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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한끼 Mar 08. 2024

기분 좋은 날

시간을 거스르는 동네골목


유난히 기분 좋은 날이었다.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내고 정류장까지 질주해서 간신히 버스를 탔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맑아 마음이 상쾌했다.


버스에 내려 출근하는 길은

예상과 다르게 바람이 차고 쌀쌀했다.

그래선지 커피라테 한잔이 간절했다.

평소에는 아까워 잘 사 먹지 않는데

어제 늦게까지 야근했으니 이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되겠지 싶어

한잔 사들고 출근했다.


똑같은 하루였다.

민원대 팸플릿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컴퓨터를 켰다.


일찍 방문한 민원인에게

9시부터 시작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안내하고

자활근로자분들 출근확인 후 업무를 시작했다.


어제와 다르지 않는데 그냥 기분이 좋았다.


낯설게 느껴지던 책상이 친근하게 보이고

동료들도 그런대로 다 괜찮아 보였다.

한동안 날 짓누르던 교육비의 무게도 한결 가볍게 느껴지고

못할까 봐, 안될까 봐, 아플까 봐 억눌렸던 마음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요 며칠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들에겐 하고 싶은 공부 엄마가 지원해 줄게 약속을 했는데

번번이 그런 일들로 마음이 어수선해지곤 한다.


큰아이 학원비가 대폭 오르고

통학이 힘들다 하여 기숙사 신청을 했다.

기숙사비와 조식, 석식비

주말에는 학원에서 사 먹어야 하는 중식과 석식

거기에 용돈, 교재비, 미술재료값 등등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예산보다 훨씬 더 많다.

월급의 반 이상이 큰 아이에게 들어갈 예정이다.


문제는 올해 즉, 고3기간에만 끝나는 게 아니다.

올해부터 대학졸업 때까지 비슷한 금액대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한동안 마음이 답답했다.

커피 한잔 사 먹을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지원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괜히 했나?

형편에 맞춰 전공도 선택하라고 할 걸 그랬나.?

친구들은 유복한 편인데,

엄마가 최선을 다한들 고마워나 할까?


큰 아이를 기숙사로 보내면

이후부터 쭉.. 이제 떨어져 지내겠지?

올해는 우리 세 식구 같이 밥 먹을 날이 없겠구나.

그렇게 큰아이가 떠나가면

둘째도 곧이어 그럴 테고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닥치는 것의 차이를 또 한 번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묵직한 가장의 무게를 느끼며 며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가벼워졌다.

 충분히 힘들어했으니 받아들이게 되었나 보다.

감당하기 버거운 어떤 것도

내려놓고 인정하면 가벼워지나 보다.


어쨌든 예상했던 일이다.

교육비가 부족하면 보태 쓰려고 예금도 미리 해두었고

혼자 살아갈 마음의 준비는 천천히 하면 된다.


큰아이는 건강하고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행복해한다.

둘째는 아직 어리지만 제 몫을 다 하려고 애쓰는 걸 안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편이라

(반항도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해서 골치 아프지만)

엄마에게 버릇없을지언정, 제 앞가림을 할 거라는 믿음은 있다.



무엇을 더 걱정할까?

풍족하다고 더 행복했던가?

욕심을 낼수록 더 힘들어진다.

채워지면 비워지고

또 비워지면 채워지고

삶은 그렇게 연속이었다.


점심 후 산책코스, 꼭 어릴 때 살던 동네같다.


몇십억을 넘나드는 새아파트와 비교되는 전월세, 가격 또한 시대를 거스르는 듯하다.



점심시간 사무실 근처를 산책하다 보면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 동네 골목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무거운 기운을 벗어던지고

가끔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말자며

오늘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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