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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un 18. 2024

#8. 구글맵 없이 여행하면 생기는 일

여행의 효율에 관하여

요즘 텔레비전은 어딜 틀어도 여행 이야기다. 코로나 시절 여행길이 막혀 대리만족을 위한 여행 유튜버가 성업하며 그 영향이 매스 미디어까지 넘어오고 있다. 여행 프로그램이 반가운 부분은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일 때 다같이 보기 적당하다는 점이다. 도파민 중독의 시대, 각종 자극적인 프로그램의 향연 속에 여행 프로그램은 그나마 세로토닌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이 가는 곳엔 갈등이 끊이지 않으니, 여행 프로그램 앞이라고 성역은 아니다. 여행 프로를 잘 보던 중 가족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여행을 혼자 다니는 건 몰라도 권장하는 건 좀 아니야. 한창 일하고 공부해야 할 시기에 저거 해서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여행을 해.”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나로선 괜히 가슴이 찔렸다. 나를 보고 한 말은 아니지만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도 특히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반면 위의 말을 한 그는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은 아니었다. 주로 사람들이 여행에 회의적인 이유는 효율의 문제 때문이다. 인생이란 젊으면 젊을수록 부단히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여행에 무슨 생산적인 이득이 있어 그걸 하겠냐는 생각인 것. 그 외에 큰 이유는 낯선 여행지에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위험하다는 것이다. 


먼저 효율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여행파인 나도 할 말은 있다. 여행을 통해 갖게 되는 다양한 경험이 되레 인생을 지름길로 데려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안전과 신용의 이유라면 되레 사회의 일반적인 의견에 다소 동감한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불호지만 내겐 극호인 여행지는 인돈데, 인도에선 여행자에겐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인도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보려거든 최소한 다섯 명에게는 물으라는 것. 인도인들이 아무리 자신 있게 길을 알려 주더라도 막상 가보면 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도를 직접 여행해보면 더욱 뚜렷하게 알게 되는 사실이다. 한 장소를 두고도 사람마다 가르쳐주는 길은 다 제각각이다. 자연히 한 명 빼곤 다 틀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자신 있게 틀린 길을 알려주니, 마치 이 사람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뭐라도 답을 주는 것이, 틀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도저히 믿을 사람이 없는 동네다. 그 부분만 보면 여행, 특히 인도 여행은 미시적으로도 효율이 적은 셈이다. 고작 길 하나 찾는 데에 있어서도 함부로 다녔다간 효율이 뚝 떨어진다. 여행을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나조차 그건 비효율적인 일이라 느낄 정도였다. 아무튼 결국 헛걸음을 줄이려거든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물어, 가장 유력한 평균값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헛걸음을 경험해보면 오히려 불문율을 벗어나게 된다. 다섯 명이 아니라 애당초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하지 않는 습관 탓에 여행지에서 지도도 챙기지 않는 사람에겐,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날, 바라나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힌두교의 가장 큰 성지인 바라나시에 머문지 어느덧 열흘 째 되던 날이었다. 한국을 떠나온지는 벌써 70여 일이 되었다.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보단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마치 현지인처럼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였다. 문제는 당시 바라나시는 매일의 기온이 섭씨 45도를 웃돌았다는 사실이다. 평상시엔 밖을 나다니지 않고 주로 숙소에만 붙어 있었다. 사실상 여행을 한다기 보다는 매일 숙소에 틀어박혀 피서만(숙소도 마찬가지로 더워 제대로된 피서는 아니었지만) 한다는 게 더 어울릴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그 날은 평소와 달랐다. 오랜만에 숙소를 벗어나야 했다. 여행을 할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엽서를 보낼 일이 있어 사진을 인화해야 했다. 다행히 숙소 근처 골목에 사진관이 있었다. 평소 지나다니며 우연히 봤던 사진관. 오후 세 시 정도 됐을 무렵 아무 생각 없이 사진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인도는 인도인지라, 사진 하나 뽑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사장의 말이, 프린터를 돌리기 위해선 100여 장의 사진이 모여야 하는데 아직은 열 장 남짓밖에 안 모였다는 것이다. 평상시대로라면 한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인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린터기가 한국의 사진관에서 본 것과 같았는데, 왜 여기선 작동 방식이 다른 건지. 또 이 동네에선 사진을 급히 뽑을 사람, 예를 들어 증명 사진 등을 뽑는 사람은 그럼 어떡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건 또 아니었다. 인도에선 안 되는 게 없기도 하지만, 많은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안 되기도 한다. 내가 이해를 못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아무튼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선 일주일씩이나 기다릴 순 없었다. 당장 사진이 필요한 게 아니긴 했다. 다만 워낙 뭐든 생각나는 건 바로 바로 처리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골목에 사진관은 그거 하나 뿐이었다. 다른 사진관을 찾으려면 별 수 없이 큰 길로 나가야했다. 그게 뭐 굳이 ‘큰 길’이라고까지 언급할 정도의 별 일이냐 하겠지만, 내겐 죽는 것 다음으로 싫은 일이었다.


