아타 광장을 마주하고 있는 아홉 개의 원형 아치(로마식 건축의 상징과도 같은)는 완벽하게 코린티안 모델의 비율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아치의 높이가 아치와 아치 사이의 거리와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 https://esperto.tistory.com/60

오늘날 아눈치아타 광장을 찾는 관광객은 광장의 사면 중 삼면이 시립 고아원의 로지아와 동일한 형태의 로지아들로 구성돼 있는 모습을 발견할 테다. 고아원을 시작으로 백 년 간격으로 산티시마 안눈지아타 성당과 아케이드가 완성됐고, 안눈지아타 광장은 17세기에 이르러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중심적인 건축물이 ‘규칙’을 확립한다는 브루넬레스키의 포부가 200년에 걸쳐서 결실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과거에서 회귀한 듯한 모양새를 하고 등장한 르네상스 건축의 균형미가 첨두아치, 화려한 내부 장식, 커다란 창문을 내세운 고딕 양식으로부터 피렌체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에 있어서 고딕식 화려한 장식 역시 기피했다. 돌과 그외 재료의 색상 이외 추가적인 색상을 활용하는 일 역시 드물었다. 이 역시 로마식 건축과 르네상스 건축이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그는 건축이 바로 장식이라 믿었고, 따라서 커다란 프레스코로 벽을 장식하는 일은 사람들이 벽을 보는 일을 방해할 뿐이라 생각했다. 원형 돔, 원형 아치, 계단을 활용한 로지아, 모듈을 정확하게 따르는 균형 잡힌 건축(브루넬레스키는 오로지 코린티안 양식만을 활용했지만, 그의 뒤를 따라 등장하게 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도리아, 이오니아 양식 역시 활용하게 된다)의 등장은 분명 온전히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힘으로 이루어낸 공적이었다. 


 

 

    르네상스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열될 때, 여전히 일선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의 친구인 닌자거북,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다. 심지어 관광객으로 피렌체를 방문하면서 브루넬레스키의 이름을 접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모두가 그의 쿠폴라의 그늘에 서 있으면서도 말이다. 질투심 강한 그가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뻔할 듯하다. 오늘날 그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더없이 완벽하게 완성된 그의 걸작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동상을 두오모 곁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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