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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릴 Mar 16. 2018

 1.허수경 시인

     허수경 시인의 '수박' , 우리 같이 읽어요


수박 
-허수경 시인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 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퓰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몰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년) 발췌

   

 사랑을 하면서 가장 용기 내어야 할 때는 언제일까. '용기'라는 단어는 관계의 시작에서 많이 쓰이곤 한다. 용기 내어 사랑을 말하세요. 그러나 내가 연애에서 가장 용감해져야 한다고 느꼈던 때는, 관계의 끝에서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볼 때였다. 


 한국 문학계에서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여성 작가의 시선은 '순종적' '한국적 여인상' 등으로 비치곤 했다. 특히 떠나간 연인을 떠올리는 행위가 여성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날 때, 비평가들은 사랑에 "속수무책" "수동적" "무력한"  등의 수식어로 여성 작가의 작품을 해석했다. 


 최근 수강한 페미니즘 수업에서, 허수경 시인의 작품들 역시 그동안 한국적인 서정성을 지닌 수동적인 여성화자라는 틀 내에서 해석되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허수경 시인의 작품들을 읽으며, 그 누구보다도 강한 시인의 사랑에 매번 감탄했다. 
  
 허수경 시인의 ‘수박’ 시를 읽어보자. 화자는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고백한다. 떠난 이를 떠올리게 하는 사물과 감각은 남겨진 자에게 유리 파편처럼 박힌다. 화자에게는 그것이 둥근 것- 수박이었던 것 같다. 수박을 사들고 왔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 모습을 깊이 사랑했던 과거 나의 눈동자도 떠오른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울적해졌고, 결국 나를 떠났다. 


 어쩌면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던 것 같다고 화자는 고백한다. 당신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하지만 울적하고 후회스러워 검은 눈물을 흘리더라도, 화자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라고 말한다. 
  
 사랑이 끝나 홀로 남겨졌을 때, 떠난 상대를 책망하며 부정하는 행위가 가장 쉽고 편리하다. 하지만 화자는 그 쉬운 선택지들을 버리고 떠난 당신의 마음도 좋다며 그 사랑마저 강하게 끌어안는다. 이는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단단하고 강한 태도다. 스스로 단단해져서 더 큰 사랑을 끌어안을 때 화자는 기적처럼 본다.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몰고 가는 시간’이 올 것이라는 걸. 화자의 단단하고 용감한 사랑은 푸르게 차오르며 괴로웠던 기억들은 수박빛 향기로 남아 어린 새와 함께 서서히 날아갈 것이라는 걸. 이는 아픈 과거의 사랑을 ‘수용’하고 ‘인정’ 해 나아가는 용기 있는 자만이 볼 수 있는 기적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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