평소 골목에서는 나름대로 살만은 했다. 골목은 높은 건물로 둘러싸여 있으니 그 그늘 속에 있으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반면 큰길에는 그 정도의 그늘은 없고 아스팔트는 절절 끓었으니 더위가 곱절은 되었다. 평소 다른 일로라도 잠깐이나마 큰길에 나가면 그게 그렇게 짜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진관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보통 걱정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안도한다. 대체로 현실은 중간값을 지키니,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면 현실은 그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인도는 걱정을 얼마나하건 그 이상이었다. 단순히 더위만 힘들 줄 알았는데, 바로 옆 갠지스강에서 올라오는 미친 듯한 습기도 문제였다. 거기다 온갖 자동차에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 심지어 소와 소똥까지 뒤엉키니 불쾌지수는 3000%로 치솟았다. 누가 툭 건들기만 해도 짜증이 폭발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가급적 큰길에는 최대한 적게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사진관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운명의 사거리에 도착하게 됐다. 


괜히 잘못된 길로 가는 수고를 하고싶지 않았다. 이 더위를 그나마 줄이려면 큰길에서 보내는 시간과 체력을 최대한 아껴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물론 인도인의 말을 함부로 믿지 말아야 한다는 건 이미 몸으로 배웠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들어지면 이성적 판단이 제한되고,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진다. 결국 그늘 한쪽의 경찰관에게 길을 물었다. 풍선처럼 불룩 나온 동그란 배를 보면 그래도 믿음직스러웠다. 경찰관은 양 손을 허리춤에 놓고 입 안에서 자꾸만 뭔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인도사람처럼 합장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마스테. 사진을 뽑으려고 하는데, 사진관은 어떻게 갑니까?”


가까이서 보니 그의 입안에 든 것은 빤(씹는 담배)이었다. 내 말은 듣는둥 마는둥하며 온 정신이 담배에만 쏠린 듯보였다. 빤은 씹을수록 침이 나오게 되니, 마치 양치 후 가글하는 사람처럼 앙다문 입술 너머 양볼이 가볍게 부풀어 있었다. 입을 열어 말을 하긴 곤란해보이는 상황. 그는 단지 퉁명스런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왼쪽 길을 가르킬 뿐이었다. 말보다 확실한 손짓이었다. 다만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담배가 걸렸다. 성실한 경찰관이라기 보다는 담배 중독자로 느껴진 것이다. 께름칙한 마음에 나는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진 않고 고개를 한쪽으로 툭툭 치며 인도인들 특유의 긍정 몸짓을 해 보였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짐짓 걱정은 됐다. 정말이지 이 찜통 같은 더위에 헛걸음하고 싶진 않았다.


경찰관에게 작은 그늘을 만들어준 것은 그의 뒤에 있던 소박한 구멍가게였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컴컴했다. 작고 희미한 전구 하나만이 간신히 켜져 있었고, 매대 넘어엔 빼빼 마른 주인장이 앉아 있었다. 마치 가게 밖의 경찰관이 그가 먹을 것을 다 뺏어 먹은 것처럼 그는 야위었다. 다만 그 모습은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신용을 주었다. 어쨌꺼나 내 본론은 길찾기니 그에게도 물었다. 다만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또 물어보는 걸 경찰관이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찰관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그런데 희미하게나마 자세히 보니 그 역시 빤을 씹고 있었다. 그 역시 양 볼이 부풀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살짝 들며 말로써 대답해주긴 했다. 


