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대하는 원칙
인터넷 중고 거래를 시작한지 어언 7년 여에 접어들었다. 지금껏 가슴 쫄린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다행히 한 번도 사기를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주 제대로 사기를 당했다. 드디어.
사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견은 했다. 거래를 위해 판매자와 문자로 대화를 나누는 데 어딘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 사람에게 나는 최초로 사기를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적은 돈이면 모르겠는데 20만원도 넘는 금액이었으니 사기를 당하면 심리적으로도 타격을 받을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느낌을 따르지 않고, 그냥 돈을 보냈다. 지금껏 늘 그래왔으니.
물론 나름의 보험은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중고 거래 사기꾼 복수'에 관한 썰을 봤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극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기꾼에게 불이익을 가해 원금을 받아냈다는 내용이었다. 법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는 나지만, 그 얘기만 놓고 봤을 땐 언젠가 나도 사기를 당하면 저렇게 받아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를 찾고 사법 당국에 왔다갔다 하는 게 좀 귀찮아서 그렇지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였다. 꼭 그게 아니라도 대화를 나눠 보니 이 사람은 어딘가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기를 당해도 그 '최소한의 양심'의 영역에 해당되는 부분을 내가 말로 잘 구슬르면 돈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사건의 경위는 간단했다. 돈을 보냈는데, 물건이 오지 않았다. 물건이 오는 것에 앞서 발송하면 바로 운송장 사진을 찍어 보내주기로 했는데 그것도 안 왔다. 오히려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니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줄곧 나왔다. 한 20시간 가까이 지났을 때에야 다른 안내음이 나왔는데,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번호를 차단했을 때 나오는 안내음이었다. 집 전화로 걸어보니 전화를 받긴 받더라.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보내긴 보냈다고 하더라. 당장 운송장 번호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집 전화도 이내 차단됐다. 그때 내가 사기를 당했음을 짐작했다.
그래도 오해는 금물이다. 인간은 말로 소통하는 동물이니, 일단 이 사람의 말을 믿기로 했다. 오늘 보냈다고 했으니 내일이면 도착할 거고, 좀 늦더라도 모레면 도착할 거다. 요즘은 코로나19로 택배가 늦지만, 그때는 거의 99% 하루만에 도착할 때였다. 그러나 이틀을 기다려도 역시 택배는 오지 않았다.
물론 이 사람에게 또 어떤 사정이 생겼을 건지는 나도 모른다. 택배가 중간에 사고가 났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전화 번호도 차단 당해서 연락도 안 되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찰에 신고하기에 앞서, 일단 '더치트'라는 사기 신고 등록 사이트에 판매자 전화번호를 등록했다.
한편, 만약 이 사람이 정말 내게 '사기'를 친 게 맞을 경우 판매자가 받게 될 처벌은 벌금형이다. 엄연한 형사 범죄인 것이다. 게다가 사기죄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되지 않아도 신고하고 나중에 내가 판매자와 합의한다고 해도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벌금을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내가 신고를 하면 일종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원금을 돌려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사람은 당국에 벌금만 내면 땡이고, 나는 원금을 직접 받아내야 한다. 그때 나는 형사 결과를 갖고 판매자에게 민사 소송을 걸어야 하는데, 민사 소송이 걸려도 당사자가 돈 없다고 배 째라고 하면 솔직히 받아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물론 그래도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건 있다. 상대방을 채무불이행자를 만들고 어찌 저찌 해서 신용불량자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취업도 제한되고 사회 생활의 근본적인 문제가 많이 생겨서 피의자는 현실적 압박을 받아 피해자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내가 인터넷에서 본 얘기였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합법적 최선이었다.
