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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Feb 18. 2021

숨은 진심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Honesty is the best policy.


대학 때 밤잠을 못 이루며 고민하는 내게 선배가 해줬던 말이다. 그 뒤로 나는 꼬일 대로 꼬여,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만날 때마다 솔직한 나의 진심을 바라보려 애썼다. 거울을 바라보듯 정면으로 나의 진심을 마주하는 순간 단단했던 매듭은 힘을 잃은 듯 허무하게 풀려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숨은 진심을 마주하는 용기였다.


얼마 전 나는 엄마의 자리에서 나의 숨은 진심과 마주해야 하는 문제에 부닥쳤다.

올해 6학년이 되는 둘째 아이의 꿈은 오래전부터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는 유명 축구선수들의 사진이 붙어 있고 자신도 그들처럼 월드컵 경기에 뛰어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결승전에서 멋지게 이겨 우리나라에 꼭 우승컵을 안길 거라고 다짐하는 아들이 나는 늘 흐뭇했다. 유해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보다 운동을 좋아하는 하는 것이 기특했고,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은 해의 모든 경기와 선수, 골장면, 세리머니 등을 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기분이 좋았다. 특히 늘 꿈이 없다고, 자신이 뭐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큰 아이와 비교돼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아이가 학교 숙제로 쓴 글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 아빠가 제 꿈을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내가 아이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코로나로 자연스럽게 운동과 멀어지면서 아이의 마음에서도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마음은 사라진 줄 알았다. 그저 공부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제 고학년이 됐으니 스스로 알아서 또 다른 꿈을 펼치며 공부에 집중할 거라 기대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성적보다 인성이 중요하다고, 너의 인생은 네 거라고, 엄마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응원한다고 했던 마음이 나의 진심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위선자였다. 나는 아이가 운동선수가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운동을 잘해서 기쁠 때도,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고 유아 체능단을 고집할 때도, 무리하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을 때도 나는 믿었다. 언젠가는 아이 스스로 내가 기대했던 길을 걸어가 줄 거라고.


내 안의 모순을 발견한 순간 어릴 적 나와 아빠의 팽팽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오르지 못할 산처럼, 아빠 앞에서 나는 자주 긴장했다. 아빠와의 소통의 문을 찾지 못해 나만의 방을 만들고 나의 진짜 마음은 그 방안에 꽁꽁 숨겼다.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아빠라는 것도 알았고, 나 역시 아빠를 사랑했지만 나는 모든 것에서 솔직해질 수 없었다. 소외되는 아빠가 안쓰러울 때도 있었지만 숨겨서라도 지킬 수 있는 평화의 시간이 내겐 더 소중했다. 아빠에겐 보이고 싶은 마음만 보인 채 나만의 방에 숨어 끊임없이 외쳤다. ‘세상에는 아빠가 보지 못한 세상도 분명히 있어! 벗어날 거야! 나의 길을 걸어갈 거야!’라고.


그래서였을까. 며칠 동안 아이가 쓴 글이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책상 앞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 더 고역스러워 보였다.

아이가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왜, 무엇 때문에 막아서려 하는 걸까? 지난 시간 내가 아이에게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일까?

나는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나의 진심과 마주했다.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아이가 다칠까 봐 마음을 놓지 못했다. 운동선수라면 으레 있는 잦은 부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구나 아이는 또래에 비해 체구가 한참이나 작았고 편식도 심했다. 집에서 막내로 응석받이로 자란 아이가 나와 떨어져 단체생활에 유순하게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됐다. 게다가 나는 운동선수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르니까 더 두렵고 말리고 싶었다.


결국 돈이나 명예,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막연히 덜 불안한 쪽을 택하고 싶은 나의 편견과 오만이었다. 날고자 하는 새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나의 욕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 역시 박완서를 보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면서, 박지성이나 손흥민 얘기를 하는 아들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철없는 소리라 생각했다. 나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오기를 부리고 있으면서,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 게 부끄러워졌다.


거울 속에서 나온 나는 이미 아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이가 원하는 길을 내가 막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아이의 축구 실력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곳을 알아냈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생기가 없던 얼굴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조용하기만 하던 아이는 수다스러워졌다. 사실 아이는 그동안 몸만 함께 있었던 거였다. 어쩌면 어릴 적 나처럼 마음속 자신의 방에서 보내는 시간만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아이는 숙제를 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이고 싶지 않았던 진심이 불러온 변화였다. 구겨졌던 아이의 일상이 제대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기쁨 반 걱정 반이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축구선수가 될지 말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다음번 길 역시 다시 또 아이가 선택할 테니까. 나는 그저 아이가 만날 수많은 길 앞에서 반쪽자리 진심이 아닌 온 마음으로 아이를 지지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마음속으로 외친다.


‘용기 내! 넌 이제 더 이상 겁쟁이 엄마가 아니야!’





Image thanks to unsplash

@jonty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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