“레프트(왼쪽).” 


짧지만 그 어떤 말보다 분명한 한 마디였다. 재차 물을 것도 없었다. 고맙다 인사하고 구멍가게를 나섰다. 가게 앞에는 그새 젊은 인도인 몇 명이 등장해 있었다. 물론, 앞선 두 사람에게 물어본 결과 사진관은 왼쪽 길에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지역 터줏대감(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의견이니 분명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물어본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되레 더 확실해질 수 있으니, 그 젊은이들에게도 물었다. 사실 정보를 얻기 위해 물었다기보다는, 그냥 말이나 건 거였다. 내 안에서 ‘왼쪽’이란 답은 확정적이었다.


“나마스테, 사진관은 어떻게 갑니까?”


그들은 잠시 생각과 의논에 빠졌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오른쪽’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건가. 앞 두 사람에게 물을 땐 짐짓 ‘인도인이 알려주는 길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었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이 전혀 반대의 답을 내놓으니 그 불문율이 떠오르며 헷갈리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을 믿자니 이들은 이 지역에 대해 잘은 모르는 것 같았고, 경찰관과 가게 주인을 믿자니 또 그들의 담배 씹는 모습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결국 내 선택은 다수결이었다. 아무련 소수 의견도 무시해선 안 된다지만, 일반적인 결정을 내릴 땐 다수결만한 것이 없다. 결국 오른쪽으로 결정했다. 다만 처음 길을 알려줬던 경찰관에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가 보지 않는 틈에 조심조심 오른쪽 길로 나아갔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었다. 못해도 2~3킬로미터는 내려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사진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진이란 것이 아직 발명되기 전 시기인 것처럼 없었다. 심지어 숙소에서부터 가지고 나왔던 얼음물은 불볕더위에 일찌감치 미온수로 변해 있었다. 내 체온보다 더 따뜻한 정도의 그 물은 마시면 시원하긴커녕 오히려 속이 매스꺼워졌다. 하지만 아직 반 통이나 남아있으니, 자원 보호의 측면에서 새 물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분이 보충되지 못한 몸은 갈수록 지쳤고, 몸이 지치니 마음도 덩달아 척박해져갔다. 앞서 대학생들에게 굳이 더 물었던 일로, 분명 나는 괜히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건 공연히 혼란스러워지는 일임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척박해지니 의심이 피어올랐고 실수는 반복됐다. 거리에 보이는 아무나 붙잡고 다시 물었다. 


“나마스테, 이 근처에 사진관이 있습니까?”


그 인도인은 지금껏 말을 건 이들 중 가장 친절했다. 사진관을 찾는 것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곰곰이 고민하며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런데 그의 설명대로라면, 나는 돌아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경찰관을 만났던 사거리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가야 했다. 


내 입장에선 허탈하고 되레 힘빠지는 말이었다. 그 사거리까지 다시 돌아가야 한다니. 하지만 힘이빠지긴커녕 되레 힘이 났다. 더위에 녹아내려 암흑이 되어버린 머릿속에 전구가 팍 켜지는 것 같았다. 결국 처음 물어봤던 경찰관의 말이 맞았던 것. 모든 건 그를 믿지 않았던 ‘내’ 탓이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책망할 수 없는 까닭에, 어떤 문제가 내 탓이 되면 오히려 살만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사거리에서는 다시 경찰관 모르게 반대편으로 슬쩍 지나갔다. 하지만 왼쪽 길에서도 아무리 걸어도 사진관은 나오지 않았다. 체감상 왼쪽 길로 접어든지 40분은 넘은 것 같은데도 그랬다. 걸으면 걸을수록 짓다 만 건물들만 나왔다. 번화가는 이미 아까 전에 끝났고, 이젠 사람이 사는 지역도 끝날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사진관이 있을리는 만무했다. 

결국 나도 모르게 지나가던 또 다른 인도인을 붙잡고 물었다. 


