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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Jan 15. 2020

고기 먹을 자유과 고기 안 먹을 선택

키토제닉 한 달만에 맞닥뜨린 비건이라는 숙제


1. 시작은 야매 키토인으로.

회사 부서에서 키토제닉(저탄고지, LCHF - Low Carb High Fat) 식단의 1호 성공자가 나타났다. 곧, 2호 성공자가 뒤따랐다. 둘이서 앞서 걸으면 뒷모습이 너무나 늘씬했다. 나는 부러웠다. 여자가 뚱뚱하면 안 되고 늘씬해야만 한다는 낡은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달라진 둘은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경우, 살이 찌면 온몸이 붓고 게을러지는데, 살이 빠지고 몸이 가벼워질수록 기운이 넘치는 체질이다. 그 둘도 키토제닉 식단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기분이라고 했다.


늘 다이어트를 할 때마다 점심시간에 혼자 자리에서 궁상맞게 도시락 까먹고는 했는데, 먼저 키토 하는 선배들이 있으니 내가 3호 성공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야매 키토인이었다. 관련 책도 다큐도 보지 않고 밀가루와 밥, 과자만 일절 끊었다. 아침에는 방탄커피를 마시고, 점심에는 사내 식당에서 밥 없이 고기 반찬을 챙겨 먹었다. 방탄커피는 처음에 편의점 GS25의 버터커피로 시작했다가 천 원 더 비싼 마켓컬리 버터커피로 바꿨더니 훨씬 진하고 맛이 있었다. 점심은 주로 사내 식당에서 떡갈비, 햄구이, 미트볼, 생선 구이 등 육류를 베이스로 한 반찬으로 챙겨서 배불리 먹었고, 저녁은 집으로 와서 삼겹살을 굽거나 계란 요리를 했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인터넷에서 흘러들은 이런저런 잡식들로 2주 간 나름 부지런하게 '키토 제닉' 식사를 했다. 거기에 매일 운동까지 꼬박꼬박 했다. 억울할 만큼 효과가 미미했다.



2. 진짜 키토인이 되기 위한 준비

그러다 하루는 런닝 머신을 뛰는데 동백이도 끝났고 유튜브에서 뭘 봐야 할지 모르겠기에, 어쩔 수 없이 올해 10월에 방영한 MBC 스페셜 <지방의 누명>을 틀었다. 세상에, 지구 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선 키토제닉이 열풍이라고 한다. 그것도 막 유행이 시작한 초기 단계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인기를 얻어 수많은 검증을 거쳤고, 이제는 일반 샌드위치 가게에도 '저탄고지' 메뉴가 따로 있을 만큼 자리 잡았다고 한다. 나는 홀린 듯이 동영상에 빠져들었다. 아 그러니까, 이게 키토제닉 이라는게 뭐가 있긴 있는 거구나.


그러고보니 한참 전에 부서의 1호 성공자에게서 추천받은 <최강의 식사> 책이 생각났다. 저탄고지 메뉴나 레시피는 인터넷 검색만 해도 수두룩하게 나오는데, 굳이 두꺼운 책으로 (368페이지) 읽을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 제쳐두었던 책이다.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선택해서 따르고 있는 이 식단이, 어떤 원리로 살을 빼고 건강을 되찾아준다고 하는 걸까. 곧바로 책을 빌렸고, 속독으로 하루 만에 완독 했다. 꼼꼼하게 읽었어도 좋았을 텐데, 사실 세균이니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니의 작용을 상세하게 알고 싶진 않았다. 대충대충 원리만 파악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에너지원으로 탄수화물을 사용하는데, 지방을 소비할 수 있도록 식단을 바꿔야 한다...) 원칙들을 정리하고 (탄수화물은 무조건 저녁으로 먹고, 설탕은 최대한 먹지 말고, 밀가루는 완전히 끊어라), 카테고리 별 완전무결 식품 차트(먹어야 할 식품과 피해야 할 식품)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었다.


나는 보통 책으로 인생을 배우는 편이다. 클래식이 궁금하면 YouTube로 클래식을 틀기 전에 음악 교양서를 먼저 찾아 읽고, 현대미술이 궁금하면 전시관을 방문하기 전에 현대미술 입문서를 먼저 읽는다. 그리고 <최강의 식사>를 읽었기에, 드디어 나는 진정한 키토제닉인으로 거듭이 났다. 책에서 알려주는 데로 식단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2주 만에 2키로를 뺐고(내 몸무게에서는 많이 빠진 편이다), 배가 많이 들어갔으며, 몸이 가뿐해졌다!



3. 매일 고기만 먹다가 비건인의 인터뷰를 마주하다

그리고 2019년 12월 31일. 이슬아 작가의 신간, <깨끗한 존경>을 읽었다. <아무튼 비건>의 저자 김한민 작가와 비건을 이야기하는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김한민 작가는 '얼굴이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존중하며 멸치 육수가 있는 국물도 최대한 먹지 않으려 애쓴다고 했다. 인간 중심적이고 잔인한 공장식 축산/수산의 실태, 동물권, 윤리성, 환경을 생각하며 비건을 지향한다고 했다.


한 달도 안된 나의 키토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키토제닉을 시작한 이후로 여느 때보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으로 고기 메뉴를 찾아다니고 있고, 하루에도 점심 저녁 두 끼를 고기로 해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식단이 내 몸에 꽤 잘 맞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내 안에서 죄책감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나의 윤리 의식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몹시 불편해하며, 나는 또 고기 요리를 챙겨 먹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이 글에는 또렷한 결론이 없다. 아직 1월 14일, 그러니까 내가 이슬아 작가의 <깨끗한 존경>으로 비건을 접한 지 이제 2주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의식적으로 하루 한 끼만 육류를 먹고, 한 끼는 계란과 야채 위주로 챙겨 먹기로 했다. 아주 조금은 고기 섭취를 줄인 셈이다. 대신 나는 2020년 한 해 동안 더 적극적으로 불편해지기로 다짐했다. 도서관에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예약 신청했고, 몇 개의 채식주의자의 글을 읽었다. 사실 고기를 끊을 수 있다는 자신은 없다.


비건을 공부하고 마음이 불편한 채 고기를 먹는 일과, 비건을 모르고 마음 편히 고기를 먹는 일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전자가 더 나쁠지도.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마음만 편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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