아무튼 더치트에 등록하니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가 있었다. 물론 이 사람이 확인을 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나로선 경찰 신고 전에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모월 모일 몇 시 ㅇㅇ 사이트에서 ㅇㅇ물품 거래한 ㅇㅇㅇ입니다. 보내셨다는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지만 물건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득이한 사정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물건도 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으며 운송장도 없는 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일단 더치트에 등록 했습니다. 서류는 모두 준비했고 앞으로 24시간 내에 연락이 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예정입니다. 알아보니 형사법상 사기 죄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되지 않아 제가 신고한다면 선생님은 차후 저와 합의한다고 해도 이 사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으셔야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선 벌금에 개의치 않으실 수 있어도, 저는 이 사건을 민사 소송까지 끌고 갈 의지와 계획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선생님의 개인적인 사정을 모른 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 다만 물건도 안 오고 연락도 안 되는 제 입장에선 이 상황을 충분히 '사기'라고 짐작할 수 있으니, 만약 오해라면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만약 나쁜 의도를 갖고 '사기'를 치신 거라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사람은 살다 보면 누구나 순간적인 욕망에 의해 실수할 수 있는 거죠. 제가 감히 선생님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이 일로 선생님을 '나쁜 사람'이라 단정할 순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구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요. 다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실수가 큰 책임으로 바뀌기 전에 되돌릴 수 있는 건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비단 법적 책임만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나 제가 선생님과 거래하기로 한 것은 선생님께선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만약 그런데도 저지른 실수가 '잘못'이라는 걸 앎에도 되돌리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실망감으로 어딘가 찜찜하고 마음이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이 실수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큰 책임'으로 변하기 전 선생님께 지금으로부터 24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저는 수사 당국의 도움을 받아 선생님께 연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사기꾼'이라고 부르고 싶기도 했지만, 막상 그럴 순 없었다. 왜냐하면 '사기꾼'이라고 부르려면 이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분명 증거가 내겐 필요했는데, 고작 한 번 연락이 끊겼다고 해서 그걸 '사기'라고 부를 순 없었다. 심증적으론 100%라도 현실적으론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이게 만약 '사기'라면 무엇보다 피의자의 의도가 중요한 건데, 누구도 타인의 의도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감히 타인의 의도를 함부로 아는 채 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사람'이란 복합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라서 하나의 과오를 갖고 그 사람의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다. 그건 명백한 '오해'였다.
'이 사람이 물건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도 오해였다.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뭐 거의 대충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0.1%의 변수라도 있다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는 건 단지 "물건이 '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하나 하나 엄밀히 명백하게 따져보니 상대방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명징하게 확인된 객관적 정보만 다루고, 그 외의 모든 추측은 오류'라는 철학적 원칙에 위배되었다. 그런데도 내 기준과 생각, 내 마음대로 상대를 함부로 추측하고 오해한다면 그건 나 자신의 철학에도 오점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랬다간 이 일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정한 철학만큼은 지키고 살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객관적인 정보 이상의 판단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그건 오만일 수 있다. 그런데 24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문자로 답장이 왔다.
판매자는 '실은 물건을 보내지 않았다'고 그제야 시인했다. 사기를 친 게 맞다고. 이내 개인적인 얘기를 해주기도 하셨는데, 사실 사기 전과와 징역살이 경험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이미 내가 보낸 돈은 그세 다 쓰셨으며, 내가 나중에 민사 소송을 걸어도 이미 본인은 신용불량자라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고. 인생이 이른바 '갈 데까지 가서' 이렇게 사기도 친 건데, 사실 자신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그래도 그런 자신을 그나마 좋은 말로 대해줬기에 이렇게 답장을 쓴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엔 "저같은 사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라는 말까지 붙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민사 소송을 걸었어도 이 사람을 압박할 수단은 없던 것이다.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그 이후 연락을 주고 받아 결국엔 돈을 다 받아내긴 했다. 다만 이미 신용불량자이신 데다가 당장의 일자리도 없으셔서, 내 돈을 마련하느라 또 사기를 치실까 지레 노파심이 들어 나는 '일용직 근로를 하시면 어떠냐' 권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신 건줄은 모르겠으나, 이후 일자리를 잘 구하셨는지 입금이 되었다. 물론 전액은 아니었다. 하루치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하루 일하고 받은 걸 곧장 나한테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총 사흘에 걸쳐 삼일치 일당이, 내가 최초 사기 당했던 금액이 모두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문자를 보냈을 땐 전송이 되지 않았다. 차단 때문은 아니었다. 핸드폰 요금도 내지 못 하고 있다고 하시더니 발신에 이어 수신까지 정지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 가튼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왔다.