“나마스테, 이 근처에 사진관이 있습니까?”

그는 어떤 미사여구도 붙이지 않은 채, 단호하게 없다고 말했다. 달리 사진관이 어디 있는 지는 말하지 않고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때,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위에 다 증발되어 버렸다. 다른 인도인에게 길을 물을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남은 선택지는 하나, 아까 그 사거리에서 직진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40여 분 되는 기나긴 길을 걸어내려왔다. 몸은 더 지쳤으므로 되돌아오는 길은 그보다 더 걸렸으리라. 경찰관은 여전히 저쪽 그늘 아래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런데 웬걸, 직진한 길에선 고작 1분 거리에 사진관이 떡하니 있었다. 심지어 사진관 골목이기라도 한 건지 세네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일단은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찰나였다. 이내 원망이 밀려왔다. 지금껏 만났던 모든 인도인이 야속했다. 비단 오늘 만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난 보름간 인도를 여행하며 만났던 모든 이들. 헛걸음하게 만들고 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모든 이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던지, 아무렇게나 알려주고 보는 건 내 입장에선 결코 선행도 상식도 아니었다. 문화 상대주의로 생각한다고 해도 이건 아무래도 잘못된 거였다. 인생이 전혀 효율적이지 않고 허송세월하는 셈 아닌가. 사진관은 사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왜 다들 이 길을 알려주지 않은 건가. 하지만 그조차 문제의 해결은 아니었다. 세네 사진관 모두 들렀지만, 다들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은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도 더는 요구하지 않았다. 더위에 너무 지쳐 이제는 사진에 대한 미련마저 없었다. 다 필요 없으니 그냥 숙소에 돌아가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사거리에서 경찰관을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담배를 씹고 있지는 않았다. 커다란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대어, 지나가는 차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로선 그를 보자마자 열불이 치솟았다. 처음엔 믿었다가, 불신했다가, 나 스스로를 탓하며 다시 믿었더니 그것마저 진실이 아니었던 남자. 불신이 불신으로 유지된다면 그저 단순한 ‘불신’일 뿐이다. 하지만 한 번 신뢰로 들어갔다가 되돌아나온 불신은 속았다는 배신감으로 인한 복수심에 불을 지핀다. 이 땡볕더위 속에서 이리저리 헤맨고 오늘 하루를 낭비해버린 것이 모두 그의 탓인 것 같았다. 온종일 헤매느라 받아두었던 모든 더위와 열기를 큰 소리와 함께 그에게 내뿜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많은 인도인들로 인해 했던 모든 헛걸음의 설움을 다 토해내듯 그에게 말했다. 


”도대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엉터리 길을 그렇게 당당하게 알려준 이유가 뭡니까? 내가 지리를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그러나 배가 불룩 나온 경찰관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여느 인도인의 그것보다도 매서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새카만 눈은 더 불탔다. 반응 없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아니, 저리로 가면 사진관이 있다더니, 아무리 걸어도 없잖아요! 결국 사진관이 바로 이 앞에 있었는데, 모른다면 모른다고 하지, 왜 잘못된 길을 알려줘 하루종일 사람 고생하게 만듭니까?”


어쩌면 나는 그 순간 본질적인 문제였던 길찾기가 아니라, 감정적 야속함을 토로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두껍고도 까만 콧수염을 욱신거리며, 나와는 상반된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넌 왜 그렇게 서둘러? 나는 왼쪽으로 가는 저 길을 좋아해서 그렇게 빙 돌아가는 거야. 내게 물어봤으니 당연히 내 기준으로 대답을 해 준거고. 거기 가는 길이 무조건 하나도 아닌데, 너는 왜 그렇게 별안간 화만 내고 있는 거야? 왼쪽 길로 갔어도 결국엔 찾긴 찾았잖아. 뭐가 문제야?”


나는 여전히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거의 이성의 끈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 순간 그의 말은 철저히 이성적으로 이해됐다. 내게 그의 말은 너무도 논리적이고 맞는 말이었어서, 끓어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게. 나는 왜 그렇게 서두른 걸까.’


