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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ul 12. 2023

강의실에 울려퍼진 혐오의 웃음소리

그때 나는 대학 생활의 막학기였다. 공부를 하면할수록 ‘사람’에 대해 더 궁금해졌으므로, 그 학기엔 ‘심리학개론’이란 과목을 수강했다. 다만 교양 수업이었던 만큼 내용이 깊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개론’이었을 뿐이다. 중간 고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수업은 별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갔다. 강의실은 1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으니 관심 없는 학생들은 강의실 뒤편에 앉아 딴청하기 딱 좋았고, 실제 그런 학생이 많았다. 교수님도 학생들이 열심히 듣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본인 할 말만 하는 타입이었다. 문제가 생길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전형적인 ‘평화로운 수업 분위기.’ 그런데 그 수업에서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중간 고사를 보고 두 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날의 수업 주제는 여러 심리학 소재 중에서도 ‘인상’이었다. 사건은 최초 교수님이 수업 도중에 유튜브로 틀어준 한 영상에서 시작되었다. 수년 전에 찍힌 사회 실험 영상이었는데, ‘복장이 주는 첫 인상’이 영상의 주제였다. 실험은 연출된 복장의 남성 모델을 길거리에 세워두고, PD가 지나가는 무작위의 시민들에게 그 모델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저 남자가 데이트 신청하며 받아줄 것이냐?”


인터뷰를 받게 된 시민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아마도 주제가 ‘데이트’이고, 그 대상이 ‘남성 모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당연한 까닭은 우리 사회는 이성애를 로맨스의 전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남자는 여자를 만나 데이트를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어딘가 씁쓸함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사회의 여러 소수자들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성적 지향대로 살아가는데, 사회의 일반적인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성애가 당연한 영상 속에서 그 사람들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영상은 그렇게만 끝나지 않았다. 


영상의 마지막에 주목할만한 장면이 등장했다. ‘저 남자가 데이트 신청하면 받아줄 거냐?’라는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이번에는 여성 시민이 아닌 지나가던 남성 시민에게도 한 것이다. 그 장면이 나오는 순간부터 강의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당연하디 당연한 내용이 나오는 동안 학생들은 영상을 보는둥 마는둥 했다. 그런데 그 질문의 대상이 달라지자, 학생들은 어딘가 흥미를 느낀 듯했다. 남성과의 데이트 질문을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했다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보통 이런 일은 ‘이상한(queer)’ 일로 여겨진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그 남성 시민이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에요?’라거나 ‘저 남잔데요?’ 정도로 답하는 걸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전혀 의외의 말이 나왔다. 


“음… 일단은 받아들이고, 좀… 그래도 지켜는 봐야죠”


일단, 남성 모델의 데이트와 로맨스의 대상을 ‘여성’으로만 한정 짓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 장면이 퍽 반가웠다. 비로소 신 시대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보다 더 반가운 건 그 남성 시민의 대답이었다. 소위 말하는 ‘커밍 아웃’이다.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는 것. 이런 걸 굳이 ‘커밍아웃’이라고까지 이름 붙여 부르는 까닭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성소수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사회적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으니, 겉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저 남성 시민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이다. 그 모습이 어딘가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남성 시민의 대답이 나온 뒤 고요하던 강의실은 크게 울렸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남성이 남성을 대상으로 한 데이트 신청을 고민해보겠다는 말이, 학생들은 웃긴 것이었다. 


학생들이 그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린 까닭은, 남성 시민의 말을 ‘진심’이 아니라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사실 진짜 동성애자는 아닌데, 상황을 재미있게 넘기기 위해 위트 있는 말을 한 것. 한 마디로 그 웃음은 겉으론 좋아 보이지만, 속에는 “저 사람은 ‘당연히’ 동성애자가 아닐 거다”라는 전제가 숨어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 웃음 소리에 깜짝 놀랐고, 그 웃음이 마치 일종의 폭력으로 들렸다. 


그 무렵 사회의 여러 소수자들에 대해 알아가던 나의 매일은 반성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처를 주는 법이었다.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그 당사자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최근에서야 그걸 알게 된 사람으로 나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고, 결국 주제 넘는 오지랖을 부리고 말았다. 여상 시청 후 그룹 토의 시간이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내가 토의 내용을 발표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우리 조의 토의 내용과 그 웃음을 접목해 일어서서 말했다. 


“… 우리는 아까 그 장면에서 사실 그렇게 함부로 웃으면 안 됐습니다. 남성 시민이 진심이었다면, 그의 용기 있는 발언은 그 웃음 소리에 그냥 사장되어버린 거였죠. 만약 이 강의실에 실제 성소수자 학생이 있었다면 그 웃음 소리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2022년에 나온 미국 CP에서 나온 통계를 보면, 천여 명에 이르는 무작위 표본 중에서 스스로를 ‘성소수자’라고 밝힌 미국인의 비율이 무려 7.2%나 된다고 했다. 백 명 중에 최소 일곱 명은 성소수자라는 것. 성적 지향의 결정 여부는 선천적이라고 하니 미국과 한국 사이에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평생동안 성소수자를 본 적이 없었따. 그런데도 7.2%나 된다고 하니, 이건 의외로 꽤 높은 수치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게 절대 아니었다. 우리 사회 분위기가 워낙 여전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보니, 함부로 커밍아웃 했다가 받게 될 혐오때문에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당장 심리학개론의 전체 수강생이 80명은 됐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 안에 대여섯 명의 성소수자는 있었을 것이다. ‘만약’이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강의실에 성소수자 학생이 없으리란 법도 절대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열띠게 말하는 내가 더 희한해 보이는지 곳곳에서 피식거릴 뿐이었다. 아마 다들 그런 학생은 강의실에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분위기를 보며 나도 어쩌면 괜한 오버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침 강의실 저 끝에서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그 성소수자입니다!”