한 친구는 이 얘기를 해줬더니 '선한 영향력'이라고 했다. 사실 지금껏 나는 '선한 영향력'이란 게 거창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건줄 알았고, 오히려 멀게만 여겨 더 어렵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흉흉하게 변해가고 '선한 영향력' 같은 게 필요한 이유는 '오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인간은 이성적이긴 하지만 때론 감정적인 동물이기도 해서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수 한 번 했다고 해서 그 행동이 아닌 '사람'까지 나쁘다고 말하며 미워하는 건 명백한 오해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자신이 한 잘못 이상의 비난과 미움, 오해를 받는다면 그게 너무 억울해서라도 정말 '나쁘게' 변할 수 있다. 실수를 몇 번 했어도 내가 사람은 나쁜 건 아닌데, 사람들은 내 실수만 꾸짖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까지 하니, 충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누구에게 어떤 성장 환경과 사연이 있는 줄도 모르니 어떤 경우에도 오해는 금물이다. 결국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가급적 오해하지 말고,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도 말고, 100% 분명하게 드러난 객관적인 정보만을 갖고 사는 건 아닐까. 사실 그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식적이고 모두에게 공정한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누구도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할 순 없다.
아무튼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이 판매자 분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피해자 분들께도 원금을 돌려 드리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일 한 번 있었다고 해서 거기까지 개입하는 건 나로선 주제 넘고 선도 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만 이쯤에서 끝냈다. 물론 한 번 사기를 친 이력이 있는 판매자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 잠재적인 피해가 발생하게 될 여지를 남겼다는 데에서 어딘가 모를 죄의식이 조금 느껴지긴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른바 '갈데까지 간 사람'이니 벌금형을 받아도 계속 사기 행위를 칠 가능성은 얼마든 있는 것이다. 대개 벌금이 사기 금액보다 적은 까닭이다. 물론 피해자로선 민사 소송을 걸 수도 있지만, 이처럼 이미 신용불량자인 경우엔 채무불이행 민사 소송이 하등의 압박도 될 수 없다. 흔한 말로 배째라고 나오면 그만이다. 우리 현행법의 명백한 한계고, 신고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사기 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엔 얼마나 많은 전과n범이 있는가. 더구나 이 판매자 분의 경우에도 이미 사기 전과와 징역 경험이 있었다. 그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우리 사법 체계는 '감금'은 시킬 수 있어도 '교화'에는 아직 많이 미숙하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고를 한다고 해서 이후의 피해자를 막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다만 나로선 그렇게 법적으로 제재하는 것보다는 때론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자신이 저지른 실수 이상으로 비난이나 오해 받지 않고 남에게 사기 치지 않고 새롭게 살아갈 삶의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하고 싶었다. '사람'으로서 사는 세상에선 어쩌면 그게 더 필요한 걸지도 모르니. 물론 법치 사회의 시민으로서 법적으로 해결하지 않았다는 죄의식은 내 몫으로 남지만, 어쩌면 재소자의 현실적인 교정에 깊이 신경 쓰지 않는 사법 당국에 대한 작은 반발이라고 해두고 싶다.
감사하게도 사건이 있은 뒤로 약 3~4개월이 지난 지금, 판매자 분의 판매 이력을 보면 그 이후 40여 건의 판매 내역에 대한 구매자들의 별점 평가는 5.0 / 5.0 이다. 직접 연락을 한 건 아니지만 이 내용으로만 본다면, 잘 살고 계신 듯하다.
단, 나는 내가 돈을 받아낸 게 어디까지나 처음 직감한 대로 이 판매자 분께 '최소한의 양심'이 있기에 가능한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마저도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결과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