그 순간 그의 말은 단순히 길 찾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전반적인 인생을 다 건드린 것 같았다. 어떤 것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평범한 말 한 마디에도 자격지심이 건드려진다. 나는 삶을 늘 바쁘고 성급하게 산다는 것이 나도 모르는 열등감이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다. 무언가 빨리 쟁취하지 못 하면 불안해졌고, 효율적이지 못 하고 시간을 허비하면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내 생의 모든 서두름에는 늘 그 목적이 불분명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고자 하는 까닭은 더 빨리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다.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이유는 그래야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효율적 삶의 궁극적 목적도 ‘행복’이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행복’이란 물질이 아닌 일종의 마음 상태라는 점이다. 가령 돈이 많은 사람을 두고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도 삶이 여유롭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을 두고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내일의 물질적인 성공을 좇을 것 없이 지금 당장 행복한 마음을 가지면 될 일이다. 효율을 통해 성공을 쟁취하고 그 성공으로 행복을 얻으며 잔뜩 우회하는 게 아니라 행복으로 직진하는 것. 역사속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들 역시 입을 모아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말하지 않던가. 결국 지금 당장 인생의 과정이 효율적이지 않아도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겨 그 순간에 재미있고 행복했다면, 효율 따위보다 더욱 값지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다. 


일상에서도 여행 중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줄곧 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정을 즐기는 게 삶의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그걸 머리로는 안다는 사람이 지금은 그깟 효율 때문에 삶을 누리지 못 하고 되레 경찰관에게 화를 내고 있던 것이다. 사진관을 빨리 찾는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걸 빨리 끝내면 뭐 대단하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경찰관이 그리 말했을 땐 꼭 이런 내 조급한 어리석음이 들춰진 것 같았다. 나는 정말이지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하물며 큰 소리가 난 걸 들은 다른 인도인들도 그새 주변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나와 경찰관을 둘러쌌다.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나를 향해 있었으니, 나는 마치 그들의 눈동자에 포위당한 듯했다. 그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들은 꼭, ‘이 외국인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고 숨도 막혀왔다.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얼른 현장을 벗어났다. 


마침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마냥 무덥던 큰 길에도 엷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후끈거리던 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지금까지는 더위에 의한 화끈거림이었으나, 그 순간부터는 온전히 부끄러움 때문이었으리라. 




다시 현재로 돌아와, 여행의 효율을 따질 때면 나는 종종 그 날의 바라나시가 떠오른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날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 했다. 하지만 효율적이지 못 한 까닭에, 단조롭던 평소와 달리 더위를 뚫고 바라나시 곳곳을 둘러본 다채롭고 풍성한 날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여행을 하는 건 여행 회의론자의 의견처럼 아무런 효율도 없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든 좋은 말로 좋게 포장을 해봐도, 공부 등을 하는 것보단 비효율적인 게 사실이다. 여행은 일보다는 ‘놂’에 가깝다. 다만, 여행은 삶이 효율만으로 사는 게 아님을, 내일의 성공보다 당장 삶을 즐기는 것이 때론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시간이 나면 인도를 여행했다. 여전히 모르는 길은 인도인에게 물었고 때론 아는 길도 괜히 물었다. 여전히 그들 역시 잘못된 길을 알려줬다. 하지만 그 이후론 잘못된 걸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갔다. 애당초 잘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레 길을 잃기 위해 묻는 것이다. 그들이 가란대로 가다보면 길을 잃게 되고, 그러다보면 삶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 했던 방향으로 풍성해진다. 때론 틀리더라도 일단 아무 답이라도 내는 것이, 아무런 답을 내지 않는 것보단 낫다. 정답이 아닌 길을 가더라도, 어느 길로 가건 인생은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것처럼. 


경찰관에게 부끄러움이 들쳐줬던 그날, 쳐진 어깨로 숙소로 돌아왔을 때 거실엔 웬일로 숙소 관리자가 나와있었다. 날더러 어딜 다녀오느냐 물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사진을 뽑으러 사진관을 찾아다녔는데, 다 안 된다고 하네.”


그는 리셉션 책상 뒤로 가더니 개인 용도로 사둔 거라며 휴대용 사진 프린터기를 갖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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