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잇고 03
찬란한 햇빛 버프를 받아 생산성이 폭발해 가열차게 좀 더 끄적여 본다.
3. 첫사랑
나랑 같은 학번이었지만 재수에, 반수까지 했다는 그는 서류상 2살 위였다. 동아리도 나보다 1학기 뒤에 들어왔는데 본인이 나이가 많다고 ‘오빠‘라고 부르라길래 처음에는 꼴값 한다고 생각했다.
파워 E였던 그는 얼마 후 동아리 회장 자리를 꾀차고 회원들을 관리? 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포함, 근접 선후배들에게 두루두루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는 키도 크고 무엇보다 스타일이 좋아 언제나 눈에 띄었다. 리더십도 있고 명문대생이니 생각해 보면 요즘 말하는 ‘알파남‘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나한테 적극적으로 먼저 말을 걸고 다가오던 그에게 점점 호감이 생겼다. 캠퍼스를 걷다 우연히 마주치거나, 동아리 정기 모임에서 자주 보자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씩 커졌다. 결정적으로 동아리 친목 술자리에서 술을 잘 못했는데 술게임은 더 못했던 내 옆에서 조용히 내 술잔을 눈치껏 비워주는 흑기사를 자처하자 그만 홀딱 반했다.
이건 그린라이트지!
여고 출신에, 여자만 득실득실한 과에 있었던 내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설레는 마음에 주변 동기들에게 ‘그도 나를 좋아하는 거 맞지?’라며 그와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지만 동기이자, 언니들은 ’ 호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일단 지켜봐 ‘ 라며 그에게 직진하는 내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원래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던 나는, ‘좋아하면 여자가 먼저 대시할 수도 있는 거지’라는 다소 진취적인 마인드로 그에게 공강이면 같이 밥 먹자. 커피 마시자. 를 종종 시전 했고 봉사활동을 하러 갈 때도 그가 참석하는 봉사활동에만 따라가 그와 한 조가 되려고 그의 곁을 맴돌았다.
한 마디로 ‘나 너 좋아해’라는 티를 팍팍 냈다.
눈치 빠르고 머리 좋은 그놈은 당연히 알았겠지만, 이상하게 내가 다가갈수록 그는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훗날 나는 그의 무수한 어장 속에 한 마리 피래미에 불과했고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어장관리‘ 였지만 경험이 미천했던 나는 내가 그가 나와 썸 타는 중인 줄 알았다. 허허허.
밀 줄 모르고 당기기만 열심히 시전 하던 나는 유난히 꽃이 예쁘게 폈던 봄날 공강시간에 매점에서 설레임을 하나 사서 쪽쪽 빨며 걷던 중 여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걷던 그를 정면으로 마주치자 깜짝 놀래서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직도 그날의 꽃 냄새, 햇빛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참으로 친절하게도 본인의 여자친구를 손수 소개해준 그의 배려? 에 그저 ‘어어어 그래~‘ 라며 버벅거렸다. 돌이켜보면 딱 봐도 당황해서 어버버버하며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져 뚝딱거렸던 나를 보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혼자만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박살 났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에게 칼같이 거리를 뒀다. 괜히 더 창피해지고 싶지 않았고 이후 나는 취업준비에 매진, 그는 고시 준비를 하러 신림동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을 만큼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접점은 없었다.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25살쯤이었나? 갑자기 그가 한 번 보자며 연락이 왔다.
갑자기?
우리가? 왜?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첫사랑한테 온 연락이니 호기심반, 설렘 반으로 약속을 잡았다. 당시 자취하던 우리 집 앞에 호프집에서 치킨과 맥주를 사이에 두고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그.
사시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소위 ‘사’ 짜가 되어 다시 나타난 그에게 갑자기 무한 호감이 다시 생겨 재잘재잘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털다가 회심의 한 방.
“근데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어. “
순간 뭐지?
이 새끼 뭐지 싶었다.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래도 사회 물을 1년이나 먹은 나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버벅거렸던 스무 살 때와는 달랐다.
“그럼 여자친구랑 저랑 이렇게 치맥하는 거 알아요?”
“모르지. 말 안 했어. “
뭘까. 이 새끼 지금 환승연애 스킬 쓰려는 걸까?
시끌시끌한 호프집에서 우리 테이블만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자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갑자기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가 변호사 되는 것도 다 기다려주고 고마운 게 많은데. 본인 집에서 탐탁지 않아 해서 결혼이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아… 그래요…“
얼굴도 모르는 그의 여자친구에 대해서 뭐라고 더 말을 보태겠는가.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어 “다 드셨으면 일어나죠” 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는데 이 자식이 굳이 나를 집 앞까지 배웅해 주겠단다. 호프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사양했으나 따라오는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오피스텔 입구까지 온 나는 이제 그만 들어가겠다며, 얼굴 봐서 좋았다고 마무리 멘트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이 새끼 암만 봐도 쭈뻣쭈뻣 거리며 돌아서지 않는 것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갑자기 과거에 어장관리 당했던 기억까지 소환되며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근데요, 만약에 제가 만약 오빠 여자친구라면 저희 둘이 이렇게 만나는 거 알면 기분 되게 나쁠 것 같아요. 솔직히 저희가 졸업하고 내내 연락하던 돈독한 사이도 아니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여자라면서요. “
“그렇긴 하지… 근데 헤어질지도 모르고 말 안 하면 모르지 않을까? “
하.
순간 이 새끼. 또 이 지랄이네.
갑자기 머리에 빨간 경고등이 삐삐 울리기 시작하자 나의 언행은 거침이 없어졌다.
“저 솔직히 그때 오빠 좋아했던 거 알죠?”
“어….”
그래. 이 새끼는 100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가 오늘 만나자고 연락 왔을 때 내심 좋았어요. 그런데 여자친구도 있다는 분이 이렇게 행동하시면 안 되죠. 혹시 환승하고 싶어서 저 간 보세요? 아님 양다리라도 하고 싶으세요? 환승하고 싶으면 지금 여자친구분 확실히 정리하시고 연락하시고, 혹시라도 양다리 걸칠꺼라면 저 가만 안 있어요. 절대 그냥은 안 넘어가니 개망신당할 생각 없으면 이쯤에서 그냥 가시죠.”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인생의 사이다 순간이 몇 없는데, 이게 내 1번 사이다 모먼트다.
다다다 숨도 안 쉬고 내뱉은 내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는
“너… 좀 많이 변한 것 같다. “
라는 다소 비굴한 말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1년쯤 지났나, 카톡 프로필 사진에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우다다 올라온 그의 프로필을 봤다. 조용히 친구 차단 버튼을, 내 프로필도 볼 수 없는 영원한 추방을 선사했다.
변했지 그럼.
어장인 줄도 모르고 밀당도 할 줄 모르고
느끼는 감정을 얼굴에 순도 100% 드러냈던 스무 살의 나
아주 나중에 우연히 사회에서 다시 만난 동아리 여자 후배 가 사실은 그때 그녀도 그놈을 좋아했다고. 자기도 썸 타는 줄 알았다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는 말을 하길래. 나의 사이다썰을 나누며 ‘개버릇 남 못주지 않았을까?’ 하며 깔깔 웃었다.
첫사랑은 원래 이뤄지지 않는다던데,
스무 살. 첫사랑이 이뤄지지 않아서 정말 천만다행이다.