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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케이크 May 03. 2021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이야기의 효능을 믿어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경험하고 자기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접할수록 자기 인생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소설가의 임무라고 생각하고요" 문득 생각나서 찾아본 김연수 작가님의 인터뷰에서 발췌.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자꾸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보라고 이야기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타인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과 아는 지식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다양성을 만나게 되고, 그 다양성을 통해 이 세상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답이 존재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고집해왔던 사고방식이 한순간에 뒤틀리는 경험을 해보기도 한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갑자기 17시간이 넘는 비행기를 타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떨어지는 상상. 휴대전화도 없고 언어도 모르고 내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툭 떨어진 상상. 끔찍할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새로운 경험이다. 거기서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들이며 거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초라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더라도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나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신기한 건 원하기만 한다면 이 논리를 지금 당장이라도 적용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 대한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수영을 못해, 나는 콩을 싫어해, 나는 나비가 무서워, 그런 생각들 말이다. 1초만 떠올려도 몸서리치게 싫은 끔찍한 존재들이 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나는 남들이 번지 점프를 하는 영상만 봐도 손바닥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무서움과 고정관념의 바탕은 대부분 내가 만들어 낸 상상이나 한 번의 부정적 경험, 아니면 근거 없는 타인의 의견에 기반한 게 많다.


호주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내가 뚱뚱하다고 느꼈다. 지금 돌아보면 아주 평범한 정상 체중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옷을 사러 가면 L도 꽉 끼는 몸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마주칠 때마다 살 빼라고 잔소리를 들이붓는 아르바이트 매니저의 이야기도 한몫을 했다. 그랬던 내가 호주에서 여름 맞이 옷을 사러 갔다가 아주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S는커녕 XXS도 간신히 맞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신발을 사려면 아동 매장에 가야 했다. 그때 나는 지금까지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사고방식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을 했다. "어라? 난 뚱뚱한 게 아니었나 보네, 잠깐만.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들은 헛소리는 뭐였지?"


이런 경험은 호주 이후에도 종종 발생했다. 내가 맞다고 믿어 왔던 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한 번 해보고 나니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욕구가 자꾸 생겼다. 싫어하던 생강을 다른 조리법으로 자꾸 먹어 보면서 사실은 생강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강차를 싫어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해보지 않았던 색을 입고 나간 날에는 처음으로 내게 잘 어울리는 색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렇게 자꾸 내가 생각하던 세상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실패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런 우리에게는 무언가 잘못될 때마다 스스로를 탓하는 습관이 있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그 사람과 나의 인연이 다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못나서 그렇다며 갑자기 몸짱이 되려고 헬스장에 가고 머리를 새로 다듬는 행동이 우리의 그런 습관을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해 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못났을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디빌더였다면, 새로운 머리가 찰랑거렸다면 연인이 떠나가지 않았을까? 모두가 아는 것처럼 답은 그렇지 않다. 나를 비난하는 습관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으며 내 기분을 더 낫게 해주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는 하나의 답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항상 사랑을 받아야 하고 남자는 여자를 지켜줘야 한다는 드라마 속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모든 게 내 탓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이 논리는 다른 일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모두가 대학을 가고, 그래야만 성공하는 사회만 바라보고 있으면 대학을 가지 않은 내가 인생의 실패자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다. 그런데 나에게 더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도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수십 명, 아니 수 백 명을 알고 있다면? 내가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예전만큼 나에게 큰 절망감을 주지는 못할 거다.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는 느낌이 들 때는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더 많은 세계, 더 많은 이야기를 둘러보자. 삼각형 틀에 크나 큰 사각형을 아무리 꾸겨 넣어도 절대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살면서 생기는 많은 사건 중 대부분은 나 혼자만의 온전한 잘못이기보다는 "서로가 맞지 않아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절망감을 안겨줄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작지도 않지만 크지도 않다. 그 사람에게도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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