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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한끼 May 21. 2024

아빠 연락을 받지 않은 아이

가만히 지켜볼 때..

"내 인생이 더 소중해"


6년 전, 어느날 애들아빠에게 들었던 대답이었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기는 참 어렵다.


하지만 그걸 알아야 

앞으로 함께 살든, 헤어지든 결정을 할 수 있는데

영혼 없이 던지는 말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노력할게”

믿고 싶어도 믿을 수도 없는 그 말들 때문에 더 헷갈리기만 했다.


어두운 밤, 

술이 한잔 들어간 상태, 

감정적으로 울컥하는 상황에

 “애들 생각 안 해?” 하는 질문에..


 “내 인생이 더 소중해.”

애들아빠의 대답을 듣고 한숨이 나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부성애가 조금 남아있지 않을까?

단 1%의 희망에 매달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대답은

아이들보다 자신이 우선이라는 말이였다.





어제 오후, 

몇달 간, 큰 아이가 카톡을 읽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다며 혹시 무슨 일이 있냐고 

애들 아빠로부터 문자가 왔다.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큰 딸은 아빠랑 외모도 성격도 많이 닮은 데다

내가 서운할 만큼 아빠를 챙기는 편이었다.

동생과 아빠가 사이가 어색하니

중간에서 그 틈을 메워주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하고

면접교섭 가기 싫다고(귀찮아서) 하는 동생에게

설득과 회유로 데리고 나가기도 했었다.


내심 아이가 내 편이 되어 

아빠를 원망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반응에 많이 서운해했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애들 아빠의 외도가 밝혀진 직후

엄마 아빠가 냉전을 거듭하고

평화롭던 집안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면서

초등 고학년이었던 큰딸에게 무기력증이 찾아왔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일어날 수 없다고 했다.

등교거부를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빛에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한 달 가까이 반복되면서

출석일수가 부족해지면 어쩌나

 선생님의 전화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에 피가 말라가는 때였는데

큰 딸이 그러는 걸 보고 미치는 줄 알았다.


너까지 그러면 어쩌냐고 엉엉 울기도 했었다.


억지로 학교에 보냈더니 신발을 신지 않고 가다가

동네 엄마가 발견하곤 집으로 다시 데려다주기도 했고

6년 동안 다니던 학교인데 가는 길을 잃어 헤매다 집으로 오곤 했다.

혼내기도 하고 설득해보기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나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큰아이도 함께 겪었던 것 같다.


큰 딸의 상태를 당시 애들아빠에게 호소했지만

자신의 인생이 소중하다고 했다.


주말부부 중이라 아이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부풀렸을 거라 생각했던 것인지..

누구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엄마인 내가 일어서야 했다.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엄마가 가정을 무너지두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하며

아이 앞에서는 더 씩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다.


직장도 다시 출근하고 맛있는 거 만들어주며 

여행도 가고 괜찮은 듯 시간을 흘려보냈더니

큰아이는 어느 날부터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다.



그로 3년 후 이혼을 결심하고

큰 딸에게 그 의사를 물었을 때

"엄마, 아빠가 결정할 일이야. 나는 생각하지 마."

라고 말해줬던 속 깊은 딸이었다.


아빠가 짐을 싸서 나간 이후부터는

아빠 걱정을 자주 하던 딸이었다.


그랬던 큰 딸이 왜 카톡도 읽지 않고 전화도 안 받았을까?


혹시.. 상간녀와 아빠가 다니는 걸 본 건 아닐까?

아니면 주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닐까?

심경의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차마 엄마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일까?


궁금했지만 딸에게 나름 이유가 있을 텐데..

그래서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큰 아이에게는 아직은 아빠가 필요하다.

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래도 의지할 곳은 아빠이다.

기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나을 수 있다.


딸에게는 그저 별일 아닌 듯이 간단하게 한마디로 전달했다.


“아빠가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하더라. 걱정 안 하게 답은 해드려.”


큰아이가 알겠다고 하며 통화를 끝냈다.




자신의 인생이 소중해서

상처받는 가족들을 외면하고 

결국 이혼할 정도로 멈추지 못했다면..


이혼 후에도 젊은 상간녀와 같이 살고

지척에 발령받아 왔으면..


자식과의 관계까지 그대로 유지하려는 건 욕심 아닌가? 

자식의 이해까지 바라는 건 정말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부모가 일평생 정성을 쏟아도 몰라주는 자녀들도 많은데

그렇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으면서...

아이가 아프든 말든 그건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거라 생각하고

본인 인생을 찾아갔으면... 서운한 마음을 가질 자격도 없는 건 아닐까?


양육비 보내주면 아빠 노릇은 다 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행여 내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애들 아빠에게는 

평일에는 기숙사에, 

주말에는 온종일 학원에 있느라

연락을 받기 힘들다고 문자를 보냈다.


부녀지간, 부자지간 훼방을 놓지도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안하면 당사자가 노력할 일이고 본인 몫이다.




이혼 후 심정에 대해 

가끔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만

이 글의 목적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여전히 공감과 소통이 필요해서일까?


최근 들어 나는 아주 편안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


출근해서 일하고 점심 먹고 산책하고 

퇴근 후 아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침대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다.


불안하지도 않고 걱정도 거의 사라졌다.

그토록 바라던 일상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 일상이 너무 소중해서,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조금씩 밀어낼 정도이다.


다시는 평온한 내 삶을 

뒤흔들 누군가를 만들고 싶지가 않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지나 지천명에 다다르는 때라 그런가


그래도 가끔 목마른 갈증처럼

창작의 욕구가 튀어나오곤 한다.


그 목마름은 가끔 올리는 글로 충족시키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감정과 생각에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데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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