그때부터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아무튼 그 순간엔 뭐랄까, 일단 나는 드디어 아군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까 그 웃음소리가 퍼져 나올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손을 들었던 학생은 꽤나 감정적인 어조로, 하지만 당당히 말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교양 수업이라, 각 학과에서 온 서로 잘 알지 못 하는 80여 명의 수강생과 교수님도 듣고 있는 자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똑똑히 말했다.


“좆 같았습니다.”


그 한 마디에 강의실은 무슨 원자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다소 숙연한 태도까지 보였다. 나는 당연히 숙연해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증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내가 할 말은 없었다.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내가 뭔가를 말 해서는 안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발표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고, 다른 그룹에서도 발표를 이어갔다. 특별할 것 없는 발표가 이어지다, 그리고 이내 ‘그’ 성소수자 학생이 있는 그룹의 차례까지 되었다. 그 그룹에선 다시 그 학생이 일어났다. 그는 강의실 앞까지 나와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 번 더 그 웃음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 적나라한 언어로 이야기했다. 정말로 좆 같았다는 것.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그 아픔이 짐짓 느껴지는 것 같아 속상했다. 물론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 아픔에 대해 함부로 공감이니 이해니를 운운할 수는 없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아픔과 억압은 내가 뭘 상상하건 그 이상일 것이다. 내가 그 아픔과 상처의 세기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당사자의 표현이 전부이므로,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 지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좆 같았으니 좆 같았다고 한 것. 그 말을 들으면서, ‘그 정도였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보통 발표 후에는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형식적인 것일 뿐이고, 학생들 대부분은 수업에 관심이 없으므로 질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강의실이 열정으로 가득 찼다. 곳곳에서 학생들은 손을 들었고, 질의 순서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저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성소수자 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좆 같았다고 말하는 당신이 더 좆 같다.”

“그래도 공적인 발표 자리에서 표현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말 좀 가려가며 해라.”

“발표자 말이 너무 거칠어서 토론 참여도 하기 싫다. 왜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라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


강의실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모두가 그 성소수자 학생을 공격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그게 더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라는 게 이해 안 된다’라는 말은 너무 혐오스럽게 느껴져서 가만히 두고 보기가 어려웠다. 반론을 제기하고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워낙 과열되었다 보니, 교수 님이 나서서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하지만 수업 분위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모두들 여전히 그 ‘말을 너무 과격하게 하는’ 학생을 멸시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수업은 계속 되어야 하니, 발표는 이어졌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형식적인 발표가 이어졌고, 마지막 조에서 한 학생이 일어났다. 한 학기 내내 토론이나 발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있는 줄도 몰랐던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저는 발표를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해야 할 것 같다’라며 말을 뗀 그는, 자신도 성소수자임을 많은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커밍아웃’했다. 그리고 아까 영상에서 동성애적인 부분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터뜨릴 때, 정말 큰 상처를 받아 속으로 펑펑 울었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는 듯했다. 피해를 입은 학생이 화를 낼 땐 오히려 더 화를 내더니, 눈물을 보이니 비로소 상황을 깨닫는 장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다르게 보면 그 역시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꼭 피해자는 저렇게 슬픈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지. 우리는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보통 ‘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주눅 들 필요 없어.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피해자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만을 바란다.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장면이 나는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건 비단 심리학개론 강의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온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고 나아가 자기 삶을 바꾸기 위해 오늘도 목소리를 높인다. 그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면 때론 과격하게도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들에게 강의실의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응한다. 


“그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꼭 그렇게 과격하게 말해야 하냐?”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했다. 유식한 말로 하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고, 쉬운 말로 풀면, ‘표현’과 ‘의미’다. 표현과 의미는 서로 같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론 꽤 다르다. 표현이 중요한 것인지 의미가 중요한 것인지. 또는, 껍데기가 중요한 것인지 알맹이가 중요한 건지. 학생들의 웃음은 그것이 ‘웃음’이니만큼 표현 자체만 놓고 보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혐오’였다. 반대로 그 소수자 학생이 한 말은 결국 욕설이었으므로, 그 표현 자체는 좋지 않다. 하지만 그 의미는 차별과 멸시 속에 살아온 자기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발악이었다. 그렇다면 표현을 좋게 해도 그 의미가 혐오였다면 괜찮은 것이고, 의미가 생존의 발악이었어도 표현이 욕설이면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인가?


누군가가 과격한 말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맥락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 “기분이 나빴습니다” 정도로만 말했다면, 그래도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상대방은 그저 ‘아, 그냥 기분 나쁜 정도였구나’ 로 알아듣고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 했을 것이다. 사실 당장 현재의 모습이 그 반증이다. 만약 그 정도로만 말했어도 세상이 알아들었을 거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애당초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결국 지금껏 순화된 표현을 했는데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제야 비로소 과격한 표현이 나온 것이다. 대뜸 처음부터 과격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순화해서 말한 것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과격한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그 표현이 ‘과격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듣기에 그 말이 과격하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삶을 살아본 적 없는 ‘내 입장’인 것이다. 당사자가 되어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그 아픔이 어느 정도인 줄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그건 전혀 과격한 것도 아니라,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반응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그 말이 과격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다. 직접적으로 겪어보지도 못 했으면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직접 경험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말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랬구나’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듣는 사람은 그 과격한 '표현' 하나에 기분이 나쁘고 말 일이겠지만, 그 과격한 말을 하게 되기까지 그 당사자는 생존이 걸린 투쟁을 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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